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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왜 후계자를 세우지 않습니까?”

3선개헌 담판 그리고 박정희와의 결별

“각하! 왜 후계자를 세우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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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 1월로 들어서자 당내에서 은근히 ‘개헌’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요즘 개헌 여부를 당내에서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는 중입니다.”

1월6일 길재호 공화당 사무총장의 첫 발설을 계기로, 다음 날에는 윤치영 공화당 의장서리도 거들었다.

“후진 사회를 면치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의 과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지상 명제를 위해서는 현행 헌법의 문제점을 개정하는 연구가 진행돼야 합니다.”

역시 같은 얘기였다. 그러자 뭔가 음모(?)를 눈치 잰 신민당 등 야당에서는 즉각 삼선개헌 반대를 외쳤고 정가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그 당시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당·정간에 이미 조율이 있었던 것 같다. 여론의 향배를 보면서 한쪽에서는 거부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다른 한쪽에선 찬성하는 이른바 양동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당내가 양분돼 다소 어수선한 가운데 3월6일에 의원총회가 있었다.

이날 모임은 처음에는 개헌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윤치영 의장이 인사말에서 슬쩍 개헌 문제를 거론하면서 서서히 토론이 벌어졌다. 물론 개헌 문제가 공식회의에서 논의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모두들 마음은 열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평소에 직선적이며 바른말 잘하던 의원들은 이 날도 개헌을 반대하는 의견을 서슴지 않고 밝혔다. 양순직·박종태·신윤창·정간용 의원 등이 주로 반대 의견을 얘기했으며, 나도 서슴없이 다음과 같이 내 의견을 밝혔다.

“박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업적은 국민들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 어느 누구도 개헌을 하면서까지 정권을 연장하는 것을 원치는 않습니다. 지금 이 헌법은 우리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결국 그날 의원총회는 격론을 벌이다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대통령의 측근인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길재호 사무총장, 김성곤 재정위원장, 백남억 정책위원장 등은 개헌을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해 개헌 지지를 설득하고 아예 찬성 도장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특히 김형욱 부장은 개헌을 반대하는 의원들에게 온갖 회유와 협박 공갈로 찬성 도장을 받아내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이 바람은 물론 내게도 불어닥쳤다. 그러나 이미 의원총회 등에서 공개적으로 개헌을 반대하는 등 강경한 입장이었기에, 그들은 내게만큼은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이의원… 개헌 문제좀 얘기합시다….”

“그거라면…그건 절대 안됩니다.”

김성곤 의원이 내게 넌지시 의향을 타진했지만, 난 본론이 나오기도 전에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그러자 다음에는 길재호 의원이 나를 두번씩이나 찾아와 마음을 돌리라고 종용했고 난 역시 거절했다. 안 되겠다 싶었던지 그들은 결국 박대통령에게 미뤘다.

“이만섭 의원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안됩니다…. 이의원만큼은 각하께서 직접 불러서 설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이의원은 내가 한번 불러 이야기 해보지….”

박대통령은 결국 나를 불렀다.

박대통령과 독대

그날은 69년 6월29일이었다. 오후 3시였는데 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나는 들어가기 전부터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대통령을 내가 설득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서재로 들어선 나는 박대통령의 얼굴이 다소 굳어져 있음을 느꼈다. 차를 권한 박대통령은 먼저 3선개헌을 하지 않을 수없는 당위성을 말하며 협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단단히 마음을 먹고 간 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5·16혁명이 아무리 구국 혁명이었다 하더라고,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 군사혁명을 국민혁명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대통령께서 스스로 만든 헌법을 지켜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리입니다.”

내 말에 대통령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난 계속 말을 이었다.

“4·19때 저는 동아일보 정치부기자로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 집권해 학생혁명을 유발했고, 결국 이 박사의 동상을 학생들이 넘어뜨려 새끼줄로 목을 맨 채 광화문 거리를 질질 끌고 다니는 광경을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각하도 장기 집권하게 되면, 나중에 학생이나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라는 말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그제서야 박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나서지 않으면 정권을 야당에 빼앗길 텐데…”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께서 물러나시면서 ‘내가 못다한 일을 바로 이 사람, 나의 후계자에게 맡겨 주십시오’라고 하신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당선됩니다. 왜 정권을 빼앗긴단 말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후계자가 될 사람은 있는가?”

박대통령은 짜증스런 투로 물었다.

“이효상씨나 백남억씨 같은 분도 좋지 않습니까. 그분 중 한분에게 4년간 맡긴 뒤, 4년 후에 다시 정권을 잡으시면 되잖습니까?”

박대통령은 내 말에 버럭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그렇지만 4년 뒤에 누가 나한테 정권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다시 내놓겠어?…”

이 말에 다소 반발심 같은 게 생겼다.

“각하! 만일 후계자한테 맡겨서 그 분이 일을 잘하면 꼭 각하께서 다시 하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그땐 나라의 큰 지도자로서 후배대통령을 뒤에서 도와주시고 또 나라의 갈 길만 인도해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이 말에 박대통령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아마 허리에 권총이라고 차고 있었다면 금방이라고 빼서 쏠 듯한 기세였다.

2시간 40분 동안 박대통령 설득

그러나 나는 간곡하게 3선개헌은 안 된다고 계속 주장했다.

“전 이 나라가 민주주의를 꽃 피우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평화적인 정권 교체이며, 그건 꼭 야당에 정권을 넘겨준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또하나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치 보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가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전 굳게 믿습니다…. 사실 각하 주위에서 개헌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진정 나라를 위하는 마음보다는, 정권을 내놓게 되면 자기들이 죽는다고 생각해 자기들이 살려고 개헌하자는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나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박대통령의 얼굴이 초췌해 보여 인간적으로 안타까웠다.

사실 박대통령은 군에 있을 때부터 정의감이 강하고 바른 소리를 잘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분이 정의롭지 못한 3선개헌을 하려고 하니, 자신은 또 얼마나 괴로웠을까. 난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대통령은 나를 이론적으로 설득하기보다는 자신을 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마음에 호소했던 것이다.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무려 2시간40분의 면담을 끝냈지만, 청와대를 나오면서도 나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각하께서는 3선개헌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빨리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아니면 나라는 극도로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후일 김성곤의원에게 들은 얘기로는 박대통령은 내게 상당히 서운해 했다고 한다. 김의원이 나와 면담한 결과를 묻자 짜증부터 내더라 한다.

“대체 고집이 어찌나 센지, 내가 아무리 얘기해도 듣지를 않아.”

또한 박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인 왕학수가 찾아가 개헌을 만류하는 얘기를 하자, 그때도 박대통령은 “어쩌면 자네도 그렇게 이만섭이와 똑같은 소리만 하는가?” 하고 벌컥 화를 냈다고 한다.

아무튼 박대통령은 이미 날 만나기 전부터 개헌할 결심이 굳어져 있었던 것 같다. 나와 면담한 지 한 달여 뒤인 7월25일, 드디어 박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했다.

“개헌문제로 국론이 분란스러운데, 국민 여러분께 직접 묻겠습니다. 3선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입니다. 만일 국민이 지지해주지 않으면, 나와 정부는 미련없이 물러설 것입니다.”

드디어 개헌을 위한 배수진을 친 것이다. 기자회견이 있은 다음날부터 개헌파들은 바로 반대 세력에 대한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이후락·김형욱·김성곤·길재호 등 네 명은 청와대 비서실장실에 진을 치고 앉아, 그때까지 서명하지 않은 의원들을 한 사람씩 불러 서명을 받았다. 대통령을 만나 직접 얘기를 해본 뒤 서명하겠다던 공정식 의원(전 해병대 사령관) 등에게는 서명을 받고 난 뒤에야 대통령을 만나도록 해주었다.

대통령 기자회견 다음날 공화당은 즉시 당무회의를 열어 발의 일정을 채택한 후, 개헌안 성안을 백남억 정책위원장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사흘 뒤인 7월29일. 공화당은 개헌안 발의 서명을 받기 위해 그 유명한 영빈관 의원총회를 열었다.

바로 전날인 28일 밤,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서른한 살에 국회의원의 길로 들어선 이후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목숨 걸고 투쟁하겠소”

나는 박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의리 때문에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선행조건’을 내걸고 투쟁키로 했다. 책상에 앉은 나는 메모지에 선행조건을 하나하나 써내렸갔다.

첫째, 권력형 부정부패의 책임자 이후락·김형욱은 그 책임을 지고 즉각 물러날 것.

둘째, 중앙정보부는 대공 사찰에만 전념하고 정치 사찰은 하지 말것.

셋째, 당이 명실공히 창당 이념에 맞도록 체질을 올바르게 개혁할 것.

넷째, 국민투표는 지는 한이 있더라고 공명정대하게 실시할 것.

다섯째, 권오병 문교부장관 불신임 파동때 제명당한 예춘호·양순직·박종태 등 제명의원 5명을 복당시킬 것.

나는 비장한 각오로 다섯 가지 선행조건을 정리했다.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첫째 조건에 포함돼 있는 이후락·김형욱, 특히 김형욱의 보복을 감수해야만 했다. 선행조건을 다 쓰고 다시 한번 읽어 본 후 아내를 불렀다.

“여기 5개 선행조건에 이후락·김형욱을 물러나라고 했는데, 이건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소. 그렇지만 난 내일 의원총회에서 반드시 말하고야 말 것이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말을 하면, 김형욱이 무슨 일일 벌일지 모른다는 것이오. 이미 알다시피 김형욱은 김영삼의원의 얼굴에 초산을 뿌리려고 하지 않았소. 그리고 초산을 뿌렸던 하수인은 오리무중 한동안 자취를 감췄는데 인천 앞바다에서 떠오른 시체 2구가 그들이라는 이야기도 있소. 나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내일 당신은 집을 깨끗이 치워주시오. 혹시 습격 받더라고 뒤를 깨끗이 해놓아야 하지 않겠소.”

아내도 이러한 나의 소신에 동의하는 듯 고개는 끄덕였으나 무거운 표정으로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정치인의 아내로서 겪는 비애가 아닐 수 없었다.

다음날 의원총회장소는 영빈관이었다. 현재의 신라호텔 별관 자리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처음부터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예정보다 40분 늦은 10시 40분이 돼서야 시작됐다. 의원총회는 공화당 소속의원 109명 가운데 101명이 참석했다. 김택수 원내총무가 회의 개시를 알리면서 ‘영빈관 의원총회’는 시작됐다.

의원총회는 처음부터 파란의 연속이었다. 맨처음 발언대로 나온 사람은 정구영의원이었다.

“나는 평소 소신대로 개헌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간단하게 한마디로 소신을 밝히고 자리로 돌아가자, 그때부터 의원들 간에 찬·반 양론이 물꼬를 트고 넘치기 시작했다.

의견 접근이 되지 않자 윤치영 당 의장서리등 당 5역은 옆방으로 들어가 대책을 숙의했으나 결론은 당5역 모두 사의를 표한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날 회의는 심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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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 새정치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새천년 민주신당 창당준비위공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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