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보여 준 김정일의 파격적인 모습은 우리 국민은 물론 세계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2박3일간 김정일이 연출한 ‘멋진 지도자’ 이미지는 30년 이상 우리가 그에 대해 가졌던 지식이 허구였음을 알리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반면, 북한 방송은 정상회담 이후 고조된 평화의 분위기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 야당 총재와 김영삼 전대통령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도대체 무엇이 김정일의 진정한 모습이며, 그 의도는 또 무엇인가? TV를 통해 잠깐 본 모습이 김정일의 본래 모습이라고 믿을 만한 증거는 어디에 있으며, 반대로 믿지 않을 증거는 또 무엇인가? 이런 점에서 6월11일 국회 안보포럼에서 스티븐 보스워스 주한 미대사가 “(김정일을) 믿되, 검증하라”고 한 발언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김정일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김정일과 북한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대북전략과 통일전략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새삼 짚어볼 필요가 있는 문제가 있다. 김정일은 과연 북한의 생존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있다면 최근의 모든 연출은 그 마스터플랜에 따른 것일까? 야당 총재에 대한 비난도 정해진 것이었을까? 더 구체적으로 김정일은 과연 자신의 마스터플랜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여건과 능력을 갖고 있을까?
이런 문제들에 대답하기 앞서 제기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김정일에게 마스터플랜이 있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 질문은 이 땅의 모든 북한 연구자들이 안고 있는 한계를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론정치가 행해지는 사회에는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정보에 대한 접근은 가능하다. 특히 국가발전을 위한 마스터플랜은 공론화 과정을 거쳐 채택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마스터플랜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정보가 공개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공개된 정보조차 신뢰하기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토록 많은 북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자칭 타칭 북한전문가들이 양산됐음에도 여전히 북한에 대해 자신있는 분석을 내놓는 사람이 드물다. 심지어 연구자의 개인적 채널을 통해 입수한 검증 안된 첩보성 정보를 활용해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공식적으로 확인하거나 검증 통로가 차단돼 있다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특별한 의도를 가진 측의 역정보에 말려들 우려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를 두고 냉전적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빛과 어둠의 세계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어느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평가하기에 앞서 역할 분담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정말 비정상인가
그러면 우리는 북한을 도대체 어떤 사회로 보아야 하나? 이 질문을 새삼 제기하는 까닭은 정상회담으로 우리의 대북한 인식에 혼란상이 나타났고, 또 필자가 보기에 김정일의 마스터플랜을 추론하기 위한 정지작업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북한을 볼 때 흔히 우리의 상식과 제도가 북한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이런 태도 때문에 우리 기준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일을 북한이 범할 때 우리는 북한은 비정상이라고 간단히 규정해버린다.
사실 ‘정보의 블랙홀(black hole)’로까지 규정되곤 하는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현재로선 불가능에 가깝다. 정상회담이 열렸다고는 하지만 김정일의 의도가 무엇이며 북한 내의 여론이 어떤지에 대해 우리가 접근할 길이 막연하다.
먼저 북한은 황장엽씨의 주장처럼 ‘사상의 나라’이자 철저히 통제된 ‘수령절대주의’ 체제가 구축된 나라다. 이런 체제에서는 김정일의 지령이 정책인 동시에 상황 그 자체를 규정해버린다. 북한에서는 김일성·김정일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게 돼 있다. 정상회담에서 도출된 6·15 공동선언에 일단 기대를 걸어보는 이유도 김정일이 직접 서명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둘째, 생존전략 차원에서 보면 북한은 ‘긴장을 먹고 사는 유기체’다. 북한은 대외적으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 국제사회의 관심을 그들에게 잡아둠으로써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본다. 또, 대내적 차원에서 단결력 확보를 위해 대외적 긴장을 이용한다. 예컨대 핵·미사일 문제와 NLL문제 등이 부정적인 긴장을 유발한 사례라면, 정상회담은 긍정적인 긴장 유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셋째, 변화의 속도 측면에서 규정하면 북한은 ‘병약한 국가’다. 이 말은 북한은 기본적으로 변화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병약한 사람에게서는 순발력을 기대할 수 없다. 즉 북한이 변화를 위해서 순발력을 발휘하기엔 기초 체력과 골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근본적으로 변화 자체를 거부한다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다만, 체제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그들 계획대로 변화하기 위해서 북한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북한과의 협상이 시간과의 싸움이고 인내력의 싸움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넷째, 정책결정과정에서 보면 북한도 나름대로 상당한 합리성을 갖고 있는 체제임을 알 수 있다. 이건 북한의 정책 방향을 읽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북한은 정책결정을 하기에 앞서 대체로 사전 징후를 보인다. ‘로동신문’을 비롯한 관영방송 등 언론매체를 통해서, 또는 의전(儀典)을 통해서 방향을 암시하곤 한다.
다섯째, 북한은 연출이 가능한 사회라는 것이다. 특히 대내적 차원에서는 더 그렇다. 이것은 김정일의 지령이 북한의 내부 상황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북한체제를 통제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김정일이 장악하고 있는 이상, 김정일의 의지에 따른 연출은 항상 가능하다.
목표는 경제 강성대국 건설
이러한 북한읽기를 토대로 이제 ‘김정일은 과연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과제에 접근할 차례가 됐다. 결론부터 말해서 김정일의 마스터플랜은 98년 8월 이후 제기한 강성대국 건설로 집약된다. 그리고 이건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한 마스터플랜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공개·비공개적으로 접했던 각종 마스터플랜은 북한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남한을 비롯한 서방의 대북한 체제전환을 위한 것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나마 적대관계에 있는 북한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공개됐다는 사실 자체가 비정상적이어서 여기에 신빙성을 부여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것들은 대체로 과거 사회주의권의 체제전환 과정을 북한에 적용한 정도의 마스터플랜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자기 희망대로 마스터플랜을 세운다고 해서 모두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의지에 따른 계획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과 방법, 그리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점에서 냉정하게 평가하면 지금 북한은 주도적으로 마스터플랜을 짤 여건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계획을 짜는 것과 의도대로 실행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주어진 상황에서 자기 이익을 최대화하는 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김정일의 마스터플랜일 수밖에 없다.
북한체제의 특성상 내부적으로는 김정일의 의지를 철저히 관철시킬 수 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자본주의에 효과적으로 ‘적응’하는 것, 자본주의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습득하는 것 외에 북한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물론 그것도 수령절대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체제의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전제에서다. 김정일은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북한을 변화시킬 기회를 조성하려 애쓰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단 한 번의 정상회담으로 김정일이 자신의 마스터플랜을 실행할 만한 힘을 확보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김정일이 21세기 마스터플랜으로 제시한 강성대국 건설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고, 어떤 구조로 작동되는가? 어떤 국가든 국가존속의 기본 축은 안보와 경제다. 북한의 경우 이것은 구체적으로 ‘우리식 사회주의’의 체제 보장과 당면한 경제난 극복이 될 것이다. 이중 굳이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당연히 우리식 사회주의 체제유지가 경제문제를 앞선다.
북한을 정상적인 국가로 보고 기능주의적으로 분석한다면 경제가 가장 중요해 보인다. 그러나 김정일의 마스터플랜은 분명 군사·경제강국을 수단으로 정치·사상강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사상·정치강국과 군사강국은 이미 달성됐고, 이제 남은 것은 경제강국 건설이라고 주장한다. 99년 신년 공동사설에서도 99년을 강성대국 건설의 새로운 전환기로 삼고 당면한 식량난과 전력난을 해결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2000년 신년사설에서는 96∼97년 고난의 행군, 98∼99년 강행군 등 생존을 위한 절박한 표현이 사라진 대신 ‘구보행군(驅步行軍)’이라는 정상적인 행군으로 전환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우리는 북한이 올해 들어와 경제강국 건설을 독려하는 것을 보면서 개혁·개방의 길로 갈 것이라는 희망섞인 전망을 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북한의 강성대국 구조는 김정일 일인지배체제의 정치대국, 사상강국을 상위에 두고 군사강국과 경제강국은 이를 위한 보조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 김정일이 실용주의적 행보를 보인다고 해서 점차적으로 시장경제체제를 수용할 수도 있다는 증거로 본다거나 심지어 내부 개혁도 가능할 것이라는 식의, 가위 혁명적인 전망을 하는 것은 최소한 김정일 시대에는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김정일 마스터플랜의 밑그림은 우리식 사회주의 체제, 곧 정치·사상적으로 주체사상과 김정일 사상으로 무장된 김정일 독재체제,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 자립적 민족경제노선이 유지되고 경제수준은 결코 자유화·민주화 운동이 발생하지 않을 정도의 낮은 생활수준이면서 사회주의적 자립경제가 자생력을 가질 정도일 것이다. 또 대외 개방을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북한이 자유민주주의나 시장경제로 체제전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경제적 실리추구를 위한 부차적 수단인 개방이다. 그러므로 북한이 개방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은 당의 통제가 가능한 범위에 머물 게 분명하다.
마스터플랜 실행의 대내 전략
그러면 강성대국 마스터플랜의 실천을 위한 대내 차원의 체제강화 방식을 먼저 살펴보자. 북한은 90년대를 전시 상황으로 간주하여 김정일 사상의 일색화 작업을 통해 난국을 타개해왔다. 98년 8월31일 ‘광명성 1호’ 미사일 발사를 강성대국의 신호탄이자 군사강국 건설의 완성을 과시하는 사건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또 김정일은 97년 10월 노동당 총비서로 추대되고 98년 9월 사회주의 헌법개정과 국가기구체계의 개편을 통해 법·제도적 차원에서 정치체제의 안정을 구축했다. 특히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국방위원장을 국가통치의 정점으로 하면서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됨으로써 그의 권력기반이 확고함을 과시했다. 아울러 선군정치(先軍政治)로 명명된 김정일 특유의 군사중시 통치방식을 제도화해 위기상황 타개에 군대를 앞장세우고 있다.
경제난 극복을 통한 경제강국 건설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가? 북한은 98년 9월 사회주의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노선을 고수한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그 후속조치로 99년 4월 ‘인민경제계획법’을 채택했다. 북한이 주장하는 자립적 민족경제는 한 마디 원자재 조달, 기술축적에서부터 생산, 소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제활동을 자체적으로 보장하는 체제다.
최근 2년 사이 경제면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경제강국의 최우선과업으로 제시된 먹는 문제는 감자농사혁명, 종자혁명, 이모작 확대, 전군중적 가축 사육, 토지정리사업 등을 통해 해결책을 강구해왔다. 전기문제에 대해서는 전력을 인민경제의 기본 동력으로 간주하고 기존 발전소의 보강과 신설, 특히 중소형발전소의 건설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지방공업부문의 회생 기미도 나타났다. 지방공업은 대개 생필품과 관련된 경공업 분야로 4000여개의 지방산업공장 대부분이 가동을 시작했고, 근로자들의 공장 복귀율도 높아졌다는 ‘로동신문’ 보도도 있다. 이런 예들은 주민들의 생활에 윤기가 돌기 시작했고 경제가 바닥을 쳤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처럼 98년부터 시작된 김정일의 잦은 경제부문 현지지도는 그가 경제문제에서 자신감을 회복했다는 뜻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가능하게 된 요인이다. 그것은 바로 중국의 지원이며, 이로 인해 김정일이 정권붕괴의 우려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강성대국 건설을 국가전략 목표로 삼고 경제강국 실현을 추구하는 한 대외지향적 경제노선의 제한적인 확대 가능성은 있다. 비록 지금은 북한이 자립적 민족경제노선을 견지하고 있지만, 내부자원의 고갈로 한계를 느끼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시장경제의 부분도입 등 개방노선으로 선회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경우 문제는 개방의 폭이다. 이것은 북한이 과연 사상강국, 군사강국의 건설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있고, 중국을 비롯한 외부로부터 어떤 식으로 체제 보장을 약속받았는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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