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호

“유언장은 인생의 방학 숙제, 미리 써두고 홀가분하게 살아라”

[특집 | 초고령사회 대한민국, 존엄한 삶과 죽음을 말하다] ‘웰다잉 전도사’ 원혜영 전 의원의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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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렬 기자

    display@donga.com

        

    입력2025-06-0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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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2024년 초고령사회 진입…유례없는 속도

    • 의학으로 죽음 극복할 수 있다는 집단 착각에 빠져

    • 준비 없이 죽음 맞이하면 혼란과 갈등, 낭비 초래

    • 자녀 간의 불화를 막는 백신으로 유언장 필요

    • 추모 부족한 장례 문화, 고인 기리는 방식 고민해야

    “만약 돈이 무한히 많다면 그 가치를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수중에 5만 원밖에 없다면 돈을 소중히 여기기 마련이다. 돈이 귀중한 이유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은 유한하다’라는 사실, 즉 죽음을 받아들이면 삶이 새롭게 느껴진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도 하게 된다. 유언장을 써본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은 삶의 자세가 다르다.” 

    원혜영(74)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는 4월 2일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1981년 식품 회사 풀무원을 창업한 그는 6년간의 기업인 생활 끝에 정치권에 투신, 부천시장과 5선 의원 등을 지냈다. 2019년 21대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한 원 대표는 ‘웰다잉 전도사’로 인생 3막을 열었다. 국회에서 ‘웰다잉 문화 조성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만들고, 연명의료결정법을 통과시킨 경험이 계기가 됐다. 연명의료결정법은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본인 또는 가족의 뜻에 따라 연명치료를 받지 않고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이다. 국회미래연구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원 대표는 “‘법이 잘 정착되도록 애프터서비스(AS) 차원에서 봉사활동을 하자’고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10년 뒤 1500만 노인 시대 온다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는 4월 2일 ‘신동아’ 인터뷰에서 “세상 모든 일은 준비가 필요하며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는 4월 2일 ‘신동아’ 인터뷰에서 “세상 모든 일은 준비가 필요하며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한국은 2024년 12월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가 20% 이상)에 진입했다. 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가 14% 이상)에 진입한 지 불과 7년 만으로 유례없는 속도다. 독일(37년), 프랑스(39년)는 물론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13년)과도 비교가 안 된다. 원 대표는 “죽음에 대해 사회적 고민이 축적되지 않은 상황에서 초고령사회가 도래해 걱정”이라며 “세상 모든 일은 준비가 필요하며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고 말했다. 다음은 원 대표와의 일문일답.

    ‘1000만 노인 시대’다.

    “10년가량 지나면 ‘1500만 노인 시대’가 도래한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초고령사회의 주력 부대가 될 것이다. 노인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실천하는 사회는 활력과 품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은 별다른 준비 없이 초고령사회를 맞이했다. 1000만 노인 시대라지만 관련 정부 부처마저 없다. 보건복지부 일부 과에서 관련 정책을 담당할 뿐이다. 지금이라도 웰다잉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웰다잉 문화가 왜 중요한가.

    “초고령사회 대책은 대부분 ‘돈 문제’에 맞닥뜨린다. 노일 일자리부터 노령연금까지 모두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반면 웰다잉 운동은 ‘자기 실천’의 성격이 강하다. 교육·홍보비만 들 뿐 재정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필요한 연명치료, 상속 분쟁 등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상당하다. 가령 노인 10만 명이 ‘불필요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조 단위의 사회적 비용이 줄어든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지만 무시할 수 없다. 차기 정부에서 관련 문제를 중요하게 검토했으면 한다.”

    어쩌다 웰다잉에 관심을 가지게 됐나.

    “10년 전에는 상황이 더 심각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원치 않은 사람이 많았는데, 정작 법이 치료를 거부할 수 없는 방향으로 설계돼 있었다. ‘환자가 연명치료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여야 의원 40여 명을 규합해 연구 모임을 만들었다. 덕분에 2016년 연명의료에 대해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연명의료결정법을 제정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뜻대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론적일 수 있는데 잘 죽는 것은 왜 중요한가.

    “30~40년 전만 하더라도 환갑을 넘긴 사람이 적었다. 늙으면 자연스레 죽음을 맞이했고, 자녀들에게 나눠줄 재산 역시 적었다. 장례 역시 집안이나 마을 관습을 따랐다. 의학 발달과 함께 수명이 길어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연명치료가 일상화됐고, 그 과정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 역시 관행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친지가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심적, 육체적, 경제적 부담을 겪고 있다.” 

    자녀 입장에서 부모가 위독하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렇다. 노쇠해 오늘내일하는 어르신을 일단 응급실로 보내는 이유다. 환자의 가족은 의사에게 ‘어떤 조치를 해도 좋으니 아버지를 살려만 달라’고 말한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죽음 자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한국 사회를 보면 ‘현대 의학을 통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집단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얼마나 허망한 기대인가. 사람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죽는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 서울대병원 응급실을 대상으로 한 통계에 따르면 대다수의 사람이 임종 직전까지 각종 치료를 받다가 생을 마감한다.”

    유신혜 서울대병원 교수·김정선 세종충남대병원 교수 연구팀이 2018~2020년 서울대병원 응급실에서 질병으로 사망한 성인 환자 22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임종 전 24시간 동안 중증 치료를 받는 비율은 39.6%였다. △인공호흡기(36%) △심폐소생술(27.5%) △혈액 투석(0.5%) 등이다. 환자 가운데 92.3%가 혈액검사를 받았다. 이를 두고 원 대표는 “더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의료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평가했다.

    해외는 다른가.

    “싱가포르는 응급실을 찾은 노인의 10%만이 중환자실로 옮겨진다. 90%는 ‘늙고 쇠약해진 탓이니 편히 쉬시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다. 한국은 응급실에 실려 간 환자의 약 70%가 중환자실로 옮겨진다고 한다. 사실상 대부분이 환자를 중환자실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은 전체 사망자 가운데 30% 수준이 병원에서 눈을 감는데, 한국은 70%대다. 한국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문제로 여기는 인식이 만연하다. 결국 수많은 사람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으며 고생하다 세상을 떠난다.”

    100세 시대 축복 아냐…건강한 장수가 복

    100세 시대를 마냥 축복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현실적으로 그렇다. 장수 시대라지만 유병 기간 역시 길어졌다. 게다가 노인들이 앓는 병은 사소하지 않다.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병이 대다수다. 건강한 장수가 복이지 단순히 오래 산다고 축복이 아니다. 특히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으며 고생만 하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많다.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하면 막대한 혼란과 갈등, 낭비만 겪게 될 뿐이다.”

    웰다잉문화운동은 출판, 생애보 쓰기, 유언장 작성 상담, 정책 세미나 등 웰다잉 문화 확산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웰다잉문화운동 홈페이지 갈무리

    웰다잉문화운동은 출판, 생애보 쓰기, 유언장 작성 상담, 정책 세미나 등 웰다잉 문화 확산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웰다잉문화운동 홈페이지 갈무리

    한국 사회에서 웰다잉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는 없나.

    “고령화가 너무나 빠르게 이뤄졌다는 점이다. 서구 국가들은 20세기 초중을 기점으로 서서히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는데, 한국은 압축적으로 진행됐다. 초고령사회 진입이 얼마나 큰 파장을 미칠지 숙고하지 못한 상황에서 현실로 닥쳐버린 것이다.”

    원 대표는 웰다잉을 실천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으로 △유언장 쓰기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장례 방법 결정 등을 꼽았다. 그는 “사람들은 각종 보험에 가입하는 등 돈을 써가며 ‘만일의 사고’에 대비한다”며 “유언장은 별도 비용 부담 없이 ‘반드시 일어날 일’(죽음)에 대비할 수 있는 장치”라고 평가했다.

    “유언장은 부자들이나 쓰는 것”이라는 인식이 많다.

    “사람들에게 ‘유언장을 써두라’고 권하면 제일 많이 듣는 답변이 ‘재벌이나 유언장을 쓰지, 나는 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라 괜찮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속 분쟁은 이른바 집 한 채 있는 가정에서 벌어진다. 1년에 벌어지는 상속 소송이 5만 건을 넘어섰다. 가족의 죽음을 겪은 서너 가족 가운데 한 곳은 상속 문제로 법정을 찾는다는 의미다. ‘자녀들끼리 공평하게 재산을 나누면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원 대표는 “이혼소송이 많다지만, 상속 소송 역시 못지않다”며 “오히려 상속 문제로 남남이 된 가정이 이혼소송을 겪는 가정보다 더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법원행정처의 ‘2023 사법연감’에 따르면 ‘상속에 관한 사건’은 5만7567건으로 이혼소송(2만7501건·1심 접수 기준)을 뛰어넘었다. 원 대표가 “자녀 간의 불화를 막는 백신으로 유언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언제 유언장을 쓰면 좋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특히 건강할 때 유언장을 써둬야 한다. 유언장 작성을 미뤘다가 자칫 알츠하이머병에라도 걸리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유언장은 방학 숙제와 유사하다. 방학 숙제를 미리 해놓으면 방학을 홀가분하게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숙제를 끝까지 미루다 벼락치기를 하고, 최악의 경우 때를 놓쳐 선생님께 혼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유언장, 장례의향서를 일찌감치 써둘 필요가 있다. 유언장은 인생의 방학 숙제다. 미리 써두고 홀가분하게 살아라. 유언장을 쓴다고 죽음이 앞당겨지는 것도 아니다.”

    장례 문화, 추모보단 조의에 가까워

    “장례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는데. 

    “1인 가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세 가구 가운데 한 곳은 1인 가구다. 10년 안에 1인 가구의 비중이 40%를 넘어설 전망이다. 혼자 살다가 죽으면 장례를 누가 치르겠는가. 평소 왕래가 적던 자식 혹은 조카가 텅 빈 빈소를 지키는 게 과연 아름다울까. 장례를 치르지 말자는 소리가 아니다. 다양화하자는 얘기다.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각자 추도사를 읽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추모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한국의 장례식에는 추모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사실상 그렇다. 조의를 표하는 것이지, 추모를 한다고 보긴 어렵다. 장례식을 한번 가보라. ‘고인은 연세가 어떻게 되나’ ‘98세다’ ‘장수하셨다’ ‘마지막 순간 큰 고통 없이 가셔서 다행이다’ 등의 대화가 전부다. 90살쯤 죽으면 주변 친구들 역시 이미 죽거나 건강이 나빠져 조문하기 어렵다. 결국 고인에 대해 잘 모르는, 자녀의 지인 중심으로 장례식장이 채워지기 마련이다.”

    인터뷰 막바지 원 대표는 “한국에서 이례적으로 자리 잡은 웰다잉 문화가 있다”며 화장을 꼽았다. 그는 “20~30년 전만 하더라도 상주에게 ‘화장하느냐’고 물어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화장이 대세다”고 말했다. 원 대표에 따르면 그 계기를 만든 사람은 선경그룹(현 SK그룹) 창업자인 고(故) 최종현 회장이다. 1998년 타계한 최종현 회장은 평소 유지에 따라 화장을 치렀다. SK는 2010년 충남 세종시 은하수공원에 500억 원을 들여 장례문화센터를 조성해 세종시에 기부했는데, 이 역시 “화장시설을 지어 사회에 기부하라”는 최 회장의 유지에 따른 것이다. 원 대표는 “한국 사회에 웰다잉이 자리 잡기 위해, 게을렀지만 열심히 노력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웰다잉을 전파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겠다”고 말했다. 



    최진렬 기자

    최진렬 기자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주간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재미없지만 재미있는 기사를 쓰고 싶습니다.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1인분의 몫을 하는 사람이 되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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