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각하! 왜 후계자를 세우지 않습니까?”

3선개헌 담판 그리고 박정희와의 결별

  • 이만섭 새정치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새천년 민주신당 창당준비위공동위원장

    입력2007-01-26 11: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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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때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동생을 잃은 일이다. 지금까지도 어머니와 내게 한을 심어준 사건이다.

    본래 나에게는 천섭(千燮)이란 이름의 3년 아래 동생이 있었다. 학교도 같았으니 난 3학년 때부터 동생과 함께 통학한 셈이다.

    그러나 내가 5학년 때, 그러니까 녀석이 2학년 때였다. 교실에서 녀석이 좀 떠들었던 모양인데 젊은 일본 선생이 녀석을 몇번 업어치기로 마루바닥에 때려눕혔다는 것이다. 그게 치명적이었다. 어린 동생은 그만 머리를 크게 다쳐 병원에 가야 했다. 결국 뇌를 다쳐 시름시름 앓다가 대구 동산병원(현 계명대 부속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난 어린 동생에게 잔인한 짓을 한 일본인 선생을 증오하고 한을 품었다. 겨우 초등학교 5학년생인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비애’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큰 충격이었고 그 당시 땅을 치고 오열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내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형제가 2남 1녀가 됐다.

    일본인에게 어린 동생을 빼앗긴 내가 민족학교인 대륜 중학교(당시 6년제)를 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륜학교는 3·1운동 직후 대구 지역의 독립운동가인 홍우일, 김영서, 정운기 선생 등이 설립한 학교였다. 당시 이 분들은 민족운동가이자 저항시인인 상화선생의 서재에 모여 학교설립을 의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상화선생은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셨고,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처음으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민족 정신의 맥을 이은 대륜의 뿌리가 그러했으니 내가 대륜을 다닐 때의 분위기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입학 25일만에 터진 전쟁

    50년 봄 대학입시를 앞두고 고민이었다. 집안이 어려워 서울에서 공부할 형편이 못 됐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고향인 합천으로 돌아가 정미소를 운영던 아버지는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라고 권했다. 그러나 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서울에서 인생에 승부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해 서울행을 고집했다.

    그 해 신입생 선발은 연세대가 가장 빨랐다. 당시 난 정치외교를 통해 나라에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 유일하게 정외과가 있는 연세대를 지원했다. 그리고 24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무난히 합격했다. 아무튼 선생님들 덕에 6월1일 무사히 입학식을 치렀고, 서대문 충정로에 하숙집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나와 함께 입학한 정외과 동기로는 한기춘 전 외국어대 교수, 이종익 전 전주 대 총장, 한배호 고려대 교수, 서대숙 전 하와이대 교수 등이 있으며 같은 해 입학했다가 6·25가 발생하자 바로 군에 입대한 오자복 전국방장관도 동기다.

    그러나 내 서울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입학 25일 만에 동족상잔의 불행한 전쟁이 터진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고생은 다음 날 곧바로 시작됐다. 28일 한강다리가 끓어지자 이젠 정말로 모두가 적지에 남게 된 것이다. 게다가 29일부터는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지고 비축해야 할 상황으로 치닫자 하숙집에서는 하숙생에게 밥까지 끊어버렸다. 그날부터 인심 좋고 잘 사는 집에서 하숙한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밥을 먹거나 먹다 남은 누룽지를 얻어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어떻게 매번 신세질 수 있겠는가. 한창 먹어야 할 나이에 눈치를 보다 굶게 되니 나로서는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7월8일 결국 정외과 친구인 김경덕군과 함께 고향으로 향했다. 나는 영어사전과 책 몇권만 챙겨 길을 재촉했다. 김군의 고향은 경북 선산군 장천읍이었다.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경기도 이천을 지나 장호원 쪽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그나마 여름이라 다행이었다. 배는 고팠지만, 길가에서 과일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걷다가 눈에 보이는 수박이나 참외를 따먹으며, 우린 무작정 남쪽으로 향했다.

    낙동강까지는 도보로 거의 열흘이 걸렸다. 도중에 민가에 들러 밥도 얻어먹으며 목숨을 부지했지만, 피골이 상접했다. 낙동강 가까이 도착하자, 난 그제서야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음을 느꼈다. 열흘 동안 인민군은 아무 저항 없이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낙동강 근처는 달랐다. 하루 종일 총소리가 끊이질 않는 게 아닌가.

    강 하나만 건너면 안심인데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강건너는 경북 선산 땅이었다. 김군과 나는 날이 밝기 전에 마을 노인이 가르쳐주는 대로 허겁지겁 산을 넘어 마침내 강가에 다다랐고, 마지막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뗏목 위에는 후퇴하는 우리 경찰관도 눈에 띄었다. 김군과 헤어져 대구 집에 돌아오니 그때가 7월18일, 떠난 지 열흘 만에 도착한 셈이었다.

    공사3기생 입교, 임관 직전 퇴교

    정부는 16일 이미 대전에서 대구로 와 있었다. 나를 본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는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간 합천에서 정미소를 경영할 때라 한동안 뵙지 못한 채 보냈다. 당시 대구와 부산을 빼놓곤 거의 모든 지역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8월초 부산에 가보았다. 당시 고려대는 대구에 피란해 있었으나, 서울대와 연세대는 부산으로 피란했었다. 영도에 있는 연세대 가교사에 각보니 도저히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전쟁통에 한가롭게 공부한다는 것도 내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8월22일 국민병 모집이 시작됐다. 나 역시 학도병으로 가야 했다.

    ‘그래, 이왕이면 공군으로 가자. 하늘 높은 곳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또 하늘에서 조국을 지키자.’

    난 즉시 공군사관학교 지원서를 냈고, 시험에도 무난히 합격해 50년 11월1일 진해의 공군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교했다.

    막상 들어가보니 난 학벌이 좋은 편이었다. 대부분 중학교 5·6학년을 다니다 들어온 사람들이었고, 나처럼 대학을 다니다 온 친구는 별로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더러 낯익은 친구가 눈에 띄긴 했지만, 대부분 대구의 학교 후배들이었다.

    나이와 경력 때문에 난 입학식 때부터 학생 대대장으로 활약했다. 당시 공사 3기생들은 무척 우수했다. 전쟁 중이라 교수진도 막강했다. 당시 동기생 중에는 나중에 공군참모총장과 13대 국회의원을 한 김인기씨도 있었다.

    난 성격이 분명하고 활동적이었기에 2학년 때 생도회 격인 ‘오성회(五星會)’를 조직했고, 회장으로 선출돼 생도회를 이끌게 됐다. 현재도 공군 예비역 장교 모임으로 ‘오성회’가 있는데, 뿌리는 당시 내가 만든 ‘오성회’다.

    그러나 하늘에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내 소박한 꿈은 2년 만에 무산되고 말았다. 53년 봄, 모든 기초 훈련을 마친 우리는 본격적인 비행훈련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앞으로 열 달 정도만 견디면, 나도 원하는 조종사가 되어 조국을 지킬 수 있다는 꿈에 젖어 있을 때였다.

    우리는 진해에서 대전의 항공학교로 이동, 비행훈련 이전에 실시하는 마지막 지상훈련을 받게 됐다. 그런데 지상훈련을 마치고 비행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사건이 터졌다.

    우리는 항공병 학교에서 자고 있었는데, 그날 밤 임관을 하루 앞둔 행정장교 후보생들이 유성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와 3기 사관 불침번에게 공연히 시비를 걸어온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술에 취한 행정장교측에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많은 부상자가 생겨, 전시중인 공군에서는 그대로 넘기기에 엄청난 사건이다.

    이젠 열 달만 참으면 임관하게 되는데, 최소한 예닐곱 명은 어쩔 수 없이 처벌 당할 위기였다. 생도회장이었던 나는 고민했다. 그리곤 결심했다.

    ‘비록 현장에 있진 않았지만, 회장인 내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모든 건 내가 책임지고 동료들을 살려야 겠다.’

    결국 나는 혼자 책임을 지고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내가 책임을 지고 희생하겠다는 생각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공사 출신 장교들은 물론 옥만호·주영복·최치곤 등 당시 유명했던 임전 출격 조종사들까지 나의 구명운동에 나섰고, 채용덕 공군참모총장까지도 유치장에 있는 나를 불러 위로했다. 특히 채장군은 내 용기를 대견하게 생각하면서도 안타깝게 여겨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뭐라 해야 할지…. 내가 한평생 조종사 생활을 해왔지만, 이군 같은 성격은 비행기 타면 반드시 죽어…. 대학을 다니다 왔다니 차라리 대학으로 복교해서 공부를 계속하는 게 좋겠어.”

    채장군은 적극적이고 정열적인 내 성격이 비행기 조종사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일사천리로 공군본부에서 군법회의가 진행됐고, 난 결국 퇴교당했다.

    ‘연대 털보응원단장’ 시절

    퇴교당하던 그날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3·4·5기 생도 모두가 두 줄로 도열해 교문까지 날 전송해주었고, 특히 동기생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 했다. 공사에 근무하던 장교·사병·문관, 심지어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까지 나의 퇴교를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의 희생적 퇴교는 같은 진해에 있던 육사에서도 관심거리였다. 듣기로는 강의 중에 교관들이 내 이름을 거명하며, 귀감으로 삼았다고 한다. 아쉽게 공사를 퇴교했지만, 공사 3년을 군복무 기간으로 환산해 법적으로 병역 의무는 다 마치고 공군 이병으로 군복무를 끝냈다. 때문에 난 지금도 사병 제대다.

    집에서 한동안 쉬며 생각을 정리한 난 복학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9월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그 사이 전쟁은 소강 상태에 있었다. 7월엔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됐고, 정부는 이미 환도한 후였다.

    신촌캠퍼스의 분위기는 전시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니 내 눈이 변했을까. 거의 3년간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고된 훈련을 견디던 내가 변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도대체 학생들이 정신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보통 해이해진 게 아니군. 정말 큰 문제다.’

    학생들의 걷는 모습은 물론, 옷차림에다 생활태도까지도 내 눈에는 엉망으로 보였다. 가뜩이나 휴전으로 사회 기강도 다소 해이해지고 있을 때라 더욱 그랬다. 게다가 입학 동기생들은 졸업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난 초조하기도 했지만 학교에 정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에 응원단장을 자처하고,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르고는 학교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때부터 연대 ‘털보 응원단장’이란 별명이 내 뒤를 따랐다. 이 ‘연대 털보’는 옳지 못한 걸 보면 참지 못하는 특유의 성격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난 등교 때면 학교 정문에 서서 차를 타고 오는 학생들은 모두 차에서 내려 걷도록 했다. 교수들도 걸어서 학교에 들어오는데 고관 자제라고, 또 돈 많은 학생이라고 특권을 누릴 수 없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게다가 때가 어떤 때인가.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해 서민들은 ‘보릿고개’를 넘기기도 어려울 때인데, 자가용 등하교라니….

    뿐만 아니었다. 당시 학생들은 서대문에서 신촌역까지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신촌역 앞에서 연세대·이화여대생들에게 줄을 서라고 야단치기도 하고 버스 안에서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호통을 치기도 했다. 때문에 이화여대생들은 특히 나를 무서워했고, 김활란 총장이 백낙준 총장에게 ‘이만섭 학생이 우리 여학생들에게 너무 하는 게 아닌가’하는 항의 편지까지 보냈다고 한다.

    57년 졸업을 앞두고 당시 AP 및 AFP와 특약을 맺고 새로 창간된 동화통신사에 지원, 56년 9월 입사했다.

    처음엔 동화통신사에서 영어경제판을 만드는 특심부에서 근무했다. 이후 정치부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것이 내 인생에서 정치를 접하게 된 시초였다. 때는 3대 국회 후반이었다.

    부정선거 현장 덮치다 깡패에게 몰매

    동화통신사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1년 만인 58년, 난 대학 선배인 이동수 기자(전 동아일보 상무)의 추천으로 동아일보 정치부로 자리를 옮졌다.

    3년간 3·4·5대 국회를 취재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는 58년 5월12일에 실시된 4대 민의원 총선거다. 당시 경북 영일을구에서는 불법과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자유당의 김익노씨가 당선됐는데, 이에 민주당의 김상순씨가 당선 무효 소송을 내 결국 9월19일 재선거가 실시됐다.

    나는 이를 취재하기 위해 영일로 내려갔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재선거는 한마디로 불법이 총동원된 부정선거였다. 손에 흰 붕대를 감은 깡패들은 무리지어 다니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특히 야당측 운동원과 취재기자들에게 공갈·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경찰이 투표소마다 유권자들의 번호표를 일일이 검사한 후 투표를 허락했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무더기 투표·대리 투표·릴레이식 투표 등 온갖 부정이 난무했다.

    투표가 끝나자, 포항 대송초등학교에서 1000여 유권자들과 수십명의 무장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표가 시작됐다. 그러나 유권자는 냉정할 정도로 올바른 투표를 했다. 그토록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해 부정선거가 감행됐는데도, 막상 뚜껑을 열자 처음부터 자유당 공천의 김익노 후보가 민주당의 김상순 후보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미를 감지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표차가 갈수록 벌어지기 시작하자, 개표 작업을 하던 종사원들이 이상하리만큼 느리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결국 날이 새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선거관리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개표 종사원들이 피로하니,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표를 중단합니다.’

    오후 6시로 시간을 잡은 건 뻔한 수작이었다. 어두워야 뭔가 일을 꾸밀 수 있잖은가. 눈치를 챈 야당측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력히 항의하자, 개표 시간이 4시로 앞당겨졌지만 여전히 양측의 긴장감은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4시가 돼도 개표 종사원들은 억지를 부리며 개표를 미루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느니, 또는 쉬어야겠다느니 하면서 미적거리다가 결국 개표는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7시10분경에야 속개됐다. 당시 난 개표장 안팎을 오가며 분위기를 탐색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개표소 바로 옆 교실에 대구 시내에서 주먹 좀 쓴다는 깡패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닌가. 그 두목은 대구사회에서 유명한 김세덕이었다.

    ‘불상사가 나겠구나.’

    나는 직감했다. 개표는 속개됐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다. 투표함을 개봉해 자유당 표와 민주당 표를 분류해 쌓아 놓은 것을 보면 한눈에도 민주당 표가 훨씬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개표중 갑자기 전기가 나가버렸다. 두어 차례 그러더니 세번째는 아예 끊겨버렸다. 난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불이 나가자마자 옆방의 깡패들이 소리를 지르며 개표장으로 난입했다. 그와 동시에 민주당 대변인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표 도둑이야! 표 도둑이야!”

    순간 기자석에 앉아 있던 나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당시 내 나이 스물일곱. 무서울 게 없는 나이였다.

    “야! 이 도둑놈들아.”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서는 민주당 표가 쌓여 있는 곳으로 가 표 더미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표를 감싸안고 엎드린 내 등과 머리 위로 곧이어 깡패들의 주먹과 발길이 날아오기 시작했고, 난 평생에 걸쳐 가장 심한 폭행을 당했다.

    잠시 후 깡패들이 사라지고 장내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개표소 안으로 들어온 경찰은 엉뚱하게도 관람인들과 기자들을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나중에 다시 전기가 들어온 뒤에 보니, 쌓여 있던 민주당 지지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림짐작으로 3600표가 넘는 상당한 분량이었다.

    ‘도대체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난 서글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주위의 기자들도 참담한지 담배만 피워 물고 있었다. 그때 개표 종사원 중 몇명이 기자들에게 사과를 나눠주었다. 분이 머리 끝까지 치민 나는 사과를 개표소 안으로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야! 이 뻔뻔스러운 놈들아. 표 도둑놈들아.”

    개표 결과는 뻔했다. 자유당의 김익노 후보가 300여표 차로 재당선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정의감 앞에는 위협만 도사리고 있었다. 분한 마음을 지닌 채 서울로 올라오니 ‘개표 방해’라는 선거법 위반 혐의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병옥 박사 비서관인 조승만씨로부터 연락이 와 가보니, 조박사가 내게 귀띔을 해주었다.

    “조금 전 이기붕씨 집에서 자유당 간부회의가 열렸는데, 자네를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키로 했다네. 그러니 며칠간 숨어 지내게.”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표 도둑놈은 가만 놔둔 채. 불의를 참지 못한 내겐 사과 던진 걸 가지고 ‘개표방해죄’를 적용시키다니. 그러나 구속까지는 되지 않았다. 친구와 친척집으로 피신해 있는 동안 동료 정치부 기자들이 항의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된 것이다. 당시 깡패들에게 심하게 얻어맞은 것이 지금도 허리에 신경통으로 남아 있다.

    58년 12월24일, 자유당 정권이 국민들로부터 완전히 외면당하게 되는 이른바 ‘보안법 파동’이 있었다. 나는 사건 현장에서 이를 생생하게 지켜봤다.

    ‘보안법 파동’이란 자유당 정권이 58년 12월24일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철저하게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신(新)국가보안법’을 제안하면서 발생했다.

    그러나 잘 따져보면 문제가 많았다. 이미 48년에 제정된 국가보안법이 있는데도 새로운 법을 제정한다는 건 정권 연장을 위한 술수에 불과했다. 기존 법률로는 정권 유지에 어려움이 있기에 더 강력한 법을 끌어들이려는 수법이었다.

    당연히 야당은 “경찰국가를 만들려는 음모” 또는 “관제 공산주의자를 양산하려는 악법”이라며 범국민 저지 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그날은 야당인 민주당이 5일째 의사당내에서 농성을 벌이던 23일 저녁이었다. 평소처럼 저녁을 먹은 뒤 민주당의 농성을 취재하던 중이었다. 국회총무과에 다녀오는데 국회총무과 창문을 통해 직원들이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창문 밖으로 나르고 있는 걸 목격했다.

    순간적으로 수상하다고 판단, 밖으로 나가 보니 서류뭉치였다. 뭔가 음모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 사이 서류뭉치는 검은 지프에 실렸고, 곧 출발할 태세였다.

    난 황급히 기자실로 달려가 마침 그곳에 있던 이원홍 기자(李元洪·전 문공부 장관)를 불러내 영업용 택시를 타고 지프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역시 문제가 있었다. 서울역 앞을 지나친 그 수상한 지프는 한강다리와 노량진, 영등포를 거쳐 인천 쪽으로 달리더니 부평경찰전문학교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우리는 택시를 대기시킨 채 밖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30분이 지나도 지프가 나오지 않아, 일단 서울로 돌아와 알아보기로 했다. 서울에서 보충취재를 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그날 밤 전국의 무술경찰관들을 긴급히 국회 무술경위로 특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싣고나간 서류는 이력서 등 채용에 필요한 서류임이 분명했다.

    보안법 파동, 끌려나가는 의원들

    우리는 곧 경향신문의 정종식 기자(鄭宗植·전 연합통신 사장)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다음날 아침 조간에 이를 보도해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국회 특채 무술 경위의 동원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은 너무 약했다. 24일 새벽 나는 전국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 300여명을 모아 국회 경위 옷을 입혀 덕수궁에 집결시킨 것을 확인했다. 이 사실은 당시 국회사무차장 비서관이던 연세대 정외과 동문이 귀뜀해 준 것이었다.

    나는 조병옥 박사를 찾았다. 조박사는 당시 본회의장 뒤 별관 의무실 2층에서 민주당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가다가 계단 밑에서 마주친 치안국 특수정보과 국회 담당은 은근한 협박조로 말했다.

    “이형이 지금 무엇 때문에 조박사를 찾아가는지 알고 있소. 지난번 영일 선거 때도 문제가 됐다 살아났는데, 이번에는 정말 몸조심해야 할 거요.”

    그러나 그렇다고 내 의지를 꺾을 수는 없기에 계단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소리쳤다.

    “큰일났습니다. 지금 덕수궁에 무술 경위 300여명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 아침이 되면 그들이 본회의장으로 난입할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쫓겨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농성하던 침구를 치우고 본회의장을 깨끗하게 정리한 뒤, 의사진행 발언을 얻어 시간을 끄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 언론에서 무술 경위 급조 등 자유당의 음모에 대해 계속 보도하면 뭔가 정치적 해결책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마침 그 자리에는 곽상훈(郭尙勳)·박순천(朴順天)씨 등 최고위원들도 모여 있다가, 내 말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게 좋겠어.”

    그 자리에서 내 의견을 수용한 그들은 곧 본회의장으로 내려가, 침구를 깨끗이 치우고 의자에 앉아 10시 개회를 기다렸다. 그러나 자유당의 계획을 바꿀 수는 없었다. 9시40분쯤 됐을까. 갑자기 사방으로 나 있는 본회의장 문이 열리면서, 무술경위들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범법자를 소탕하는 듯한 위세였다. 그래도 국민들이 뽑은 선량(選良)들인데, 저렇게 무자비하게 끌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야! 이놈들아. 도대체 여기가 어딘데….”

    찢어질 듯 카랑카랑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박순천 여사가 양팔을 무술 경위들한테 잡힌 채 끌려 가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도대체 이런 국회가 어디에 또 있을까?’

    그 처참한 장면을 지켜보며 울분을 참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 결국 민주당 의원들을 의사당 복도와 식당 사이의 좁은 공간에 감금시킨 채, 자유당 의원들만으로 보안법을 통과시켜버리고 말았다. 정권 말기의 전형적인 폭거였다.

    사실 당시 자유당의 관제 용공 세력 만들기는 정도가 지나쳤다. ‘보안법 파동’ 전에 민주당의 통일방안은 ‘UN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였다 그런데 자유당은 이를 ‘용공 통일’로 몰아붙여 본회의장이 한때 소란해지기도 했다.

    ‘이만섭 기자 조용히 하시오’

    당시 2층 기자석에 있던 나는 자유당의 행태가 너무 한심해 본회의장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자유당 놈들아. 이럴 수가 있는 거야?”

    그러자 당시 사회를 보던 민주당 곽상훈 부의장이 기자석을 향해 한마디 했다.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 조용히 하시오.”

    곽부의장의 이 말은 아직도 국회 속기록에 남아 있다. 이렇듯 민주당의 통일론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던 자유당은 결국 ‘보안법 파동’이란 큰일외에 온갖 탄압과 불법선거를 자행했고 4·19는 이미 그때 싹을 틔우고 있었다.

    본격적인 규탄 데모는 마산에서 시작됐다. 후일 ‘10·26’의 불씨도 그랬던 것처럼.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3월15일 마산에서 시작됐고, 곧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데모는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4월11일 아침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군의 시체가 떠오르면서, 시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날 아침 나는 급히 마산으로 내려갔다. 도착하자마자 동아일보 마산지국에 진을 쳤다.

    마산시내는 마치 전쟁터 같았다. 성난 시민들은 경찰과 정면 충돌했고 12일과 13일이 되어도 분노의 불길은 꺼질 줄 몰랐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3일 밤 난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경찰이 김주열의 시신을 빼돌린다더라.”

    즉시 시신이 안치된 마산 도립병원으로 내달았다. 무술경관들이 병원을 포위한 채 일체 접근을 불허했고 조금 있다보니 아니나다를까 시체를 인수한 경찰차가 무장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 시내를 가로질러 달리 시작했다. 나는 차를 몰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을 추적했다.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는 밤, 내가 탄 차는 김주열군의 시신을 실은 경찰차를 바짝 뒤쫓았다. 그러나 역시 경찰은 눈치가 빨랐다. 어느새 알아차렸는지 금세 차 서너 대가 내 차의 앞뒤를 둘러싸고 추적을 방해했다. 그 차가 가는 방향으로 봐 김군의 고향인 남원으로 가는 게 틀림없었다.

    억울한 심정으로 동아일보 마산지국으로 돌아와 곧 서울로 급전을 쳤다. 다음날인 14일 아침 동아일보 조간에는 ‘마산발=李萬燮기자’로 ‘경찰, 밤비를 이용, 金朱烈군의 시신 남원으로 이송’이란 제하의 5단기사가 실렸다.

    전국은 다시 분노했다. 시위는 곧 전국으로 확대됐다. 서울·부산·대구 등지로 확산돼 사태가 점점 긴박해짐에 따라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군사혁명

    올라와 보니 서울의 시위 또한 마산 못지 않게 심각했다. 마침 동아일보는 광화문에 있었기에 비교적 시위 상황을 상세히 볼 수 있었다. 현재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자리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 박사의 동상을 무너뜨린 뒤 목에 새끼줄을 걸고 끌고다니는 시위대가 보였고, 저 멀리 경무대 쪽에는 경찰과 대치한 채 시위를 벌이는 학생이 한눈에 들어왔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학생들을 보면서, 또한 총알이 날아다니는 현장을 취재하면서 내 마음은 착잡했다. 민심을 거역하는 독재정치가 결국은 나라를 망치고 만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건 같았다. 자유당 12년 정권의 말로 역시 그러했다.

    그 후 허정(許政) 과도내각이 들어섰고, 60년 7월29일 5대 국회의원 총선에서는 예상대로 민주당이 압승했다. 그러나 조병옥 박사의 서거로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구심점이 없어 정국은 혼미를 거듭했다.

    그해 5월16일 새벽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대륜중학교 후배로 해병대 장교라는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군사혁명이 일어났습니다”라고 알려왔다 나는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이를 확인한 후 급히 집에서 뛰쳐나갔다.

    ‘군사혁명이 발생했다’는 전화를 받고 동아일보사로 달려가면서 언뜻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단하나였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나중에 윤보선(尹潽善) 대통령도 ‘올 것이 왔다’와 비슷한 말을 했다는 걸 들었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만큼 당시 사회상이 국민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는 증거였다.

    신문사에 들어서니 라디오에서는 이미 혁명군의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두들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채 한 달도 못 돼 필화(筆禍)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6월3일 오후, 청와대에서는 윤보선 대통령의 특별 기자회견이 있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록 혁명이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법적으로는 윤대통령이 나라의 통수권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대통령의 회견 중 혁명군에게 불리한 얘기도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음일까. 특별 기자회견장에는 무장 헌병들이 늘어서서 윤대통령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했으며 중앙청 출입기자단 간사조차 몸을 사리는 발언을 했다.

    “우리, 이번에는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회견 때 곤란한 질문 같은 건 피하면서 적당히 하는 게 좋겠소.”

    나는 그런 비열한 태도를 용인할 수가 없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된다. 민간 정부 때는 약하다고 마구 때리다가, 힘 있는 군사정권이라 해서 꼼짝 못하는 그런 기회주의적인 언론이 되란 말인가? 안돼! 각자 소신껏 묻고 소신껏 써야 해.”

    ‘민정 이양 촉구’ 기사로 2개월 옥고

    그러나 내 말에 기자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만큼 당시 분위기는 살벌했다. 드디어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나는 회견이 끝날 무렵 옆방 경호실로 나와야 했다. 왜냐하면 마감 시간이 임박해 본사로 기사를 송고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마침 견습중인 이진희기자(후일 문공부 장관)를 데리고 갔다. 뒷일을 이기자에게 부탁하고 옆방에서 전화로 원고를 부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이진희 기자가 문을 열고 뛰어들어왔다.

    “선배님, 방금 대통령께서 중요한 얘기를 했습니다. 군사정권은 9월의 유엔 총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조속히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뭐야! 그거 아주 중요한 얘긴데…. 이건 정확해야 해. 다시 이야기해봐.”

    나는 긴장했다. 윤대통령이 그런 얘기를 했다면 이건 톱뉴스였다.

    사실을 확인하고는 그 부분을 ‘리드(前文)’로 뽑아 다시 기사를 전화로 불러 주었다. 바로 그날 저녁에 나온 동아일보에는 1면 톱에 ‘윤대통령, 정권 민간 이양을 촉구’란 제목이 있었다.

    바로 이게 문제였다.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모든 언론이 당국의 눈치를 보느라, 아예 그 기사를 빼버리거나 은폐했다. 조선일보는 제목은 뽑지 않은 채 기사로 취급했으나, 동아일보는 당당하게 1면 톱으로 다뤘던 것이다.

    그날 밤 회사에서 숙직하던 사원이 이상한 전화를 했다.

    “시경에서 사람들이 왔는데, 이기자 집을 가르쳐줘도 되겠습니까?”

    난 ‘혁명정부의 포고령 위반’으로 신문사에서 시경으로 끌려가면서, 전화로 고재욱 주필과 김성열 정치부장에게 말했다.

    “만일 통행금지 전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잡혀간 걸로 아십시오.”

    가보니 나 이외에 김영상 편집국장도 옆방에 연행돼 있었다. 분명한 사실을 썼을 뿐인데,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윤보선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말을 내가 국민과 군사정부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꾸며서 썼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도 보도한 사실을 들며 윤대통령에게 직접 확인하라고 했으나, 나중에야 그들도 “우리는 최고회의의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고 솔직히 시인했다.

    당시 내가 연행된 사실은 외신에까지 크게 보도됐다. 당시 UPI통신은 서울발 기사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국 경찰은 한국 최대 신문인 동아일보의 편집국장과 기자 1명을 체포했다. 편집국장 김영상씨와 이만섭 기자는 4일밤 심문차 체포돼, 5일 현재 구류중에 있다. 이들을 체포한 데 대해서는 아무런 공식적 해명이 없으나, 3일의 윤대통령 기자회견에 관한 기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는 4일자 조간에서 윤보선 대통령은 금년 가을 유엔 총회에 미칠 영향 때문에 정권을 조속히 민간인에게 복귀시키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언명했다고 보도를 한 바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심흥선 공보부장은 5일 모일간지가 대통령의 기자회견 내용 일부를 사실과 유리되게 조작해서 보도했는데 이는 용인할 수 없는 일이며, 또한 혁명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구속이 결정된 뒤 나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서빙고 육군형무소로 이감됐다.

    이렇게 두어 달 고생한 후 8월초 어느날 새벽 원충연 대령이 찾아왔다. 당시 그는 최고회의 공보실장이었다. 그런데 그의 태도가 의외였다.

    “이만섭 기자시죠. 대단히 미안합니다. 기소유예가 결정됐습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라 기뻐할 새도 없었다. 내가 옷을 갈아입자, 그는 자기가 타고온 지프에 날 태우더니 우리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러나 가슴 아픈 일은 내 일로 부친이 충격을 받아 병을 얻은 것이다. 전에 공군사관학교에서 퇴교했을 때도 충격을 받았던 부친은, 이번에 내가 수갑을 차고 형무소로 가자 더 큰 충격을 받아 몸져 누워버렸다.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한 부친은 2년 뒤 환갑을 한 해 남긴 채 눈을 감고 말았다. 모두 내 탓이었다.

    최고회의를 출입하고 얼마쯤 지난 어느 날,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이 우연히 기자실에 들렀다. 기자간담회였는데, 그와는 첫 대면이었다. 그러나 사실 난 그때까지 그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전에 일본의 월간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 김종필씨가 기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5·16이전에 나라가 부패한 원인으로 그가 기자들의 책임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난 첫 대면이었음에도 그 얘기를 꺼내며 강력히 항의했다.

    “김부장이 쓴 글에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5·16 전에 군도 부패했었다고 쓰면서, 그 원인이 기자 때문이라고 쓰지 않았습니까? 즉 군에서 휘발유 한 드럼을 빼내 팔면서 신문기자의 입을 막기 위해 결과적으로 두 드럼, 세 드럼씩 더 빼내다 보니 부패의 악순환이 거듭됐다고 썼지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 사이비 기자들의 행태에 불과한데 그걸 마치 전체 언론계의 일인 양, 그것도 외국 잡지에 쓰다니 잘못된 것 아닙니까.

    정계입문

    여기 기자들 중에도 군인들 못지 않게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애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군인들이 총으로 애국했다면, 우리는 붓으로 애국한 겁니다. 그런데 그런 건 간과한 채 모두가 사이비 기자인 양 언론을 매도했으니, 이만저만 잘못한 게 아닙니다.”

    내 목소리가 다소 높아지자, 동료 기자들은 내가 다시 형무소로 끌려가게 될까봐 걱정됐는지 옆구리를 찌르면서 말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러나 난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또한 나는 혁명정부 밑에서 억울하게 육군형무소에 갔다 온 적이 있는데, 언론 탄압도 심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던 김부장은 화는커녕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기자의 말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잘못된 점이 있다면, 내가 사과드리지요.”

    의외였다. 그는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중앙정보부장답지 않게 예상외로 부드러웠다. 그날로 그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해가 바뀌어 62년이 되자, 정국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간 혁명정부의 의중을 읽은 윤보선 대통령은 3월23일 결국 대통령직에서 하야했고,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된다. 62년 가을 어느날, 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운명의 날을 맞았다. 박의장의 울릉도 시찰을 잠입취재한 것이다. 국가원수로서는 전무후무한 울릉도 시찰이었고 5·16혁명후 기자로서 박의장과 단독취재를 한 것도 동아일보의 내가 처음이었다. 그때 세찬 울릉도 격랑으로 박의장이 하마터면 큰 변을 당할 뻔 했다거나 울릉도 산길을 따라 함께 걸어 올라가며 나눴던 많은 얘기들은 지금도 생생하고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 그때 나는 ‘박의장은 일본 육사를 나온 군인이라기보다는 역시 사범학교 출신이구나’하는 판단을 했다. 정확한 판단력, 치밀한 두뇌, 그리고 교사들이 가진 인간적인 면… 나는 비로소 그때부터 은연중 박정희라는 인물에 경도되어 간 것이다.

    63년 추석날 밤 마당에서 환한 보름달을 바라보며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나는 기자생활을 청산하고 정치인이 돼 나라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다음날 곧바로 장충단 의장 공관에서 박의장을 만나 내 결심을 밝혔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내 말에 박의장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난 말을 이었다.

    “물론 입당에 따른 조건은 없습니다. 무조건 입당하되, 구정치인들처럼 감투나 돈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다만 제가 왜 공화당에 입당하게 됐는지, 또한 왜 박정희 후보를 지지하게 됐는지 제 소신을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이 말은 내가 대통령 선거 유세에 함께 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얘기였다. 내 말이 끝나자 박대통령은 내 손을 꼭 잡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맙소. 이만섭씨.”

    그 자리에서 바로 이후락 공보실장에게 전화를 한 박의장은 나를 선거유세반에 포함시키라고 지시했다. 내 정치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렇게 공화당에 입당한 나는 며칠 뒤 바로 선거 유세에 합류했고 대구를 시작으로 선거가 끝날 때까지 박정희 후보·이후락 공보실장과 전국을 누볐다.

    이어 6대 국회에는 전국구로 진출하게 됐다. 이때부터 박대통령은 나를 자주 불러 여러 문제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정치 스타일이 바뀌었지만, 박대통령은 3선 개헌 전까지만 해도 나처럼 직언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63년 12월17일, 박대통령은 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더불어 6대 국회가 개원했으며, 제3공화국이 돛을 올렸다. 6대 국회에 처음 진출한 나는 여당 원내 부총무를 맡았다. 제3공화국 출범 후 맞은 최초의 위기는 64년의 한일 회담이었다.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 회담이 시작되자, 야당과 각계 인사들은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특위’를 결성해 회담 반대 투쟁에 나섰다.

    6월3일, 마침내 6·3 사태가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6·3사태는 심각한 헌정 위기였다. 바로 전날 학생 1만여명이 박정희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파출소를 점거, 파괴하기에 이르렀기에 서울 일원의 비상계엄은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그런데 계엄 바로 다음 날이었다. 갑자기 김재규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며 계엄군 임시 사단 본부가 있는 덕수궁을 찾았다.

    ‘JP 잡아 넣어야겠는데…’

    김장군은 나를 반갑게 맞으며, “누가 엿들으면 곤란하니 잠깐 ”하더니 날 사단장실에서 밖으로 불러내 뜰에 있던 앰뷸런스 안으로 데려갔다.

    “지금 계엄군의 공기는, 비록 데모는 진압됐지만 나라를 위해 이번 기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몇 사람을 해결해야겠다는 분위기요. 대상은 김종필 공화당 의장과 야당의 김준연 서민호 의원이요. 문제는 군의 공기가 이러한데, 이걸 대통령께 말씀드려 순조롭게 처리할 사람은 이만섭 의원밖에 없을 듯하오. 그러니 대통령께 말씀 좀 드려 주시지요.”

    김장군은 계속 이유를 설명했다.

    “김종필 의장은 4대 의혹 사건으로 군의 공기가 좋지 않고 김준연·서민호 의원은 한일회담에서 대통령이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허무맹랑한 발언을 국회에서 한 때문이지요.”

    “잘 알겠습니다”

    나는 사태를 사전에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화당 의장인 김종필에게는 미리 알려 스스로 결심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는 1차 외유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데다, 나와 인간적으로 가까운 편이었다.

    당시는 제3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박정희 정권이 맞은 최악의 위기였고 어떻게든 시국을 수습해놓고 보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김종필 의장의 행방을 알아보니, 마침 민기식 참모총장 공관에 있는 게 확인되었다. 급하게 가보니 이미 그곳에는 민기식 총장과 김종필 의장뿐만이 아니라 김성은 국방장관, 그리고 JP 직계인 김종갑 국회 국방위원장도 함께 있었다. 국방색 작업복을 입고 있던 김의장은 대충 분위기를 파악한 듯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김국방과 민총장은 마침 그날 아침에 박대통령을 만나 군의 분위기를 보고했고, 박대통령으로부터 “김의장에게 그런 분위기를 직접 말해 주지 않고 뭘 하고 있어”하는 핀잔만 듣고 왔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들어갈 때까지 그들은 차마 김종필 의장에게 그 얘기를 못한 채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김의장에게 말했다.

    “…그러니 김의장께서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십시오.”

    그러나 김의장은 굳은 표정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론 군 전체 분위기가 그런 건 아니고, 박경원 장군(후일 내무부 장관) 등 일부 장군들이 내게 감정이 있어 그런 것 같소. 그리고 내가 당의장을 물러난다면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누가 맡아서 각하를 보필할 수 있겠소? 또 만약 내가 물러나야 한다면 나를 모함하고 있는 당 간부들도 함께 물러나야 하잖소.”

    다소 감정이 격앙돼 있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JP 만나 ‘2보 전진 위한 1보 후퇴’ 권고

    “그만두는 데 누구와 함께 그만두겠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또 누가 당을 맡아 하건 걱정할 필요 없는 것이며, 만일 후임자가 시원찮으면 각하께서는 더욱 김의장을 아쉬워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학생 데모가 워낙 심각하니 우선 나라를 살려 놓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 나라를 위해 1보 후퇴하십시오.”

    그러나 김의장은 듣고만 있을 뿐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는데 진행 사항이 궁금했는지 다음날 박대통령이 나를 불렀다.

    “아무래도 사태가 급하니, 지금 각하께서 김의장을 부르셔서 나라를 위해 자진해서 당의장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박대통령은 곧 부속실의 김성구 비서관을 불러 김의장을 찾아오도록 했다. 바로 그날 저녁 김종필 의장의 사임을 알리는 호외가 시중에 배포됐다. 6·3 사태는 결국 김종필씨가 외유를 떠나고, 김준연·서민호 의원이 구속되면서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6대 국회 때에는 한일 회담도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훗날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된 ‘남북 가족 면회소설치에 관한 결의안’이었다. 내가 이 결의안을 제의한 것은 64년 10월9일. 제18회 동경 올림픽에서 북한의 신금단(辛今丹)선수와 부친 신문준씨가 14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본 뒤였다.

    겨우 몇분간의 만남이었지만 그 감격적인 장면을 보면서 헤어진 혈육의 아픔을 느꼈으며, 한편으로는 뜨거운 민족애가 용솟음치는 걸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남·북으로 흩어져 있는 혈육이 서로 만날 수 있게 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10월27일 ‘남·북 가족 면회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국회에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내용은 판문점에 남·북 가족면회소를 설치해 이산 가족이 서로 만나게 하며, 상봉자 명단 작성과 주선은 남·북의 적식자사와 국제적십자사가 공동으로 맡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로 인해 어처구니 없게도 정치적 박해를 받게 되었다. 바로 중앙정보부장인 김형욱(金炯旭)이 내 제안을 반공법 위반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김형욱은 내 사상과 생각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경직된 사고의 소유자였다.

    결국 김형욱은 내게 그 결의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잡아넣겠다고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참다 못한 나는 박대통령을 만나 결의안을 제출하게 된 동기와 내용, 그리고 김형욱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음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박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김형욱 그 친구 돌았구먼…. 머리가 나빠.”

    결국 박대통령으로부터 내 주장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셈이다. 나는 박대통령의 이 말을 정가에 퍼뜨렸다. 그러자 그 후로 김형욱의 압력이 상당히 수그러들었고, 결국 11월6일 제11차 외무위원회에서 이결의안에 대한 제안 설명을 하게 되었다. 결의안은 외무위원회에서 심각하게 논의를 거듭했건만, 외압에 의해 통과는 보류되고 말았다.

    69년 1월로 들어서자 당내에서 은근히 ‘개헌’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요즘 개헌 여부를 당내에서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는 중입니다.”

    1월6일 길재호 공화당 사무총장의 첫 발설을 계기로, 다음 날에는 윤치영 공화당 의장서리도 거들었다.

    “후진 사회를 면치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의 과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지상 명제를 위해서는 현행 헌법의 문제점을 개정하는 연구가 진행돼야 합니다.”

    역시 같은 얘기였다. 그러자 뭔가 음모(?)를 눈치 잰 신민당 등 야당에서는 즉각 삼선개헌 반대를 외쳤고 정가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그 당시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당·정간에 이미 조율이 있었던 것 같다. 여론의 향배를 보면서 한쪽에서는 거부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다른 한쪽에선 찬성하는 이른바 양동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당내가 양분돼 다소 어수선한 가운데 3월6일에 의원총회가 있었다.

    이날 모임은 처음에는 개헌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윤치영 의장이 인사말에서 슬쩍 개헌 문제를 거론하면서 서서히 토론이 벌어졌다. 물론 개헌 문제가 공식회의에서 논의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모두들 마음은 열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평소에 직선적이며 바른말 잘하던 의원들은 이 날도 개헌을 반대하는 의견을 서슴지 않고 밝혔다. 양순직·박종태·신윤창·정간용 의원 등이 주로 반대 의견을 얘기했으며, 나도 서슴없이 다음과 같이 내 의견을 밝혔다.

    “박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업적은 국민들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 어느 누구도 개헌을 하면서까지 정권을 연장하는 것을 원치는 않습니다. 지금 이 헌법은 우리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결국 그날 의원총회는 격론을 벌이다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대통령의 측근인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길재호 사무총장, 김성곤 재정위원장, 백남억 정책위원장 등은 개헌을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해 개헌 지지를 설득하고 아예 찬성 도장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특히 김형욱 부장은 개헌을 반대하는 의원들에게 온갖 회유와 협박 공갈로 찬성 도장을 받아내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이 바람은 물론 내게도 불어닥쳤다. 그러나 이미 의원총회 등에서 공개적으로 개헌을 반대하는 등 강경한 입장이었기에, 그들은 내게만큼은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이의원… 개헌 문제좀 얘기합시다….”

    “그거라면…그건 절대 안됩니다.”

    김성곤 의원이 내게 넌지시 의향을 타진했지만, 난 본론이 나오기도 전에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그러자 다음에는 길재호 의원이 나를 두번씩이나 찾아와 마음을 돌리라고 종용했고 난 역시 거절했다. 안 되겠다 싶었던지 그들은 결국 박대통령에게 미뤘다.

    “이만섭 의원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안됩니다…. 이의원만큼은 각하께서 직접 불러서 설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이의원은 내가 한번 불러 이야기 해보지….”

    박대통령은 결국 나를 불렀다.

    박대통령과 독대

    그날은 69년 6월29일이었다. 오후 3시였는데 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나는 들어가기 전부터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대통령을 내가 설득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서재로 들어선 나는 박대통령의 얼굴이 다소 굳어져 있음을 느꼈다. 차를 권한 박대통령은 먼저 3선개헌을 하지 않을 수없는 당위성을 말하며 협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단단히 마음을 먹고 간 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5·16혁명이 아무리 구국 혁명이었다 하더라고,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 군사혁명을 국민혁명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대통령께서 스스로 만든 헌법을 지켜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리입니다.”

    내 말에 대통령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난 계속 말을 이었다.

    “4·19때 저는 동아일보 정치부기자로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 집권해 학생혁명을 유발했고, 결국 이 박사의 동상을 학생들이 넘어뜨려 새끼줄로 목을 맨 채 광화문 거리를 질질 끌고 다니는 광경을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각하도 장기 집권하게 되면, 나중에 학생이나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라는 말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그제서야 박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나서지 않으면 정권을 야당에 빼앗길 텐데…”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께서 물러나시면서 ‘내가 못다한 일을 바로 이 사람, 나의 후계자에게 맡겨 주십시오’라고 하신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당선됩니다. 왜 정권을 빼앗긴단 말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후계자가 될 사람은 있는가?”

    박대통령은 짜증스런 투로 물었다.

    “이효상씨나 백남억씨 같은 분도 좋지 않습니까. 그분 중 한분에게 4년간 맡긴 뒤, 4년 후에 다시 정권을 잡으시면 되잖습니까?”

    박대통령은 내 말에 버럭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그렇지만 4년 뒤에 누가 나한테 정권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다시 내놓겠어?…”

    이 말에 다소 반발심 같은 게 생겼다.

    “각하! 만일 후계자한테 맡겨서 그 분이 일을 잘하면 꼭 각하께서 다시 하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그땐 나라의 큰 지도자로서 후배대통령을 뒤에서 도와주시고 또 나라의 갈 길만 인도해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이 말에 박대통령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아마 허리에 권총이라고 차고 있었다면 금방이라고 빼서 쏠 듯한 기세였다.

    2시간 40분 동안 박대통령 설득

    그러나 나는 간곡하게 3선개헌은 안 된다고 계속 주장했다.

    “전 이 나라가 민주주의를 꽃 피우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평화적인 정권 교체이며, 그건 꼭 야당에 정권을 넘겨준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또하나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치 보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가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전 굳게 믿습니다…. 사실 각하 주위에서 개헌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진정 나라를 위하는 마음보다는, 정권을 내놓게 되면 자기들이 죽는다고 생각해 자기들이 살려고 개헌하자는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나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박대통령의 얼굴이 초췌해 보여 인간적으로 안타까웠다.

    사실 박대통령은 군에 있을 때부터 정의감이 강하고 바른 소리를 잘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분이 정의롭지 못한 3선개헌을 하려고 하니, 자신은 또 얼마나 괴로웠을까. 난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대통령은 나를 이론적으로 설득하기보다는 자신을 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마음에 호소했던 것이다.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무려 2시간40분의 면담을 끝냈지만, 청와대를 나오면서도 나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각하께서는 3선개헌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빨리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아니면 나라는 극도로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후일 김성곤의원에게 들은 얘기로는 박대통령은 내게 상당히 서운해 했다고 한다. 김의원이 나와 면담한 결과를 묻자 짜증부터 내더라 한다.

    “대체 고집이 어찌나 센지, 내가 아무리 얘기해도 듣지를 않아.”

    또한 박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인 왕학수가 찾아가 개헌을 만류하는 얘기를 하자, 그때도 박대통령은 “어쩌면 자네도 그렇게 이만섭이와 똑같은 소리만 하는가?” 하고 벌컥 화를 냈다고 한다.

    아무튼 박대통령은 이미 날 만나기 전부터 개헌할 결심이 굳어져 있었던 것 같다. 나와 면담한 지 한 달여 뒤인 7월25일, 드디어 박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했다.

    “개헌문제로 국론이 분란스러운데, 국민 여러분께 직접 묻겠습니다. 3선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입니다. 만일 국민이 지지해주지 않으면, 나와 정부는 미련없이 물러설 것입니다.”

    드디어 개헌을 위한 배수진을 친 것이다. 기자회견이 있은 다음날부터 개헌파들은 바로 반대 세력에 대한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이후락·김형욱·김성곤·길재호 등 네 명은 청와대 비서실장실에 진을 치고 앉아, 그때까지 서명하지 않은 의원들을 한 사람씩 불러 서명을 받았다. 대통령을 만나 직접 얘기를 해본 뒤 서명하겠다던 공정식 의원(전 해병대 사령관) 등에게는 서명을 받고 난 뒤에야 대통령을 만나도록 해주었다.

    대통령 기자회견 다음날 공화당은 즉시 당무회의를 열어 발의 일정을 채택한 후, 개헌안 성안을 백남억 정책위원장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사흘 뒤인 7월29일. 공화당은 개헌안 발의 서명을 받기 위해 그 유명한 영빈관 의원총회를 열었다.

    바로 전날인 28일 밤,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서른한 살에 국회의원의 길로 들어선 이후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목숨 걸고 투쟁하겠소”

    나는 박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의리 때문에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선행조건’을 내걸고 투쟁키로 했다. 책상에 앉은 나는 메모지에 선행조건을 하나하나 써내렸갔다.

    첫째, 권력형 부정부패의 책임자 이후락·김형욱은 그 책임을 지고 즉각 물러날 것.

    둘째, 중앙정보부는 대공 사찰에만 전념하고 정치 사찰은 하지 말것.

    셋째, 당이 명실공히 창당 이념에 맞도록 체질을 올바르게 개혁할 것.

    넷째, 국민투표는 지는 한이 있더라고 공명정대하게 실시할 것.

    다섯째, 권오병 문교부장관 불신임 파동때 제명당한 예춘호·양순직·박종태 등 제명의원 5명을 복당시킬 것.

    나는 비장한 각오로 다섯 가지 선행조건을 정리했다.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첫째 조건에 포함돼 있는 이후락·김형욱, 특히 김형욱의 보복을 감수해야만 했다. 선행조건을 다 쓰고 다시 한번 읽어 본 후 아내를 불렀다.

    “여기 5개 선행조건에 이후락·김형욱을 물러나라고 했는데, 이건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소. 그렇지만 난 내일 의원총회에서 반드시 말하고야 말 것이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말을 하면, 김형욱이 무슨 일일 벌일지 모른다는 것이오. 이미 알다시피 김형욱은 김영삼의원의 얼굴에 초산을 뿌리려고 하지 않았소. 그리고 초산을 뿌렸던 하수인은 오리무중 한동안 자취를 감췄는데 인천 앞바다에서 떠오른 시체 2구가 그들이라는 이야기도 있소. 나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내일 당신은 집을 깨끗이 치워주시오. 혹시 습격 받더라고 뒤를 깨끗이 해놓아야 하지 않겠소.”

    아내도 이러한 나의 소신에 동의하는 듯 고개는 끄덕였으나 무거운 표정으로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정치인의 아내로서 겪는 비애가 아닐 수 없었다.

    다음날 의원총회장소는 영빈관이었다. 현재의 신라호텔 별관 자리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처음부터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예정보다 40분 늦은 10시 40분이 돼서야 시작됐다. 의원총회는 공화당 소속의원 109명 가운데 101명이 참석했다. 김택수 원내총무가 회의 개시를 알리면서 ‘영빈관 의원총회’는 시작됐다.

    의원총회는 처음부터 파란의 연속이었다. 맨처음 발언대로 나온 사람은 정구영의원이었다.

    “나는 평소 소신대로 개헌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간단하게 한마디로 소신을 밝히고 자리로 돌아가자, 그때부터 의원들 간에 찬·반 양론이 물꼬를 트고 넘치기 시작했다.

    의견 접근이 되지 않자 윤치영 당 의장서리등 당 5역은 옆방으로 들어가 대책을 숙의했으나 결론은 당5역 모두 사의를 표한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날 회의는 심각했던 것이다.

    내가 발언권을 얻어 연단에 섰을 때는, 이미 밖에 어둠이 깔려 있었다. 비장한 각오로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나는 근본적으로 3선개헌에 반대해 왔습니다. 지금도 그 소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통령께서 나라를 위해 꼭 한 번만 더 하신다 하더라도 우리 공화당에서 먼저 자가 숙정부터 하고 국민들에게 고개숙여 양해를 구하는 것이 정치도의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잠깐 숨을 멈춘 후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인데 나는 개헌에 대한 선행조건으로 5개항을 촉구합니다.

    첫째, 권력형 부정부패의 책임자 이후락·김형욱은 그 책임을 지고 즉각 물러날 것…”

    내가 채 다음 항목을 말하기도 전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름이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다섯 가지 선행조치를 모두 말하고나니 의원들은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박수를 치기도 하고, 책상을 두들기면서 열렬히 지지했다. 이는 그만큼 두 사람이 대다수 의원들의 원한을 사고 있다는 증거였다.

    개헌이냐 아니냐로 팽팽하던 균형은 내 제의로 일순간에 변화가 생겼다. 반대파들도 내 ‘선행조건’에는 전적으로 찬동했던 것이다.

    나의 선행조건은 곧바로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 정도까지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때는 이미 자정을 넘어 새벽 2시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변수가 생겼다. 그때까지 밤잠을 자지 않고 의원총회결과를 기다리던 박대통령이 일언지하에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 만장일치로 채택된 내 선행조건을 들고 김성곤 정책위원장과 장형순 부의장이 박대통령에게 재가를 얻으러 청와대로 들어갔으나, 박대통령은 책상을 걷어차고 컵을 내던지면서 화를 벌컥 냈다는 것이다.

    “뭐야? 누가 이따위 선행조건을 내세웠어? 뭐? 이만섭의원? 이의원 지금 어디 있어! 도장을 찍으려면 찍고 말려면 말지, 선행조건은 무슨 선행조건이야?”

    아무튼 박대통령의 격노에 김성곤 의원과 장부의장은 혼비백산해서 그냥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소신을 굽히지 않은 채 다시 연단으로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건 당 간부들의 설명이 부족했기 때문일 겁니다. 대통령과 나라를 위하는 일인데 대통령께서 그렇게 화를 낼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설명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당 간부들은 다시 가서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끝까지 개헌에 동의할수 없습니다.”

    내 말에 모두들 찬성이었다. 이번에는 장형순 부의장 혼자서 청와대로 가기로 했다. 김성곤 의원이 갑자기 배탈이 나 신문로에 있는 자기 집으로 죽을 먹으러 간다는 것이었다.

    “이만섭을 죽여버리겠어”

    그런데 우리가 장형순 부의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해프닝이 벌어졌다.

    우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에서 모든 발언을 도청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후락·김형욱은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한 말도 김형욱의 귀에 즉각 들어가게 되었다.

    흥분한 김형욱은 곧장 청와대로 달려가 이후락 비서실장실에 들어서면서 이후락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만섭이가 우릴 쫓아내려 한다. 내 이만섭을 죽여버리겠어.”

    이토록 분위기가 격앙돼 있는 사이에, 두 번째로 청와대에 갔던 장형순 부의장이 돌아왔다. 모두의 시선이 단상에 오른 장부의장에게 집중됐다.

    “다시 말씀드렸더니, 대통령께서는 ‘모든 것을 잘 알겠고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니 그 문제는 나한테 맡기고 개헌안에 서명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대통령께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공은 대통령에게 넘어간 셈이 되었다. 의원들의 흥분도 가라앉았고 김택수 총무는 서둘러 회의를 끝내려 했다.

    “여러분! 이만 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으로 의원총회를 끝내려고 하니 개헌안에 서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이왕이면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다시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대통령에게 맡기는 건 나도 찬성합니다. 그러나 대신 1주일 후 다시 의원총회를 열어야 합니다. 그 기간에 대통령께서는 두 사람을 반드시 조치해주어야 합니다. 아무튼 1주일 후 다시 의원총회를 열기로 결의하고 끝내야지, 그냥 막연하게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나의 제안을 모든 의원들이 지지하고 이어서 의원들이 개헌안에 서명함으로써 총회는 끝났다.

    그때는 벌써 30일 새벽 4시40분이었다. 우리나라 정치 사상 최장 기록인 18시간동안의 의원총회였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밖으로 나오니 여름비가 퍼붓고 있었다. 그날 따라 비오는 밤거리가 여간 기분 나쁘지 않았다. 더구나 김형욱이 내 말을 모두 도청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뜻밖이었다. 청와대에서 날 찾고 있다는 게 아닌가. 아마 내가 내건 선행조건에 대해서 대통령이 직접 알아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날 오후 3시 청와대에서 박대통령을 만난 나는 심경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각하를 위하고 나라를 위해서, 만일 개헌을 한다면 우리가 먼저 국민에게 반성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뜻에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개헌을 하더라도 이렇게 해야만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 각하 앞이라고 큰소리 치는 거야?”

    이어서 나는 선행조건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다. 굳은 표정의 박대통령은 내 말을 다 듣고는 못마땅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만섭 의원의 순수한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김성곤 의원은 그게 뭐야? 그 사람들하고 밤낮 이마를 맞대고 일해오다가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짓이야.”

    아마 김성곤 의원까지 ‘이후락·김형욱을 물러나게 하는’ 내 선행조건에 동조하는 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내가 만든 선행조건의 내용을 설명하고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청와대에서 다시 찾는다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연락이 잘못됐나 싶었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찾은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확인해 보니 틀림없었다. 저녁식사 초대였다. 다시 들어가 보니 식당에는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김성곤 의원까지 모여 있었다. 박대통령은 선행조건으로 감정이 나빠진 네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자리를 마련한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박대통령, 이후락 실장과 악수를 한 뒤 그 옆에 앉은 김형욱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그때까지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그는 내 손을 잡기는 커녕, 앉은 채로 나를 노려보면서 소리부터 지르는 게 아닌가.

    “야! 이의원, 너 나한테 이러기야!”

    순간 나는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내민 손을 걷어들이곤 나도 소리를 질렀다.

    “무어야! 너 각하 앞이라고 큰소리 치는 거야, 네가 할 일은 당장 그만두는 것밖에 없어. 이게 어디다 큰 소리야!”

    서로 고성이 오가는데 박대통령은 굳게 입을 다문 채 무거운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결국 박대통령이 주선한 화해는 실패로 끝나고 그 날의 만찬 분위기는 납덩이처럼 무겁기만 했다.

    대통령이 화해를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소리를 질러가며 싸웠으니, 대통령께는 죄송하고 무례한 행동임에 틀림없었다.

    사실 나는 그렇게까지 소리를 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형욱이 워낙 무례하게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맞받아쳤던 것이다.

    박대통령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통령은 저녁식사를 하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니 김성곤 의원과 이후락 비서실장 등 우리도 시종 침묵 속에서 식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는 이후락 실장과 김형욱부장이 먼저 나가고, 김성곤 의원과 내가 뒤따라 나왔다. 밖에 나오니 불안한 느낌이 들어 김성곤의원의 차에 타고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괜히 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생각을 바꾸었다. 대신 그날도 집에 가서 자지 않고 친척집에 가서 밤을 보냈다.

    “이만섭에게 손대면 가만두지 않을 것”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난 자칫 불귀의 객이 될 뻔 했다. 후일 중앙정보부의 한 간부와 김성곤 의원은 내게 소름끼치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후락·김형욱은 물러나야 한다”는 의원총회 발언에 앙심을 품은 김형욱은 중정 간부 두 사람을 불러 국가 기밀문서 보관함에서 수류탄과 권총을 꺼내 주면서 날 해치우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역 의원을 죽인다는 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에, 지시받은 이 간부는 만류했다고 한다.

    “그냥 정치적으로 매장해버리는 방법을 쓰면 되지, 굳이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김형욱은 끝까지 막무가내였고, 결국 살인지령이 내려진 것이다. 그러나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이 사실을 김성곤 의원이 어떻게 알아내곤 급히 청와대로 가 박대통령에게 알렸다고 한다.

    “각하! 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만일 국민투표를 앞두고 이만섭 의원이 다치게 되면 모든 게 끝장이고, 정국은 크게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누가 이만섭 의원을 죽이려 한단 말이오. 김형욱 부장이 그러는 거요?”

    “김형욱 부장이 직접 나서지는 않더라도 과잉 충성을 하는 그의 부하들이 일을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각하께서 조치를 취해 주십시오.”

    박대통령은 즉각 그 자리에서 김형욱부장을 불러 진위를 묻곤 야단을 쳤다고 한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만일 김부장이 이만섭 의원에게 손만 대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개헌 논쟁은 결국 일단락돼 69년 8월7일 윤치영 의원 등 121명의 이름으로 대통령 3기 연임을 허용한다는 골자로 국회에 제안됐고, 다음날 제71회 임시국회가 개헌안 발의를 위해 소집됐다. 9월14일 새벽 2시, 개헌안은 결국 국민투표법안과 함께 국회 제3별관에서 야당 몰래 변칙 통과됐다.

    결국 10월17일의 국민투표에서는 77.1% 투표율에 찬성 65.1%, 반대 31.4%, 그리고 무효 3.5%로 개헌안은 확정됐다.

    국민투표가 끝나자 박대통령은 이후락비서실장은 주일대사로, 그리고 김형욱은 그만두게 했다가 나중에 8대 때 전국구로 국회의원을 시켜주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이후 79년 10·26으로 목숨을 잃을 때까지 단 한번도 나를 부른 적이 없다. 나에 대한 섭섭한 감정도 풀어지지 않았겠지만, 박대통령은 이처럼 한 번 틀어지면 그토록 차갑고 독한 면이 있었다.

    73년에는 김대중납치사건이 발생했다. 8월8일, 그날은 무척이나 더운 날이었다. 김대중납치 사건의 소식을 당 간부로부터 전해 들은 나는 공화당 당사 기둥이 삐걱삐걱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제 끝장이구나. 천심도 민심도 모두 공화당과 박대통령을 떠나겠구나.”

    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강력했던 유신체제도 결국은 무조건 추종하는 사람만 만들었고 그 와중에 일어난 충성 경쟁이 그와같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맹목 추종과 충성 경쟁은동서고금 어느 시대나 경계되어야 하면서도 또 그만큼 경계하기 어려운 사안인 셈이다.

    79년 가을 김재규부장은 나와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 나라 정치는 차지철 때문에 큰 문제요. 모든 일을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해서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오.”

    김부장은 차지철의 횡포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게 사실이다. 나는 그때 의리상 공화당을 떠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민심과 함께 이미 당을 떠나 있었다는 게 솔직한 심경이었다.

    ‘어쩌면 다시 4·19 같은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때는 박대통령이 암살당하거나 그렇잖으면 자살할지도 모른다. 이승만 박사야 미국에서 공부해 민주적인 사고를 갖고 있어 스스로 물러났지만, 박대통령은 일본육사 출신이기 때문에 이 박사와는 다르지 않은가.’

    결국 나는 10월27일 새벽 박준규 당의장으로부터 ‘대통령 유고’ 소식을 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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