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호

국민 스스로가 주인으로 깨어나야 대한민국 우뚝 선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며 스스로는 선하다는 정치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jeongtaeroh@ries.or.kr

    입력2025-06-0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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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대를 악이라 가정하며 정당성을 취하는 ‘르상티망’

    • 니체 “르상티망, 증오를 포장한 ‘노예의 도덕’”

    • 남과 비교해 자신을 찾지 말란 조언과 같은 맥락

    • 개인적 조언 차원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나…

    • 집단, 정치 구도에서는 르상티망에 빠져 버린 한국사회

    “한일 수교 60주년을 맞아 과거사·영토 문제는 원칙적으로, 사회·문화·경제 영역은 전향적·미래지향적으로 대응하겠습니다.”

    5월 26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페이스북을 통해 발표한 외교·안보 공약의 한 문장이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정신을 이어받아,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원칙적 입장을 지키되, 그 외 영역에서는 협력할 것을 협력하며 공존 공생을 꾀하겠다는 취지다.

    같은 날 경기 수원시 아주대에서 대학생 간담회 이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다시 한번 비슷한 취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과 관계를 친일·반일 차원에서 접근하는 건 운동가이거나 책임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얘기”라며, 어디까지나 국익을 중심으로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를 하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5월 26일 오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월드컵로 아주대학교에서 열린 ‘아주대와 함께하는 대학생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5월 26일 오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월드컵로 아주대학교에서 열린 ‘아주대와 함께하는 대학생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

    이재명 후보가 대일관계 이야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유권자의 상당수가 그의 대일 외교에 불안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후보도 이를 알고 있다. 5월 20일에 진행된 재외국민 유튜브 간담회에서도 “제가 일본에 적대적일 거란 선입견이 있다”라며 자신을 향한 유권자의 불안을 먼저 언급하기도 했다.

    필자 역시 그러한 ‘선입견’을 떨치지 못하는 편이다. 만약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한일 관계가 요동칠 수 있다는 불안을 잠재우기 어렵다. 그가 정치활동을 하며 보여주었던 행보를 놓고 볼 때 그렇다. 이재명 후보는 반일 선동을 제어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준 바 있기 때문이다.



    국내 정치를 위해 국제 관계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행보를 보이는 것은 이재명 후보와 민주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당이 ‘반일’로 불장난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그 반대편에서는 ‘반중’이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가령 5월 18일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주관 1차 대통령 선거 후보자 TV 토론에서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후보는 이재명의 서·남해안 풍력발전 강화 공약에 대해 “중국이 많이 장악한 시장에 계속 우호적 발언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맹목적 투자를 줄이거나 현실화하고, 대신 원자력 발전 비중을 늘려서 기후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에너지 문제를 친중과 반중의 구도로 몰아가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의문스럽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가  5월 18일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주관 제21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회를 하고 있다. 방송화면 캡쳐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가 5월 18일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주관 제21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회를 하고 있다. 방송화면 캡쳐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도 같은 토론회에서 역시 중국을 적국으로 가정한 발언을 연이어 내놓았다. “6·25 전쟁 때도 중국 공산당은 우리나라에 쳐들어와서 우리의 적국이었지 않나” 물었고, 건강보험이 “중국동포들에게 과도하게 느슨하게 허용된 부분도 있다”라며 일각에서 제기되는 ‘조선족 건강보험 탕진설’을 언급하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서로를 친중이나 친일이라 비난하고, 자신이 반중이나 반일임을 내세우려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이 모든 정치적 태도의 본질은 같다. 외부의 ‘적’을 지목하고 그것에 대항해 자신의 지지층의,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규정하려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르상티망(Resentment)’에 바탕을 둔 정체성 정치, 노예의 도덕이 우리의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르상티망은 정치학, 윤리학, 미학을 관통하는 철학적 개념이다. 단어 자체의 뜻은 원한, 분노, 억눌린 분개 등을 뜻하는 프랑스어의 ‘ressentiment’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손에서 철학적으로 제련되면서, 르상티망은 보다 특수한 의미를 지니게 됐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5월 18일 1차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주관 제21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5월 18일 1차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주관 제21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

    정치 칼럼에서 니체를 인용하는 것은 늘 조심스럽다. 니체의 철학이 나치를 옹호하는데 동원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학적 은유를 동원하는 니체의 글쓰기 방식과 그 속에 담겨 있는 반기독교적, 반 유대주의적 표현은 니체 철학에 대한 접근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일단 흔히 알려진 바를 정리해 보자. 르상티망은 약자가 강자에 대해 느끼는 억눌린 분노와 질투, 원망 등을 뜻한다. 약자는 힘을 직접 휘두를 수 없기 때문에 도덕적, 정신적 우위를 누리고자 한다. 어떤 명분이나 가치를 내세워 강자를 비난한다. 약자 스스로의 이기적 욕망은 명분과 가치로 뒤덮어버린다.

    그리하여 발생하는 것이 바로 ‘노예의 도덕’이다. 강자에 대한 증오를 도덕적 가치로 포장하고, 약자의 추태를 대의명분으로 감싸는 것이다. 니체는 19세기 말 유럽을 휩쓸던 반유대주의에 편승하여, 그러한 노예의 도덕이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대인 사제들이 만들어낸 노예의 도덕은 기독교의 탈을 쓰고 유럽을 짓눌러왔기에, 그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노예의 도덕을 그렇게만 이해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해당 논의가 지니는 철학적 함의를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동원하고 있는 ‘문학적’ 서술을 고려하며 니체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고귀한 모든 도덕이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노예 도덕은 처음부터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이야말로 노예 도덕의 창조적인 행위인 것이다.” (도덕의 계보, 제1 논문 10절)

    니체가 볼 때 도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긍정의 도덕’과 ‘부정의 도덕’이다. 긍정의 도덕은 고귀한 도덕이다. 일단 자기 자신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반대로 부정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으로, ‘밖에 있는 것’, ‘자기가 아닌 것’, 즉 ‘타자’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무언가를 부정함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도덕관, 그런 것이 바로 노예의 도덕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서 ‘도덕의 계보’에는 노예의 도덕에 관한 정의가 적혀 있다. 청하출판사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서 ‘도덕의 계보’에는 노예의 도덕에 관한 정의가 적혀 있다. 청하출판사

    우선 노예 도덕의 구조부터 이해하는 게 좋겠다. “노예 도덕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먼저 대립하는 어떤 세계와 외부 세계가 필요하다. 생리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일반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이 필요하다.”(도덕의 계보, 제1 논문 10절)

    생존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실상 대부분의 생명체를 떠올려 보자. 우리의 눈에 새는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생물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여 생존을 위해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노예의 도덕에 사로잡혀 있는 평범한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하루 생존을 위해 그저 살아갈 뿐이다. 그런 이들의 눈에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사람이 곱게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누리지 못하는 경지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 선함, 아름다움은 그들의 ‘바깥’에 있고, 그래서 가질 수 없다. 빼앗고 싶지만 빼앗을 수 없다면 부숴버리고 싶어진다.

    반면 “고귀한 인간의 경우는 정반대이다. 고귀한 인간은 ‘좋음’이라는 근본 개념을 먼저 자발적으로, 즉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해 내고, 거기에서 비로소 ‘나쁨’이라는 관념을 만들게 된다!”(도덕의 계보, 제1 논문 11절) 고귀한 인간은 자기 바깥의 것을 탐내지 않는다. 고귀한 인간에게 ‘좋음’이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고귀한 인간이라고 해서 외부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자기 바깥의 무언가를 보고, 선악을 판별한다. 문제는 선악이 제기되고 인식되는 순서다. 니체에 따르면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하는 선’과 대비되는 ‘악’은 일단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면서 그 반대급부로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선’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이 고귀한 기원을 지닌 ‘나쁨’과 끝없는 증오의 도가니에서 나온 저 ‘악함’을 비교해 보자. 전자가 후에 만들어진 것이며 병렬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자 일종의 보색(補色)이라면, 후자는 이에 반해 원형이며 시원이자 노예 도덕이라는 구상에서 나온 본래의 행위이다.”(도덕의 계보, 제1 논문 11절)

    철학자의 원문을 통해 살펴보았지만, 이것은 실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야기이다. 흔히 ‘자존감’이라 부르는 무언가를 키우고 싶다면 나의 긍정적인 면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 먼저다. 남과 비교하며 남을 깎아내리면서 자존감을 세우려 해봐야 소용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기 인식이 남에게 휘둘리게 된다. 자존심만 내세우는 허약한 자아의 소유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오늘날 우리에게 퍽 낯설지 않게 들리는 것은 니체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남과 비교해서 자신을 찾으려 하지 말 것.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과 맞닥뜨릴 것. 서점에서 아무 자기개발서나 펼쳐놓고 보더라도 한 번쯤은 나올 법한 이런 말은, 사실 19세기 말의 한 철학자가 그를 둘러싼 세상 전체로부터 고립된 채 종이 위에 쏟아냈던 혁명적 사고방식을 대중적으로 풀어 쓴 것이나 다름없다.

    ‘남과 너를 비교해라, 너의 열등감을 매일 매분 매 순간 느끼면서 살아라, 그 분노와 부정적인 감정을 통해 너를 확인해라’ 이런 식의 조언을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요컨대 우리는 니체로부터 비롯한 ‘노예의 도덕’에 대한 비판을, 적어도 개인적 조언 차원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문제는 집단적 도덕의 경우다. 집단, 특히 국가적 단위로 올라가면 노예의 도덕이 대세가 된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반일주의와 반미주의, 더 나아가 반중주의 역시 그렇다. 특정한 나라를 무조건 악으로 설정한 후, 이를 배척하는 모습을 과시하듯 내비쳐야 ‘진정한 한국인’이라는 식의 주장이 2025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적을 중심에 둔 세계관, 남을 공격하고 비판해야 성립하는 자아상은 허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절대로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력이 흐려지니까.” 영화 ‘대부 3’의 명대사다. 적에 대한 증오심은 짧은 순간 뜨거운 에너지를 뽑아내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그 본질은 노예의 도덕이다. 그것에 함몰된 한 노예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기준과 가치관이 중심이 되어 행동하지 않으면 주인이 되지 못한다. 니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실 우리가 모두 이미 잘 알고 있는 세상의 근본 원리 중 하나다. 그런데 이 간단한 원리가 왜 국가적 차원의 정체성 확립과 진로 확충에는 적용되지 않는 걸까.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벌써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점점 더 잘 사는 나라, 잘 알려진 나라,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가 되어 왔다. 반면 그 기간 동안 우리의 정치는 한국인을 점점 더 편협하게 노예의 도덕에 휘둘리는 못난 백성으로 만들어온 것 같다. 국민을 갈라치기 하는 정치,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착한 나라’의 편이지만 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악한 나라’의 부역자라는 식으로 손가락질하는 정치, 그런 정치가 판치고 있는 한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꿈꾸는 일은 쉽지 않을 듯하다.

    결국 선택은 국민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르상티망의 정치에서 벗어나 주인의 도덕으로 향하는 정치를 원한다면,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국민이 주체적으로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만이 유일하면서도 확실한 해법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국민 스스로가 주인으로서 깨어날 때, 대한민국은 그 어떤 외국에도 휘둘리지 않고 정복되지 않는 나라로 우뚝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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