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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리포트|게임무기 탈취, ID 성폭력, 온라인 사기

사이버세계는 범죄천국, 막을 ‘법’이 없다

  • 이나리 자유기고가

사이버세계는 범죄천국, 막을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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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컴퓨터와 네트워크가 연출하는 사이버 스페이스는 진짜 세계와 어떤 관계인가. 파죽의 기세로 사이버 스페이스가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사이 현실의 법과 규범, 문화적 패러다임은 방향을 잃은 채 허둥대고 있다. 》
여러 명이 동시 접속해 가상사회에서 모험을 즐기는 온라인 머드게임. 그중 ‘리니지’는 순간 동시 사용자 수가 1만여 명을 넘어설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국산 멀티 플레이어 머드게임이다.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이 게임 안에서 사용자들은 ID로 불리는 자신의 ‘아바타(분신)’를 통해 다양한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친구를 사귀고,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며, ‘혈맹’이라는 이름의 가족 관계도 형성한다. 악당, 사기꾼, 살인자가 있는가 하면 군인, 상인, 군주도 존재한다. 이들은 서로를 지배하고 지배받으며, 물건을 사고 팔거나 혁명을 일으키기도 한다.

있으되 또한 있지 않은 것. 게임 세상은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전형이다. 그런데 요즘 이 가상공간 안에서 수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게임 속 인물과 정황들이 ‘감히’ 현실계를 넘보기 시작한 것이다.

게임방 습격 사건

리니지 세상에서 각자의 ‘위치’는 등급(레벨)과 소유한 아이템의 종류에 따라 결정된다. 게임 경험치가 높을수록 등급도 올라가며, 그 과정에 칼, 갑옷, 변신반지 등 다양한 아이템을 얻게 된다. 강한 능력의 소유자는 약한 자들을 지배하거나 공격해 죽일 수도 있다.

상황이 이런만큼 참가자들은 더 높은 등급, 양질의 아이템을 소유하기 위해 밤잠을 잊은 채 게임에 몰두한다. 여기서 거래가 발생한다. 자신이 키운 캐릭터나 아이템을 팔아 ‘진짜 돈’을 버는 고수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9급 일본도(刀) 150만원, 변신반지 60만원, 레벨 45 캐릭터 15만원…. 가상의 물건들에 현실의 화폐 가치가 매겨지고 매매 브로커도 생겨났다. 최근에는 급기야 도난사건, 탈취사건까지 일어났다.

게임방 주인 지모씨. 하루 15시간씩 3개월 동안 게임에 매달려 획득한 자신의 가상 무기들이 송두리째 없어진 사실을 발견했다. 혼비백산한 지씨는 서울 성동경찰서에 도난 신고를 냈다. 경찰은 리니지 개발·운영업체인 엔씨소프트와 공조해 범인 색출에 나섰다. ID 역추적을 통해 찾아낸 범인은 평소 지씨의 게임방에 드나들던 고등학생 2명. 우연히 지씨의 게임 ID와 비밀번호를 알게 된 이들이 게임 속에 들어가 지씨의 아이템들을 자기 캐릭터들에게 다 주어버린 것이다.

범인은 찾았지만 처벌 규정이 모호했다. 지씨가 도난당한 아이템의 현금 가치는 200여만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 법 어디에도 게임 속 가상 물품을 ‘재산’으로 인정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고심 끝에 경찰은 차선책을 택했다. 두 고등학생은 ID를 도용한 사기 죄목으로 불구속 입건됐다.

도난보다 더 황당한 건 탈취사건이다. 서울의 한 고등학생이 게임 중 다른 캐릭터를 공격해 숨지게 했다. 이 과정에 둘 사이엔 채팅을 통한 반말과 욕설이 오갔다. 화가 난 상대방은 ‘직접 붙어보자’는 도전장을 내밀었다. 고등학생은 별생각 없이 자신이 머물고 있는 게임방의 위치를 알려줬다. 그런데 ‘죽은’ 그가 정말로 찾아왔다. 그것도 힘깨나 쓰는 ‘동생’들을 여럿 데리고. 그는 한 지방도시의 유명 폭력조직 중간 보스였다.

고등학생은 흠씬 두들겨 맞았다. 몇 달 동안 공들여 모아왔던 가상 무기들도 모두 빼앗겼다. 폭력배의 목적은 진짜 돈이 아니라 가상 재산이었다. 바야흐로 사이버 스페이스에 필요한 재산 획득을 위해 물리적 세계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피해자는 고등학생이 아니라 초등학생이 될 수도 있다.

가상 사회, 또 하나의 ‘현실’

사이버 스페이스의 현실 개입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사이버 여론은 현실계의 정치, 문화,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최근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탤런트 서갑숙씨의 성체험 고백서 논란만 해도 그렇다. 사법부가 이 책의 음란성 여부를 가늠하는 데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의 하나로 삼았던 것은 바로 네티즌의 의견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요즘 대중 스타들은 TV 못지않게 통신 세계 홍보에 큰 비중을 둔다. 네티즌들의 인정을 받느냐 받지 못 하느냐에 따라 현실계에서 성공 여부가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방송인 백지연씨 명예훼손 사건, 이른바 ‘O양 비디오’ 사건의 진원지도 바로 사이버 스페이스였다. 빠르고 집중적이며 놀랄 만큼 강력한 여론 형성의 장. ‘사이버 스페이스를 지배하는 자가 현실계를 지배한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덜 떨어진 몽상가의 헛소리가 아니다.

그렇더라도 가상 세계를 바라보는 일반의 시각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보조, 또는 기능성 증대를 위한 수단이라는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 한마디로 사이버 스페이스는 현실 공간의 확장일 뿐이라는 것. 기본적으로 인간, 그리고 컴퓨터 네트워크로 대표되는 재화 없이는 사이버 스페이스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이버 대학, 사이버 쇼핑몰, 사이버 증권거래소, 사이버 분향소, 사이버 묘지, 사이버 애완견, 사이버 뱅크, 사이버 화폐…. 분명 새롭고 놀라운 변화들이지만 그렇더라도 그 역할은 철저히 현실의 규제를 받기 마련 아닌가.

그런데 요즘 그런 시각에 변화를 줄 만한 현상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사이버 스페이스가 자기만의 독자적인 규범, 가치체계, 존재 방식을 통해 현실 세계에 구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죽지세로 뻗어가는 가상 세계의 가공할 영토 확장 앞에서 현실의 법, 규칙, 문화적 패러다임은 종종 본연의 임무를 상실한 채 방향을 잃고 허둥거린다.

문화평론가 장은수씨는 “이미 우리는 디지털 공간과 현실 공간의 잡종 교배를 통해 창출된 새로운 사회공간 속에서 살고 있다”고 단언한다. 엔씨소프트 김택진 사장은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1990년대를 ‘인류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살기 시작한 때’라 정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에게 사이버 스페이스는 더 이상 현실계의 그림자가 아니다. 그 자체로 실존하는 또 다른 차원의 ‘현실’인 것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독자성을 담보하는 것은 현실 공간과는 명확히 다른 존재 양태와 소통 방식이다. 그 첫머리를 장식할만한 특성은 단연 익명성이다.

익명성은 개인에게 대안적 자아를 창출하고, 가능성을 시험하며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도록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가상 공간의 익명성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지난 세기 인간 존재 증명의 빛나는 명제를 뿌리부터 뒤흔든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인간은 얼마든지 ‘생각한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가상 세계에서 그는 오직 익명의 기호, 죽고 태어남이 자유로운 아바타일 뿐이다.

회사원 김명훈(가명)씨. 30대 중반의 기혼남인 김씨는 게임 ‘리니지’ 속에서는 20대 초반의 아리따운 미혼여성이다. ‘공주’ 캐릭터를 선택해 만화 속 여주인공처럼 예쁜 이름(ID)도 지었다. 상대적으로 여성캐릭터 수가 적은 게임 세계에서 김씨는 제법 인기 있는 ‘여자’다. 요염함이 물씬 풍기는 말솜씨(채팅 내용)가 매력 포인트. 미모(?)에 반한 남성참가자들로부터 새 아이템을 선물받기도 하고 가끔은 청혼도 받는다. 최근엔 그중 한 남성캐릭터와 결혼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중이다. 강력한 혈맹의 평판 좋은 군주인데다 마음도 잘 맞기 때문.

“여성 캐릭터를 선택한 건 ‘미인계’를 써 좀더 빨리 고수가 되기 위해서였어요. 해보니 나름대로 색다른 재미가 있더군요. 물론 실수로 제 ‘정체’가 들통나버릴 수도 있겠죠. 그럼 또 어떻습니까. ‘자살’한 다음 다른 캐릭터로 ‘부활’하면 되지요. 지금까지 모아온 아이템들이 좀 아깝긴 하겠지만요.”

익명성이 힘을 발휘하는 곳은 비단 게임 속만이 아니다. 가상 현실 속에서는 어디서건 ‘실제의 나’를 드러내지 않은 채 평소 상상으로밖에 할 수 없던 수많은 일들을 ‘진짜로’ 행할 수 있다. ‘나’의 생김새조차 마음대로 변형이 가능하다. 나이, 성별, 직업, 성격 등 일체의 물리적 특성은 그곳에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온순하고 방어적인 사람이 통신 세계에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무장한 무뢰한이 된다거나, 하릴없는 백수가 대학 교수 행세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사이버섹스 중독자들

미국 ‘뉴요커’지의 카툰에 등장한 “인터넷에서는 누구도 당신이 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메시지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익명성에 대한 절묘한 표현이다. 개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람인 당신이 개가 된다 한들 누구도 말리거나 규제할 수 없다. 금기는 사라지고 ‘환상 체험’이 구체화하는 것이다.

환상을 가능케 하는 둘째 요소는 사이버 세상이 선사하는 놀랄 만큼 생생한 현실감이다. 익명성, 그리고 현실을 잊고 몰입하게 만드는 특유의 사실감은 종종 사이버 스페이스와 현실계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접점에 선 사람들을 ‘중독’상태로 몰고 간다.

게임 중독, 사이버섹스 중독, 인터넷 중독…. 가상 세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현실의 인간 관계, 자아정체성, 책임과 의무로부터 멀어져간다. ‘그 곳’이 현실이 되고 ‘이 곳’이 가상이 되는 공간전도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29살의 취업준비생인 정진호(가명)씨는 3개월 전부터 서울의 한 종합병원 정신과에서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 원인은 인터넷 중독. 3년 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인터넷은 오직 취직을 위한 학습 영역일 뿐이었다. 그러나 실업자 생활이 길어지면서 어느새 “인터넷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가 가장 탐닉하는 것은 인터넷 게임. 매일 게임방을 찾아 체력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마우스를 쥐고 놓지 않는다. 집에서는 채팅과 웹서핑에 몰두한다. 아무래도 섹스 사이트 탐색이나 문자를 이용한 온라인 섹스에 들이는 시간이 많다.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다 보니 가족, 친구들과도 많이 소원해졌다. 화가 난 어머니가 컴퓨터를 없애버렸을 때는 살의를 느끼기도 했다.

급기야 지난 가을엔 게임에 몰두하느라 취업 면접 시간을 놓치는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실업의 고통을 잊으려 몰두한 인터넷이 결국 정상적인 생활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 된 것.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정씨는 가족들의 권유에 따라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컴퓨터를 보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우울증과 자기모멸감, 죄책감도 줄어들지 느낀다.

이렇듯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탐닉은 도피 또는 일탈의 심리와 맞닿아 있다. 내 맘에 들지 않는 나,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욕구불만이 또 다른 세상의 삶에 몰입하고 동경하게 하는 것이다. (주)나우콤 임문영 과장은 “통신 중독자는 남성이 여성보다 월등히 많다. 사용자 수가 많은 데도 원인이 있지만, 그보다는 명령하는 그대로 고분고분 움직이는 컴퓨터의 기계적 특성이 지배욕이 강한 남성들의 구미에 잘 맞기 때문일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가상 세계가 아무리 사용자를 만족시킨다 해도 컴퓨터 전원을 끄고 나면 그를 기다리는 건 여전히 지루하고 불만족스러운 일상이다. 두 세계 사이에서 분열된 자아는 정체성 혼란의 늪으로 빠져들어간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확대가 현실계의 일상, 가정, 심리적 안정을 붕괴시키고 나아가 인간 소외를 심화시키리란 어두운 전망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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