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인생도 요리도 오케스트라”

  • 이강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7-01-17 1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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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도 요리도 오케스트라”
    아내가 없는 집에 들어와 혼자서 밥 짓고 찌개 끓여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대한민국 남정네가 과연 몇이나 될까. 요리를 취미로 내세우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곤 하지만, 아직도 대개는 음식을 만드는 즐거움보다는 차려진 밥상에 익숙한 것이 현실. 온전히 자신만의 수고로 밥 한 끼를 준비해야 한다면, 그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아예 밖에서 먹고 들어오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제 환갑을 넘기고 세 딸을 모두 출가시킨, 그리하여 오래 전 할아버지 대열에 합류한 한완상 상지대 총장(64)은 그 연배의 인사들과 비교해 확실히 탁월한 ‘생존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부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해준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면 모두 실력을 인정한다”고 말할 만큼 부엌에 들어가기를 즐거워한다.

    여러 통로를 통해 그의 이런 면모를 익히 알고 있던 취재팀이 ‘남자들을 위한 요리코너’를 만들고 그 첫 주자로 한총장을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취재팀이 상지대 총장실로 전화를 걸어 취지를 설명하자 “신동아에서 그런 기획을 다 했느냐”며 흔쾌히 방문을 허락했다. 총장실 비서는 한총장이 “내가 보여줄 요리가 있는데”를 연발했다며 “살짝 흥분하신 것 같더라”고 웃으며 전했다.

    11월 마지막 일요일 저녁, 한총장 집에는 막 교회에서 돌아온 한 총장 내외 외에도 세 딸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에 살고 있는 큰딸 미미씨 식구가 와서 그의 요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총장이 소개하는 오늘의 요리는 등심김치볶음. 김치가 들어가는 요리에는 돼지고기가 적격이라지만, 쫄깃한 떡살이 붙은 등심은 돼지고기와 또 다른 맛을 제공한다. 그는 준비물을 보여주며 “내가 오늘 이걸 요리한다고 하니까 이전에 먹어본 교회 성가대 사람들이 입맛을 다시더라”고 자랑했다.

    “인생도 요리도 오케스트라”
    한총장이 이 요리를 선택한 이유는 뭐니뭐니 해도 준비물이 간단하고 짧은 시간에 해치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살짝 신맛이 날 정도로 익은 김치와 등심을 먹기 좋게 썬 다음 불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 소요되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20분 남짓. 이미 김치에 들어 있는 양념만으로도 맛을 낼 수 있어 별도의 간은 필요하지 않다. 고기가 너무 익으면 맛이 떨어지기에 중간 정도로 익히는 것이 포인트라면 포인트.



    조리가 간단한 탓에 그토록 자신하던 실력이 발휘될 여지가 없는 것이 아쉬운데, 칼을 잡고 고기를 써는 그의 손놀림을 보니 어쩌다 한번 해본 솜씨는 분명 아니다. 김치를 써는 사이사이 김치조각을 먹어보며 김치에 밴 간을 대중하는 모습이나, 어느 정도 익었는지를 알아보느라 뒤적이는 모습도 퍽이나 자연스럽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요리인데도 이 양반이 하면 이상하게 맛있어요. 미국 사는 아이들한테 가면 저보다 아빠한테 ‘그거 해줘’ 하거든요.”

    “참으로 이해 못 할 일이에요. 아빠가 하는 요리에는 별다른 게 들어가지 않는데도 아주 독특한 맛이 나요.”

    아내인 김형 YWCA 이사의 이야기에 딸 미미씨가 맞장구를 치자 한총장은 “이것 저것 다 넣으면 누가 맛을 못 내겠느냐”고 우쭐한 표정이다.

    한총장이 뽐내는 요리 솜씨는 우선 오랜 외국 생활의 산물이다. 한총장은 유학시절 ‘완상탕’이란 요리를 개발한 인기 있는 요리사였다고 말한다. 당시만 해도 미국인들은 소의 꼬리나 뼈 등을 먹지 않았는데, 이를 공짜로 얻어와 곰탕을 끓여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가난한 유학생들을 포식시켰다는 것.

    그러나 오늘의 요리 실력을 만들어낸 더 중요한 요인은 그와 아내가 30년이 넘도록 연출하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결혼생활에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YWCA에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김형씨는 어느날 자신을 한 아무개라고 소개한 낯선 남자로부터 국제우편을 한 통 받았다. 한총장이 친구에게 소개를 받은 뒤 무작정 편지를 보냈던 것. 다짜고짜 결혼을 전제로 서로를 알아보다 맘이 맞으면 결혼하자는 내용의 첫 편지는 65년 여름부터 이듬해 봄까지 200여통이나 이어진 끝에 드디어 66년 초 결실을 보았다.

    결혼 후 미국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두 사람은 철저하게 상대방을 인정하는 ‘평등부부’의 전형을 만들며 생활했다. 다른 점은 다르게, 같은 점은 같게 서로를 대우한다는 것이 이들의 변치 않는 부부철학. ‘집안 청소가 왜 안 돼 있느냐’ 식의 상대방에게 책임을 묻는 타박은 서로에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이런 두 사람의 생활방식을 두고 딸 미미씨는 “젊은 우리도 흉내 내지 못할 만큼 선진적”이라고 말한다.

    등심김치볶음과 완상탕 외에 그가 자신있게 하는 요리인 ‘한완상식 닭찜’은 바로 이 부부의 인생이 녹아 있는 ‘사연 있는 음식’이다. 1970년 서울대 교수로 고국에 돌아온 한총장은 유신반대활동으로 76년 학교에서 해직당했다. 이어 80년에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5개월18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인생도 요리도 오케스트라”
    81년 출옥 후 박사학위를 받은 모교인 에모리대의 이사이자 미 의회 상원의원인 샘 넌씨의 도움으로 미국 망명길에 오른 그는 이 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했는데, 이때부터 한총장이 서울대에 복직돼 귀국하던 84년까지 김이사는 브루클린에서 선교활동을 하느라 두 사람은 주초에만 하루 이틀 정도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당시 세 아이 양육은 아버지인 그의 몫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 빨리 맛 있는 밥을 해줄 요량으로 등심김치볶음을 개발한 것도 이 무렵. 그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큰딸과 작은딸, 그리고 초등학교에 다니던 막내아들에게 먹이기 위해 요리 프로를 열심히 시청했다고 한다.

    “그 무렵 콧수염을 길게 기른 서양 요리사가 나오는 프로가 인기였어요. 어느날 중국황제가 먹었다는 닭찜을 소개하더군요. 큰 솥에 닭을 넣고 김이 빠지지 않도록 한 다음 4시간 가량 푹 고는 요리인데 제법 만만해 보입디다. 이걸 조금 변형해 마늘도 넣고 간도 맞추고 내 식대로 살짝 변형을 했더니, 살이 연하면서도 쫄깃쫄깃해서 아이들이 참 좋아했어요.”

    요리 외에 그가 가진 또 하나의 취미는 합창단 지휘. 교회 성가대 지휘를 통해 갈고 닦아온 그의 지휘 실력은 총장 취임 축하 자리에서 학교 합창단을 즉석 지휘할 정도로 수준급이다. 그런 탓일까, ‘요리관’을 묻는 질문에 한총장은 ‘오케스트라 합창’이라고 답한다.

    “단원 모두는 각자 자기 소리를 내고, 그것이 전체적으로 앙상블을 이루며 하나가 되는 게 오케스트라지요. 요리도 마찬가지예요. 요리재료는 개성을 가진 오케스트라 단원입니다. 이들은 적절한 가열을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결국 전체에 녹아들지요. 배추가 파 같고 파가 배추 같아서는 훌륭한 요리가 나올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각자의 일에 충실하면서도 서로의 인생에 녹아든 두 사람의 삶은 그 자체가 최고의 맛을 간직한 일품요리 한 접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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