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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상락의 이 사람의 삶

전 기아그룹 부회장 도재영

전 기아그룹 부회장 도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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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9년 10월18일, 일본 NHK 방송의 위성채널인 BS1의 인물탐색 프로그램 ‘WHO’S WHO’가 찾아나선 주인공은 한국 사람이었다. 가로에 늘어선 은행나무 이파리가 누릇누릇 물들어가는 서울 도심 거리를 예순이 넘어뵈는 노신사가 옆구리에 가방 하나를 끼고 타박타박 걷는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이윽고 주택가 골목 하나를 골라잡아 꺾어들더니 한 양옥집 대문 앞에 선다. 이어서 집 안의 얼굴 없는 안주인과 대문 밖에서 몇 마디 말이 오간다.

“아주머니, 대문은 열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제가 아주 좋은 상품 하나를 소개하려고 하는데 10분만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딴 데 가보세요.”

대화는 싱겁게 끝난다. 옆집도 그 옆집도 마찬가지다. 노신사가 이마의 땀을 씻고 나서 담장에 몸을 기댄 채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문다.

장면이 바뀌어 서울의 한 호텔. 노신사가 가방을 열고 이것저것 카탈로그들을 꺼내 탁자에 놓더니 한참 동안 선전공세를 편다. 그러나 호텔 관리 책임자는 서비스업 종사자답게 시종 얼굴에 웃음을 띠며 상대의 얘기를 들어준다는 점이 주택가 골목의 여인들과 다른 점일 뿐, 노신사는 거기서도 팔고자 하는 무엇을 파는 데 실패하고 일어선다.



카메라가 잠시 그를 떠나 서울역 광장 한켠의 무료급식소 앞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노숙자 행렬에 머물다가, 그 남루한 화면 위에 현대니 삼성이니 대우니 하는 재벌기업들의 사옥 전경을 오버랩시킨다. 이쯤되면 해설 멘트로 흘러나오는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프로그램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도 남는다. IMF, 기업도산, 퇴출, 노숙자…. 그것들은 이미 1900년대 끝자락 2, 3년의 대한민국을 들여다볼 수 있는 키워드가 되었다. 따라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를 빛내기 위해서는 그 노신사의 외판행상은 철저히 실패의 연속이어야 하고, 또한 그의 몰락을 더욱 처절한 것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의 과거가 화려했을수록 좋다.

아닌 게 아니라 한 고층 빌딩 안, 지금은 칸막이마저 철거된 옛 자신의 근무처에 노신사가 섰다. 감회어린 얼굴로 빈 사무실 터를 둘러보던 그가 창 밖으로 눈길을 준다. 국회의사당 본관의 지붕이 지척에 보인다.

우리가 만나볼 사람이 바로 이 노신사다. 도재영(都載榮). 62세. 전 기아그룹 부회장. 그리고 양옥집의 안주인이 만일 10분간의 한가(閑暇)를 쪼개주겠노라고 했더라면 그가 소개했을 ‘좋은 상품’은 정수기다. 정수기 외판을 했다는 얘기다. 지엽적인 사실이지만 미리 얘기해버리는게 좋겠는데,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손아랫 동서다. 그는 99년 1월에 있었던 국회 ‘IMF 환란조사 특위’에 참고인으로 불려나가 기아그룹의 부실화 과정에 대한 증언을 한 바도 있다.

김영삼 전대통령의 손아랫 동서

또 한 가지, 앞서 소개한 정수기 외판행상 관련 부분을 읽고 ‘잘 나가던 사람이 어쩌다가 쯧쯧…’식의 측은지심에 사로잡힐지도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서 미리 귀띔하자면, 그는 정수기 외판행상 따위를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에는 걱정을 안 해도 될 만한 처지의 사람이다. 목구멍 공양을 위해 거리로 내몰린 게 아니라, 정수기 외판은 그가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직업’이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팔자 좋은 사람의 객기’ 정도로 성급하게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를 만나서, 무슨 생각으로 정수기 외판행상에 뛰어들었는지, 그리고 요즘은 또 무얼 하고 지내는지, 국민기업이라던 ‘기아’는 왜 망했는지, 손윗 동서인 김영삼 전대통령과는 어떤 관계를 유지해왔는지 따위의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한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요즘 공식 직함은 통신 서비스 업체인 ‘한초 인터내셔널’의 고문이다. 그 사이에 취급품목이 정수기에서 통신서비스 품목으로 바뀌었을 뿐, 판매 일선에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뛰기는 예전이나 마찬가지라 한다.

―기아그룹 부회장 시절보다 오히려 기아를 떠난 뒤의 생활이 세간에서 더욱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야기의 실마리는 어차피 기아의 부도사태로부터 풀어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기아가 부도유예를 맞은 것이 97년이었지요?

“97년 7월15일에 부도유예가 되니까 어려움이 많았지요. 은행에서는 대출이 끊기고, 협력공장들은 자금이 동결돼서 부품 생산을 못 하는 지경에 처하고…. 지금 확보가 급선무였기 때문에 당시 기아판매주식회사 대표이사 부회장이었던 저는 정신없이 현장을 뛰면서 현금판매에 매달렸어요. 어떤 차종은 30% 할인판매까지 했고…참 긴박했어요.”

―기아자동차판매주식회사 고문으로 물러났다가 사표를 내신 걸로 아는데 30여년 동안 ‘기아맨’으로 살아오시다가, 그것도 회사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만두려고 했을 때 생각이 복잡했겠습니다.

“그 심사를 어떻게 말로 표현합니까. 기아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이전인 11월 초에 진념 전 노동부장관이 와서 경영을 맡게 됐어요. 그분이 노동부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내가 기아서비스 대표이사로 있었는데, 전국 대기업 분야의 노사평화대상을 받은 적이 있어서 전부터 알고 있던 분입니다. 면담을 하면서 그랬지요. 여기 있어봤자 고문 월급만 축나고, 나같이 나이든 사람 있어봤자 걸림돌만 될 것 같으니 그만두겠다….”

―그래서 당장 그만두라던가요?

“아닙니다. 그동안 판매분야에 노하우도 있고 하니 지방 다니면서 현황 파악도 좀 하고, 판매사원들 격려도 해주라더군요. 그런데 다녀보니까 예전 기아맨들이 아니에요. 벌써 얼굴에 열정이나 패기는 온 데 간 데 없고 무엇보다 기(氣)가 빠진 모습들이에요. 몇 차례 다녀보니 효과도 없고 해서 사표를 냈지요. 사표 처리되고 나서도 31년 동안 열정을 바쳐온 회사를 떠나는 일이 쉽지 않아서 책상 정리를 못 했어요. 그래서 월급 없이 3개월을 이것저것 처리도 해주고 후배들 격려도 해주면서 나다녔어요.”

기아는 이래서 망했다

도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한 달 뒤, 월급날이 됐는데도 월급이 안 나오는 상황을 참 받아들이기가 힘들더라 했다. 먹고 살 걱정 때문이 아니라, 월급이 안 나온다는 것이 모름지기 ‘생산활동으로부터 물러났음’의 백지 증명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씨는 “엄밀히 말하자면 제가 맡았던 기아자동차판매주식회사는 부도가 나지 않았지만, 기아그룹 경영진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이야 면할 길이 있었겠느냐”고 했다.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나가셨을 때, 기아문제를 장기간 끌어온 배경에는 당시의 도 부회장께서 동서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배경을 믿고 그렇게 한 것 아니냐는 의원들의 의혹 제기가 있었습니다만….

“그런 질문 받았어요. 그러나 기아 같은 거대기업이 부도가 나게 되면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의 얘깁니다. 누구를 찾아가서 애걸복걸하는 것은 생리적으로 맞지도 않아요. 기아 종업원이나 국가 경제를 위해서 청와대에 청탁이라도 해서 될 일 같으면 다부지게 한번 떼라도 써보았겠지만, 애당초 안 될 일이었기 때문에 엄두도 내본 일이 없습니다. 문민정권 출범하고 나서 김 전대통령하고는 의식적으로 정을 떼고 지냈어요.”

―이렇게 여쭤보겠습니다. 기아가 왜 망했습니까?

“외국자본이 가한 영향력을 비롯해서 국내 자동차 업계의 과잉생산 등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겠습니다만, 노사문제를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했던 것도 한 원인입니다. 사실은 96년도부터 이익 안 나는 회사를 과감하게 팔아치우는 등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대표적으로 강성이었던 노조와의 관계가 그런 작업을 쉽지 않게 했고, 뿐만 아니라 100만대 생산에 필요한 설비투자를 대대적으로 해놨는데 마무리 단계라서 이익을 회수할 여유가 없어서 부채비율도 높아졌고, 97년 가을에 무리하게 신차종 여섯 가지를 개발하느라 수천억씩 과잉투자를 했다가 타이밍을 못 맞춘 점 등을 들 수가 있겠지요.”

고문 자리 마다하고 정수기 외판원으로

도씨가 사표가 수리되고도 3개월여를 예전 직장으로 무임출근을 계속했던 것은 물론 30여 년 동안 몸바쳤던 회사에 끊기 어려운 정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3개월이 평생을 바치다시피해온 직장으로부터 떨려난 쇼크를 묽게 해주는 완충 기간이었다고 회고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자 부인 손태자(김 전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의 동생)씨는 “다른 사람들은 40대, 50대에 밀려나는데 당신은 환갑까지 일했으니 복받은 것 아니냐, 이제부터는 외국 여행이라도 다니면서 쉬라”고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니까 여기저기서 무슨 자문을 해달라, 고문으로 모시겠다는 식의 전화가 사방에서 걸려오는 눈치예요. 집사람이 받았는데, 날 안 바꿔줘요. 나쁜 사람들 꾐에 빠져서 그나마 퇴직금마저 털어먹고 집안 망신 시킬까 봐 걱정스러웠던 모양이지요. 그러다 집사람 없는 사이에 전화 한 통을 직접 받았는데…”

전화를 받고 찾아간 곳이 바로 정수기 판매 업체인 ‘청호테크’라는 회사였다.

―정수기 판매 회사 쪽에서 처음부터 판매 일선에 나서도록 권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만나자마자 회사의 고문을 좀 맡아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의를 해요. 한 마디로 거절했지요. 내가 환갑 지나서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그걸 제2의 생으로 표현한다면, 과거를 완벽하게 잘라버리고 새출발을 시도해야 의미가 있잖겠는가. 난 가방 들고 정수기를 현장에서 판매하는 일을 하겠다, 그동안에 기아라는 큰 회사에서 생산한 큰 물건인 자동차를 팔았다지만 그건 내가 팔았던 게 아니고 아랫사람들이 팔았다, 관리하고 도장 찍고 회의하고 지시하고…나더러 또 그런 일을 하라는 말이냐.”

도씨는 한사코 고문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거절하고 판매 일선에 나서기를 원했다. 상식적으로 접근했던 정수기 회사 사장은 바로 그 상식을 뛰어넘는 도씨의 얘기에 어안이 벙벙했을 터. ‘기아 부사장 했다는 사람이 우리를 희롱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반응을 보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고문실에 앉아서 돋보기 들이대고 신문이나 넘기는 그런 거지 노릇 할 바엔 차라리 마누라 말대로 여행이나 다니면서 무위도식하겠다고 우겼지요. 난, 발로 뛰어서 내 힘으로 돈을 벌고, 그 돈을 내가 관계하고 있던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의 비용으로 쓰고 싶었어요.”

도씨가 한참 동안 말을 끊은 채 창 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고문직을 수락할 수 없다면서 정수기 사장에게 했던 얘기가 허위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표면적인 논리 이면에는 좀더 도덕적인 고민이 있었다는 토로다.

“나름으로 기아맨으로 살아오는 동안 저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부도사태로 수많은 직원들이 한데로 쫓겨났어요.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세월이 얼마나 험했겠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경영일선에 있었던 내가 회사를 나와서 다른 회사의 고문입네, 자문위원입네 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면서 여전히 같잖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면 그 모습이 기아사태로 어려움 당한 후배직원들에게 어떻게 비치겠습니까.”

도씨는 자신이 정수기 카탈로그를 들고 거리를 헤맸던 기간을, ‘열심히 일했던 죄밖에 없었음에도 한순간에 일터를 잃어야 했던 왕년의 기아 직원들에게 바치는, 조그만 속죄의 과정이었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것말고도 현장을 뛰는 의미는 또 있다.

“내가 8∼9개월 놀아보니까 느낀 게 많습니다. 첫째는 일거리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두 번째는 하다못해 월급 5만원이라도 고정수입이 얼마라도 있어야겠다는 것,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에 하등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큼 처량한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아이구, 복잡하게 깊이 들어가지 맙시다. 내가 회사 그만두고 나서 그래도 내 능력을 사겠다고 제의한 첫번째 회사가 그곳이었으니까 고맙게 여기고 말단 사원으로 자원을 한 거지요. 몸담았던 회사가 그 모양이 돼서 직원들과 국민들에게 큰 고통과 걱정을 끼쳤는데 무슨 주제로 대기업에 가서 고문 시켜주시오, 사외이사 시켜주시오 하고 찾아갈 체면이 되겠습니까. 정수기 외판은 그런 제 속죄의 마음에서 결심한, 그러나 아주 떳떳하고 당당한 제2의 직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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