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내가 연행된 사실은 외신에까지 크게 보도됐다. 당시 UPI통신은 서울발 기사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국 경찰은 한국 최대 신문인 동아일보의 편집국장과 기자 1명을 체포했다. 편집국장 김영상씨와 이만섭 기자는 4일밤 심문차 체포돼, 5일 현재 구류중에 있다. 이들을 체포한 데 대해서는 아무런 공식적 해명이 없으나, 3일의 윤대통령 기자회견에 관한 기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는 4일자 조간에서 윤보선 대통령은 금년 가을 유엔 총회에 미칠 영향 때문에 정권을 조속히 민간인에게 복귀시키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언명했다고 보도를 한 바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심흥선 공보부장은 5일 모일간지가 대통령의 기자회견 내용 일부를 사실과 유리되게 조작해서 보도했는데 이는 용인할 수 없는 일이며, 또한 혁명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구속이 결정된 뒤 나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서빙고 육군형무소로 이감됐다.
이렇게 두어 달 고생한 후 8월초 어느날 새벽 원충연 대령이 찾아왔다. 당시 그는 최고회의 공보실장이었다. 그런데 그의 태도가 의외였다.
“이만섭 기자시죠. 대단히 미안합니다. 기소유예가 결정됐습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라 기뻐할 새도 없었다. 내가 옷을 갈아입자, 그는 자기가 타고온 지프에 날 태우더니 우리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러나 가슴 아픈 일은 내 일로 부친이 충격을 받아 병을 얻은 것이다. 전에 공군사관학교에서 퇴교했을 때도 충격을 받았던 부친은, 이번에 내가 수갑을 차고 형무소로 가자 더 큰 충격을 받아 몸져 누워버렸다.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한 부친은 2년 뒤 환갑을 한 해 남긴 채 눈을 감고 말았다. 모두 내 탓이었다.
최고회의를 출입하고 얼마쯤 지난 어느 날,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이 우연히 기자실에 들렀다. 기자간담회였는데, 그와는 첫 대면이었다. 그러나 사실 난 그때까지 그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전에 일본의 월간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 김종필씨가 기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5·16이전에 나라가 부패한 원인으로 그가 기자들의 책임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난 첫 대면이었음에도 그 얘기를 꺼내며 강력히 항의했다.
“김부장이 쓴 글에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5·16 전에 군도 부패했었다고 쓰면서, 그 원인이 기자 때문이라고 쓰지 않았습니까? 즉 군에서 휘발유 한 드럼을 빼내 팔면서 신문기자의 입을 막기 위해 결과적으로 두 드럼, 세 드럼씩 더 빼내다 보니 부패의 악순환이 거듭됐다고 썼지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 사이비 기자들의 행태에 불과한데 그걸 마치 전체 언론계의 일인 양, 그것도 외국 잡지에 쓰다니 잘못된 것 아닙니까.
정계입문
여기 기자들 중에도 군인들 못지 않게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애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군인들이 총으로 애국했다면, 우리는 붓으로 애국한 겁니다. 그런데 그런 건 간과한 채 모두가 사이비 기자인 양 언론을 매도했으니, 이만저만 잘못한 게 아닙니다.”
내 목소리가 다소 높아지자, 동료 기자들은 내가 다시 형무소로 끌려가게 될까봐 걱정됐는지 옆구리를 찌르면서 말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러나 난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또한 나는 혁명정부 밑에서 억울하게 육군형무소에 갔다 온 적이 있는데, 언론 탄압도 심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던 김부장은 화는커녕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기자의 말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잘못된 점이 있다면, 내가 사과드리지요.”
의외였다. 그는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중앙정보부장답지 않게 예상외로 부드러웠다. 그날로 그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해가 바뀌어 62년이 되자, 정국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간 혁명정부의 의중을 읽은 윤보선 대통령은 3월23일 결국 대통령직에서 하야했고,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된다. 62년 가을 어느날, 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운명의 날을 맞았다. 박의장의 울릉도 시찰을 잠입취재한 것이다. 국가원수로서는 전무후무한 울릉도 시찰이었고 5·16혁명후 기자로서 박의장과 단독취재를 한 것도 동아일보의 내가 처음이었다. 그때 세찬 울릉도 격랑으로 박의장이 하마터면 큰 변을 당할 뻔 했다거나 울릉도 산길을 따라 함께 걸어 올라가며 나눴던 많은 얘기들은 지금도 생생하고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 그때 나는 ‘박의장은 일본 육사를 나온 군인이라기보다는 역시 사범학교 출신이구나’하는 판단을 했다. 정확한 판단력, 치밀한 두뇌, 그리고 교사들이 가진 인간적인 면… 나는 비로소 그때부터 은연중 박정희라는 인물에 경도되어 간 것이다.
63년 추석날 밤 마당에서 환한 보름달을 바라보며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나는 기자생활을 청산하고 정치인이 돼 나라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다음날 곧바로 장충단 의장 공관에서 박의장을 만나 내 결심을 밝혔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내 말에 박의장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난 말을 이었다.
“물론 입당에 따른 조건은 없습니다. 무조건 입당하되, 구정치인들처럼 감투나 돈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다만 제가 왜 공화당에 입당하게 됐는지, 또한 왜 박정희 후보를 지지하게 됐는지 제 소신을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이 말은 내가 대통령 선거 유세에 함께 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얘기였다. 내 말이 끝나자 박대통령은 내 손을 꼭 잡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맙소. 이만섭씨.”
그 자리에서 바로 이후락 공보실장에게 전화를 한 박의장은 나를 선거유세반에 포함시키라고 지시했다. 내 정치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렇게 공화당에 입당한 나는 며칠 뒤 바로 선거 유세에 합류했고 대구를 시작으로 선거가 끝날 때까지 박정희 후보·이후락 공보실장과 전국을 누볐다.
이어 6대 국회에는 전국구로 진출하게 됐다. 이때부터 박대통령은 나를 자주 불러 여러 문제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정치 스타일이 바뀌었지만, 박대통령은 3선 개헌 전까지만 해도 나처럼 직언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63년 12월17일, 박대통령은 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더불어 6대 국회가 개원했으며, 제3공화국이 돛을 올렸다. 6대 국회에 처음 진출한 나는 여당 원내 부총무를 맡았다. 제3공화국 출범 후 맞은 최초의 위기는 64년의 한일 회담이었다.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 회담이 시작되자, 야당과 각계 인사들은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특위’를 결성해 회담 반대 투쟁에 나섰다.
6월3일, 마침내 6·3 사태가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6·3사태는 심각한 헌정 위기였다. 바로 전날 학생 1만여명이 박정희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파출소를 점거, 파괴하기에 이르렀기에 서울 일원의 비상계엄은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그런데 계엄 바로 다음 날이었다. 갑자기 김재규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며 계엄군 임시 사단 본부가 있는 덕수궁을 찾았다.
‘JP 잡아 넣어야겠는데…’
김장군은 나를 반갑게 맞으며, “누가 엿들으면 곤란하니 잠깐 ”하더니 날 사단장실에서 밖으로 불러내 뜰에 있던 앰뷸런스 안으로 데려갔다.
“지금 계엄군의 공기는, 비록 데모는 진압됐지만 나라를 위해 이번 기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몇 사람을 해결해야겠다는 분위기요. 대상은 김종필 공화당 의장과 야당의 김준연 서민호 의원이요. 문제는 군의 공기가 이러한데, 이걸 대통령께 말씀드려 순조롭게 처리할 사람은 이만섭 의원밖에 없을 듯하오. 그러니 대통령께 말씀 좀 드려 주시지요.”
김장군은 계속 이유를 설명했다.
“김종필 의장은 4대 의혹 사건으로 군의 공기가 좋지 않고 김준연·서민호 의원은 한일회담에서 대통령이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허무맹랑한 발언을 국회에서 한 때문이지요.”
“잘 알겠습니다”
나는 사태를 사전에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화당 의장인 김종필에게는 미리 알려 스스로 결심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는 1차 외유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데다, 나와 인간적으로 가까운 편이었다.
당시는 제3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박정희 정권이 맞은 최악의 위기였고 어떻게든 시국을 수습해놓고 보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김종필 의장의 행방을 알아보니, 마침 민기식 참모총장 공관에 있는 게 확인되었다. 급하게 가보니 이미 그곳에는 민기식 총장과 김종필 의장뿐만이 아니라 김성은 국방장관, 그리고 JP 직계인 김종갑 국회 국방위원장도 함께 있었다. 국방색 작업복을 입고 있던 김의장은 대충 분위기를 파악한 듯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김국방과 민총장은 마침 그날 아침에 박대통령을 만나 군의 분위기를 보고했고, 박대통령으로부터 “김의장에게 그런 분위기를 직접 말해 주지 않고 뭘 하고 있어”하는 핀잔만 듣고 왔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들어갈 때까지 그들은 차마 김종필 의장에게 그 얘기를 못한 채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김의장에게 말했다.
“…그러니 김의장께서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십시오.”
그러나 김의장은 굳은 표정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론 군 전체 분위기가 그런 건 아니고, 박경원 장군(후일 내무부 장관) 등 일부 장군들이 내게 감정이 있어 그런 것 같소. 그리고 내가 당의장을 물러난다면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누가 맡아서 각하를 보필할 수 있겠소? 또 만약 내가 물러나야 한다면 나를 모함하고 있는 당 간부들도 함께 물러나야 하잖소.”
다소 감정이 격앙돼 있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JP 만나 ‘2보 전진 위한 1보 후퇴’ 권고
“그만두는 데 누구와 함께 그만두겠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또 누가 당을 맡아 하건 걱정할 필요 없는 것이며, 만일 후임자가 시원찮으면 각하께서는 더욱 김의장을 아쉬워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학생 데모가 워낙 심각하니 우선 나라를 살려 놓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 나라를 위해 1보 후퇴하십시오.”
그러나 김의장은 듣고만 있을 뿐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는데 진행 사항이 궁금했는지 다음날 박대통령이 나를 불렀다.
“아무래도 사태가 급하니, 지금 각하께서 김의장을 부르셔서 나라를 위해 자진해서 당의장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박대통령은 곧 부속실의 김성구 비서관을 불러 김의장을 찾아오도록 했다. 바로 그날 저녁 김종필 의장의 사임을 알리는 호외가 시중에 배포됐다. 6·3 사태는 결국 김종필씨가 외유를 떠나고, 김준연·서민호 의원이 구속되면서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6대 국회 때에는 한일 회담도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훗날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된 ‘남북 가족 면회소설치에 관한 결의안’이었다. 내가 이 결의안을 제의한 것은 64년 10월9일. 제18회 동경 올림픽에서 북한의 신금단(辛今丹)선수와 부친 신문준씨가 14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본 뒤였다.
겨우 몇분간의 만남이었지만 그 감격적인 장면을 보면서 헤어진 혈육의 아픔을 느꼈으며, 한편으로는 뜨거운 민족애가 용솟음치는 걸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남·북으로 흩어져 있는 혈육이 서로 만날 수 있게 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10월27일 ‘남·북 가족 면회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국회에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내용은 판문점에 남·북 가족면회소를 설치해 이산 가족이 서로 만나게 하며, 상봉자 명단 작성과 주선은 남·북의 적식자사와 국제적십자사가 공동으로 맡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로 인해 어처구니 없게도 정치적 박해를 받게 되었다. 바로 중앙정보부장인 김형욱(金炯旭)이 내 제안을 반공법 위반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김형욱은 내 사상과 생각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경직된 사고의 소유자였다.
결국 김형욱은 내게 그 결의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잡아넣겠다고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참다 못한 나는 박대통령을 만나 결의안을 제출하게 된 동기와 내용, 그리고 김형욱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음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박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김형욱 그 친구 돌았구먼…. 머리가 나빠.”
결국 박대통령으로부터 내 주장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셈이다. 나는 박대통령의 이 말을 정가에 퍼뜨렸다. 그러자 그 후로 김형욱의 압력이 상당히 수그러들었고, 결국 11월6일 제11차 외무위원회에서 이결의안에 대한 제안 설명을 하게 되었다. 결의안은 외무위원회에서 심각하게 논의를 거듭했건만, 외압에 의해 통과는 보류되고 말았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