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한의 군비통제 문제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뚜껑을 열면 다양한 방안과 모델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군비통제가 허상의 그늘에서 맴돌고 있는 이유는 필요성이 없어서도 방안이 없어서도 아니다. 남북관계의 역학과 통일문제, 한·미 관계와 주변국의 한반도 정책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한의 군비통제 문제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뚜껑을 열면 다양한 방안과 모델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군비통제가 허상의 그늘에서 맴돌고 있는 이유는 필요성이 없어서도 방안이 없어서도 아니다. 여기에는 남북관계의 역학과 통일문제, 한·미 관계와 주변국의 한반도 정책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를 도외시한 단순한 기계론적 방안은 군비통제 실현의 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선 과거 미·소와 유럽의 군비통제 경험이 주는 시사점과 이를 한반도에 적용할 경우 한계가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논의해 온 군비통제에 대한 다양한 방법이나 형태에 대한 각론의 대부분은 과거 동서간의 군비통제 경험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 군비통제 사례, 한반도 적용엔 한계
과거 미·소와 유럽의 경험이 남북한의 군비통제에 시사해 주는 바는 다양하게 논의될 수 있다. 그러나 군비통제에 관한 한 맹아(盲兒)적 상태에 있는 남북한의 입장을 고려할 때 이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필요 조건과 전개방식에 대한 교훈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과거 미·소 혹은 유럽의 경험은 관련국간에 군비통제 논의가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들간에 정치·군사적 현상유지에 대한 공감대가 선행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유럽에서 재래식 군비통제를 가능하게 한 시금석이 된 1975년 ‘헬싱키 최종합의서’에서 참가국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제원칙으로 주권의 평등과 주권의 인정, 국경 불가침, 국가의 영토보존 존중 등을 일차적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군비통제 논의를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군비통제 당사국간에 가능하면 군사적 대칭성이 존재하는 것이 유리하다. 군사적 대칭성이란 보유한 병력의 구조나 무기체계의 종류, 동맹구조 등이 서로 대등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군비통제 대상이 되는 병력과 무기 및 장비들을 산정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의 ‘재래식 무기 감축협상’(CFE)을 보면 과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과 바르샤바 조약기구(WTO) 국가들 간에 전차, 장갑차, 화포, 전투기, 공격용 헬기 등 5대 재래식 무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미·소간의 핵무기 통제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같은 핵전력이라도 미국은 주로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을, 소련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양무기체계는 모두 군사적 효과 면에서 대등성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통적 군비통제 방식은 ‘대칭적 상호주의’(symmetrical recip-rocity) 모델이라 규정할 수 있다. 즉 군비를 통제하는 방법에 있어서 상호 대등한 전력에 대하여 대칭적으로 통제하는 형태를 띠고 있으며, 통제 수단도 당사국간 상호주의에 입각한 군사적 수단으로 한정되는 특징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유의할 때 당장에 전통적 방식의 군비통제 모델을 남북한에 적용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남북한간에 뚜렷한 냉전적 대결 구도를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전통적 군비통제 방식이 상정하고 있는 전제조건 및 구조와는 매우 상이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남북한 쌍방간 정치·군사적 현상유지에 대한 인식의 부재와 상이한 위협인식 구조, 비대칭적인 쌍무적 군사동맹관계, 군사력의 구조의 비대칭성 등의 제반 요인들은 결국 남북한의 군비통제를 위한 당국자간의 진지한 논의조차 가로막는 장벽이 되고 있다. 남북한간에 이미 합의된 ‘기본합의서’나 ‘비핵화 공동선언’이 한치의 진전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상당 부분은 이러한 요인들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일단 ‘두고 보는’ 전략도 유용한 방법
그렇다면 남북한의 군비통제에는 일단 ‘두고 보는’(wait and see) 전략도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상황이 그다지 여유롭지만은 않다는 데 있다. 남북한 군비통제 논의와 관련한 두 가지의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대량살상무기를 중심으로 북한의 군사능력이 강화됨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대북 경제지원 및 협력의 필요성은 오히려 증대되는 상황이다. 다른 하나는 정작 평화와 협력을 강구해야 하는 남북한 당사자간의 군비통제 논의는 별다른 진전이 없는 가운데 한반도 군사문제의 논의가 미·북한을 축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 자칫하면 평화를 위해 던진 경협의 씨앗이 한반도 안보 불안을 전혀 감소시키지 못한 채 향후 대북 협상에서 주도권을 상실케 할 우려마저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사전에 예방하는 차원에서 군비통제 기제가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한국 정부는 향후 남북관계의 진전 양상에 따라 다음 두 가지의 군비통제 방식을 융통성 있게 적용하는 노력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일종의 ‘가교전략’(bridging strategy)으로서 ‘비대칭적 상호주의’ 모델에 입각한 군비통제를 실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남북한 평화전략으로 ‘대칭적 상호주의’에 입각한 군비통제를 추진하는 것이다. 전자는 남북관계가 현재처럼 군사적 대결국면을 보이는 가운데 부분적인 경제협력 및 교류가 이루어지는 국면에 적합한 방안이며, 후자는 남북관계가 정상화되는, 즉 남북한의 ‘기본합의서’ 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시점에서 상정할 수 있는 방법이다. 부연하면 ‘대칭적 상호주의’ 방식이 전통적인 군비통제 모델이 지향하는 방법이라면 ‘비대칭적 상호주의’ 방식은 탈냉전 시대에 부각되고 있는 방안이다.
‘비대칭적 상호주의’에 입각한 군비통제는 통제대상을 선정하는 데 군비통제 관련 당사국 중 어느 일방의 특정 군사력만을 통제대상으로 하는 비대칭적 방법을 채택하며, 통제수단도 비단 군사적 수단만이 아닌 정치·경제적 기제와 같은 비군사적 수단이 동원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전통적 군비통제 방식이 관련국간 군사적 측면의 통제와 제한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전쟁의 위험을 방지하고자 하였다면, 비대칭적 상호주의에 입각한 군비통제는 군사적 측면은 물론 비군사적 차원에서의 무력사용 동기 자체를 감소시키려는 데 있다.
가교전략으로서의 ‘비대칭적 상호주의’
탈냉전 시대에 들어 이러한 방법이 주목받는 이유는 자명하다. 군비통제 대상지역으로 남북한과 같은 지역분쟁국가들이 대두되는 가운데, 이들 국가간에 군비통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핵심전력에 대한 대칭성이 미약하고, 이들 분쟁국가간에 형성되어 있는 복잡한 갈등구조 등은 냉전하의 대칭적 상호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군비통제의 전제조건들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근 학자들은 이러한 이유에서 이들 국가간 군비통제에는 먼저 군사적 비대칭성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일종의 ‘가교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가교전략의 핵심은 복잡한 갈등구조와 함께 상이한 군사력의 구조를 지닌 지역분쟁 국가간 혹은 특정 지역분쟁 국가와 강대국간에 군비통제를 위한 협상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정치·경제적인 협상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쌍방간 군사적 비대칭성이 존재하는 가운데 군비통제가 이루어지려면 어느 일방의 군사적 양보가 필수적이고 이러한 양보는 이에 상응하는 정치 혹은 경제적 보상이 수반될 때 실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비대칭적 상호주의’ 방식을 적용한 군비통제 사례로는 미국의 대러시아 안보지원 정책이나 제네바 합의를 통한 대북 핵통제 등을 들 수 있다.
미국은 지난 1991년부터 구소련의 해체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위협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취지하에 구소련의 대량살상무기 해체에 대한 지원을 골자로 하는 ‘넌-루거 법안’(Nunn-Lugar legislation)을 실행중이다. ‘협력적 위협감소(Cooperative Threat Reduction)’ 정책 혹은 제안자의 이름을 따서 ‘넌-루거 계획’(Nunn-Lugar Program)으로 명명되는데 이 계획은 크게 2개 영역으로 나뉘어 수행되고 있다.
첫째는 핵무기를 중심으로 한 대량살상무기의 해체와 폐기 지원이다. 구소련의 대량살상무기를 인도받은 4개의 신생 독립국들에게 대량살상무기, 발사장치, 관련 장비들의 폐기작업에 요구되는 장비와 기술, 그리고 용역 일체를 제공함으로써 보유무기의 폐기를 유도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에 의한 구체적인 성과는 다음과 같다 ▲1997년 4월로 벨로루시,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가 보유하고 있던 약 3400개의 핵탄두를 모두 철거해 러시아로 이전(향후 폐기 예정) ▲‘전략무기감축조약’(START)에 의거, 러시아의 배치된 핵미사일 중 1200여 개의 전략 핵탄두 제거 ▲대륙간탄도탄(ICBM) 150기와 격납고(Silo)의 폐기처분 ▲핵잠수함 8척의 퇴역을 포함해 총 128기의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발사장치 철거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1997년 11월 러시아가 화학무기금지협정에 조인함에 따라 미국은 러시아가 보유한 4만여t의 화학무기 폐기를 위한 지원방안도 강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는 러시아의 핵무기와 핵물질의 안전한 저장과 관리능력 향상, 핵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원조이다. 우선 핵무기와 핵물질의 안전한 관리를 위한 구체적인 활동으로는 ▲러시아의 핵무기 관리능력 개선을 위한 컴퓨터 및 컴퓨터 기술훈련의 제공 ▲핵물질 저장고 건립에 필요한 설계 및 건축 지원업무를 담당할 용역업체 선정 지원 ▲핵물질 저장소에 대한 지원사항을 감독할 파견팀 지원 ▲핵무기 운송차량에 대한 장갑장치 설치, 운송열차에 대한 안전장비의 설치 등이 포함된다.
이와 함께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 저지를 위해 채택한 대북 경수로 지원정책도 비대칭적 군비통제 방식이 적용된 사례라 할 수 있다. 미국의 대북 핵통제의 바탕이 되는 제네바 합의의 요체는 미국측이 확약한 경제·정치적 보상의 반대급부로 북한이 자신들의 핵시설 동결 및 궁극적인 해체에 동의하였다는 점이다. 미국측은 북한이 자신들의 핵활동 동결, 즉 가동중인 5MW 흑연감속 원자로의 가동 중단과 건설중인 50MW·200MW 원자로 건설 중단, 방사화학실험실 봉인 및 추후 해체 등을 이행하는 조건으로 대북 경수로 및 대체에너지 지원, 미·북한 관계개선, 북한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 제공 등 정치·경제·군사적 측면에서의 보상책을 강구하였던 것이다.
물론 북·미 제네바 합의 방식에도 문제는 있다. 예를 들면 합의과정에 한국 정부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나, 북한의 과거 핵 규명에 대한 장기간의 유예 문제 등이 그렇다. 그럼에도 제네바 합의와 같은 비대칭적 상호주의에 의한 핵통제 방식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최선은 아니더라도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조건부 합의인 점을 감안할 때 북한의 합의 불이행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제수단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제네바 합의가 “훌륭한 정책대안이 부재한 가운데 나쁜 정책 중에서는 최선” 혹은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가능한 합의”라는 평가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다만 이상과 같은 비대칭적 상호주의에 바탕을 둔 군비통제의 실행과정에 반드시 유념할 점이 있다. 엄격한 지원조건의 명시와 이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군비통제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군사적 위협의 제거 혹은 감소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 한 정치·경제적 지원과 같은 비대칭적 통제방법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위의 ‘넌-루거 계획’도 지원금의 수혜 대상국인 러시아에 대하여 미 의회가 지원 조건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는 ▲자금의 수혜 대상국은 미·소간 군비통제 규정에 의해 파기 혹은 해체하게 되어 있는 대량살상무기에 대하여 자발적인 통제 노력을 보일 것 ▲정상적인 방위소요 이상의 군 현대화 계획 추진을 포기하고 파기되는 대량살상무기의 대체 금지 ▲자금의 예산목적 외 사용금지(파기된 핵무기의 부품이나 핵물질로 새로운 핵무기 개발) ▲이에 대한 미국의 검증(verification) 허용 ▲소수민족 보호를 포함하는 국제적 인권존중 규정의 이행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북·미 제네바 합의도 쌍무적인 조건부 합의인 점을 감안할 때 북한의 합의 불이행에 대한 상당한 견제수단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지원하되 ‘간섭하는 지원’돼야
이상과 같은 ‘비대칭적 상호주의’에 입각한 군비통제 방식을 향후 남북관계에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방안들을 신중하게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 정부는 북한에 대하여 비료나 식량과 같은 인도주의적 차원의 대북 지원 및 민간차원의 남북 경제협력을 확대 지속한다. 그러나 비록 인도주의적 차원의 대북 지원이라도 식량과 같이 전략적 목적에 사용될 우려가 있는 품목에 대해서는 지원규모에 따라서 이에 대한 목적 외 사용금지 보장 및 관련 국제기구 요원들에 의한 검증을 신중하게 요구하여야 할 것이다. 지원되는 식량이 평양측의 분배제도에 의한 것이라면(즉 굶주리는 주민보다는 당원이나 군부에 일차적으로 분배되는) 지원하는 국가의 국민들이 쉽게 납득하지 못할 것이며, 지원은 하되 ‘간섭하는 지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대규모의 대북 경제지원 및 경협시에는 이와 병행하여 남북한간에 군사적 신뢰구축 및 대남 위협을 감소시킬 수 있는 조치들을 북한에 강력하게 요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비핵화 공동선언 및 남북한 기본합의서의 이행을 강력히 촉구하여야 한다. 양자의 합의는 현재 사문화되어 있지만 남북한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최고의 문서이며 모호하나마 미·북 제네바 합의에서도 인정되고 있다.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의 이행은 현재 미·북 중심인 한반도의 전략적 협상구조를 남북한 중심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으므로 동 합의에 포함된 제반 규정과 제도적 장치를 활성화하기 위한 노력을 북측에 진지하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평화전략으로서의 ‘대칭적 상호주의’
이제 시각을 남북관계가 정상화되는 단계에서의 군비통제 방안으로 돌려보자. 남북관계가 정상화되는 시점은 적어도 남북한간의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의 이행이 보장되고, 북·일, 북·미간의 관계가 정상화되며 한반도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전환되도록 하는 시기일 것으로 판단된다. 이 단계에서 남과 북은 기본적으로 유럽식의 ‘대칭적 상호주의’ 모델에 입각하여 단순한 군사적 신뢰구축조치로부터 대규모의 군사력 감축 등의 다양한 군비통제의 방안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럽의 군비통제 경험은 남북한 군비통제 방안을 상정하는데 중요한 원칙과 실행에 관련된 세부지침들을 제공한다. 우선 유념해야 할 큰 원칙 중 하나는 남북한 평화체제가 완전히 정착하기 전까지는 쌍방간 군사적 억제(deterrence)가 유지되는 선에서 군비통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군비통제는 국가의 안보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없다. 군비통제를 위하여 국가안보를 저당 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유럽의 ‘재래식무기 감축’협상 사례는 군비통제가 억제의 산물이라는 점을 예증한다. 이 협상의 기본합의서에 따르면 군비감축의 목표는 다음 3가지로 요약되는데 ▲한층 낮은 수준에서의 재래식무기 균형을 통한 유럽의 안보 강화 ▲안보에 저해가 되는 불균형의 제거 ▲기습공격 및 대규모 공세작전 능력의 우선적 제거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세부적인 추진 방향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우선 쌍방간 군사력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우선적인 노력해야 하며 이때 양적으로 적게 보유한 측과 동일한 수준으로 감축한다. 둘째, 감축대상은 상호 기습공격용 무기와 병력부터 감축한다. 특히 휴전선 일대에 집중 배치되어 있는 북한의 공세적 전력은 주요 감축대상이 되어야 한다. 셋째, 상호 군사력 현황에 대한 자료 교환은 물론 현장사찰을 원칙으로 하는 검증체제를 유지한 상태에서 추진하여야 한다. 넷째, 쌍방간 확고한 검증체제가 존재한다면 한국 정부가 강조하는 군사적 신뢰구축→군비제한→군비감축으로 이어지는 단계적 추진방식은 융통성있게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주한미군의 전력은 남북한의 군사력 감축안에 직접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남북한의 군비통제 진행 성과에 따라서 주한미군의 위상의 변화나 미 지상군의 부분적인 감축은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 군수산업의 민수 전환 지원해야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감축기준이나 방법에 대하여 살펴보자. 먼저 무기체계의 경우 유럽의 ‘재래식무기 감축조약’(CFE Treaty)과 같이 남북한 쌍방이 통제 대상무기의 보유상한선(ceiling)을 설정하고, 합의한 기간 내에 단계적으로 초과무기를 전량 감축하는 방법이 유용할 것으로 본다. 대상무기 및 장비는 5대 재래식무기로 분류되는 탱크·장갑차·야포·공격용 헬기·전투기를 기본으로 하고 해상전력인 잠수함과 전투함정을 포함한다. 특히 야포의 경우는 견인포·자주포·다연장 로켓포(북한명은 방사포)로 세분하여 보유상한선을 설정한다.
남북한이 보유대상 무기의 상한선을 설정하는 데는 보유 수량에서 더 낮은 쪽을 기준으로 동일상한선(common ceilings)을 설정하는 방법이 가능하다. 다만 어느 일방이 무기의 질적 차이를 들어 단순한 수량적 평가에 의한 감축을 거부한다면 쌍방간 해당 무기의 화력지수(Weapons Effectiveness Indices)를 감안한 상한선의 설정도 가능하리라 본다. 단, 이 경우라도 휴전선에 전진배치시 남한의 수도권까지 기습공격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북한의 240mm 방사포와 170mm 장사거리포는 후방으로의 이동을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무기 및 장비의 감축은 감축협정 발효 후 일정기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실행하는 방식이 바람직할 것이다. 예를 들어 CFE 협정은 발효 후 감축시기를 3단계로 나누어 16개월 이내에 감축의무 대상의 25%, 28개월 이내에 60%, 그리고 40개월 이내에 100% 감축을 완료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남북한의 경우도 이러한 방식을 원용하되 감축에 소요되는 재정적 부담과 기술적 문제 등을 고려하여 기간과 비율은 조정이 가능하리라 본다.
구체적인 감축 방법에는 다양한 방안이 고려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절단이나 폭파 및 분쇄와 같이 대상무기를 폐기하는 방법, 민간용 용도로 전환하는 방법, 전시 및 교육용으로 활용하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장비를 한 지역에서 타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은 금지하여야 한다.
무기 및 장비의 감축과 관련하여 근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안은 북한 군수산업의 민수 전환을 강구하는 일이다. 만약 북한이 상당한 규모의 군수산업 기반을 지니고 있다면 단순히 현존하는 노후 무기 및 장비를 감축하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북한 군수산업의 정확한 규모는 북한 공업 분야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의 생산규모는 전체 북한 경제의 25∼40%를 점유할 정도로 상당한 규모의 군산복합체로 보인다. 비록 최근 북한이 겪고 있는 경제난으로 이들 시설의 가동률이 현저히 낮아진 것으로 보이지만 경제회복 여하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재가동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우리 정부는 북한이 원할 경우 군수산업의 민수 전환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북한의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탈군사화를 촉진하는 이중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사례는 최근 미국의 대러시아 민수전환 지원에서도 나타난다. 탈냉전 시대에 들어 미국은 ‘미·러 군수산업 민수전환위원회’(The U.S.-Russian Committee on Conversion of the Defense Industry)를 설치하고 러시아 군수산업의 민수전환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러시아 민수전환에 대한 양국 고위관리간 조정과 협조를 통하여 전환에 따른 재정적·구조적 문제와 효과적인 전환을 위해 필요한 경제지원 문제를 협의하게 되어 있다.
남북한 병력감축의 외교적 지렛대 활용
무기 및 장비를 감축하는 것에 병행하여 고려할 것은 병력 감축의 문제다. 병력감축 규모와 관련하여 남북한 쌍방은 매우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남한의 기본입장은 먼저 단계적 감축으로 상호 동수균형을 이룬 다음, 통일국가로서의 적정군사력 수준으로 상호균형 감축하자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합의 후 3∼4년내에 3단계 감축을 통하여 각각 30만, 20만, 그리고 최종 10만으로의 획기적인 병력 감축을 주장해 오고 있다.
북한의 ‘10만으로의 감축’ 주장은 아주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실현 가능성은 매우 미약하다고 판단된다. 혹자는 10만의 병력 규모란 상대방을 공격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전제하에 남북한 병력감축의 적정선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남북한이 합의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규모는 아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실현 가능성에서 의심받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북한 체제의 성격상 남한보다 신속한 동원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10만 감축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현역군인은 ‘제복을 입은 민간인’(uniformed civilian)에 불과하다. 역으로 훈련된 민간인은 무기와 장비, 그리고 신속한 동원체제만 유지한다면 언제든지 정규군화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음으로 제도적·사회경제적 이유에서 병력을 10만 수준까지 그것도 3∼4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감축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상비병력을 이 정도 수준에서 유지하려면 남북한 모두 병역제도 자체를 바꾸어야 하며 이행에 상당한 시간이 요구된다. 급격한 병력 감축으로 사회에 방출될 엄청난 유휴 인력자원을 단기간에 해소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는가 여부도 관건이다.
마지막으로 병력감축에 따른 무기 및 장비의 처리 문제이다. 잉여 장비를 그대로 가져다 버릴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이를 완전히 폐기해야 한다면 엄청난 비용과 인력, 그리고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무기와 장비를 존치한 채 병력만 줄인다면 10만 감축안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병력감축의 적정선은 얼마인가. 여기에서 구체적인 규모를 제시하기는 힘들지만 통일 이전 단계에서는 대체로 남과 북이 각각의 무기 및 장비의 감축에 상응하는 수준 이상의 병력감축이 타당하리라 본다. 다만 이때의 병력규모는 통일단계의 그것보다는 훨씬 상회하는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남북한의 통일에는 주변국의 협조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남북한의 대규모 병력감축을 이들의 동의를 유도하는 외교적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한반도 군비통제 접근 방법을 남북관계의 진전 양상에 따라 2단계로 구분하여 융통성있게 적용할 것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남북관계의 교착상태를 타개하는 가교전략으로 ‘비대칭적 상호주의’에 기초한 군비통제 방안이며, 다른 하나는 남북관계가 정상화되는 단계에서 ‘대칭적 상호주의’에 바탕을 둔 방안이다. 현재의 남북관계를 고려할 때 당장에 유용한 방식은 ‘비대칭적 상호주의’에 입각한 군비통제 방안이라 생각된다. 물론 비대칭적 상호주의에 입각한 대북 군비통제정책을 추진한다고 해서 북한이 당장에 이를 수용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북한이 원하는 것이 경제적 수혈이고 남한이 원하는 것이 대남 군사 위협의 감소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방안의 추진은 잠재적 유용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방안은 우선 대규모 남북경협 과정에 파생될 수도 있는 우리 안보에 대한 부작용을 예방할 수 있으며, 정부의 대북정책 추진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확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하게 한다. 아울러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북한이 남북 화해와 군사적 위협의 감소 기회를 거부할 경우 받을 것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학습 효과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장점은 대북정책 추진에 있어 위험을 최소화하면서도 북한의 긍정적 변화를 기대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