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교육 받지 않은 ‘소년공’ 출신
살기 위해 선택한 기득권과의 전쟁
‘노무현 특강’ 듣고 인권변호사 결심
“이재명은 ‘이방인’…그래서 자신의 정치색 부각”

소년공으로 일하던 시절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동아DB
대선후보 등록 이후인 5월 13~15일 한국리서치가 KBS 의뢰로 실시한 대선후보 지지율 조사에 따르면, 이 후보는 46%,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31%,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 8%로 나타났다. 대선에 대한 인식 조사에서도 정권교체 53%, 정권 재창출 36%로 야권 후보 당선에 대한 선호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후보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유력 후보’이지만 동시에 ‘비호감도가 높은 정치인’ 중 하나다. 한국갤럽이 2월 11~13일 전국 유권자 10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통령감으로 절대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호감도 조사에서 이재명 후보는 41%로, 45%를 기록한 이준석 후보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여론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그에게 ‘비호감 정치인’이란 불명예가 드리운 까닭은 무엇보다 각종 ‘사법 리스크’ 때문이다. 3년 넘게 지속된 사법 리스크 탓에 ‘이재명’ 하면 자동 반사처럼 사법 리스크가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된 것이다. 사법 리스크에 가려 ‘인간 이재명’은 어떤 사람인지, ‘정치인 이재명’이 정치하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2017년 대선과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이 후보가 ‘신동아’와 인터뷰한 내용과 그의 지인과 정치 동료들의 전언, 그리고 그의 자전적 에세이(‘함께 가는 길은 외롭지 않습니다’) 등을 종합해 인간적 면모와 ‘그가 정치하는 이유’를 알아보았다.
이재명 변호사, 시장 출마를 결심하다
2004년 3월 25일, 성남시민 2만 여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아 추진한 성남시립의료원 건립을 위한 조례안이 시의회에서 ‘심의보류’가 됐다. 의료원 건립에 매달려온 이들은 시의회 회의장을 점거한 채 항의 농성에 돌입했다. 시의회는 당시 농성을 주도한 ‘이재명 변호사(이변)’를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공용물건손상죄로 고발했다. 수사 당국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이변’은 시청 바로 옆 주민교회 건물 지하로 피신했다. 주민교회는 당시 명동성당이나 조계사처럼 경찰이 함부로 들어와 체포할 수 없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통했다. 당시 이 교회 이해학 목사는 빈민운동과 통일운동 등 생명공동체 활동을 하고 있었다. 화창한 어느 봄날, 어두운 지하실 구석에 숨어 있던 ‘이변’에게 그와 함께 성남시립의료원 설립운동을 하던 보건의료노조 부위원장 정모 씨가 찾아왔다. 억울하고, 암담하고, 막막한 심정을 토로하는 ‘이변’에게 정 씨는 “이 변호사가 시장으로 출마하라”고 제안했다. 그는 “내가 무슨 시장이에요. 차라리 이장을 하고 말지”라며 웃어넘겼다. 그러나 그날 저녁 ‘이변’은 고민 끝에 시장 출마를 결심했다. 시장이 되면 제일 먼저 성남시립의료원 건립부터 추진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그는 성남시립의료원이 자신을 세 번 울게 했다고 회고했다. 시의회에서 조례안이 부결됐을 때 처음 눈물 흘렸고, 사흘 뒤 주민교회 지하실에서 정치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날 두 번째 눈물을 흘렸으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3년 11월 14일, 성남시장이 돼 성남시립의료원 착공 발파 버튼을 누르던 날, 세 번째 눈물을 흘렸다는 것.
‘이변’의 정치 입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2006년 열린우리당 후보로 처음 성남시장에 도전했을 때 그는 기득권 텃세의 위력을 실감했다. 시 주최 공식 행사장에서 내빈석을 내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빈 소개 때에도 그의 이름을 뺐다. 그러나 그는 시 단위 행사는 물론 구청이나 동에서 하는 행사에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일찌감치 행사장에 나가 다른 사람 이름표를 떼고 그 자리에 먼저 앉아 있기도 했다. 사회자가 내빈을 소개할 때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본부석 마이크를 잡아채 자기소개를 스스로 하기도 했다. 아예 접이식 간이의자와 휴대용 마이크, 스피커까지 갖고 다니기도 했다.
그가 이런 ‘유치한’ 실랑이를 고집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행사장에 나온 유권자들에게 주최 측이 기득권을 내세워 얼마나 상대 후보를 배척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런 그의 노력에도 2006년 첫 시장 도전 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2년 후인 2008년 18대 총선에 경기 성남 분당갑에 도전했지만 또다시 실패했다.
두 번의 낙선 후 그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선거 전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선거는 특별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짧은 선거운동 기간에 유권자 한 사람을 두 번 이상 만나기 어려운 만큼 ‘한 번 만났을 때 확실한 인상을 심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세 번 실패하지 않기 위해 그는 ‘설득의 심리학’을 비롯해 수십 권의 심리학 서적을 탐독했다.
“선거는 종합예술이다. 후보자 자신을 알려 유권자 마음에 확실한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
“내가 상대에게 정성을 다해 진의를 보여주면 반드시 그 뜻이 마음에 전달될 것이다.”
‘설득의 심리학’에 나오는 ‘상호성의 원칙’에 입각해 선거운동 방식을 확 바꿨다. 이후 선거 때 그는 비 내리는 이른 새벽, 약수터에 올라가 명함을 돌렸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지하철역을 놔두고 왜 하필 비 오는 날 인적이 드문 약수터에서 명함을 돌리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시민에게 특별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공부하며 터득한 선거 전략이 톡톡히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이후 그는 성남시장 재선, 경기도지사 당선 등 도전한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도청 직원 명찰 패용 사건
2010년 성남시장 당선 후 그가 제일 먼저 단행한 조치는 9층에 있던 ‘시장실 이전’이었다. “시장실을 가장 낮은 층으로 옮기겠다”는 그의 말에 시청 직원들은 손사래를 쳤다. 민원인들이 막무가내로 밀어닥칠 우려가 있고, 시장실을 점거하는 일까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시장실 이전을 밀어붙였다. 1층 로비는 시민을 위한 각종 회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어 청사 2층으로 시장실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아도 로비에서 계단을 통해 시장실로 곧바로 들어올 수 있도록 했고, 누구든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도록 문도 활짝 열어뒀다. 시장실을 개방하자마자 직원들 우려대로 한 무리의 시민들이 들이닥쳤다. 민원 내용은 당시 현행법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법을 어기면서까지 도와줄 수는 없다”며 안 되는 이유를 설명했지만 민원인들은 시장실을 점거한 채 농성에 들어갔다. 직원들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민원을 빙자한 억지 주장’으로 여긴 그는 일과시간이 끝나자 농성 중인 시민들에게 시장실 열쇠를 주라고 지시하고는 퇴근해 버렸다. 대자보도 써 붙일 수 있도록 커다란 전지와 매직펜도 제공했다. 민원인들은 시장이 방 열쇠까지 주고 퇴근하자 밤 10시쯤 하나둘 자리를 떴다. 그날 이후에도 집단 민원은 계속됐다. 하지만 법에 저촉되는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자, 시장실을 점거하는 집단 민원은 점점 줄었고, 언제부턴가는 말끔하게 사라졌다.
경기도지사가 된 뒤에는 도청 모든 직원이 명찰을 패용하도록 했다. 당시 그는 한 지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경기도정에서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것은 ‘기본과 원칙’”이라며 ‘전 직원 명찰 패용’과 ‘점심시간 준수’를 예로 들었다. 그는 “근본적인 변화는 기본에서 시작하는데 토대를 튼튼하게, 제대로 바꿔놔야 정책과 제도가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다”며 “사소해 보이는 명찰 문제도 주권자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 자기가 누군지 투명하게 드러나면 조심하고 겸손하고 책임지는 자세가 나온다”고 강조했다.
일종의 ‘공무원 실명제’를 도입한 것인데, 경기도 등 3개 공무원노조는 공동성명을 내 “명찰 패용 문제는 직원과 공감대 형성과 시행 방법론에 대한 사전 소통 절차 없이 일방적으로 강행한 것”이라며 “직원들과 수평적으로 소통하는 리더십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노조 측에서는 공무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데 왼쪽 가슴에 또 명찰을 달도록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그는 도지사 재임 중 명찰 패용을 관철했다. 6·3대선에 이 후보가 당선할 경우 전국 중앙부처 공무원 모두의 왼쪽 가슴에 직책과 이름이 적힌 명찰 패용이 현실화될지 주목된다.
김민석 민주당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후보는 당대표 시절 일주일에 사흘 재판을 나가면서도 당을 장악했는데, 집권 후 재판을 안 받으면 잠도 안 자고 일을 어마어마하게 잘할 거다. 정치권에서 ‘공무원들 이제 다 죽었다’는 농담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이 후보는 이데올로기나 거시 담론보다 구체적 성과를 내는 게 최고라는 생각으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부연했다.
‘신속 행정’ ‘성과 행정’을 추구하는 그의 스타일에 함께 일하는 공무원들은 피곤해했지만, 그의 남다른 행정에 유권자인 시민들은 더 높은 지지율로 화답했다. 2010년 민선 5기 첫 성남시장 당선 때 그는 성남시 분당구에서 당시 여당 후보에게 5% 차이로 뒤졌다. 그 밖의 지역에서 앞서 전체적으로 51.2% 득표율로 당선했다. 그러나 4년 뒤 재선 때에는 분당구에서도 상대 후보보다 더 많이 득표해 전체적으로 55.1% 득표로 당선했다.
대선후보가 된 ‘소년공’
이재명 후보의 어린 시절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하는 단어는 ‘가난’과 ‘주경야독’이다. 경북 안동의 화전민 집안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가난으로 학업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초등학교 졸업 후 ‘소년공’으로 공장에 취업해 한동안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이 후보 가족이 고향 경북 안동을 떠나 성남으로 이주한 배경에는 이 후보 부친 때문이란 얘기도 있다. 한 언론인은 유튜브에서 “이 후보 고향 마을에 가서 들어보니 ‘이 후보 부친이 엄청난 사고를 치고 야반도주했다’는 불편한 진실이 나왔다”고 발언했다. 이 같은 발언에 대해 이 후보 측은 해당 언론인에 대해 ‘부친에 대한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장을 접수시켰다고 한다. 50년도 더 된 옛이야기의 진위가 쉽사리 밝혀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중앙대 입학식에서 처음 교복을 입고 어머니와 기념 촬영한 모습. 동아DB
그의 어머니는 그가 판사나 검사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노동법학회’ 활동 중 한 사람의 특별 강연이 그의 진로를 바꾸게 만들었다. 당시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이었다. 연수원 시절 ‘노무현 변호사’ 강연에 감동받은 그는 ‘나도 인권변호사가 되리라’고 마음먹었다. 노동법학회 연수원 동기 몇몇도 그와 비슷한 고민을 거쳐 인권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인권변호사가 되기로 의기투합한 이들은 ‘각자 근거지가 되는 지방으로 내려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지방자치단체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자’고 뜻을 모았다. 그가 성남시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때였다.
1994년, 서울에 참여연대가 결성될 즈음 성남에는 ‘성남시민모임’이 만들어졌다. 이 모임은 나중에 ‘성남참여연대’로 명칭을 바꿨다. 성남시민모임을 만드는 데 그는 적극 참여했다. 당시 그가 맡은 직책은 사무국 차장. 그로부터 10년 넘게 그는 어떤 단체든 대표직이 아닌 실무 역할만 도맡았다. 2002년 여름에 있었던 ‘파크 뷰 특혜 분양’ 사건 때 그는 ‘검사 사칭’ 사건으로 구치소를 경험했다. 2003년 말, 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에 있는 성남병원과 인하병원이 폐업하게 됐다. 종합병원 두 곳이 한꺼번에 문을 닫게 되면 성남시는 의료 공백 지역이 될 게 뻔했다. 그는 시립병원 설립 운동에 참여했다. 성남 시민들에게 의료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봤다. 그는 10만 명 서명운동에 돌입해 주민 발의 조례를 만들었다. 밤낮으로 서명을 받으러 뛰어다닌 끝에 ‘성남시립의료원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조례’를 발의했다. 그러나 2004년 3월 25일, 성남시의회는 이 조례를 부결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정치 투신을 결심했다. 시장이 돼 제일 먼저 성남시립의료원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을 향한 꿈
2010년 성남시장 당선 후 그는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시 재정을 흑자로 돌려놓고, 무상교복 등 각종 시민 복지제도를 강화한 덕에 그는 2014년 재선에 성공했다. 당시 성남시장 재선에 도전하며 내건 슬로건이 ‘이재명은 합니다’였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성남시장에 당선한 이재명 후보. 동아DB
이재명: “공정한 국가를 만드는 게 평생의 꿈이다. 공정한 사회, 공정한 국가….”
기자: “너무 추상적인 거 같다.”
이재명: “그렇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다. (공정 국가를 두고) 보수냐, 진보냐 논쟁으로 발전하기도 하는데, 내가 바라는 것은 법치다. 법이 지켜지고, 원칙과 상식이 발현되는 그런 나라. 나는 진짜 보수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사람이다. 농담이 아니다.”
그러나 당시 그는 당내 기반이 두터운 문재인 후보에 패해 본선 진출이 좌절됐다. 그러나 이듬해 지방선거에 경기지사에 도전해 당선했다. 이후 2022년 대선에는 경선을 통과해 본선에 직행했지만 0.73%포인트 근소한 표차로 낙선했다.
박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그는 일약 대선후보 반열에 올랐고,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지는 6·3대선에서 그는 당선이 유력한 대선후보가 됐다. 정치인 이재명은 비교적 빠른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항상 ‘소란’스러웠다. ‘소년공’ 시절부터 시작된 ‘생존’을 위한 싸움을 ‘정치인’이 된 후에도 계속했기 때문이다. 그가 다른 정치인보다 많은 논란과 갈등에 휩싸이는 것은 그가 세 가지가 없는 ‘3무(無)’ 정치인이기 때문이란 분석이 있다. 김관옥 정치연구소 ‘민의’ 소장의 분석이다.
“그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소년공’ 출신 대선후보다. 학연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는 ‘이방인’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그는 ‘살기 위해’ 더 자신의 정치 색깔을 부각하려 한다. 둘째는 운동권 출신도 아니다. 셋째는 고향이 국민의힘 지지기반인 경북 안동으로 지역적 기반도 없다. 오랫동안 정치적 성장의 필수 요소로 여겨졌던 ‘학연’ ‘지연’ ‘소속집단’이 없는 그는 생존을 위해 기득권과 싸우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대장동 의혹 등 그를 둘러싸고 제기된 각종 사법 리스크 역시 그의 ‘정치적 생존’을 위협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사법 리스크를 둘러싼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그의 지지 세력은 갈수록 커졌다. 2017년 첫 대선 도전 때 지지 그룹이던 ‘손가락혁명군’은 2022년 대선을 거치며 ‘개딸(개혁의 딸)’과 ‘양아들(양심의 아들)’로 확대돼 두 차례 민주당 대표에 오르고, 압도적 득표로 대선후보가 되는 데 주도적 구실을 했다.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지내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관례’와 ‘관행’과 싸웠다. 앞으로도 싸워야 할 가장 큰 적으로 ‘관례’와 ‘관행’을 꼽는다. 그는 자전적 에세이에서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이렇게 진단했다.
“고질적 병폐인 관례나 관행 속에서 피 같은 세금이 줄줄 새나가기 때문에 정작 써야 할 예산이 모자라고, 벌여놓은 사업을 마무리 지으려다 보니 빚더미에 올라앉게 될 수밖에 없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나는 이런 악순환을 과감히 끊어내는 것이야말로 모든 정치인들의 절대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이 스스로를 머슴이자 살림꾼임을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