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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리포트|게임무기 탈취, ID 성폭력, 온라인 사기

사이버세계는 범죄천국, 막을 ‘법’이 없다

  • 이나리 자유기고가

사이버세계는 범죄천국, 막을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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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성, 금기 도발, 중독성, 심리적 현실감이라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무(MOO,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을 도입한 가상사회형 게임. 참가자들이 직접 그 세계를 구성하는 객체를 만들며, 객체의 속성과 행동을 정의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의 하나인 람다무(LambdaMOO)에서 ‘강간’ 사건이 벌어졌다. 미스터 벙글이란 ID를 가진 회원이 리빙룸이라는 방에서 두 여성 회원을 성적으로 유린한 것.

먼저 레그바, 두 번째로 스타싱어라는 여성 ID를 자신의 ID와 강제로 성교하게 만든 다음, 이어 두 여성이 서로 성행위를 하도록 조작했다. 그 도중에 벙글은 차마 생각할 수 없는 가학성 변태행위를 계속했다. 미스터 벙글의 잔혹 행위는 한 위저드(가상 사회형 게임에서 일반 참가자보다 더 많은 힘을 갖고 있는 아바타. 대개 시스템 관리자이며 게임 내 분쟁 해결이 주 업무)가 나타나 그를 새장(일종의 감옥) 속에 가둔 다음에야 겨우 끝이 났다.

강간을 당한 여성 회원들은 곧 이 사건을 게시판에 공개했다. 두 여성은 비록 육체적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분신인 ID가 잔혹 행위를 당하는 동안 마치 직접 강간을 당하는 듯한 고통과 치욕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회원들 간에는 미스터 벙글에 대한 처벌과 향후 대책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결국 미스터 벙글은 분노에 찬 한 위저드의 개인적 결정에 의해 회원권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거짓말처럼 ‘부활’했다. 미스터 저스트라는 ID로 또다시 등록해 버젓이 활동중인 것을 다른 회원이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또 다시 추방을 당했을까? 그렇지 않다. 아무리 내쫓아도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언제든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체가 아닌 ID로.



람다무 강간사건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일어나는 반사회적 행위들을 제재할 방법이 거의 없음을 실감케 한다. 전혀 다른 세계인 그곳에 현실의 법을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행위자의 익명성이 보장되는 한 ‘색출’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터넷 특유의 가공할 파급력이 합세하면 부작용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O양 비디오가 그토록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인터넷망을 타고 보급된 까닭이었다. 최초로 동영상을 올린 이는 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보고 다시 내려 받아 퍼뜨린 사람은 수백, 수천 명이었다.

사이버 성폭력은 어떤가. 만일 누군가가 한 여성을 궁지에 몰아넣고 싶다면 인터넷에 그녀의 신상명세와 이상야릇한 글 몇 줄만 올리면 된다. 행위자는 한 명이지만 그 영향력은 세계로 확산된다. 사이버 스페이스에는 국경도, 거리도, 시간차도 없기 때문이다.

국경 없는 시대의 법

가상과 현실의 경계, 그 혼란의 접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중에는 개인을 넘어 기업, 국가, 심지어 인류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만한 것도 적지 않다. 전세계적으로 폭증하고 있는 인터넷 관련 소송이 그 증거다. 중심에 던져진 문제는 사이버 스페이스와 법이다.

앞에서 살펴본 리니지 아이템 도난사건에서 알 수 있듯 현행법은 이미 현실이 되어 있는 각종 사이버 현상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꼭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오히려 인터넷 환경이 더 빨리, 광범위하게 자리잡은 미국의 경우 주마다 다른 관련법이나, 아직 정립되지 않은 사이버 스페이스의 지적 재산권·독점권·사생활 보호 문제로 연일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수석편집위원 프랜시스 케언크로스는 저서 ‘거리의 소멸’에서 “전자세계에 대한 단속의 세 가지 쟁점은 언론의 자유, 사생활 보호, 지적 재산의 단속”이라 말한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국경을 넘나드는 새 통신의 성격, 그리고 희미해진 경계다.

사이버 스페이스에는 국경이 없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활용되는 각 지역에는 저마다의 상황에 맞게 제정된 나름의 법규가 있다. 예를 들어 플로리다에는 포르노 사이트 개설에 대한 처벌 법규가 없으나 뉴욕에서는 불법행위가 되는 식이다. 국내에선 업무 시간에 포르노 사이트를 봐도 빈축만 살 뿐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곧바로 해고사유가 된다. 스웨덴에서는 아동 포르노 자료를 전송하고 판매하는 것은 불법이되 소유는 합법이다. 중동에서는 비키니 입은 소녀의 사진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옥에 갈 수 있다.

한편 동일한 네트워크로 신문 방송 등 공적 영역뿐 아니라 개인 편지 교환, 상거래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지금의 상황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공사 구분을 매우 어렵게 만들고 있다. 네트워크 공유는 정부와 기업이 각 개인에 대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를 확보할 수 있게 한다. 정보 지배자의 출현 가능성은 조지 오웰의 ‘1984년’을 능가하는 공포로 다가온다.

곧 도래할 가상 사회를 두려움 속에 맞지 않으려면 적합한 법, 그것도 국제적인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 유연하고 효율적인 법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사이버 스페이스법으로 연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윤웅기씨(사법연수원 29기생)는 “현재 사이버 공간과 법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대개 3가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가상 공간의 자율성과 특성을 존중하자는 견해다. 이를 지지하는 전문가들은 인터넷 음란 사이트나 소프트웨어 복제 등 있을 수 있는 모든 문제의 해결은 전적으로 인터넷상에서, 네티즌의 자율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현실 법을 그대로, 또는 조금 고쳐 적용한다는 시각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와 현실계 사이의 경계가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는 지금, 현실 법의 확장 적용이 불가피하다는 견해다. 초국적 기업이나 각국 정부, 세계무역기구 등 이른바 기득권층이 선호하는 해결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셋째는 주로 법학자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제3의 길’이다. 이들은 인터넷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전제하에 사이버 스페이스와 현실계 간에 교량이 될 만한 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범인 잡아도 처벌할 수 없는 현실

현재 미국 유럽 등 인터넷 선진국들은 이른바 ‘인터넷 세계 통치’에 있어 자국에 유리한 국제 규약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중이다. 국내법 제정에 있어서도 가상공간과 현실계 사이에 발생하는 분쟁 및 범죄는 최소화하되, 디지털 산업은 활성화하는 방안을 찾아 시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1999년에만 ‘전자거래기본법률’, 인터넷을 이용한 다단계통신판매를 규율하는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 ‘음반·비디오물 및 게임물에 관한 법률’, 통신망을 통한 음란물과 스팸메일의 유통을 규제하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 또는 개정하는 등 성큼 다가온 사이버 세상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부처간의 불협화음, 미비한 현실 인식, 관련 업계와 시민단체의 참여 부족으로 인해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실정이다.

보안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시큐어소프트의 이정남 이사는 사이버 범죄에 대한 국내 법규 및 수사 체계에 개선할 점이 많다고 주장했다.

“범죄는 첨단인데 그걸 규제하는 법은 여전히 재래식입니다. 사이버 범죄는 범인을 잡기도 힘들지만 처벌하기도 어려워요. 마땅한 처벌 규정이 없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죠. 전문 인력도 부족하고, 이쪽 분야 수사의 특수성도 크게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현실에 걸맞은 법 제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변화하는 세상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마련하는 일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현실 대체를 어떻게 바라보고 준비해야 할 것인가.

가상 공간의 확대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하나는 정보 공유, 직접 민주주의의 확대, 장벽 철폐 등을 근거로 열린 공동체의 가능성을 점치는 낙관론이다. 한편에선 그와 정반대로 정보 독점, 초국적 자본의 지배, 하위 문화의 말살 등을 이야기한다. 컴퓨터로 일하고 즐기는 생활이 일반화하면서 인간 소외, 공동체의 붕괴가 이어지리라는 어두운 전망도 있다.

그러나 막상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는 그렇게 좋은 곳도, 또 그렇게 나쁜 곳도 아닌 듯하다. 끝없이 펼쳐진 무한증식의 새 영토. 그곳 역시 현실계처럼 이중적이어서 ‘열려 있는 동시에 닫혀 있으며, 공동체적인 동시에 반공동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미국의 정보사회학자 홀 배리언은 “어차피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넘쳐나는 표현의 자유, 부족한 사생활 보호, 지나치게 많은 정보 공급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구축은 이 모든 것을 전제로 끊임없이 노력할 때에만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통신전문가 김중태씨도 “사이버 스페이스의 시간은 현실의 그것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그때그때 속도를 따라잡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할 수 있는 것은 끝없는 토론과 대화를 통해 적정한 문화적 가치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씨가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N세대에 대한 디지털 문화 교육이다.

“얼마 전 광고에까지 등장해 화제를 모았던 스타크래프트 세계 챔피언이 사실은 승률 조작을 통해 정상에 올랐다는 뉴스가 전혀져 통신과 인터넷의 게시판이 시끌벅적했다. 기능만 강조할 뿐, 정작 그 바탕이 돼야 할 네티켓(네티즌의 에티켓)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기성세대 탓이 크다. 코앞에 다가온, 아니 어쩌면 이미 시작된 디지털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능한 손놀림보다 진정한 의미의 디제라시(digeracy, digital╂literacy의 합성어. 디지털을 다루는 능력)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우리 사회도 ‘기술비평가’의 적극적인 활약이 필요한 시점에 다다른 듯하다. 기술비평가란 미래 사회, 특히 사이버 스페이스의 기술적 측면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는 전문가 집단을 말한다. 98년, 가상 사회와 관련된 저술 및 비평에 종사해온 미국의 문화비평가 열 명이 이른바 테크노리얼리즘의 8대 원칙을 천명하며 활동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다. ‘기술문명공포증’ 또는 ‘기술문명광’으로 대표되는 극단적 인식으로는 우리 시대의 기술 문명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 극단이 아닌 중간 지대, 즉 기술현실주의(테크노리얼리즘)의 관점에서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이 제시한 테크노리얼리즘의 8대 원칙 중에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미래에 관한 유의미한 관점들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도 정부는 여전히 중요한 구실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치외법권 지역이 아니다. 정부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관례를 존중하고 불필요한 통제를 해서는 안 되지만, 사생활 침해 우려 등 온라인 문제에 대처할 의무와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터넷은 혁명적일 뿐 유토피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정보는 지식이 아닌만큼 그것을 인간의 인식·인지·판단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곁들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거대한 사회세력이다. 그 장점과 약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

바야흐로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세계 시민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떠오르고 있는 요즘이다.

신동아 200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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