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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취재|‘정형근 의혹’의 증언자들

“파이프담배 문 정형근이 고문을 지시했다”

  • 김당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파이프담배 문 정형근이 고문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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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기관대책회의 핵심멤버로 축소은폐 개입”

현재까지 출간된 박종철 사건에 관한 기록으로는 사건 당시 수사검사였던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경기 과천·의왕)이 95년 변호사 시절에 쓴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가 가장 사실에 근접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에 붙인 ‘박종철사건 수사검사의 일기’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지만, 필자는 “박종철 사건을 수사하면서 언젠가 때가 되면 이 사건의 진상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기를 써나갔다”고 밝히고 있고 이 책은 그 일기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안변호사는 그후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에 책 제목을 ‘안검사의 일기’로 바꾸어 출간했다).

그러나 이 ‘수사검사의 일기’에도 한계는 있다. 이 책의 필자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이 사건은 그 폭발력만큼이나 그 안에 감춰진 내막도 많았다. 세 차례에 걸쳐 사건이 터지면서 진상이 많이 드러났지만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사실들이 적지 않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중략)… 이 책에서 나는 박군 사건에 대해 내가 아는 사실, 내 주변에서 있었던 일과 내가 했던 고민을 모두 기록했다. 그래야 올바른 역사가 씌어져 후세에 교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의원은 자신이 아는 진실을 모두 밝히지는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박종철 사건 수사와 관련해 안검사에게 사건 처리방안(축소은폐)을 제시하고, 고문 경찰관의 구형량을 낮추도록 요구한 안기부 정형근 수사단장 관련 부분이다.

안검사의 일기에 안기부와 앰버서더호텔에서 ‘안기부 J단장’을 만나 박군 사건 처리방안을 의논하는 대목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J단장은 안검사의 일기에 등장하는 유일한 익명 인물이다. 그 대신에 안의원은 ‘일기’에서 자신과 검찰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을 안기부와 관계기관대책회의라는 ‘집단’에 떠넘기고 있다. ‘안검사의 일기’의 한 대목이다.

“87년 박군 사건이 터졌을 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결정은 사실 안기부의 결정이었고 그것은 곧 법이었다. 그래서 법무장관이나 검찰총장이 안기부장에게 밀려 이 사건에서 검찰이 파행적 수사를 거듭하고 온갖 수모를 당하게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두 사람은 검사 출신의 같은 당 의원인 데다가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도 506호·507실로 나란히 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64년 서울대 법대 입학동기로 66년 3학년 때는 법대 학생회 선거에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회장(정형근)·부회장(안상수)을 지낼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 또 당시 안상수·조영래군(작고한 인권변호사)이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 성토대회’ 사회를 보다가 함께 유기정학(1개월)을 당하자, 정형근 회장은 이에 항의하는 집회를 주관했다가 무기정학을 받았고, 안부회장은 정회장 대신 직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검사의 일기에 정형근 단장만 박군 사건 관련자 중에서 유일하게 익명으로 기록한 배경에는 ‘절친한 관계’말고도 ‘숨겨줘야 할 무엇’이 있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앞에서 인용한 ‘정형근 파일’은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시사해 준다.

관계기관대책회의 핵심멤버 이해구·정형근

국정원의 ‘정형근 파일’은 박군 사건과 관련해 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어떻게 작동했으며 그 구성원이 누구였는지를 일부 드러내 준다. 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 참석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관계기관대책회의는 이렇게 운영되었다.

관계기관대책회의는 정부조직법상 아무런 근거가 없는 회의체다. 그러나 5·6공화국 정부는 관계기관대책회의를 두고 어떤 정치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안기부를 비롯한 정보·치안기관들과 그 문제에 관련된 정부 부처 담당자들이 회합을 갖고 그 문제의 성격과 정부 당국의 대처방안을 의논해 왔다. 즉 회의 소집 발의는 관련 부처(노사 분규는 노동부, 학원 사태는 교육부 등)가 했지만 회의 소집권은 안기부장에게 있었다. 그러한 관계기관대책회의는 문제의 수준이나 정치적 의미에 따라 장·차관급이 참석하는 고위 관계기관대책회의, 실무 국·실장급이 참여하는 관계기관 실무대책회의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고위 관계기관대책회의에는 안기부장과 청와대 수석비서관급이 참석하게 돼 있으나 주로 1차장과 비서관들이 대신 참석했다. 마찬가지로 실무대책회의에도 실세기관인 청와대와 안기부는 한 단계 낮은 직급자들이 참여하곤 했다.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회의 장소는 주로 안기부 별관이나 호텔에 있는 안기부 안가(安家)를 이용했다.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군 사건의 축소은폐를 기도한 고위·실무 관계기관대책회의 핵심 멤버는 당시 치안본부장 출신으로 안기부 국내담당 차장을 맡고 있던 한나라당 이해구 의원(경기 안성)과 검사 출신으로 안기부 수사단장을 맡고 있던 정형근 의원이다. 두 사람이 핵심 역할을 수행한 것은 당시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다음은 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에 참여했던 검찰 관계자의 증언이다.

“5공 안기부는 당시 경찰의 물리력으로 정권을 지탱했고 검찰은 그 물리력을 합법화하는 법무참모쯤으로 간주했다. 당시 경찰총수인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전두환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고, 전임 치안본부장 이해구씨는 국내 보안정보를 총괄하는 안기부 1차장으로 앉아 있었다. 당시는 안기부의 비호를 받은 경찰이 검찰을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6공이 검찰국가였다면 5공은 경찰국가였다.”

최환 공안부장의 ‘운명의 날 1월14일’

안검사의 일기는 ‘운명의 날 1월15일’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박종철군이 사망한 것은 그 하루 전인 1월14일이다. 따라서 박군 변사사건을 배당받은 안상수 당시 수사검사에게는 1월15일이 운명의 날일지 모르지만 박종철군 사건의 전체 맥락에서 보자면 운명의 날은 1월14일이었다. 박군 사망 직후부터 당시 경찰과 안기부는 축소은폐 공작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월14일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었다. 관련 당사자들이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1월14일 당일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당시 검찰에서 박군 사망사건의 첫 보고를 접한 인물은 지난해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변호사 개업을 한 최환 부장검사(서울지검 공안2부)였다. 최환 변호사는 87년 1월14일 상황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박군 사망과 관련해 경찰이 최초 보고한 시점은 언제인가.

“1월14일 19시40분 경에 내 방(서울지검 공안2부장실)으로 대공수사단 경찰 2명이 2쪽짜리 보고서(변사사건 발생보고 및 지휘품신서)를 들고 변사사건 지휘를 해달라고 찾아왔다. 보고서에는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찾아온 경찰도 ‘쇼크사가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보고서를 보니 고문에 의한 사망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 그때 경찰은 뭐라고 했는가.

“정확히 이렇게 말했었다.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진 것으로 보아 쇼크사가 틀림없다. 유족과도 합의가 되었으니 오늘밤 안으로 화장할 수 있도록 지휘해 달라.’ 유족과 합의했다고 강조한 것은 ‘뒤탈이 없도록 마무리했으니 화장할 수 있도록 사인만 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 화장하라고 했으면 박종철 사건은 의혹만 남긴 채 묻혔을 것이다.”

― 찾아온 경찰은 대공수사단장 박처원 치안감인가.

“누군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박처원 치안감보다 낮은 직급자였다.”

― 그래서 어떻게 처리했나.

“고문에 의한 사망이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불가 입장을 피력했다. 왜냐면 당시는 김근태씨 고문 사건과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으로 시국사건에 대한 고문 의혹이 사회적으로 쟁점이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럴수록 더 철저히 해야 했다. 그래서 ‘사체를 부검해 사인을 밝힌 연후에 처리해야지 2페이지짜리 서류만 보고 결정해선 안 된다’고 했다. 또 ‘변사사건 지휘를 공안부장이 한 전례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나를 두 시간 동안이나 설득했는데 그날 청와대, 안기부 등 20여 군데서 전화가 왔다. 그중에는 ‘유족과도 화장하기로 합의했는데 왜 그러냐’는 위협성 전화도 있었다. 검찰 상부에는 보고하지도 않았는데 나중에는 검찰에서까지 ‘도장 좀 찍어주지 그러냐’며 전화가 왔다. 나중에 박군 사건으로 학생시위가 불붙고 6·29 항복 선언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그때 압력과 유혹에 넘어갔더라면 나는 ‘역사의 죄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나.

“밤 9시30분 경에 퇴근하면서 ‘내일 아침에 정식 변사사건으로 가져오라’고 했다. 이 말은 (대공분실이 있는) 관할 용산경찰서에서 변사발생보고를 작성해 정식 사건으로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해놓고 집에 와서는 아예 수화기를 내려놨다. 다음날(1월15일) 출근해 정구영 검사장에게 ‘어젯밤 대공수사단에서 변사사건 지휘를 요청했는데 정식으로 변사사건 지휘를 받으라고 했으니 오늘 아침 변사사건 발생보고가 올라올 것’이라고 어젯밤 일을 보고했다. 공안부에서는 변사사건을 지휘한 전례가 없었다. 그런데 정검사장은 대공수사단에서 발생한 사건이니 공안부에서 맡아주길 원했다. 그래서 ‘제가 부검을 지휘할 테니 형사부 검사 1명을 파견해 달라’고 검사장에게 요청했다. 워낙 민감한 사건이라 수사검사 1명에게만 일임할 사안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검사장이 이 사건을 형사부 당직검사인 안상수 검사가 부검하되 공안부장의 지휘를 받도록 지시한 것이다.”

앰버서더호텔서 검찰에 구형량 주문하기도

부검 과정에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부검 결과는 물고문에 의한 익사(실제로는 질식사)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그 과정에 경찰과 안기부는 사건을 축소은폐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박처원 치안감은 박군의 사인 규명을 위한 부검 지휘를 맡게 된 최환 공안부장을 찾아가 “부검을 잘 부탁한다”고 했다. 박치안감은 안검사한테도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입니다, 부검을 잘 부탁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또 이날(1월15일) 석간신문에 첫 보도가 나가자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오후 6시께 기자간담회를 갖고 박군 ‘변사사건’을 처음으로 공식 시인했다. 그러나 강본부장은 이 자리에서 심장마비에 의한 쇼크사 가능성을 비쳤고 배석한 박처원 치안감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고 덧붙였다. 이후 이 말은 두고두고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명문’이 당시 정형근 단장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정의원은 이에 대해 “그런 말 하면 천벌을 받는다”고 부인했다. 그런데 ‘정형근 파일’은 정형근 단장이 치안본부로부터 관계기관 긴급대책회의 소집 등 지원을 요청받고 사건 처리방향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내용의 발표문 작성에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관계기관 긴급대책회의에 누가 참여했으며 누가 그런 방향으로 은폐를 주도했는지 규명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에 대한 관련자들의 진술은 엇갈린다. 우선 최환 당시 공안부장은 서린호텔 대책회의에 참석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참석한 회의는 사건 축소은폐를 논의한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아니라 발표문을 조율하기 위한 회의였고, 그 날짜도 사건이 발생한 1월14일이 아니라 1월16일이라고 밝혔다.

― 1월14일 서린호텔 관계기관대책회의에 참석했는가.

“1월14일이 아니라 1월16일이다. 사인 규명을 한 뒤에 나는 박군 사건에서 손을 뗐다. 정구영 검사장이 ‘부검을 마쳤으니 이제 범인 색출 수사는 안검사와 신창언 부장검사(형사2부)가 맡도록 지시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런데 이날(1월16일) 저녁 사무실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정검사장이) 나더러 이날 밤 서린호텔에서 담화문 관련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있으니 검찰측 대표로 참석해 달라고 했다. 1월17일 아침에 대국민 사과 담화문을 발표하기로 돼 있는데 서린호텔에서 그 문안을 기초하는 회의였다. 강민창 본부장, 김길홍 청와대 정무비서관, 문공부 관계자 등 10여명이 참석했다. 내가 서린호텔에 불려간 배경은, 강본부장이 계속 ‘쇼크사’로 발표하자고 주장하자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서울지검장에게 연락해 부검을 지휘한 공안부장이 사망원인이 뭔지 확실히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가게 된 것이다.”

― 그래서 서린호텔 대책회의에서 어떤 결론이 나왔나.

“서린호텔에 가 보니 사인을 어떻게 발표할지 논란이 벌어지고 있어 나는 이렇게 설명을 했다. 이 사건은 적당히 넘어갈 사건이 아니다, 국민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사실대로 밝혀라,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맹세하는 심정으로 써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이런 주장이 그대로 반영되어 1월17일 담화문 발표 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경질되었다.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표현은 1월16일 밤 서린호텔 회의에서 논의한 것이 아니고 이미 그 전에 경찰 보고서에도 적혀 있었고, 강본부장 기자간담회(1월15일) 때 박처원 치안감도 한 말이다. 서린호텔 회의는 통상 언론에서 말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아니고 담화문 발표 문안을 조율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른바 축소은폐 관계기관대책회의는 그뒤에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고 나중에 공범들이 더 있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장충동 앰버서더호텔 등지에서 열린 것으로 알고 있다.”

― 앰버서더호텔에서 정형근 단장이 검찰에 고문 경관들의 구형량을 낮춰줄 것을 주문하지 않았나.

“앰버서더호텔건은 내가 수사라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안상수 검사 일기에 보면 앰버서더호텔에서 J단장(정형근 수사단장)이 주임검사인 신창언 형사부장과 안상수 검사에게 그런 요구를 한 것으로 돼 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사인 규명을 위한 부검을 지휘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많은 압력이 있었으나 아직 현직에 있는 사람도 있고 해서 구체적으로 누가 압력을 넣었는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사인 규명 당시에는 검찰 선배인 내가 공안부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정형근 단장이 함부로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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