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은주씨(34)가 한국 축구계 처음으로 여성 심판이 됐을 때 사람들은 ‘여자도 축구심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뒤이어 그녀가 국제 여성 축구심판 자격증을 따내자 이번에는 ‘능력이 있긴 있나 보다’며 ‘대견해’했다. 그러나 남자심판들의 아성인 프로축구계까지 넘보는 순간 ‘어떻게 여자가…’라는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런 눈들은 그라운드의 그녀를 그저 한 사람의 심판으로 봐주지 않았다. 자리를 잘못 찾아든 이단아 취급을 하기도 했고, 하루라도 빨리 ‘여자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은 빗나갔다. 그녀는 오히려 대담하고 공정한 판정으로 ‘칼심판’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 것이다.
‘칼심판’의 명성을 얻기까지 그녀는 기꺼이 축구계의 ‘모난 돌’ 역할을 떠맡았다. 규정보다는 관행이 횡행하는 그라운드에서 선수들 코앞에 여지없이 규정을 디밀었고, ‘손대지 않던’ 스타급 선수를 퇴장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가 무슨 특별한 존재거나 또는 튀려고 기존 관행에 따르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융통성이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구요. 그저 배운 대로 실천할 뿐이고 우리 축구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발 여자라서 어떻다는 식으로는 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전 그냥 규정에 충실한 축구심판일 뿐입니다.”
그녀는 축구얘기를 할 때면 ‘습니다’ 체를 유난히 많이 쓰며 말 한마디 한마디를 무척 신중하게 내뱉었다. 아마도 프로축구계 최초이자 현재로서는 유일한 여성심판이라는 이유로 늘 관심의 초점이 되는 자신의 위치를 의식한 조심성이 몸에 밴 때문일 것이다.
육상, 배구, 하키, 그리고 축구
짧은 커트머리, 검은 심판복, 크고 튼튼한 체격조건까지, 언뜻 봐서는 그녀를 남자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특히 그라운드에서는 남자심판과 분간이 안 되는 탓에 축구연맹 측에서 “머리를 기르라”고 종용할 정도. 이쯤 되면 너무나 ‘남성적인 여자’라 남자들의 세계에 뛰어든 것으로 이해하고 싶겠지만 천만의 말씀. 그녀가 축구심판이 된 것은 유난히 남성적이어서도, ‘금기’의 세계를 향한 도전욕이나 모험심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순전히 축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가 축구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 선수로 입문하기에는 좀 늦은 스물다섯살 때였다. 타고난 운동광이었으나 대학 졸업 후 한국사회체육센터에서 강사로 일하며 운동에 대한 갈증을 달래고 있을 즈음이었다. 대학에서 여자축구팀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축구는 해본 적도 없었지만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판단이 섰고 서둘러 이화여대 대학원에 체육 특기생으로 진학했다.
강남초등학교 시절에는 단거리와 던지기를 주종목으로 하는 육상선수로, 세화여중에서는 배구선수로, 그리고 인천체고와 서원대에서는 필드하키 선수로 활약하며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었지만 축구만큼 그의 적성에 딱 들어맞는 운동은 없었다. 북경아시안게임 여자축구 국가대표로 발탁돼 센터포워드로 활약하는 동안 그녀는 ‘여자 차범근’으로 불릴 만큼 열정적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만사가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너무 늦은 나이에 시작한 선수생활은 ‘행복’을 그리 오래 보장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나 현역으로 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조금씩 불안해졌지요. 특히 국제대회에서 외국선수들을 만나면서부터 그 불안이 더 심해졌습니다. 우리는 운동이 곧 직업인데 외국 선수들은 본업을 따로 갖고 있으면서 취미활동처럼 선수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특히 변호사인 어느 하키선수가 제게 ‘직업이 뭐냐?’고 물었을 때 충격이 컸죠. 운동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내가 초라하기만 했습니다.”
처음부터 축구심판으로 장래를 설계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은 불안한 마음에 ‘마치 환장한 사람처럼’ 온갖 자격증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체육정교사, 스포츠마사지사, 사회체육지도자, 수영강사…. 이후 취득한 심판자격증까지 합치면 그가 가진 자격증은 무려 19개에 달한다.
온갖 자격증을 섭렵한 뒤 이화여대 대학원 축구부 코치를 맡으면서 비로소 심판자격증에 욕심이 생겼다. 특히 1급 심판이 되려면 2급 심판으로 5∼7년 동안 경력을 쌓아야 하는 데 반해, 국가대표선수 출신에게는 3개월의 합숙훈련과 시험통과만으로 바로 1급 자격증이 주어진다는 규정이 그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그러나 순전히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강한 반발에 부딪혀야 했다. 여자는 심판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지만, ‘축구심판은 당연히 남자’라는 인습이 그녀를 가로막았던 것. 93년 심판 자격증 시험에 응시한 사실을 두고 주변 사람들은 “여자가 어떻게 축구심판이 되느냐”며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편견을 무색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꼭 자격증을 따내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솟았고, 그는 결국 해냈다.
금기에 도전하다
그리고 97년, 이번에는 1급 심판자격증을 획득한 지 만 3년이 경과해야 응시자격을 주는 국제심판 자격증에 도전장을 냈다. 그 사이 전국대회 이상의 경기에서 주심으로 10게임 이상, 선심으로 20게임 이상을 뛰어야 한다는 응시자격을 갖추고 영어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으로 어학연수도 다녀왔다.
까다롭고 힘들기로 유명한 체력테스트에는 평소 꾸준히 해온 10㎞ 달리기와 2∼3시간의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대비했다. 그리고 축구규정 필기시험을 위해 규정집을 아예 달달 외울 정도로 공부했다. 그 결과 그녀는 문턱 높은 국제심판자격증 시험에서 쟁쟁한 외국 심판들을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
“남자들과 경쟁해야 하는 세계에서 여자가 남자만큼만 해서는 절대로 인정 못받습니다. 그래서 국제심판자격증에 도전할 때 1등으로 붙을 각오를 했어요. 아무리 정정당당하게 시험에 합격했어도 여자심판은 못 믿는다는 분위기가 있으니까 아예 월등하게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국제심판자격증을, 그것도 최고성적으로 획득하고 돌아온 뒤에도 한국 축구계는 그녀를 선뜻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한국 최초의 국제여성심판’이 탄생했다며 떠들썩하게 보도하는 데 반해 심판세계에서는 어쩐지 자신을 경계하는 듯한 분위기를 느꼈다.
“1급 심판자격증으로 아마추어에서 활동할 때는 선배님들이 저를 꽤 예뻐하셨거든요. 여자가 무슨 축구심판이냐고 하던 분들도 막상 제가 뛰는 모습을 보고는 인정하는 분위기였죠. 그런데 국제심판자격증을 따고 난 후에는 나이도 어리고 경기경력도 많지 않다는 이유로 뒷말이 좀 많았어요. 경쟁상대가 아니라고 여길 때와는 달라진 태도를 보고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동등한 자격을 갖췄다는 증거로 받아들였습니다.”
애초 남자들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기에 ‘꾹 참고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하자’며 주변의 편치않은 시선들을 받아냈다. 그러나 심판으로서 그녀의 위치가 확고해질수록 주변의 반발은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99년 2월 프로심판자격증에 도전해 또다시 ‘최초’라는 타이틀로 프로심판이 된 이후, 그녀는 더 힘든 고비를 맞아야 했다.
98년도 베스트 심판으로 뽑힐 만큼 아마추어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그녀가 프로심판에 도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10개 구단 구단주들과 축구연맹 관계자들이 만장일치로 프로심판 자격을 인정했는데 그녀의 존재는 쉽게 용납되지 않았다. 홍일점으로 특혜를 받았다느니, 경력이 부족해 실력을 믿을 수 없다느니 하는 뒷말들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런데 여기서 그만두면 또 어떤 말들이 오갈지 눈에 뻔히 보이더라구요. ‘그렇지, 역시 여자는 안 돼’ 하는 편견만 더 심어주는 꼴이 될 게 틀림없었어요. 나 혼자만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야, 임은주. 이런 것도 못 견디면 장차 뭘 하겠다는 거야’ 하면서 순전히 오기로 버텼어요.”
축구판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한편으로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선배 심판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했다. 최소한 예비심판코스 1∼2년, 부심 등의 수순을 거쳐 전임심판으로 입문한 선배들과 달리 프로심판 계약 당시 바로 전임심판으로 영입된 자신이 ‘특혜’를 받은 것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추어에서 인정받은 경기운영 능력, 국제심판 경력 등이 참조된 것이지만 어쨌든 예비코스를 거치지 않은 것은 파격적인 대우였던 셈이다.
“사실 전 프로심판에는 별로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가는 게 당연한 순서니까 프로심판이 되기로 한 거죠. 그리고 예비코스도 당연히 거치는 것으로 알고 있었구요. 그런데 프로심판 계약 당시 심판위원장님이 예비코스 없이 바로 전임으로 계약하자는 거예요. 한동안 고사했습니다. 열 자리밖에 없는 전임심판 자리 중 하나를 제가 차지하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다른 남자선배들에게 피해가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예비심판 자리를 달라, 전임은 절대로 못 한다고 버티다가 집까지 찾아오신 심판위원장님께 설득당한 겁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는 저보다 평균 열 살씩 많은 선배님들이 어렵게 얻은 자리를 비교적 쉽게 얻은 셈이니까 미움을 살 만하다고 이해했어요.”
그때부터 친선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뒤에서 헐뜯고 대놓고 그녀를 미워하는 선배들에게까지도 모든 자존심을 접어놓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중인 99년 여름 미국에서 치러진 여자월드컵에 심판으로 참가한 것을 계기로 심판계 내에서도 그녀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한국 축구 100년 역사상 월드컵 주심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비록 막판에 번복되기는 했어도 여자심판으로는 세계 최초로 결승전 주심에 내정되기도 했다. 결승전에 중국팀이 올라간 탓에 같은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결승전 주심 자리를 내놓아야 했던 것.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세계 축구계가 ‘한국의 임은주 심판’을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이 충분히 증명된 셈이었다.
“축구판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그것도 늘 내 입지를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첫 번째 케이스라는 사실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어요. 하다못해 옷 갈아입는 데도 ‘여자’라는 사실이 불편했으니까. 보통 옷은 심판실에서 갈아입는데 우리나라에 여자심판이라는 존재가 아예 없었기 때문에 운동장에 나가도 여자 심판실이나 여자 탈의실이 따로 없습니다. 아마추어 심판 때는 혼자 화장실에서 갈아입거나 차창을 진하게 코팅하고 그 안에서 갈아입곤 했죠. 지금은 남자심판들과 워낙 친밀해져서 제가 있는 자리에서도 남자심판들은 편하게 갈아입어요. 그리고 제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는 운동장 점검을 하느라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해주구요. 지금 아마추어에서 활동하는 후배 여성심판들은 여전히 옷 갈아입는 문제가 제일 힘들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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