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미국의 실종美軍 찾기 반세기

  • 변홍진 재미언론인

    입력2006-09-19 14: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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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미국은 모든 유해와 실종자를 찾을 때까지 당신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재임 시절 ‘성조기(星條旗) 아래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했던 미귀환 포로와 실종군인들을 기억하는 행사’에서 행한 연설문 중 한 구절이다. 미국은 9월16일을 ‘전쟁포로 및 실종자 추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
    미국방부 내에는 ‘포로 및 실종군인 담당국(DPMO)’이라는 부서가 있어 전쟁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됐거나 실종된 모든 장병 문제를 관장하고 있다. 목적은 간단하다. 우리의 군인들이 고국으로 모두 안전하게 돌아와야 한다는 것. 만약 외국 땅에서 전사했으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 유골 일부라도 가족 품에 안기게 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유골을 찾지 못하면 그의 유품 한 조각, 또는 마지막 순간의 흔적이라도 찾아야 한다.

    미국정부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미군포로와 실종자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억류당한 포로나 실종자들을 안전하게 데려오는 것을 ‘국가의 최우선정책’으로 삼고 있다. 예산도 아낌없이 사용한다. 1달러의 예산도 시퍼런 눈으로 따지는 미 국회의원들도 포로와 실종자 수색작전을 위한 예산에는 관대하다. 그래서 미국은 지금도 제2차 세계대전, 6·25전쟁, 베트남전쟁 그리고 냉전 시대에 발생한 분쟁지역에서의 미군포로와 실종자에 대한 수색과 유해송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올해 6·25전쟁 50주년을 맞이해 미국정부는 수년 전부터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미군포로와 실종자들에 대한 생사확인과 유해송환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다.

    5월9일에도 미국방부는 북한측과 미군유해 공동발굴을 위한 회담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에서 갖고 6·25전쟁 발발 50주년이 되는 6월25일부터 발굴 작업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르면 미국은 5차례에 걸쳐 진행될 발굴 작업의 경비로 북한에 각 작업당 40만달러를 지급하게 되며 각 작업 때마다 25일간 20명으로 구성된 발굴단을 현지에 파견하는 것으로 돼있다.

    미 국방부 ‘포로 및 실종자 담당국’(Defense POW/ MIA Personnal Office)의 알란 라이오타 부국장은 “약 1,500명 미군 유해가 북한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중 몇구의 유해가 발굴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며 “6·25 당시 미 제8기갑연대와 중공군과의 교전이 치열했던 운산과 구장동 지역에서만 약 500구의 시신이 발굴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양측은 지난해 12월에 협상을 벌였으나 합의 없이 끝났다. 당시 북한이 미국측에 어린이용 의복생산 공장 건설 등 인도주의적 추가 원조를 요구한 데 대해 미 국방부가 난색을 표하면서 회담이 중단됐다.

    미국 대통령의 진두지휘



    미국은 1996∼99년에 실시된 12차례의 공동 유해발굴작업에서 실종 미군으로 추정되는 42구의 유해를 회수했으며 그중 3명의 신원이 확인됐고 또 다른 10여구는 신원확인 과정에 있다. 94년 미국은 북한과 핵문제 해결을 위한 ‘제네바합의서’ 서명을 계기로 대북 관계개선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북한 땅에 묻힌 미군들의 유해발굴 등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펴왔다.

    외교적 노력의 선봉장은 빌 클린턴 대통령. 클린턴 대통령은 94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당시 김일성 주석을 만나러 갈 때 ‘미군 유해발굴과 송환’을 특별히 당부했다. 나중에 카터 전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김 주석이 협력을 약속했다”고 보고했다.

    미 국방부 ‘포로 및 실종자 담당국(DPMO)’을 이끌고 있는 앨런 라이오타 부국장은 96년 5월10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처음으로 미군 유해 공동발굴에 대한 협력의사를 카터 전 대통령에게 밝혔다”고 공개했다. 이날 회견에서 라이오타 국장은 “이때부터 북한측은 과거와 달리 유해발굴에 성의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사항이 있다. 김일성 주석이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94년 7월8일 갑자기 사망하자 클린턴 대통령과 카터 전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조의’를 표했다. 이에 북한측은 7월10일자 노동신문과 평양방송을 통해 미 대통령의 조문을 크게 보도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조의 표명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미군 유해송환’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 당시 미 국방부측의 배경설명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미군 유해송환에 노력한 흔적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는 96년 5월26일 오랜 친구이며 에너지부 장관인 빌 리처드슨 당시 연방하원의원의 방북 때 ‘미군 유해송환’에 관한 그의 관심을 친서에 담아 북한 최고위층에 전달토록 당부했다. 이 결과로 북한땅에서의 미군 유해발굴에 획기적인 계기가 이루어졌다.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6·25전쟁이 휴전된 이래 최초로 미국의 군인이 공식적으로 평양에 입국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해 6월10일부터 14일까지 평양에서 미 국방부 DPMO 대표단과 북한측의 회담도 열렸다.

    대표단에는 미국 군인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군복을 입지 않고 민간인 복장으로 들어갔다. 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이 처음으로 합의한 사항들이 많았는데 그중 특기할 만한 것을 소개해본다. 첫째, 미국과 북한이 합동으로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에 합의했다. 둘째로 북한이 보존하고 있는 6·25전쟁 자료의 열람과 수집을 허가했다. 셋째로 미국정부가 유해송환과 관련해 북한에 현금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당시 평양에서의 회담은 지난 반세기 동안 지지부진했던 6·25전쟁 미군포로 및 실종자 문제에 큰 돌파구를 마련했다. 북한땅에서 미국의 유해발굴 조사팀이 직접 땅을 파게 됐으며, 북한땅에 억류된 미군 생존포로와 실종자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당시 회담에서 더 중요한 진전도 있었다. 특별한 사항이 없는 한 2000년까지 계속될 공동발굴작업 일정을 잡았다는 것이다. 그 회담에서 양측은 우선 96년 7월10일부터 30일까지 중국 국경 근처 운산 지역에서 미군조종사 유해발굴을 공동 추진하기로 합의했으며 9월에도 20일 동안 남포 근처에서 격추된 B-29 폭격기 승무원들의 유해와 기체 잔해를 발굴키로 결정했다.

    200만달러짜리 유해(遺骸)

    최근 비밀분류에서 해제된 미 국방부 공군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이 B-29 폭격기는 53년 1월 남포 근처에서 격추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폭격기에는 당시 13명의 승무원이 탑승했는데 4명이 낙하산으로 탈출해 포로가 됐으며 그중 3명은 포로송환 때 미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한 명은 돌아오지 않아 실종자로 처리됐다. 한편 이들 승무원 중 5명이 휴전 당시 북한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앞으로 발굴 조사에서 새로운 것이 발견되기를 미측은 기대하고 있다.

    미국측은 96년 2개 지역의 발굴을 위해 처음으로 21만1000달러를 북한측에 제공했다. 지급 방법은 유해발굴 전에 반을 내고 작업이 끝난 후 잔금을 치르는 것이었다. 돈은 수표로 줄 수가 없어 미화 100달러짜리를 가방에 넣어 판문점에서 북측 인민군 장교에게 전달했다. 선금을 줄 때 가방 하나에 5만2250달러를 넣었다. 나중에 앨런 라이오타 부국장은 “내 생전 5만달러 현찰이 든 가방을 들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일부 사람들은 이 비용이 ‘미군 유골값’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생각은 다르다. 미 국방부 DPMO의 총책임자인 로버트 존스 부차관보는 “미국 법은 유해를 돈을 주고 살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라이오타 부국장은, 유해 1구당 10만달러라는 비용은 유해발굴에 종사하는 북한 주민들의 임금을 포함해 유해발굴지였던 논과 밭의 대지사용료 등이라고 설명했다. 유해를 발굴하려면 논이나 밭을 망가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 당시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을 목격한 근처 주민 등을 불러와 증언을 듣기 위해서도 비용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또 미국측 발굴 조사팀의 숙식비, 차량 및 장비 대여비로도 쓰였다는 것이다.

    북한측도 발굴 작업을 도왔다. 조사단이 현장에 가는 데 헬기를 제공했으며 평양에 있는 미국 연락책과 발굴 현장 간 교신을 위해 안테나도 설치해 주었다. 북측은 미국팀들간의 교신을 위해서 오직 HF Radio 시스템만 허용했다. HF Radio 시스템으로는 교신이 원활치 않아 미국은 위성시스템을 요청했는데 북측은 한사코 이를 막았다. 그 대신 안테나를 이동식으로 설치해 교신이 원활하도록 해주었다.

    유해발굴과 관련해 일부 한국 언론에 “미국은 유해 1구당 200만달러를 지불키로 했다”는 보도가 나간 적이 있다. 당시 기사의 대략적인 내용은 ‘미국은 그동안 적극적으로 미군 유해 송환작업을 벌여왔다. 북한과 88년부터 미군 유해송환문제를 협의해온 미국은 90년부터 94년까지 모두 211구의 미군 유해를 인도받았다. 또 96년 7월에는 자국민 송환이라는 차원에서 12명의 유해발굴팀이 단 1구를 찾기 위해 200만달러를 투여하는 노력도 보였다’는 것.

    이 보도에 대해 96년 북한과 유해송환회담을 벌였던 제임스 왈드 당시 미국방부 DPMO 부차관보는 사실과 크게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96년 1월10일부터 12일까지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열린 유해송환 회담에서 북한측이 처음 400만달러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이 비용은 미국측이 90년 이후 인수받은 211구의 미군 유해발굴과 관련해 북한이 산출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유해=돈’이라는 관계를 인정치 않아 당시 회담이 난항을 겪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회담은 96년 5월 뉴욕으로 옮겨졌다. 5월6일에 합의된 뉴욕회담에서 미국은 93∼94년에 북한이 송환했던 162구의 미군 유해분에 대해 인도적 차원에서 200만달러를 지불키로 양측이 합의했다. 당시 뉴욕회담에서 북한측은 미국이 일관되게 요구해온 공동유해발굴에 동의했다. 이에 미국도 북한이 162구의 유해를 발굴한 것에 대해 인도적 차원의 보상금조로 지불키로 했다고 라이오타 국장은 설명했다. 이때 인수받은 유해들을 중앙신원확인소에서 조사했으나 지금까지 불과 6구의 유해만 신원이 확인됐을 뿐이다. 그 때문에 미국은 공동 유해발굴을 줄곧 주장해온 것이다.

    미국이 96년 6월 평양회담에서 얻은 최대의 성과 중 하나는 6·25전쟁 당시의 군사기록 열람을 허가받은 점이다. 그때까지 미국의 일부 국회의원들이 북한을 방문해 기념관 등에서 한국전 관계자료를 관람한 적은 있으나 미 국방부 관계자들이 평양의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에서 북한의 군사기록을 열람하기는 처음이었다. 미측은 89개 전시실로 된 기념관의 39개 전시실을 일차로 열람했다. 북한은 이곳에서 대공포에 격추된 미군기 기록과 부대활동 그리고 전투상황 등 6·25전쟁 당시 기록 열람을 미측에 허가했다. 북한에서 미 조사팀이 전쟁기록 관계를 열람할 수 있다는 것은 포로나 실종자들의 신원확인과 생사확인에 큰 진전이 있음을 의미한다. 96년부터 99년까지 북한은 유해 공동발굴의 일환으로 6·25전쟁 군사기록 열람을 계속 미측에 허가했다. 그 결과 미측은 100명 이상의 실종미군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얻어냈다고 라이오타 부국장은 밝혔다. 그는 지난해 의회 전문위원들에게 “우리 조사단이 평양의 전쟁기념관 사진과 문서 등 자료를 조사한 결과 소수의 실종미군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실종미군의 가족들에게도 통보해 자료분석 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실종자 파악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미국인들이 과거 기념관을 제한적으로 방문한 적은 있지만 89개 진열실의 소장자료를 상세히 조사하기는 처음”이라고 밝혔다. 조사단에 참여한 미 국방부의 엘리자베스 체치아 육군중령은 기자회견에서 “조사단은 인식표와 운전면허증을 비롯해 실종미군의 이름과 군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관계자료들을 열람했다”면서 “100여명의 실종미군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우리는 북한측의 전폭적인 협조 아래 소장 자료를 촬영하거나 복사할 수 있었다”면서 “그중에는 미군이 세균전쟁을 일으켰다고 인정하는 내용의 미군 진술서도 있었다”고 밝혔다.

    미 국방부는 6·25전쟁 당시 실종된 총 8100여명의 미군 가운데 3000여명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추정해왔다. 당시 실종된 미군 중 일부가 아직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관측들이 언론 보도를 통해 간간이 흘러나왔다. 포로 및 실종자와 관련한 유해발굴작업차 북한을 방문한 미 국방부 관계자들은 북한내 생존 미군포로나 실종자의 생사확인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북한측이 비협조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1953년 휴전협정 후 포로교환 때 미국으로 돌아오기를 거부했던 21명의 미군병사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역시 비협조적이라는 것이다.

    60년부터 80년대까지 월북한 미군병사 6명에 대해서도 미국은 그들 가족의 요청으로 북한측에 면담을 주선해달라고 했으나 이 역시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 국방부의 마틴 위스다 중령은 “북한에 망명한 6명의 미군 중 4명의 생존을 확인했다”고 보고서에서 밝혔다. 4명의 미군 망명자들은 북한에서 잡지나 영상물에 선전용으로 출연한 것이 확인됐으며 북한군 자문관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흥미로운 것은 79년 6월에 북쪽으로 망명한 로이 정(Roy Chung) 일등병이 동양계 이름이라는 것이다. 한편 미 국방부 DPMO 관계자들이 작성한 96∼97 방북 보고서에서 “북한은 일부 미국인이 망명자건 아니건 신분에 관계없이 북한 내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보고서는 “북한 내에 본인의 의사에 반해 억류당하고 있는 미국인의 존재에 대해서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북한측이 우리의 미군 망명자 면담 요청에 차후 논의 대상이라고 동의한 점은 유익한 것”이라고 밝혔다.

    다각적인 정보수집

    미국은 북한 내에 생존해 있을지 모르는 미군포로나 실종자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한국인들로부터도 도움을 얻어 왔다. 94년 3월 한국으로 탈출했던 국군포로 조창호 중위 소식을 접한 미 국방부 DPMO 관계자들은 무척 흥분했다. 미국측은 이듬해 2월14일 조창호 중위로부터 북한내 사정과 미군포로에 관한 정보를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이 자리에서 조중위는 52년 말 동료 국군포로들로부터 여러 곳의 포로수용소에 미군포로들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특히 미측은 조중위로부터 전사한 미군포로들이 가매장된 지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조중위는 미 조사관들에게 북한에 생존해 있는 노인들을 통해 한국전에 참전했던 미군포로 합동무덤들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란 점도 상기시켰다. 미국은 그후 조창호 중위처럼 북한을 탈출한 국군포로인 양순용씨, 서병렬씨, 박홍길씨, 장무환씨 그리고 손재술씨 등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했다. 99년 3월 귀환한 국군포로 손재술씨(67)는 “북한에 억류중인 10여명의 국군포로를 알고 있다”고 진술했는데 미국 관계기관에서 간접적으로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귀환 국군포로들뿐만 아니라 망명자들이나 귀순자 또는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정보를 수집해 왔다. 미 국방부 DPMO 지침서에는 이들 귀순자, 망명자 그리고 탈북자들을 어떤 형태로든 접촉해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고 적어놓고 있다.

    한편 최근 재미동포가 한국에서 실시되고 있는 미군 유해발굴에 협조하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5월23일자 미주중앙일보는 LA 거주 미주동포 유용수씨(67)가 49년 전 매장된 미군포로 유해발굴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 정치범 수용소에서 미군포로의 시체를 묻었던 그는 미 국방부의 요청으로 49년 만에 유해발굴을 위해 5월29일 한국에 왔다.

    유씨는 51년 6·25전쟁 당시 인민군 징집을 피해 토굴 속에 숨어 있다가 발각돼 철원군 노동당사 근처의 정치범 수용소에 갇혔는데 이때 같은 방에 있던 미군 조종사를 만나게 됐다.

    문제의 미군 조종사는 식중독으로 사망했는데 당시 유씨는 수용소 간수와 함께 미군 시체를 수용소 인근에 묻었고 그후 유씨는 북으로 호송중 탈출했다. 그는 훗날 남미 파라과이로 이민갔으며 87년 미국에 이민했다. 은퇴후 문필활동중인 유씨는 미군 조종사의 무덤에 대한 기억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98년 5월 남가주 미수복 강원도민회장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주한미군 당국에 그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미군 당국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유씨의 진술이 당시 미군 조종사의 실종과 연관된 기록임을 밝혀냈다.

    최근 유씨는 미 국방부로부터 하와이에 있는 육군중앙신원확인소(CILHI) 관계자들과 함께 유해발굴에 협조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귀국했다. 유씨 부부의 왕복여비는 미 국방부가 제공했다. 그런데 유씨에게 문제가 생겼다. 최근에야 미국 시민권 선서를 했기에 미국 여권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이 사정을 들은 DPMO측은 미 국무부에 협조를 요청해 유씨에게 24시간만에 여권을 발급해 주었다. 이런 점도 미국정부가 참전군인들의 유해발굴에 얼마나 정성을 쏟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다.

    전세계적으로 벌어지는 미국의 사망미군 찾기

    한국전에 참전했던 미군포로나 실종자를 찾으려는 미국정부의 노력은 남한이나 북한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무대로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있다. 여기에도 클린턴 대통령이 한몫을 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중국의 주룽지 총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클린턴 대통령은 주총리에게 특별한 요청을 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중공군의 군사기록을 통해 미군포로들이나 실종자들의 수색작업에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중공군은 장진호 등 여러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특히 중공군은 미군포로들을 수용하고 있었으며 일부는 소련으로 후송까지 했던 것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미 국무부나 국방 관계자들이 중국정부측과 이 문제에 교섭을 벌였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을 받은 주룽지 총리는 협력을 약속했고 그후 이 문제는 비교적 쉽게 풀려 나가고 있다. 미 국방부 DPMO의 로버트 존스 부차관보는 1월31일 베이징을 방문, 첸밍밍 중국외교부 북미 및 오세아니아 부국장과 만나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 자리에서 중국측은 한국전에 참가했던 중공군의 군사기록 열람을 포함해 6·25전쟁에서 미군포로들을 다루었던 참전 중공군 병사들과 미측이 인터뷰를 할 수 있게 협조하겠다고 다짐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자리에서 중국의 첸 부국장이 남한에서 진행되고 있는 유해발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중국은 남한땅에 묻힌 중공군 병사의 유해발굴에 미측의 협조를 요청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 재임시에도 6·25전쟁 미군포로와 실종자 문제에 협조를 요청했다. 이미 92년 옐친 대통령과 당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포로 및 실종자 문제를 위한 미·러 공동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옐친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에 전폭적인 협력을 해주었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미국측에 약 1500페이지에 달하는 6·25전쟁 참전 관계 자료와 사진들을 제공했다. 6·25전쟁 당시 구소련은 미그 전투기들을 대량 참전시켜 미군 조종사들과 공중전을 벌였다. 러시아측은 포돌스크 국립문서보관소에 비밀보관된 6·25전쟁 참전문서들에 대해 미국측 조사반의 열람을 허가했다. 이들 자료에는 6·25전쟁에서 포로가 된 미군병사들이 구소련으로 후송된 사실도 포함되어 있어 미국측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러시아측이 미국에 건네준 자료에는 국군포로들에 관한 사항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련의 통제를 받은 일부 미군포로들과 한국군 포로들은 소련의 핵전쟁, 화생방 그리고 세균전 등의 실험용으로 이용됐다는 정보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 국방부 DPMO 관계자들의 추적작업에는 과거 동구권 국가들도 들어 있다. 지난해 4월 미국 관리들은 불가리아를 방문해 과거 한국전에 의무관으로 파견된 전직 군의관들을 만났다. 이들 외에도 미국 관리들은 체코와 유고 등도 방문해 휴전회담에서 중립국 감시위원단으로 활동했던 사람들과 정부 관계 문서들을 수집했다. 또한 미국은 과거 공산권에서 서방으로 망명한 동구권 인사들과도 광범위하게 접촉해왔다.

    이중에 68년 미국으로 망명한 전 체코 국방성 참모장 겸 당 제1서기였던 잔 세이나의 폭로는 아주 충격적이었다. 그는 96년 9월17일 미 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6·25전쟁 당시 소련군이 행한 미군포로와 한국군포로에 대한 생체실험을 폭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6·25전쟁 초기에 체코정부는 모스크바로부터 북한에 군병원을 설치할 것을 명령받았다. 병원이 완성되자 소련측은 군부상자 치료를 위한 병원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이는 위장이었다고 세이나는 말했다. 그는 체코정부의 최고기밀 서류를 인용해 이 병원이 미군포로와 한국군포로들에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장이었다고 증언했다. 소련 과학자들은 미군포로들을 대상으로 소련이 제조한 핵무기를 포함해 세균전과 화학전에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가를 실험했다. 그들은 한국군포로보다 미군포로들을 선호했다. 그 이유는 소련의 1차적인 적대국은 미국이기에 미국인들의 신체 반응이 중요했다고 세이나는 설명했다.

    체코정부는 소련당국의 명령으로 이 병원 인근에 시체소각장을 건립했다. 6·25전쟁이 휴전에 이르렀을 때 이 병원에는 약 100명의 미군포로들이 있었다. 이들 포로들은 우선 4개 그룹으로 나뉘어 체코로 후송되어 신체검사를 마친 후 소련으로 이송됐다. 세이나는 이 모든 사실을 북한에 파견된 체코 비밀경찰과 군의무관들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또 소련군 고문관들의 보고서도 입수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1968년 체코를 탈출할 때 적어도 200명 이상의 또 다른 미군포로들이 소련으로 후송됐다고 말했다. 미 국방부 관계자들이 이 정보를 추적했음은 당연했다.

    이렇게 미국정부는 참전 지역에 관계 없이 전세계를 상대로 미군포로나 실종자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만약 이들 정보가 미군포로나 실종자 추적작업에 도움을 줄 때는 보상금도 지급하고 있다.

    미국이 해외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의 유해를 모국으로 송환하는 것은 남북전쟁 이후 멕시칸 전쟁(1846~1848) 때부터라고 미 국방부 전사자료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전사자나 실종자 신원파악이 정확지 않았다. 그리고 유해봉송도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전투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면 전투지역 근방이 그들의 무덤이 됐다. 그러다가 1898년 미서전쟁을 계기로 해외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유해를 미국땅으로 송환하는 제도가 미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됐다. 당시 쿠바 전투에서 사망한 미군들의 유해를 미국본토로 이송했다. 그후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미군이 유럽전선에 투입되면서 미군 유해가 대서양을 건너 미 본토로 대거 송환됐다. 이를 위해 영현청을 설치해 전사자들의 신원파악과 유해송환업무를 관장케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면서 전사자나 포로 및 실종자 관리의 중요성은 한층 높아져 미 의회는 관계 법령을 대대적으로 보완했다. 또한 지휘책임을 육군장관에게 맡겼다. 또한 전사자의 신원파악도 과학적으로 다루게 되어 오늘날과 같은 신원확인소가 설립됐다. 이 신원확인소에 사상 처음으로 전문해부학자와 인류학자들이 요원으로 근무하게 됐다. 이후 한국전쟁과 월남전쟁 등을 포함한 냉전상황에 신원확인소의 중요성이 높아져 1976년 5월 하와이주 호놀룰루 히캄 공군기지 내에 DNA 감식반 등 첨단장비를 갖춘 ‘육군중앙신원확인소(CILHI)’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 신원확인소 건물 입구에 레이건 전 대통령이 말한 “당신들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실종미군 찾기의 교훈

    육군중앙신원확인소(CILHI)는 우리에게도 낯익은 기관이다. 최근 북한으로부터 송환되는 미군 유해가 판문점을 통해 미측에 인수되는 즉시 하와이에 있는 이 신원확인소로 보내진다. 이곳에서 정밀검사를 통해 신원을 식별하고 확인이 끝나면 가족에게 통보되고 이어 국가의식에 따라 엄숙한 장례식을 치르고 유해는 비로소 조국의 땅에 안장된다.

    최근 한국에서도 재북 국군포로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억류 국군포로 송환촉진 연구회 총무간사’로 활동하는 이기봉씨는 국군포로에 대해 최소한 생사 확인 및 희망자의 귀향을 위해 정부의 노력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미주에서도 알려졌다. 한편 지금까지 한국정부가 국군포로 현황에 대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여러 채널을 통해 북한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국군포로 중 268명의 명단을 확보했다는 것이 전부이고 유엔이나 국제인권단체들에 건의하는 정도로 보인다.

    6·25전쟁이 휴전됐을 당시 미송환 국군포로 숫자는 연구자에 따라 2만∼9만여명까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한국 정부기관에서는 대체로 2만여명 선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53년 포로교환 현황을 보면 유엔군측이 인수한 포로가 1만3457명(한국군 8333명, 유엔군 5124명), 인계한 포로는 8만2493명(북한군 7만5778명, 중공군 6715명)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실종자는 총 4만1954명이며, 이 가운데 유가족 신고와 증언자료를 토대로 전사처리된 경우가 2만2562명이었다. 병적부 확인 결과 실종자로 처리된 1만7020명과 미확인자 2372명을 합친 나머지 1만9392명이 미송환 국군포로일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한국 국방부측 설명이다.

    97년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제대군인연맹(WVF) 제22차 총회에서 ‘한국전쟁 포로 송환 촉구’ 결의안이 통과됐다. 당시 세계 74개국 200여개의 참전 제대군인 단체로 구성된 서울총회는 폐회식에 앞서 각국 대표단이 “6·25전쟁 포로 및 실종자들은 국제인도주의적 법규와 포로 자신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송환돼야 하며 북한은 이 결의에 성의 있는 태도로 임할 것을 희망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지난번 코소보 사태로 유고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미군포로 중 한 군인은 미 군용기로 미국땅에 내리면서 “조국이 명하면 나는 다시 코소보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을 위해 싸움터에 나갔다가 포로가 된 자신을 위해 미국민들과 미국정부가 쏟는 애정을 누구보다도 실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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