48개국·104경기·16개 도시의 사상 최대 스포츠 이벤트
8년 전 포용적 월드컵 꿈꾸며 ‘하나로 통합된 북미’ 외쳤지만…
현재 트럼프의 ‘정치 쇼’ 무대가 된 북중미 월드컵
북미 동맹 균열로 美에 맞서는 캐나다-멕시코 연대
국경 장벽과 이민 갈등, 치안 불안 겪는 월드컵
갈등·분열의 촉매? 아니면 평화·통합의 상징?
104번 경기 참여하는 모두의 목소리에 달려

2022 카타르 월드컵 우승팀 아르헨티나(왼쪽). 2018년 6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FIFA 총회. Gettyimage, 뉴시스
8년 전 포용적 월드컵 꿈꾸며 ‘하나로 통합된 북미’ 외쳐
참가국 수 증가와 경기 수 증가는 주최국 숫자의 증가로 이어졌다. 예전의 방식을 따를 경우 대회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한 국가가 감당하기에는 경기장·숙박·교통 등 인프라 부담이 너무 커지는 까닭에 3개국 분산 개최를 통해 미국 11개 도시에서 78경기(결승전 포함), 멕시코 3개 도시에서 13경기, 캐나다 2개 도시에서 13경기를 나눠 치르게 됐다. 16개 도시, 3개국에 걸친 사상 최대 규모의 축구 축제가 한 달 넘게(6월 11일~7월 19일) 이어지는 것이다.2018년 6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FIFA 총회에서 북미 3국의 공동 유치가 확정됐을 때, 이들이 내세운 슬로건은 ‘하나로 통합된 북미(United as One)’였다. 당시 미국축구협회 회장 수닐 굴라티, 캐나다축구협회 회장 빅터 몬탈리아니, 멕시코축구연맹 회장 데시오 데 마리아는 나란히 서서 “그 어느 때보다 포용적이고 보편적인 월드컵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경제 통합을 이루어온 세 나라가 스포츠를 통해 국경의 벽을 허물고 대륙의 결속을 과시하겠다는 야심 찬 약속이었다.
하지만 지금, 축구공이 굴러갈 북미 대륙의 지정학적 상황은 ‘하나로 통합된 북미’의 약속이 힘들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관세전쟁이 격화하고, 이민 갈등이 폭발하며, 동맹의 균열이 가시화하는 ‘분열의 시대(the era of great division)’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국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Politico)는 이번 대회를 “분열되고 있는 대륙을 위한 월드컵”이라고 명명했으며, 축구 전문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골드블라트(David Goldblatt)는 “대륙 통합의 축제로 기획됐던 것이 세 개의 분리된 월드컵으로 변질됐다”고 진단했다. 둥근 축구공과 삐뚤어진 지정학, 그 모순된 무대의 막이 올랐다.
트럼프의 ‘정치 쇼’ 무대가 된 월드컵
스포츠는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중립성을 표방해 왔다. 그러나 근대 올림픽의 출범 이후 메가 스포츠 이벤트는 대내적으로는 정치적 상징조작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다양한 정치 목적에 기여해 왔고, 대외적으로는 다양한 외교 목적에 활용될 수 있는 비정치적 형식의 정치적 수단으로 작동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 국가의 대내적 통합과 국가이미지 제고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소프트파워’ 도구로서 메가 스포츠 이벤트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역사 속에서 스포츠 이벤트의 정치·외교적 활용 사례는 매우 빈번하게 발견된다. 다른 어떤 메가 스포츠 이벤트보다 가장 정치적으로 활용된 것이 올림픽이다. 수없이 많은 사례가 있지만 1936년 독일 나치의 베를린 올림픽을 통한 민족적 우월성 과시와 재건된 독일에 대한 선전 시도, 인종차별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경기에서 토미 스미스(Tommie Smith)와 존 카를로스(John Carlos)의 블랙 파워 시위 사건, 냉전의 벽을 무너뜨린 1988 서울올림픽, 남북한 해빙 무드 조성을 넘어 미국과 북한의 관계 개선 도모로까지 이어졌던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71년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세계적인 데탕트 무드 조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핑퐁 외교’는 스포츠 외교를 신화의 수준으로 공고화했다. 월드컵의 경우 1934년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월드컵이나 1978년 비델라 군사정권의 아르헨티나 월드컵처럼 권위주의 정권이 체제를 선전하는 수단으로 삼은 사례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스포츠와 정치 혹은 스포츠와 외교는 오랫동안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다. 하지만 2026년 북중미 월드컵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사건들은 이러한 범주를 넘어선다. 민주주의 국가의 현직 대통령이 국제 스포츠 행사를 자신의 정치 목적 달성을 위한 대내외적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2025년 7월 미국에서 열린 FIFA 클럽 월드컵 결승 트로피 수여식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뉴시스
더 나아가 트럼프는 국제 축구 무대를 자신의 선호 국가에 제공하는 외교 전장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이란 대신 이탈리아를 월드컵에 출전시키라는 파격적 제안을 하는가 하면, 가자지구 전쟁으로 촉발된 이스라엘의 월드컵 참가 자격 논란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이는 친이스라엘 보수 유권자를 겨냥한 행보로 읽힌다.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과의 밀착 행보는 이러한 우려를 가중한다. 인판티노 회장은 “트럼프와의 관계는 월드컵 성공에 필수적”이라고까지 공언했고, FIFA는 뉴욕 트럼프타워에 사무소를 개설했다.
급기야 2025년 7월 미국에서 열린 FIFA 클럽 월드컵 결승 트로피 수여식에서 트럼프는 통상적 프로토콜을 무시하고 무대 중앙에 남아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국제 스포츠 기구가 특정 정치지도자에게 휘둘리고 있다”며 비판했고, 가디언은 “스포츠 외교의 명분은 개방과 환대지만, 트럼프의 미국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고 꼬집었다.
북미 동맹 균열로 美에 맞서는 캐나다-멕시코 연대
다른 한편으로, 3국 공동 개최 북중미 월드컵의 화려한 조명 뒤에는 피 말리는 무역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2025년 2월 1일, 트럼프 대통령은 캐나다와 멕시코 수입품 거의 전 품목에 대해 25%의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캐나다산 에너지는 10%). 이에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당시 총리가 300억 캐나다달러 규모의 보복 관세로 맞대응하면서 북미 3국 간의 무역 전쟁이 본격화했다. 이후 미국은 미국·멕시코·캐나다 자유무역협정(USMCA) 준수 상품에 대한 관세를 면제함으로써 양국 간 교역의 85% 이상은 여전히 무관세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철강·알루미늄·자동차 등 핵심 산업에 대한 관세 충격은 북미 공급망을 뒤흔들었다.공교롭게도 월드컵이 열리는 2026년 여름은 USMCA의 의무적 6년 차 공동 리뷰가 예정된 시기이기도 하다. 트럼프 1기 때 “역대 최고의 무역협정”이라고 자찬했던 USMCA에 대한 그의 애정은 이미 식었다. 미국 외교협회(CFR) 마이클 프로먼 회장은 “USMCA 리뷰가 트럼프 행정부에 캐나다와 멕시코를 압박할 새로운 지렛대를 제공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스포츠 경기장에서는 세 나라 정상이 나란히 앉아 미소를 짓겠지만, 그 뒤편의 협상 테이블에서는 국익을 건 혈투가 벌어질 예정이다. 아니 어쩌면 트럼프라면 나란히 앉아 있는 자리를 전투의 장으로 삼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무역 갈등은 동맹의 심각한 균열과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2025년 3월 캐나다 총리로 취임한 마크 카니는 “미국과의 기존 관계는 이제 끝났다”며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선언했다. 2026년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는 미국 주도의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가 ‘단절(rupture)’을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캐나다 내에서는 “캐나다 퍼스트”를 외치는 애국주의 물결과 함께 미국산 제품 불매운동까지 일어났다. 카니 총리는 “과거 강점으로 여겨졌던 미국과의 긴밀한 경제 관계가 이제는 약점이 됐다”며 경제구조 전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크리스토퍼 샌즈(Christopher Sands) 연구원은 캐나다가 1970년대 피에르 트뤼도 총리 시절의 ‘제3의 옵션(Third Option)’ 정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미국 의존도를 줄이면서도 상호 의존 속에서 독자적인 회복탄력성을 확보하려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캐나다와 멕시코는 2025년 9월 양자 간 ‘포괄적 전략 파트너십’을 체결하며 미국에 대한 공동 대응 전선을 구축했다. 카니 총리와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이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은, ‘하나로 통합된 북미’라는 월드컵 슬로건의 의미가 어떻게 변질됐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통합’은 미국을 포함한 3국의 결속이 아니라, 미국에 맞서는 캐나다-멕시코 연대를 의미하게 됐다.

2026 북중미 월드컵 메인 경기장인 멕시코시티의 에스타디오 아스테가. Gettyimage
국경 장벽과 이민 갈등, 치안 불안 겪는 월드컵
가장 큰 이슈는 이민 갈등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초강경 반이민 정책을 밀어붙이며 남부 국경의 장벽을 높이고 대규모 강제 추방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국토안보부(DHS)는 230마일(약 370㎞)에 달하는 새로운 국경 장벽 건설에 45억 달러를 투입했고, 2025년 한 해 동안 약 30만 명의 불법 이민자를 강제 추방한 것으로 추산된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2025 회계연도 미국-멕시코 국경 체포 건수는 23만7538건으로 5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정책 성과로 자축하지만, 그 이면에는 DACA(불법 입국 아동 추방 유예) 수혜자의 멕시코 강제 추방 같은 인권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동시에 멕시코 내부의 치안 상황도 월드컵의 심각한 불안 요소다. 지난 2월 멕시코군(軍)이 마약 카르텔인 할리스코 신세대 카르텔(CJNG)의 수장 네메시오 오세게라 세르반테스(일명 ‘엘 멘초’)를 사살한 이후, 20개 주에 걸친 보복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월드컵 개최 도시인 과달라하라는 바로 이 CJNG의 본거지인 할리스코주의 최대 도시다. 올 초 1월에는 멕시코 중부 과나후아토주 살라망카시의 한 축구장에서 무장 괴한이 난입해 11명을 사살하는 끔찍한 사건도 발생했으며, 4월에는 테오티우아칸의 ‘달의 피라미드’ 유적지에서 관광객 대상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이에 셰인바움 대통령은 월드컵 기간에 무려 10만 명의 보안 인력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개최국 멕시코와 함께 A조에 편성되어 과달라하라, 몬테레이 등지에서 조별 리그를 치른다. 한국 팬들은 삼엄한 국경 통제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보안 병력 사이를 뚫고 경기장으로 향해야 할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멕시코로 이동하는 팬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까다로운 출입국 정책과 멕시코의 카르텔 위협이라는 이중의 불안 속에서 응원전을 펼쳐야 하는 셈이다.
미국은 이민자와 난민을 강제로 내쫓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월드컵을 핑계로 전 세계 관광객을 환영한다는 모순된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이미 지난 2025년 미국에서 열린 FIFA 클럽 월드컵 당시, 미국의 까다로운 비자 정책 탓에 세네갈 농구 대표팀과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 국가들의 선수와 지원 스태프들의 입국이 거부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국경 장벽은 높아지는데, 축구공만 자유롭게 그 위를 날아다니는 형국이다. 미국 버지니아주에 본사를 둔 보안 전문 기관 ASIS 인터내셔널은 “2018년 유치 당시와 2026년 개최 시점의 지정학적 환경은 완전히 달라졌다”며, 지난 2월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군사작전으로 인한 테러 위협까지 가세해 “새로운 지정학적 위험의 세계에서 월드컵이 개막한다”고 경고했다.
갈등·분열의 촉매? 아니면 평화·통합의 상징?
2026 북중미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를 넘어, 트럼프 시대 북미 대륙의 지정학적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대한 쇼케이스가 될 전망이다. 이상주의자들은 스포츠가 외교적 통합의 도구가 되기를 갈망하고 스포츠의 중립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파편화한 각국의 이기주의와 스포츠가 표방하는 중립성이 역설적으로 스포츠의 도구적 활용성을 높여 스포츠 무대의 중립·평화적 상징성은 형해화, 정치화돼 흔들리고 있다. 3국 고위급 조율위원회는 거의 회의를 열지 못했고, 대회 준비는 사실상 각국이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 분열로 인해 스포츠가 갖는 평화적 소통 수단으로서의 가치가 다시 한번 현장에서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축구공은 국적을 묻지 않고 굴러가며, 경기장의 환호는 국경을 넘어 울려 퍼진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이 축구 불모지였던 미국에 메이저리그 사커(MLS)를 탄생시키고 축구 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그처럼 2026년 대회도 각국의 여러 복잡다단한 갈등 상황을 극복하고 통합의 무대를 제공하는 화합의 장으로서 유산을 남길 수 있을 것인지, 혹은 그저 단지 트럼프 시대의 ‘분열과 힘의 논리’를 확인해주는 실패한 평화와 통합의 도구로서 기록될 것인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6월 11일 멕시코시티 아스테카 스타디움(에스타디오 바노르테)에서 첫 휘슬이 울리는 순간, 축구공은 단순히 잔디 위를 구르는 것이 아니라 지정학으로 복잡다단하게 얽힌 이해관계의 네트워크 위를 굴러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로 통합된 북미’라는 8년 전의 약속이 그저 공허한 수사로 남을지, 아니면 분열의 시대에도 스포츠가 연대의 마지막 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통합의 장이 열리게 될지, 104번의 경기와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목소리가 그 답을 들려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