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의 세계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일찍이 갈브레이스가 설파했던 ‘불확실성의 시대’를 넘어 ‘총체적 불가지(不可知)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변화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도대체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 ‘신동아’는 세계 석학들이 보는 새 밀레니엄 시리즈를 시작한다. 첫 순서는 미래를 꿰뚫는 혜안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가 보는 ‘정보혁명의 미래’다. 2000년에 91세가 되는 피터 드러커 박사는 수많은 거대 기업의 경영 컨설턴트로, 30여 권에 달하는 경영서의 저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원로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러나 현재 엄청난 기세로 기존 틀을 바꾸고 있는’ 전자상거래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자신의 신조어인 ‘지식노동자’의 앞날을 조망하고 있는 이 글은 미국의 유서 깊은 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 최근호에 실린 드러커 박사의 기고문을 전문 번역한 것이다. 》
사람들은 ‘정보 혁명’이라는 실로 갑작스러운 충격을 이제 막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충격은 ‘정보’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이 충격은 ‘인공지능’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의사결정, 정책·전략 수립에 활용되는 컴퓨터나 전산처리 기법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그 충격은 그야말로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으며, 10∼15년 전만 해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도 않았던 전자 상거래(e-commerce)에서 비롯됐다.
전자상거래는 이제 범세계적인 상품과 서비스, 그리고 놀랍게도 전문 직업까지 유통시키는 하나의 주요―아마 최종적으로도 가장 중요한―창구가 됐다. 이 전자상거래는 ▲경제, 시장, 그리고 산업구조 ▲상품과 서비스 및 그 유통 ▲소비계층의 세분화, 소비자의 가치관, 소비행위 ▲직업과 노동시장 등에 심오한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하지만 전자상거래가 가져온 가장 큰 충격은 우리 사회와 정치,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각과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보는 시각이 준 충격 아닐까?
동시에, 예측 불가능한 신종 산업이 빠른 속도로 등장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미 생명공학이 모습을 드러냈고 어류양식도 등장했다. 앞으로 50년 안에 어류양식은 바다에서 수렵·채취 경제를 영위해가는 인간의 현재 지위를 ‘해양 목축업자’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약 1만년 전에 이와 비슷한 혁신이 땅 위에서 수렵·채취 경제 활동을 하던 인류의 조상을 경작자나 목축업자로 바꾸어놓은 것을 상기해 보라.
난데없이 신기술이 등장해서 신흥 주력산업군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현재로서는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추측하기조차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신기술들이 머지 않아 등장할 것이라는 개연성은 아주 높다. 아마 확실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가운데 어떤 기술도―그리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한 어떤 산업도― 컴퓨터나 정보기술과는 별반 관계가 없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생명공학이나 어류양식에서 보듯이 나름의 독특한, 기대도 않던 기술로부터 등장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건 단지 예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1455년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 혁명 이후 지금까지 500여년 동안 신기술에 바탕을 둔 몇몇 ‘혁명’들이 걸어온 궤적을 정보혁명도 따라 가리라는 가정 아래 내린 예측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보혁명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산업혁명과 비슷한 과정을 밟으리라는 가정이다. 실제로 지난 50년 동안 정보혁명은 산업혁명이 초창기에 보여준 것과 정확하게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산업혁명과 정보혁명
그런 점에서 정보혁명은 현재 1820년대의 산업혁명 단계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1820년대는 제임스 와트의 개량형 증기기관(1776년에 처음 제작됐다)을 산업 활동, 구체적으로는 방적기계에 처음 응용한 1785년에서 약 40년이 지난 시기다. 이 증기기관이 1차 산업혁명을 일으켰듯이 컴퓨터는 정보혁명의 방아쇠가 됐고, 나아가 그 상징이 됐다.
오늘날 사람들은 경제학 사상 정보혁명만큼 빨리 진행되면서 큰 영향을 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산업혁명도 (지금의 정보혁명과 같은 발전 단계에서 보면) 정보혁명만큼 빠르게 진행됐으며, 더 크지는 않더라도 정보혁명에 비견할 만한 영향을 주었다. 산업혁명은 18세기와 19세기 초에 가장 중요한 소비재인 섬유 생산분야에서 시작돼 지체없이 대다수 제조업 부문을 기계화시켰다.
정보혁명의 기본 구성요소인 마이크로 칩의 가격은 18개월마다 절반으로 떨어진다는 ‘무어의 법칙’이 있다. 1차 산업혁명으로 생산이 기계화된 제품들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면직물 가격은 방직을 기계화한 18세기부터 50년 사이에 90%나 떨어졌다. 같은 기간에 면직물의 생산은 영국에서만 150배 증가했다. 섬유가 1차 산업혁명의 초창기를 대표하는 상품이긴 하지만, 종이 유리 가죽 벽돌 등 거의 모든 주요 상품 생산에 기계의 힘을 빌리게 됐다.
기계화는 소비재에 그치지 않았다. 철과 철물―예를 들어 철사― 생산도 섬유산업과 같이 빠른 속도로 기계화해 증기기관으로 움직였으며, 비용과 가격 그리고 생산에서 직물과 같은 경로를 밟았다. 나폴레옹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에는 유럽 전역이 대포를 만드느라 증기기관을 가동했다. 증기기관에 힘입어 대포 제작이 이전보다 10~20배 빨라졌고, 비용도 3분의 2 이상 떨어졌다. 이 무렵 미국에서는 엘리 휘트니가 장총 생산을 기계화해서 대량생산에 성공했다.
산업혁명 초기의 40~50년 동안 공장과 ‘근로계층’의 수가 증가했다. 공장과 근로계층은 1820년대 중반까지도 영국에서조차 그 수가 미미해 통계상 별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뇌리에는 그들이 이미 주도세력으로 자리잡았으며, 얼마 안 가서는 정치적으로도 주도세력이 됐다.
미국에 공장이 들어서기 전인 1791년 알렉산더 해밀턴은 자신의 저서 ‘제조업에 대한 보고서’에서 산업국가의 도래를 예견했다. 이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1803년 프랑스 경제학자인 장-밥티스트 세이는 산업혁명이 ‘기업가’를 낳아 경제학을 새로 써야 한다는 것을 간파했다.
산업혁명이 사회에 끼친 영향은 공장이나 근로계층의 탄생뿐만이 아니다. 사학자인 폴 존슨이 자신의 저서 ‘미국인의 역사’(1997)에서 지적했듯이,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한 섬유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은 노예를 부활시켰다. 사실상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노예가 조면기의―이것도 얼마 안 가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하게 된다―기계소리와 함께 되살아난 것이다. 조면기를 돌리기 위해 엄청난 수의 저임금 노동자가 필요했고, 노예 양성은 이후 몇십 년간 미국에서 가장 수지맞는 사업이었다.
산업혁명은 가족관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핵가족은 산업혁명 훨씬 전부터 이미 하나의 생산단위였다. 밭이나 가게에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이 함께 일했다. 그러나 공장은 사상 처음으로 노동력과 일거리를 가정 밖으로 끌어내 작업장으로 옮겼고 다른 가족 구성원은 집에 남게 됐다. 배우자가 공장 근로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특히 산업혁명의 초창기에는 아동들이 공장 근로자가 되면서 부모가 집에 남는 경우가 많았다.
소위 ‘가족의 위기’라는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 위기는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해 산업혁명과 공장제도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요 쟁점이 됐다. 노동과 가족의 결별, 그리고 그 양자가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은 찰스 디킨스의 1854년 작 ‘힘든 나날’에 잘 묘사돼 있다.
혁명의 견인차, 철도
이러한 영향에도 산업혁명의 첫 반세기는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상품들의 생산을 기계화하는 것에 불과했다. 생산은 대폭 늘어났으며 비용은 대폭 줄어들었다. 산업혁명은 소비자와 소비재를 동시에 창출해낸 것이다. 하지만 소비재인 상품 자체는 이미 존재하던 것들이었다.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은 생김새가 각양각색인 전통 제품들과는 달리 모양이 똑같고, 아주 뛰어난 장인이 만든 제품이 아닌 한 흔히 있었던 결함이 더 적다는 것 외에는 차이가 없었다.
단 하나 눈에 띄는 예외라면, 산업혁명 초창기 50년 사이에 등장한 새 상품 증기선(蒸氣船)을 들 수 있다. 1807년 로버트 풀턴이 실용화한 첫 증기선의 등장 후 30∼40년 동안은 별다른 파장이 없었다. 사실 19세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도 해양운송에는 범선이 증기선보다 더 많이 투입됐다.
한편 1829년에 철도가 등장했다. 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발명품이 등장해 경제·사회 그리고 정치에 영구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돌이켜보면 철도의 발명이 왜 그렇게 늦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탄광에서 수레를 옮기기 위해 궤도를 사용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 궤도 위에서 수레를 움직이는 데 사람이 밀거나 말이 끄는 것보다 증기기관으로 돌리는 것이 편하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하지만 광산에 부설된 궤도는 철도로 발전하지 못했다. 철도는 아주 독자적으로 개발된 것이다. 애초에 화물 운반을 위해 고안한 것도 아니었다. 철도는 상당 기간 승객수송 수단으로 간주됐다.
화물 운반에 철도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30년이 지난 뒤 미국에서였다(사실 1870년대와 80년대에 막 서구화한 일본은 승객수송용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영국 토목 기술자들을 초빙했다. 지금도 일본의 철도에는 화물운반을 위한 시설이 없다). 이 화물용 철도가 실제 개통되기 전까지는 화물운송 철도는 기대 밖이었다.
하지만 화물용 철도가 등장한 후 채 5년이 지나지 않아 서방세계는 역사상 가장 큰 붐, 즉 철도건설 붐에 돌입했다. 1850년대 경제학사상 가장 끔찍했던 불황이 몰아칠 때까지 유럽에서 철도붐은 30년 동안 계속됐다. 오늘날의 간선 철도망 대부분이 이 무렵에 건설됐다. 철도건설 붐은 미국에서는―그리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시베리아, 중국 등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도―이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 30년 정도 더 이어졌다.
철도야말로 산업혁명을 일으킨 혁명분자였다. 경제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심리적 거리감’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은 진정한 이동성을 갖게 됐고, 사상 처음으로 서민들에게도 지평선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심리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이 시대 사람들도 깨달았다. 전환기를 맞은 산업혁명 당시의 사회상을 가장 잘 묘사한 조지 엘리엇의 1871년 소설 ‘미들마치(Middlemarch)’는 이런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의 위대한 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자신의 마지막 역작인 ‘프랑스의 특성’(1986)에서 프랑스를 하나의 문화를 가진 국가로 만든 것은 철도였다고 주장했다. 철도를 건설하기 이전의 프랑스는 서로 고립된 지역의 정치적 집합체에 불과했다. 미국의 서부 개척사에 철도가 한 일은 불문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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