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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선일보에 ‘나를 고소하라’고 외치는 이유

내가 조선일보에 ‘나를 고소하라’고 외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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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압살시키는 모순이 계속돼왔다.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극우세력이 스스로 보수라고 칭했고 또 자유민주주의를 참칭해 왔기 때문이다. 그 선두에 조선일보가 있다. 그래서 나는 주저함이 없이 조선일보를 향해 “나를 고소하라!”고 외치는 것이다.
  • 홍세화씨는 반(反)조선일보 측을 대표해 이 글을 썼다. 이를 계기로 우리사회에서 보수와 진보, 자유민주주의와 극우파시즘에 대한 진지한 논의의 장이 열리기 바란다(편집실).》
나는 99년 11월29일자 ‘한겨레신문’ 칼럼에 “나를 고소하라!”고 썼다. 스스로 생각해도 도발적인 언사임에 틀림없다. 마조히스트가 아니라면, 그리고 ‘점잖은’ 사람이라면 함부로 꺼낼 소리가 아닐 것이다.

실상 내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남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동의하지 않더라도 인정해 주라는 똘레랑스(tole쳑ance:관용)를 무척이나 강조해 왔다. 그러나 똘레랑스가 앵똘레랑스까지 용인해버리면 자기 모순에 빠진다. 근대사에서 보더라도 로크나 볼테르, 루소 등 똘레랑스를 강조했던 사람들일수록 앵똘레랑스(intole쳑ance:불관용)와 과감하게 싸웠다. 조선일보는 앵똘레랑스를 부추겼다. 한국 사회에서 사상 검증이란 행위, 즉 ‘당신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빨갱이로 몰아가는 행위는 앵똘레랑스의 전형이다. 그래서 나는 주저함 없이 “나를 고소하라!”고 외친 것이다.

“나를 고소하라!”고 외친 것은 물론 내가 처음이 아니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리베라시옹’의 마티외 랭동 기자가 소설 ‘장 마리 르펜의 소송’을 통해 극우세력을 실명으로 비판해 화제가 됐다. 여기서 랭동 기자는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우두머리인 장 마리 르펜을 ‘살인자 집단의 수괴’ ‘인간 역사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망령’ ‘피로 살찌는 흡혈귀’ 등 극단적인 표현으로 비판했다. 르펜은 출판사와 랭동 기자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승소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프랑스 문인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100여명의 문인들이 문제가 된 네 개의 구절을 ‘리베라시옹’에 그대로 옮겨 쓴 뒤 “똑같이 쓸 준비가 돼있다”며 “그대로 썼으니 나를 고소하라”고 요구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한국판에서는 최장집(崔章集) 전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의 사상검증 사건과 관련해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를 ‘스승의 등에 칼을 꽂은 청부살인업자’라고 쓴 강준만 교수(월간 ‘인물과 사상’)와 ‘마조히즘적인 정신분열 증상’이라고 쓴 정지환 기자(월간 ‘말’)가 명예훼손에 의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여기까지는 ‘한겨레신문’에서 이미 밝힌 내용이다.



그후 한국에서는 네티즌들이 중심이 돼 ‘벌금 대신 물어주기(모금) 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는 지식인들이 앞장섰지만 한국에선 일반 시민들이 나섰다. 실로 기이한 대비라 하겠다.

프랑스 극우세력은 왜 한국을 좋아하나

내가 바라는 한국사회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다. 누군가 말했듯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라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우선 상식만이라도 통하면 다행이겠다.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극우 국민전선당을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민전선당의 당수인 장 마리 르펜은 유태인을 대량학살한 가스실을 가리켜 “2차 대전 중에 일어난 사소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꾸조차 하기 역겨운 극우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역사관이다. 그들은 또 프랑스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외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별하고 멸시하고 혐오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정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와 같은 극우세력의 선동에 쐐기를 박기 위해 부단히 싸운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위하여. 여기서 극우주의자와 관련해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아, 한국요! 한국은 나의 이상향(mon pays id al)입니다!”

전화 저쪽에서 반갑게 외친 사람은 브뤼노 골리쉬라는 사람이다. 그는 파리에 있는 어느 교포신문의 인터뷰 요청을 받은 참이었다. 한국을 이상적인 나라로 꼽아주는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국민전선당의 제2인자이며 장 마리 르펜의 오른팔이다. 일본 여자를 아내로 둔 탓인지 동아시아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한국의 이인화’들은 그의 얘기를 듣고 감동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비(非)백인들을 싸잡아서 혐오하고 멸시하는 국민전선당이지만 한국인은 좀 봐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프랑스 극우세력의 대표 인물 중 하나가 한국을 가리켜 이상향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국가보안법이나 준법서약제 같은 것도 그들에게는 무척 매력적일 것이다. 또 사상을 검증할 수 있다는 것, 사상을 검증하는 신문이 가장 강력한 언론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 사상을 검증한다는 데 지식인들조차 침묵함으로써 방조하고 그래서 한국 사회에 극우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매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사상 검증’이란 말은 중세 용어에 속한다. 극우세력의 사전에도 이 말은 없다. 자유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 다른 점은 사회 안에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이며, 따라서 전체주의의 속성인 ‘배제의 논리’를 거부하는 게 자유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칼 포퍼의 말을 빌어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를 구분하면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의 차이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보수 우파와 그렇지 않은 극우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극우 국민전선당은 여타의 모든 정당들과 다 사이가 좋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보수 우파 정당과 가장 앙숙이다.

사상검증과 극우헤게모니

한국에선 현대 정치사가 말해주듯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압살시켜온 모순이 계속됐다.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극우세력이 스스로 보수라고 칭했고, 또 자유민주주의를 참칭해 왔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조선일보가 보인 언론 왜곡의 역사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공인이 사상 검증을 받아야 하는 이유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가 조선일보에 의해 어떻게 지켜졌는지 살펴보자.

조선일보는 세계 유일무이한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 초기부터 헌정 질서를 문란시켰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장기집권하다가 4·19 혁명에 의해 쫓겨난 독재자를 대한민국의 국부(國富)로 추앙하고, 독재자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지켜주었다. 조선일보는 일본 육군장교 출신이며 남로당원이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게는 그네들처럼 일제의 적자(適者)라는 정실주의에 입각해 사상 검증을 면제해 줌으로써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빛내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유신독재에 대해 “비상사태는 민주제도의 향상과 발전을 위하여 하나의 탈각이요 시련이요 진보의 표현임을 의심치 않는다”고 말해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지켜주었다. 드디어 광주에서 ‘어슬렁대던 폭도’(김대중 당시 기자의 표현. 현 주필)들을 진압한 전두환씨를 차기 대통령으로 추대한 ‘전군 지휘관 회의’에 관한 보도를 접하고 일반 국민들은 크게 안도했을 것이다. 이로써 조선일보는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지켜낸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독재 정권을 가져본 적이 없는 셈이다. 조선일보가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위해 사상을 검증해준 덕이 참으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일보가 보여주는 역사의 뒤틀림은 프랑스 극우파의 역사관 못지 않은 것이다.

조선일보는 왜 이처럼 극우 헤게모니에 매달리는가. 궁극적인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권력과 부의 계속적인 확대 유지에 있다. 이 목적을 달성키 위한 주무기가 ‘안보상업주의’라는 것인데 지금까지는 아주 잘 먹혀왔다. 안보상업주의는 한국사회에 극우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힘을 주었다. 따라서 극우 헤게모니의 관철은 조선일보의 조직논리 그 자체인 것이다.

지금도 조선일보의 활약은 계속되고 있다. 극우 인사 중 대표격인 정형근 의원과 아주 의견이 잘 맞는다. 김대중 주필의 활약 또한 눈부시다. 그가 최근에 쓴 ‘간첩이 삿대질하는 공안’이라는 칼럼을 보자. 제목부터 무시무시하다. 간첩이 삿대질하는 공안이라! 여기서 간첩이란 서경원 전의원을 말하며, 공안이란 당시 서의원과 김대중씨를 연결시키기 위해 고문을 일삼고 은행 전표를 슬쩍 감춘 공안팀을 말한다. 김주필은 이에 대해 “이유가 어쨌건 상황의 줄거리만 보면 주객이 보따리를 바꿔서 진 것 같다. 우리는 지금 가치관의 전도를 목격하고 있다”고 했다.

‘이유가 어쨌건’이라… 나에겐 그 이유가 제일 중요하다. ‘가치관의 전도’라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상적으로 그리고 마음대로 고문할 수 있었던 3공 때나 5공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라면 말이다. 칼럼은 이렇게 이어진다. “자신의 한이 용공조작과 지역감정이라고 실토한 김대통령은 그 한의 한자락을 풀려다가 거꾸로 김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이 사회에 용공성이 점증하고 있다는 보수적 시각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형국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보수적 시각은 구체적으로 누구의 시각을 말하는 것일까. 국가보안법 개정에 극력 반대하면서 극우 헤게모니 유지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조선일보의 시각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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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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