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비서실 공보기획 담당과장은 정확하게 12월10일 오후 1시20분에 청와대 본관 정문 앞에 대기하라고 했다. 사전에 청와대 비서실에서 요구한 대로 인터뷰 담당기자와 사진 담당 기자의 주민등록번호와 약력, 타고갈 차종과 차번 및 색깔을 알려주었다.
청와대 11호 정문이라고 불리는 대문 앞에 도착하자 이미 통보를 받고 대기중인 경호원이 다가와서 신분과 차종을 확인한 뒤 대문을 열어주었다. 마침 대문 안쪽에서는 2대의 대형관광버스가 막 나오려던 참이었다. 관광버스 창문에는 ‘위탁가정’ 이라는 표지가 붙어있었다. 직감적으로 영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과 오찬을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청와대 본관 옆 주차장에 타고온 차를 세운 후 마중나와 있던 담당과장과 함께 창살로 된 문을 지나 청와대 본관으로 걸어들어갔다. 청와대 본관의 육중한 현관문이 열리자 경호원들이 소지품을 자세하게 검사했다. 녹음기의 버튼과 사진기의 셔터를 일일이 눌러보게 했다.
이윽고 이희호 여사의 접견실에 들어섰다. 접견실은 연한 빛깔로 치장됐는데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벽 주위로는 우리나라 전통 소품들이 진열돼 있었고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여왕이 쓴 듯한 금관의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옆에 이희호 여사가 선 채로 웃는 모습을 찍은 조그마한 사진이 놓여 있었다.
인터뷰 약속시간인 오후 1시30분이 되자 이희호 여사가 접견실에 들어섰다. 연한 계란색의 투피스를 입고 나온 이 여사는 한결 젊어보였고 머리 모양은 마치 둥근 모자를 쓴 듯 잘 다듬어져 있었다. 이 여사가 청와대에 들어오기 전에 동교동이나 일산의 자택에서 봤을 때 느낄 수 있었던 ‘할머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새로운 자리는 사람을 새롭게 하는 것일까.
─ 새 천년을 맞는 2000년 1월 1일은 어디에서 맞겠습니까?
“청와대에서 새 천년의 아침을 맞이하게 되겠죠. 하지만 특별한 날이기 때문에 특별한 일정을 가질 생각입니다.”
─ 어떤 새 꿈을 가지고 계십니까?
“2000년대가 열리는 새해의 꿈은 너무 많아요. 무엇보다 우리 경제가 완전히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이 제일 큰 소망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의 형편이 훨씬 나아져 빈부의 격차가 좁아졌으면 합니다. 또 새해에는 결식아동이나 소년소녀가장, 장애인이나 불우노인 등 어려운 이들에게 더 많은 사랑의 손길이 펼쳐지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새 세기는 여성의 세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여성들의 권익이 한층 신장되고 사회나 나라를 위해서도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어 남녀평등사회로 발전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정치가 여·야의 대화와 타협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남북 이산가족상봉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평화롭게 상호교류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여기에다가 공동여당의 합당과 내년 총선에서의 승리만 곁들인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새해 소망과 이 여사의 소망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100년 산삼 먹긴 했지만…”
─ 청와대에 들어오신 후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대통령께서 편한 마음으로 국정을 수행할 수 있게끔 돕는 일에 신경을 쏟아요. 대통령께서 연세가 많으신 관계로 주위에서 건강에 대해 염려를 많이 해주세요. 저도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구요. 고마운 것은 많은 분들이 저희들 건강을 위해 기도해주신다는 겁니다. 저희들은 기독교를 믿지만 불교 신자들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해주시니 힘이 됩니다. 제가 대통령의 건강에 신경을 쓴다고 해서 보약을 해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될 수 있는대로 규칙적으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신경을 씁니다.”
─ 저번에 어떤 사람이 100년 된 산삼을 청와대에 보내지 않았습니까?
“글쎄 보내신 분의 정성을 생각해서 대통령께서 잡수긴 했는데 100년이 됐는지, 산삼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제는 그런 것 받지 않아요.”
이 여사는 약간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는데 별로 효험은 보지 못한 모양이다.
─ 대통령은 산에서 나는 음식보다는 해산물을 즐겨드신다고 했는데….
“원래 어려서부터 섬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해산물 중에서도 싱싱한 것을 좋아하세요. 소금에 절인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세요. 그런 것을 다 알고 음식을 장만해줘요. 추어탕도 좋아하세요. 장어나 조기도 좋아하시죠. 기본적으로 그쪽은 홍어를 좋아하니까 큰아이가 겨울만 되면 홍어를 가지고 옵니다.”
─ 요즘 이 여사께서는 건강관리를 어떻게 합니까.
“시간이 날 때마다 수영을 하세요.”
이희호 여사의 건강 관리에 대해서 물었지만 이 여사는 무심결에 대통령의 건강관리에 대한 대답을 했다. 그만큼 신경을 쓴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이희호 여사의 건강관리에 대해 다시 묻자 이 여사는 허리를 굽혀 자신의 다리 부분을 가르키며 말을 이었다.
“저는 작년에 여기를 다쳤어요. 뼈에 문제가 생겨 플라스틱을 집어넣었어요. 의사가 무리하게 걸으면 안된다고 해서 매일 수영장의 물속에서 뛰어요. 물속에서는 걷는 것보다 뛰는 것이 더 쉬워요. 저는 수영을 할 줄 모르거든요. 아무튼 건강관리는 규칙적인 생활과 마음의 평화를 간직하는 것이 최고예요. 될 수 있는 대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생각을 합니다.”
─ 대통령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취침전에 기분 좋은 이야기를 들려준다든지, 나름대로의 비법이 있습니까.
“날마다 기분좋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잖아요. 취침전에는 우스운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곤 합니다.”
이희호 여사는 역대 영부인 중 독특한 스타일의 영부인이다. 단순한 내조형도 아니고 과시적인 활동형도 아니다. 이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에는 여성운동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결혼한 후에는 민주화운동 동지로서 활동했다.
이희호 여사가 92년에 쓴 회고록 ‘나의 사랑, 나의 조국’을 보면 이 여사의 활동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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