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사이버세계는 범죄천국, 막을 ‘법’이 없다

  • 이나리 자유기고가

    입력2007-01-26 1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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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컴퓨터와 네트워크가 연출하는 사이버 스페이스는 진짜 세계와 어떤 관계인가. 파죽의 기세로 사이버 스페이스가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사이 현실의 법과 규범, 문화적 패러다임은 방향을 잃은 채 허둥대고 있다. 》
    여러 명이 동시 접속해 가상사회에서 모험을 즐기는 온라인 머드게임. 그중 ‘리니지’는 순간 동시 사용자 수가 1만여 명을 넘어설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국산 멀티 플레이어 머드게임이다.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이 게임 안에서 사용자들은 ID로 불리는 자신의 ‘아바타(분신)’를 통해 다양한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친구를 사귀고,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며, ‘혈맹’이라는 이름의 가족 관계도 형성한다. 악당, 사기꾼, 살인자가 있는가 하면 군인, 상인, 군주도 존재한다. 이들은 서로를 지배하고 지배받으며, 물건을 사고 팔거나 혁명을 일으키기도 한다.

    있으되 또한 있지 않은 것. 게임 세상은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전형이다. 그런데 요즘 이 가상공간 안에서 수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게임 속 인물과 정황들이 ‘감히’ 현실계를 넘보기 시작한 것이다.

    게임방 습격 사건

    리니지 세상에서 각자의 ‘위치’는 등급(레벨)과 소유한 아이템의 종류에 따라 결정된다. 게임 경험치가 높을수록 등급도 올라가며, 그 과정에 칼, 갑옷, 변신반지 등 다양한 아이템을 얻게 된다. 강한 능력의 소유자는 약한 자들을 지배하거나 공격해 죽일 수도 있다.



    상황이 이런만큼 참가자들은 더 높은 등급, 양질의 아이템을 소유하기 위해 밤잠을 잊은 채 게임에 몰두한다. 여기서 거래가 발생한다. 자신이 키운 캐릭터나 아이템을 팔아 ‘진짜 돈’을 버는 고수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9급 일본도(刀) 150만원, 변신반지 60만원, 레벨 45 캐릭터 15만원…. 가상의 물건들에 현실의 화폐 가치가 매겨지고 매매 브로커도 생겨났다. 최근에는 급기야 도난사건, 탈취사건까지 일어났다.

    게임방 주인 지모씨. 하루 15시간씩 3개월 동안 게임에 매달려 획득한 자신의 가상 무기들이 송두리째 없어진 사실을 발견했다. 혼비백산한 지씨는 서울 성동경찰서에 도난 신고를 냈다. 경찰은 리니지 개발·운영업체인 엔씨소프트와 공조해 범인 색출에 나섰다. ID 역추적을 통해 찾아낸 범인은 평소 지씨의 게임방에 드나들던 고등학생 2명. 우연히 지씨의 게임 ID와 비밀번호를 알게 된 이들이 게임 속에 들어가 지씨의 아이템들을 자기 캐릭터들에게 다 주어버린 것이다.

    범인은 찾았지만 처벌 규정이 모호했다. 지씨가 도난당한 아이템의 현금 가치는 200여만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 법 어디에도 게임 속 가상 물품을 ‘재산’으로 인정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고심 끝에 경찰은 차선책을 택했다. 두 고등학생은 ID를 도용한 사기 죄목으로 불구속 입건됐다.

    도난보다 더 황당한 건 탈취사건이다. 서울의 한 고등학생이 게임 중 다른 캐릭터를 공격해 숨지게 했다. 이 과정에 둘 사이엔 채팅을 통한 반말과 욕설이 오갔다. 화가 난 상대방은 ‘직접 붙어보자’는 도전장을 내밀었다. 고등학생은 별생각 없이 자신이 머물고 있는 게임방의 위치를 알려줬다. 그런데 ‘죽은’ 그가 정말로 찾아왔다. 그것도 힘깨나 쓰는 ‘동생’들을 여럿 데리고. 그는 한 지방도시의 유명 폭력조직 중간 보스였다.

    고등학생은 흠씬 두들겨 맞았다. 몇 달 동안 공들여 모아왔던 가상 무기들도 모두 빼앗겼다. 폭력배의 목적은 진짜 돈이 아니라 가상 재산이었다. 바야흐로 사이버 스페이스에 필요한 재산 획득을 위해 물리적 세계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피해자는 고등학생이 아니라 초등학생이 될 수도 있다.

    가상 사회, 또 하나의 ‘현실’

    사이버 스페이스의 현실 개입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사이버 여론은 현실계의 정치, 문화,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최근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탤런트 서갑숙씨의 성체험 고백서 논란만 해도 그렇다. 사법부가 이 책의 음란성 여부를 가늠하는 데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의 하나로 삼았던 것은 바로 네티즌의 의견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요즘 대중 스타들은 TV 못지않게 통신 세계 홍보에 큰 비중을 둔다. 네티즌들의 인정을 받느냐 받지 못 하느냐에 따라 현실계에서 성공 여부가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방송인 백지연씨 명예훼손 사건, 이른바 ‘O양 비디오’ 사건의 진원지도 바로 사이버 스페이스였다. 빠르고 집중적이며 놀랄 만큼 강력한 여론 형성의 장. ‘사이버 스페이스를 지배하는 자가 현실계를 지배한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덜 떨어진 몽상가의 헛소리가 아니다.

    그렇더라도 가상 세계를 바라보는 일반의 시각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보조, 또는 기능성 증대를 위한 수단이라는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 한마디로 사이버 스페이스는 현실 공간의 확장일 뿐이라는 것. 기본적으로 인간, 그리고 컴퓨터 네트워크로 대표되는 재화 없이는 사이버 스페이스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이버 대학, 사이버 쇼핑몰, 사이버 증권거래소, 사이버 분향소, 사이버 묘지, 사이버 애완견, 사이버 뱅크, 사이버 화폐…. 분명 새롭고 놀라운 변화들이지만 그렇더라도 그 역할은 철저히 현실의 규제를 받기 마련 아닌가.

    그런데 요즘 그런 시각에 변화를 줄 만한 현상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사이버 스페이스가 자기만의 독자적인 규범, 가치체계, 존재 방식을 통해 현실 세계에 구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죽지세로 뻗어가는 가상 세계의 가공할 영토 확장 앞에서 현실의 법, 규칙, 문화적 패러다임은 종종 본연의 임무를 상실한 채 방향을 잃고 허둥거린다.

    문화평론가 장은수씨는 “이미 우리는 디지털 공간과 현실 공간의 잡종 교배를 통해 창출된 새로운 사회공간 속에서 살고 있다”고 단언한다. 엔씨소프트 김택진 사장은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1990년대를 ‘인류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살기 시작한 때’라 정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에게 사이버 스페이스는 더 이상 현실계의 그림자가 아니다. 그 자체로 실존하는 또 다른 차원의 ‘현실’인 것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독자성을 담보하는 것은 현실 공간과는 명확히 다른 존재 양태와 소통 방식이다. 그 첫머리를 장식할만한 특성은 단연 익명성이다.

    익명성은 개인에게 대안적 자아를 창출하고, 가능성을 시험하며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도록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가상 공간의 익명성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지난 세기 인간 존재 증명의 빛나는 명제를 뿌리부터 뒤흔든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인간은 얼마든지 ‘생각한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가상 세계에서 그는 오직 익명의 기호, 죽고 태어남이 자유로운 아바타일 뿐이다.

    회사원 김명훈(가명)씨. 30대 중반의 기혼남인 김씨는 게임 ‘리니지’ 속에서는 20대 초반의 아리따운 미혼여성이다. ‘공주’ 캐릭터를 선택해 만화 속 여주인공처럼 예쁜 이름(ID)도 지었다. 상대적으로 여성캐릭터 수가 적은 게임 세계에서 김씨는 제법 인기 있는 ‘여자’다. 요염함이 물씬 풍기는 말솜씨(채팅 내용)가 매력 포인트. 미모(?)에 반한 남성참가자들로부터 새 아이템을 선물받기도 하고 가끔은 청혼도 받는다. 최근엔 그중 한 남성캐릭터와 결혼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중이다. 강력한 혈맹의 평판 좋은 군주인데다 마음도 잘 맞기 때문.

    “여성 캐릭터를 선택한 건 ‘미인계’를 써 좀더 빨리 고수가 되기 위해서였어요. 해보니 나름대로 색다른 재미가 있더군요. 물론 실수로 제 ‘정체’가 들통나버릴 수도 있겠죠. 그럼 또 어떻습니까. ‘자살’한 다음 다른 캐릭터로 ‘부활’하면 되지요. 지금까지 모아온 아이템들이 좀 아깝긴 하겠지만요.”

    익명성이 힘을 발휘하는 곳은 비단 게임 속만이 아니다. 가상 현실 속에서는 어디서건 ‘실제의 나’를 드러내지 않은 채 평소 상상으로밖에 할 수 없던 수많은 일들을 ‘진짜로’ 행할 수 있다. ‘나’의 생김새조차 마음대로 변형이 가능하다. 나이, 성별, 직업, 성격 등 일체의 물리적 특성은 그곳에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온순하고 방어적인 사람이 통신 세계에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무장한 무뢰한이 된다거나, 하릴없는 백수가 대학 교수 행세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사이버섹스 중독자들

    미국 ‘뉴요커’지의 카툰에 등장한 “인터넷에서는 누구도 당신이 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메시지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익명성에 대한 절묘한 표현이다. 개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람인 당신이 개가 된다 한들 누구도 말리거나 규제할 수 없다. 금기는 사라지고 ‘환상 체험’이 구체화하는 것이다.

    환상을 가능케 하는 둘째 요소는 사이버 세상이 선사하는 놀랄 만큼 생생한 현실감이다. 익명성, 그리고 현실을 잊고 몰입하게 만드는 특유의 사실감은 종종 사이버 스페이스와 현실계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접점에 선 사람들을 ‘중독’상태로 몰고 간다.

    게임 중독, 사이버섹스 중독, 인터넷 중독…. 가상 세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현실의 인간 관계, 자아정체성, 책임과 의무로부터 멀어져간다. ‘그 곳’이 현실이 되고 ‘이 곳’이 가상이 되는 공간전도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29살의 취업준비생인 정진호(가명)씨는 3개월 전부터 서울의 한 종합병원 정신과에서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 원인은 인터넷 중독. 3년 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인터넷은 오직 취직을 위한 학습 영역일 뿐이었다. 그러나 실업자 생활이 길어지면서 어느새 “인터넷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가 가장 탐닉하는 것은 인터넷 게임. 매일 게임방을 찾아 체력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마우스를 쥐고 놓지 않는다. 집에서는 채팅과 웹서핑에 몰두한다. 아무래도 섹스 사이트 탐색이나 문자를 이용한 온라인 섹스에 들이는 시간이 많다.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다 보니 가족, 친구들과도 많이 소원해졌다. 화가 난 어머니가 컴퓨터를 없애버렸을 때는 살의를 느끼기도 했다.

    급기야 지난 가을엔 게임에 몰두하느라 취업 면접 시간을 놓치는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실업의 고통을 잊으려 몰두한 인터넷이 결국 정상적인 생활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 된 것.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정씨는 가족들의 권유에 따라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컴퓨터를 보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우울증과 자기모멸감, 죄책감도 줄어들지 느낀다.

    이렇듯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탐닉은 도피 또는 일탈의 심리와 맞닿아 있다. 내 맘에 들지 않는 나,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욕구불만이 또 다른 세상의 삶에 몰입하고 동경하게 하는 것이다. (주)나우콤 임문영 과장은 “통신 중독자는 남성이 여성보다 월등히 많다. 사용자 수가 많은 데도 원인이 있지만, 그보다는 명령하는 그대로 고분고분 움직이는 컴퓨터의 기계적 특성이 지배욕이 강한 남성들의 구미에 잘 맞기 때문일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가상 세계가 아무리 사용자를 만족시킨다 해도 컴퓨터 전원을 끄고 나면 그를 기다리는 건 여전히 지루하고 불만족스러운 일상이다. 두 세계 사이에서 분열된 자아는 정체성 혼란의 늪으로 빠져들어간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확대가 현실계의 일상, 가정, 심리적 안정을 붕괴시키고 나아가 인간 소외를 심화시키리란 어두운 전망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지점이다.

    익명성, 금기 도발, 중독성, 심리적 현실감이라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무(MOO,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을 도입한 가상사회형 게임. 참가자들이 직접 그 세계를 구성하는 객체를 만들며, 객체의 속성과 행동을 정의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의 하나인 람다무(LambdaMOO)에서 ‘강간’ 사건이 벌어졌다. 미스터 벙글이란 ID를 가진 회원이 리빙룸이라는 방에서 두 여성 회원을 성적으로 유린한 것.

    먼저 레그바, 두 번째로 스타싱어라는 여성 ID를 자신의 ID와 강제로 성교하게 만든 다음, 이어 두 여성이 서로 성행위를 하도록 조작했다. 그 도중에 벙글은 차마 생각할 수 없는 가학성 변태행위를 계속했다. 미스터 벙글의 잔혹 행위는 한 위저드(가상 사회형 게임에서 일반 참가자보다 더 많은 힘을 갖고 있는 아바타. 대개 시스템 관리자이며 게임 내 분쟁 해결이 주 업무)가 나타나 그를 새장(일종의 감옥) 속에 가둔 다음에야 겨우 끝이 났다.

    강간을 당한 여성 회원들은 곧 이 사건을 게시판에 공개했다. 두 여성은 비록 육체적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분신인 ID가 잔혹 행위를 당하는 동안 마치 직접 강간을 당하는 듯한 고통과 치욕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회원들 간에는 미스터 벙글에 대한 처벌과 향후 대책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결국 미스터 벙글은 분노에 찬 한 위저드의 개인적 결정에 의해 회원권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거짓말처럼 ‘부활’했다. 미스터 저스트라는 ID로 또다시 등록해 버젓이 활동중인 것을 다른 회원이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또 다시 추방을 당했을까? 그렇지 않다. 아무리 내쫓아도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언제든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체가 아닌 ID로.

    람다무 강간사건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일어나는 반사회적 행위들을 제재할 방법이 거의 없음을 실감케 한다. 전혀 다른 세계인 그곳에 현실의 법을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행위자의 익명성이 보장되는 한 ‘색출’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터넷 특유의 가공할 파급력이 합세하면 부작용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O양 비디오가 그토록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인터넷망을 타고 보급된 까닭이었다. 최초로 동영상을 올린 이는 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보고 다시 내려 받아 퍼뜨린 사람은 수백, 수천 명이었다.

    사이버 성폭력은 어떤가. 만일 누군가가 한 여성을 궁지에 몰아넣고 싶다면 인터넷에 그녀의 신상명세와 이상야릇한 글 몇 줄만 올리면 된다. 행위자는 한 명이지만 그 영향력은 세계로 확산된다. 사이버 스페이스에는 국경도, 거리도, 시간차도 없기 때문이다.

    국경 없는 시대의 법

    가상과 현실의 경계, 그 혼란의 접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중에는 개인을 넘어 기업, 국가, 심지어 인류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만한 것도 적지 않다. 전세계적으로 폭증하고 있는 인터넷 관련 소송이 그 증거다. 중심에 던져진 문제는 사이버 스페이스와 법이다.

    앞에서 살펴본 리니지 아이템 도난사건에서 알 수 있듯 현행법은 이미 현실이 되어 있는 각종 사이버 현상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꼭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오히려 인터넷 환경이 더 빨리, 광범위하게 자리잡은 미국의 경우 주마다 다른 관련법이나, 아직 정립되지 않은 사이버 스페이스의 지적 재산권·독점권·사생활 보호 문제로 연일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수석편집위원 프랜시스 케언크로스는 저서 ‘거리의 소멸’에서 “전자세계에 대한 단속의 세 가지 쟁점은 언론의 자유, 사생활 보호, 지적 재산의 단속”이라 말한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국경을 넘나드는 새 통신의 성격, 그리고 희미해진 경계다.

    사이버 스페이스에는 국경이 없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활용되는 각 지역에는 저마다의 상황에 맞게 제정된 나름의 법규가 있다. 예를 들어 플로리다에는 포르노 사이트 개설에 대한 처벌 법규가 없으나 뉴욕에서는 불법행위가 되는 식이다. 국내에선 업무 시간에 포르노 사이트를 봐도 빈축만 살 뿐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곧바로 해고사유가 된다. 스웨덴에서는 아동 포르노 자료를 전송하고 판매하는 것은 불법이되 소유는 합법이다. 중동에서는 비키니 입은 소녀의 사진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옥에 갈 수 있다.

    한편 동일한 네트워크로 신문 방송 등 공적 영역뿐 아니라 개인 편지 교환, 상거래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지금의 상황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공사 구분을 매우 어렵게 만들고 있다. 네트워크 공유는 정부와 기업이 각 개인에 대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를 확보할 수 있게 한다. 정보 지배자의 출현 가능성은 조지 오웰의 ‘1984년’을 능가하는 공포로 다가온다.

    곧 도래할 가상 사회를 두려움 속에 맞지 않으려면 적합한 법, 그것도 국제적인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 유연하고 효율적인 법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사이버 스페이스법으로 연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윤웅기씨(사법연수원 29기생)는 “현재 사이버 공간과 법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대개 3가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가상 공간의 자율성과 특성을 존중하자는 견해다. 이를 지지하는 전문가들은 인터넷 음란 사이트나 소프트웨어 복제 등 있을 수 있는 모든 문제의 해결은 전적으로 인터넷상에서, 네티즌의 자율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현실 법을 그대로, 또는 조금 고쳐 적용한다는 시각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와 현실계 사이의 경계가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는 지금, 현실 법의 확장 적용이 불가피하다는 견해다. 초국적 기업이나 각국 정부, 세계무역기구 등 이른바 기득권층이 선호하는 해결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셋째는 주로 법학자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제3의 길’이다. 이들은 인터넷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전제하에 사이버 스페이스와 현실계 간에 교량이 될 만한 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범인 잡아도 처벌할 수 없는 현실

    현재 미국 유럽 등 인터넷 선진국들은 이른바 ‘인터넷 세계 통치’에 있어 자국에 유리한 국제 규약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중이다. 국내법 제정에 있어서도 가상공간과 현실계 사이에 발생하는 분쟁 및 범죄는 최소화하되, 디지털 산업은 활성화하는 방안을 찾아 시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1999년에만 ‘전자거래기본법률’, 인터넷을 이용한 다단계통신판매를 규율하는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 ‘음반·비디오물 및 게임물에 관한 법률’, 통신망을 통한 음란물과 스팸메일의 유통을 규제하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 또는 개정하는 등 성큼 다가온 사이버 세상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부처간의 불협화음, 미비한 현실 인식, 관련 업계와 시민단체의 참여 부족으로 인해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실정이다.

    보안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시큐어소프트의 이정남 이사는 사이버 범죄에 대한 국내 법규 및 수사 체계에 개선할 점이 많다고 주장했다.

    “범죄는 첨단인데 그걸 규제하는 법은 여전히 재래식입니다. 사이버 범죄는 범인을 잡기도 힘들지만 처벌하기도 어려워요. 마땅한 처벌 규정이 없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죠. 전문 인력도 부족하고, 이쪽 분야 수사의 특수성도 크게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현실에 걸맞은 법 제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변화하는 세상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마련하는 일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현실 대체를 어떻게 바라보고 준비해야 할 것인가.

    가상 공간의 확대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하나는 정보 공유, 직접 민주주의의 확대, 장벽 철폐 등을 근거로 열린 공동체의 가능성을 점치는 낙관론이다. 한편에선 그와 정반대로 정보 독점, 초국적 자본의 지배, 하위 문화의 말살 등을 이야기한다. 컴퓨터로 일하고 즐기는 생활이 일반화하면서 인간 소외, 공동체의 붕괴가 이어지리라는 어두운 전망도 있다.

    그러나 막상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는 그렇게 좋은 곳도, 또 그렇게 나쁜 곳도 아닌 듯하다. 끝없이 펼쳐진 무한증식의 새 영토. 그곳 역시 현실계처럼 이중적이어서 ‘열려 있는 동시에 닫혀 있으며, 공동체적인 동시에 반공동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미국의 정보사회학자 홀 배리언은 “어차피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넘쳐나는 표현의 자유, 부족한 사생활 보호, 지나치게 많은 정보 공급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구축은 이 모든 것을 전제로 끊임없이 노력할 때에만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통신전문가 김중태씨도 “사이버 스페이스의 시간은 현실의 그것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그때그때 속도를 따라잡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할 수 있는 것은 끝없는 토론과 대화를 통해 적정한 문화적 가치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씨가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N세대에 대한 디지털 문화 교육이다.

    “얼마 전 광고에까지 등장해 화제를 모았던 스타크래프트 세계 챔피언이 사실은 승률 조작을 통해 정상에 올랐다는 뉴스가 전혀져 통신과 인터넷의 게시판이 시끌벅적했다. 기능만 강조할 뿐, 정작 그 바탕이 돼야 할 네티켓(네티즌의 에티켓)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기성세대 탓이 크다. 코앞에 다가온, 아니 어쩌면 이미 시작된 디지털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능한 손놀림보다 진정한 의미의 디제라시(digeracy, digital╂literacy의 합성어. 디지털을 다루는 능력)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우리 사회도 ‘기술비평가’의 적극적인 활약이 필요한 시점에 다다른 듯하다. 기술비평가란 미래 사회, 특히 사이버 스페이스의 기술적 측면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는 전문가 집단을 말한다. 98년, 가상 사회와 관련된 저술 및 비평에 종사해온 미국의 문화비평가 열 명이 이른바 테크노리얼리즘의 8대 원칙을 천명하며 활동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다. ‘기술문명공포증’ 또는 ‘기술문명광’으로 대표되는 극단적 인식으로는 우리 시대의 기술 문명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 극단이 아닌 중간 지대, 즉 기술현실주의(테크노리얼리즘)의 관점에서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이 제시한 테크노리얼리즘의 8대 원칙 중에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미래에 관한 유의미한 관점들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도 정부는 여전히 중요한 구실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치외법권 지역이 아니다. 정부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관례를 존중하고 불필요한 통제를 해서는 안 되지만, 사생활 침해 우려 등 온라인 문제에 대처할 의무와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터넷은 혁명적일 뿐 유토피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정보는 지식이 아닌만큼 그것을 인간의 인식·인지·판단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곁들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거대한 사회세력이다. 그 장점과 약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

    바야흐로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세계 시민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떠오르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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