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내 새끼 지상’ ‘각자도생’ 틈에서 죽은 아내 그리는 悼亡詩를 읽다

[김호기의 고전으로 읽는 21세기] 박지원·정약용 詩로 본 ‘지금, 여기’ 가족의 초상

  •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2024-04-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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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 사랑 지극했던 연암과 다산

    • ‘아내와 헤어진 지 하마 천년이 된 듯…’

    • 연암 시, 하염없이 눈물 흐르게 해

    • ‘맑고 밝은 세상에 일민(逸民)이 되어라’

    • 폐족 된 자식에 대한 다산의 연민과 사랑

    • 가족이란 애틋함·힘 안겨주는 존재적 거점

    손자 박주수가 그린 박지원의 초상화. [동아DB]

    손자 박주수가 그린 박지원의 초상화. [동아DB]

    이 기획을 연재하며 고민한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나라 고전을 얼마나 다루느냐 하는 문제였다. 고전이 서양의 독점물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동아시아에도 고전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중국의 경우 ‘논어’와 ‘맹자’, ‘노자’와 ‘장자’, ‘사기’와 ‘육조단경’ 등은 고전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저작들이다. 우리 전통사회도 마찬가지다. 이 기획을 시작하며 나는 신라 향가와 고려가요, 정철의 가사와 윤선도의 시조, 박지원과 이옥의 산문을 우리나라의 고전으로 꼽았다.

    이 땅에서 살아온 이들이라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고전으로는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의 저작을 들 것이다. 박지원과 정약용은 당대는 물론 지난 20세기에도 큰 영향을 미친 지식인들이다. 이러한 박지원과 정약용의 삶과 사상을 나는 10여 년 전 내놓은 책 ‘시대정신과 지식인’에서 다룬 바 있다.

    널리 알려졌듯, 박지원은 ‘열하일기’ 등 산문에서, 정약용은 ‘목민심서’ 등 경세학에서 이름이 드높았다. 오늘 주목하려는 것은 이채로운 텍스트다. 박지원과 정약용이 가족을 다룬 시들이다. 여기서 가족 시를 선택한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문학은 개인의 감정은 물론 이성, 그리고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미래에 대한 열망을 형상화한다. 이러한 문학 가운데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잘 드러내는 양식이 시다. 시는 본디 노래다. 노래란 감정과 생각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 인간적인 자연스러운 목소리는 삶과 사회에 대한 공감을 일으키고 통찰을 안겨준다.

    둘째, 박지원과 정약용이 가족을 다룬 시만 쓴 것은 아니었다. 외려 자연과 사회를 다룬 시가 더 많다. 그런데도 가족 시를 주목하는 것은 가족의 의미 때문이다. 가족은 동아시아에서든 서구 사회에서든 국가와 함께 공동체의 대표 격이다. 특히 우리나라를 위시한 동아시아에서는 개인 및 사회생활의 가장 일차적 단위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이 가족은 21세기에 들어와 극적 변동을 겪고 있다.



    박지원의 가족 詩

    박지원은 시를 많이 남기지 않았다. 한학자 신호열과 국문학자 김명호가 현대 국어로 옮긴 ‘연암집’에 아들 박종채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버님이 본시 시인으로 자처하지 아니하여 남과 더불어 창수(唱酬)한 것이 극히 드물었으며, 보통 요구에 응해 지은 작품들도 상자에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작품 제목이 몹시 적다.” 박지원의 시는 ‘연암집’ 제4권 ‘영대정잡영’에 42수가 실려 있고, 다른 곳에 8수가 전한다.

    연암집. [한국학자료원]

    연암집. [한국학자료원]

    작품 수가 적은 만큼 박지원의 가족 시 또한 드물다. 그 가운데 널리 알려진 작품은 형 박희원이 세상을 떠난 후 형을 그리워하며 쓴 시다.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고 /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나면 우리 형님 쳐다봤지 / 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드메서 본단 말고 / 두건 쓰고 옷 입고 가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연암에서 선형(先兄)을 생각하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에서 박종채는 1787년(정조 11년) 형 박희원의 죽음을 애도한 작품이라고 적고 있다. 형 얼굴에서 아버지 얼굴을 떠올리고, 내 얼굴에서 다시 형 얼굴을 떠올리고 있다. 더는 볼 수 없는 형에 대한 그리움을 애틋하게 담고 있다.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년)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 박희원과는 열다섯 살 차이였다. 박지원에게 형 부부는 또 하나의 부모 같은 존재였다. 형과 형수는 나이 어린 동생이자 시동생인 박지원을 자식처럼 돌봤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수가 세상을 떠난 후 이제 형마저 곁에 없으니 박지원의 슬픔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박지원은 조선 후기 북학파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 북학파는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려고 한 이들이었다. 박지원, 그의 벗 홍대용, 그의 제자들인 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서구 등이 북학파에 속했다. 이들 가운데 박지원에게 가장 가까운 이는 홍대용과 이덕무였다. 홍대용이 연상의 벗이었다면, 이덕무는 네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은 제자이자 친구였다.

    이덕무는 서얼 출신이었다. 정조의 서얼 등용 정책에 따라 박제가, 유득공 등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을 지냈다. 이덕무의 호 가운데 하나가 ‘간서치(看書痴)’였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이다. 그만큼 그는 당대에 가장 박식한 지식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덕무가 박지원을 존경한 것처럼 박지원도 이덕무를 아꼈다. 이덕무가 세상을 떠나자 박지원은 “꼭 나를 잃은 것 같아”라고 탄식했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을 보면, 이덕무가 ‘연암에서 선형을 생각하다’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적고 있다. “정을 표현한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게 해야 비로소 진실되고 절절한 것”이라고 이덕무는 논평했다.

    박지원은 2남 2녀를 뒀다. 자식들에 대한 연암의 사랑 또한 각별했다. ‘연암집’에는 자식들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글이 거의 없다. 국문학자 박희병이 현대 국어로 옮긴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라는 책은 자식들에 대한 박지원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연암의 편지 33통으로 이뤄져 있다. ‘연암집’에 실려 있지 않은 개인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은 박지원의 섬세한 사랑을 발견하게 한다.

    “전후에 보낸 쇠고기 장볶이는 잘 받아서 조석간에 반찬으로 하니? 왜 한 번도 좋은지 어떤지 말이 없니? (…) 고추장은 내 손으로 담근 것이다.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 주면 앞으로도 계속 두 물건을 인편에 보낼지 말지 결정하겠다.”

    1796년(정조 20년)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서울에 사는 큰아들에게 쓴 편지다. 쇠고기 장볶이와 직접 담근 고추장을 보내는 아버지의 섬세하고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시간을 초월한다. 이때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 박지원이 혼자 자녀들을 돌보던 시기였다.

    박지원의 개인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는 당연히 전주 이씨 부인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동갑이었다. 열여섯 살에 결혼했다. 아내 전주 이씨가 51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35년 동안 함께 살았다.

    박지원에게 처가는 작지 않은 의미를 가졌다. 박지원은 장인 이보천에게 ‘맹자’를, 처숙 이양천에게 ‘사기’를 배웠다. 학문적 스승들이었다. 더해 처남 이재성은 평생지기였다. ‘연암집’에는 장인과 처숙의 제문, 처남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특히 ‘장인 처사 유안재 이공에 대한 제문’은 박지원이 품고 있던 한없는 존경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박지원이 근대적 감각을 갖고 있었지만, 시대적 구속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가부장주의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성보다 남성을, 부인 못지않게 친구를 더 중시했다. 그러나 박지원은 때때로 그 시대적 구속을 넘어섰다. 박종채는 ‘나의 아버지 박지원’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여읜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맏며느리 이 씨의 상을 당하셨다. 그래서 끼니를 챙겨줄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혹 소실을 얻으라고 권했지만, 아버지는 우스갯소리로 대꾸할 뿐 종신토록 첩을 두시지 않으셨다. 친한 벗들 가운데에는 이 일을 갖고 아버지를 칭찬하는 사람이 많다.”

    첩 또는 소실을 두는 것은 전통사회의 나쁜 가부장주의다. 현대사회에서는 당연히 용납해서 안 되는 것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박지원은 18년 동안 혼자 살았다. 박지원의 내면을 모두 알 순 없지만, 그가 아내 한 사람을 평생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에서 박종채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가 도망시(悼亡詩) 20수를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 시를 잃어버려 볼 수 없다고 애통해했다. 도망시란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다. 중국과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 적잖이 창작됐다. 박지원 역시 도망시를 남긴 거였다.

    이 도망시 20수 가운데 2수가 얼마 전 발견됐다. 김명호는 ‘연암 문학의 심층 탐구’라는 저서에서 문인 유만주의 일기 ‘흠영’이 전하는 박지원의 도망시 두 편을 소개하고 해설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한 침상에서 지내다가 잠시 헤어진 지 하마 천년이 된 듯 / 시력이 다하도록 먼 하늘로 돌아가는 구름 바라보네 / 하필이면 나중에 오작교 건너 만나리오 / 은하수 서쪽 가에 달이 배처럼 떠 있는데.”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을 표현한 작품이다. 아내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천년이 지난 것처럼 느껴지고, 하늘 멀리 사라지는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자신과 아내를 견우와 직녀로 비유하고, 서쪽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배로 삼아 은하수를 건너 아내를 만나러 가고 싶다고 박지원은 노래한다.

    ‘연암집’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내 평생 언문이라고는 한 글자도 모르기에, 50년 동안 해로한 아내에게도 끝내 편지 한 글자도 서로 주고받은 일 없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한이 될 따름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오랫동안 홀로 살아냈던 박지원은 1805년(순조 5년) 세상을 떠났다. 박종채는 아버지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마침내 이날 하늘의 가호도 그쳐 끝내 운명하셨으니, 유언은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말씀뿐이셨다. (…) 아아, 애통하다! 이해 12월 5일, 장단의 대세현(경기도 장단군 송서면) 남향에 자리한 어머니 묘에 합장했다.” 이렇게 박지원은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아내 옆에 자신의 몸을 누여 다시 만났다.

    정약용의 가족 詩

    전남 강진군의 의뢰로 전통 초상화법의 대가인 김호석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그린 정약용 초상화. [다산기념관]

    전남 강진군의 의뢰로 전통 초상화법의 대가인 김호석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그린 정약용 초상화. [다산기념관]

    정약용은 박지원과 달리 상당한 시를 남겼다. 국문학자 김상홍은 정약용의 시를 사회시, 악부시, 인륜시, 전원시, 서정시로 구분한 바 있다. 이 가운데 정약용의 인간적 면모를 잘 보여주는 것이 인륜시다. 유학자였던 만큼 정약용은 효도와 우애를 중시했고, 이에 대한 시를 적지 않게 썼다. 정약용의 시는 국문학자 송재소에 의해 ‘다산시선’이란 제목으로 현대 국어로 옮겨져 있다.

    가족이란 존재가 유독 큰 의미로 다가올 때는 행복을 느끼는 경우보다 불행을 마주하는 경우다.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로 유배를 떠났을 때 정약용은 가족에 대한 시를 많이 남겼다.

    “아버지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 어머니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 우리 가문 갑자기 뒤집어져서 / 죽고 사는 문제가 이 지경이 되었네요(…) 자식 낳아 부모님 기뻐하시며 / 잡아주고 끌어주고 애써서 길렀는데 / 부모 은혜 갚으리라 응당 말했지 / 이같이 꺾이리라 생각인들 했겠어요 / 이 세상 사람들께 바라는 바는 / 다시 자식 낳았다 기뻐 말기를.” (‘하담의 이별’)

    정약용이 유배지인 장기로 가면서 충주 선산에 들렀을 때 쓴 작품이다. 그의 나이 마흔 살 때였다. 신유박해로 정약용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둘째 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를 갔고, 셋째 형 정약종은 순교했다. 그리고 자신도 유배를 떠나게 됐으니 부모 묘소를 들렀을 때 정약용의 심정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식을 낳았다고 기뻐하지 말라고 정약용은 탄식하고 있다.

    정약용에게 스승이자 지기(知己)는 둘째 형 정약전이었다. 정약전은 두 번째 유배지 흑산도에서 물고기를 연구한 ‘자산어보(玆山魚譜)’(‘현산어보’라고도 읽음)를 집필했다. ‘자산어보’는 조선시대에 쓰인 이채로운 자연과학 저작이었다. 정약용은 긴 유배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정약전은 안타깝게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래의 시는 첫 번째 유배지인 신지도에 있는 둘째 형을 그리워하며 쓴 것이다. 정약용 자신도 장기에 유배돼 있을 때였다.

    “신지 섬 아스라이 멀고 멀지만 / 분명히 이 세상에 있는 섬이라 / 수평으로 궁복해에 연접해 있고 / 비껴서 등룡산을 마주해 있네 / 달이 져도 소식 한 자 들리지 않고 / 뜬구름만 저 혼자 갔다가 돌아오네 / 언젠가 지하에서 다시 만나면 / 우리 형제 얼굴에 웃음꽃 피리.” (‘가을날 형님을 그리며’)

    소식 없는 둘째 형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정약용은 자유롭게 오가는 뜬구름에 빗대 쓸쓸하게 표현한다. 유배가 언제 끝날지 모르기에 저승에서나 웃으며 만나자는 구절은 마음 시리게 한다.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형제는 편지를 통해 학문적 토론을 이어갔다. 더없이 불행한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지식인으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보낸 정약용의 편지. [보물창고]

    유배지에서 보낸 정약용의 편지. [보물창고]

    이러했던 둘째 형을 잃은 슬픔은 정약용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정약용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를 알아주는 분이 죽었으니 또한 슬프지 않겠느냐? 경서에 관한 240책의 내 저서를 새로 장정하여 책상 위에 보관해 놓았는데 이제 그것을 불사르지 않을 수 없겠구나”라고 쓰고 있다. 정약용과 정약전의 우애는 이렇듯 남달랐다.

    유배를 떠난 후 정약용에게 가장 애틋한 존재는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이었다. 정약용이 시의 모범으로 삼았던 시성(詩聖) 두보 역시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시를 남겼다. 두보는 ‘달밤(月夜)’이란 시에서 그 그리움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오늘밤 부주 하늘에 뜬 달을 / 아내는 홀로 바라보려나 / 더욱 가여운 어린 자식들은 / 장안의 아비를 그리는 엄마 마음을 알지 못하리.”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가족을 부주에 피난시킨 후 장안에 혼자 남았을 때 두보가 쓴 시다. 아내와 자식에 대한 그리움은 정약용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용은 6남 3녀를 뒀지만, 그 가운데 4남 2녀를 일찍 잃었다.

    “도연명 아들보다 사뭇 낫구나 / 아비에게 밤 부쳐 보낸 것을 보니 / 한 자루 조그마한 이 밤알들이 / 천리 밖 궁한 나를 위로해 주네 / 내 생각 잊지 않은 그 마음 어여쁘고 / 봉함한 그 솜씨 생각이 나네 / 맛보려 생각하니 도리어 맘에 걸려 / 서글피 먼 하늘만 바라보노라.” (‘밤’)

    첫 번째 유배지인 장기에서 쓴 시다. 유배를 간 정약용에게 아들이 밤을 보내오자 기쁘면서도 서글픈 마음을 읊은 작품이다. 정약용은 도연명의 아들이 배와 밤을 찾은 것을 떠올리며 밤을 보내준 아들을 칭찬하고 흐뭇한 마음을 시로 표현한다. 하지만 두고 온 자식들의 앞날을 생각하면 그 마음은 이내 서글픔으로 바뀐다.

    비슷한 시기에 쓴 다른 시에서 정약용은 “부지런히 힘써서 남새밭 가꾸어 / 맑고 밝은 세상에 일민(逸民)이 되어라”(‘아들에게’)라고 당부한다. 일민이란 벼슬하지 않고 숨어 지내는 사람을 뜻한다. 유배는 정약용에게 견디기 힘든 좌절인 동시에 자식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폐족이 돼버린 자식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정약용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 유배지인 강진에 있은 지 10년 만에 찾아온 둘째 아들을 보고 쓴 시 또한 인상적이다. “얼굴 생김은 내 자식 같은데 / 수염이 자라서 딴사람 같구나 / 집안 편지를 가지고 왔지만 / 아직도 내 자식인지 미심쩍다네”(‘둘째 아들을 보고’)라는 고백은 어느새 장성한 아들에게 느끼는 대견함과 자신의 부재에 대한 미안함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정약용의 아내는 유배의 고통을 누구보다 크게 느꼈을 가족이었을 것이다. ‘다산시선’을 보면 아내를 언급하는 작품이 더러 나온다. 아래의 ‘회혼일(回婚日)에’는 결혼 60년을 맞이해 쓴 시다. 정약용이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성공과 좌절로 이어지는 삶에 대한 무상한 심정, 득의와 고난의 시기를 함께해 온 아내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다.

    “육십년이 바람처럼 순식간에 지났는데 / 복사꽃 핀 봄빛은 신혼 시절 같구나 (…) 이 밤 읽는 목란사(木蘭詞·남편이 아내에게 읽어주었다는 악부시) 소리 더욱 다정하고 / 그 옛날 하피(霞帔·글을 썼던 붉은색 치마)엔 먹흔적 아직 있네 / 갈라졌다 합해지니 진짜 나의 모습이라 / 합한주 술잔 남겨 자손에게 물려주리.” (‘회혼일에’)

    전통사회의 평균수명을 생각할 때 부부가 회혼을 맞이하기란 쉽지 않다. 정약용은 1776년(영조 52년) 2월 22일 풍산 홍씨 부인과 결혼해 60년 되는 1836년(헌종 2년) 2월 22일 회혼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일흔다섯이었다. 이 시는 회혼일 3일 전에 쓴 거였다.

    정약용은 부모에게 효심 가득한 아들이었고, 형님에게 우애 깊은 아우였다. 자식들에게는 엄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였고, 아내에게는 예의를 갖춘 다정한 남편이었다. 유교에서 강조한 삼강오륜을 정약용은 구체적 삶에서 실천했고, 이러한 정약용의 윤리적 태도는 그의 시에 오롯이 반영돼 있다.

    돌아보면 정약용의 삶은 극적이었다. 전반부가 영광을 누린 삶이었다면, 후반부는 18년의 유배라는 좌절을 견뎌내야 한 삶이었다. 이러한 고통의 시간은 한편으로 가족에 대한 그의 사랑을 더욱 깊게 했다. 이 가족에 대한 사랑은 다른 한편으로 그에게 기나긴 유배를 의연히 견뎌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안겨준 것으로 보인다.

    전통사회의 삶과 현대사회의 삶은 같고도 다르다. 보편적 인간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시대적 구속을 받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정약용의 가족 시는 자식이자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인간적 모습을 애틋하면서도 기품 있게 전달하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인간적 모습은 전통적 유교 윤리 안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효도 등 유교적 가치를 일방적으로 거부하자는 게 아니다. 그것이 놓인 현재적 자리와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1세기 가족의 사회학

    오늘날 가족의 형태는 핵가족의 경우 ‘내 새끼 지상주의’가 견고한 반면, 1인가구의 경우 ‘각자도생주의’가 공고화하고 있다. [Gettyimage]

    오늘날 가족의 형태는 핵가족의 경우 ‘내 새끼 지상주의’가 견고한 반면, 1인가구의 경우 ‘각자도생주의’가 공고화하고 있다. [Gettyimage]

    사회학적으로 가족이란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공동체다. 인간은 국가와 시장이라는 제도 속에 살아가는 동시에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 터 잡고 있다. 고전적 시각에서 가족은 혼인과 출산으로 연결된, 정서적으로 친밀한 1차 집단을 의미했다.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핵가족이 빠르게 확산됐다. 가부장제와 사적 친밀성은 핵가족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가족은 다양해졌다. 서구의 경우 가족의 형태는 ‘가족(the family)’이 아니라 ‘가족들(families)’로 존재한다. 전통적 가족 외에 한부모 가족 또는 재결합 가족, 그리고 LGBT(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 가족 등이 존재한다. 21세기에 들어와서 가족을 말할 때 하나의 보편 모델을 상정하지 않는 게 사회 흐름을 이뤄왔다.

    우리나라 가족에 대해서는 사회학자 김동춘의 연구가 주목할 만하다. 김동춘의 저작 ‘한국인의 에너지, 가족주의’에 따르면, 한국의 근대는 독자적 자유와 책임을 한 몸에 지닌 서구적 ‘개인’의 탄생사가 아니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유기적 단위 속의 개인인 ‘가족 개인’의 탄생사로 봐야 한다. 김동춘은 우리나라 가족과 가족주의가 불안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받을 수 있는 안식처이자 도피처이며, 국가와 시장의 폭력을 버텨내는 울타리였다고 분석한다.

    우리 사회 전통과 현대가 보여주는 연속 및 단절에서 가족은 양면적 특성을 드러내 왔다. 한편에서 볼 때 근대화 과정에서 가족은 크게 변화해 왔다. 대가족의 감소, 핵가족의 증대, 가족의 소규모화가 가족 변동을 이끌었다. 가장 극적 변화는 1인가구의 변동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1인가구의 비중은 전체 가구의 34.5%를 차지했고, 그 규모는 750만 가구를 넘어섰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볼 때 핵가족의 재생산에서 전통적인 가족문화가 여전히 큰 영향을 미쳐왔다. 박지원과 정약용의 가족 시에서 발견할 수 있듯, 그리고 김동춘의 분석에서 살펴볼 수 있듯, 가족은 그 구성원들에게 사회적·정서적 보호막을 이뤄왔다. 특히 정서의 영역에서 가족은 애틋함과 힘을 동시에 안겨주는 존재적 거점이었다.

    이러한 정서적 애틋함과 힘에서 물론 전통과 현대 사이에 거리가 존재한다. 박지원과 정약용의 가족 시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전통사회의 가족문화는 효도와 자애와 우애라는 유교적 윤리 및 문화에 기반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가족문화에서 자식에 대한 사랑인 자애는 극대화돼 있는 반면 효도와 우애는 적잖이 퇴색해 있다.

    21세기 현재, 문화적 측면에서 가족은 그 형태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핵가족의 경우 ‘내 새끼 지상주의’가 견고한 반면, 1인가구의 경우 ‘각자도생주의’가 공고화하고 있다. 내 새끼 지상주의가 공동체주의의 21세기적 변형이라면, 각자도생주의는 개인주의의 21세기적 변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21세기 우리 사회에서 가족의 초상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은, 최근 저출생·고령화 경향이 증거하듯, 새로운 전환의 지점에 도달해 있고, 이에 따른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 있다. 핵가족화 강화에 따른 자녀와 부모의 돌봄 문제, 1인가구 증가에 따른 고령 세대의 빈곤과 고독사 문제, 이혼 증가에 따른 편부·편모 내지 조손 가족 문제 등은 현재 우리 사회 가족이 직면한 중요한 이슈다.

    바로 이점에서 21세기 가족 변동에 걸맞은 가족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거시적 차원에서 저출생·고령화에 대한 대책이, 미시적 차원에서 돌봄노동에 대한 대처가 중요하다. 나아가 1인가구 고령 세대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복지정책의 강화도 중요하다. 공동체주의의 관점에서 가족을 일방적으로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가족이 여전히 소중한 사람에게 그 가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을 정부는 사려 깊게 추진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논리보단 사랑이, 이성보단 감성이, 말보단 침묵이 감싸 흐르는 공간이 가족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던 가족은 21세기에 들어와 공적 영역의 이슈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한국적 가족과 그 변동에 대한 숙고와 이에 기반한 정책 모색 및 추진을 더는 미뤄선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 1960년 경기 양주 출생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센터 코렛 펠로
    ● 現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저서 : ‘현대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한국의 현대성과 사회변동’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신기욱과 공편)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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