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린다 김 구속, 백두 로비의 새 진실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09-13 14: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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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사업 로비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짚기 위해선 린다 김은 린다 김대로, 백두는 백두대로 구분해 접근해야 한다. ‘백두사업=린다 김’이라는 공식은 잘못된 것이다. 린다 김이 로비한 사업이므로 백두사업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백두사업은 린다 김의 로비와 별개로 그 자체로 평가받고 비판받아야 한다. 백두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군관계자들이 린다 김 사건을 바라보며 가슴을 치는 데는 그런 사정이 있다.

    냉정히 말하면 린다 김은 다른 로비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국방부가 추진하고 있던 백두사업에 뛰어들어 장비 및 기종 선정과정에 자신을 고용한 회사를 위해 로비한 죄밖에 없다. 대형 국책사업 수주전에 로비스트가 개입하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린다 김은 1996년 6월 그 로비전에서 경쟁자들을 제치고 승리했다.

    말할 것도 없이 로비 자체는 죄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로비의 행태, 곧 ‘부적절한 관계’로 상징되는 부당한 로비다. 거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그 로비로 엉터리 장비와 기종이 선정돼 한국의 국익을 손상시켰는지 여부다. 이제껏 드러난 바에 따르면 린다 김은 이 두 가지 혐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그렇긴 해도 모든 비난을 그녀에게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을 뿐 아니라 ‘제 발이 저린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뇌물이 오갔다면 준 사람보다는 받은 사람에게 더 문제가 있다는 건 상식이다. 또 린다 김의 로비로 ‘부적절한’ 장비와 기종이 선정돼 국익에 해를 끼쳤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장사꾼인 로비스트보다 그 제품을 사들인 구매자에게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구매자란 바로 무기도입사업에 관여한 정책 결정권자들이다.

    린다 김과 백두사업을 구분해 비판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백두사업의 문제점을 린다 김 탓으로만 돌리는 시각은 한국군의 자주정보력 확보에 이바지할 백두사업을 필요 이상으로 매도하는 데도 한몫한다. “모든 건 린다 김, 그 여자 때문이야!” 책임을 회피하는 데 그보다 더 편한 말은 없을 것이다. 과연 그렇게 단정할 수 있을까. 아마도 국방부 정책결정권자들과 백두사업 추진 실무자들을 그보다 더 모욕하는 표현도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한 여자한테 놀아났어!”라고 고백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과연 백두사업은 ‘한 여자의 치마폭’에 싸여 망쳐버린 사업인가.



    [ 1부 린다 김 옥중인터뷰 ]

    지 난 5월15일 ‘신동아’(6월호)와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 린다 김이 가장 난처해한 질문은 기무사 내사기록에 있는 이화수 예비역 대령(백두사업 전주미사업단장)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린다 김은 “귀국 후 검찰에서 6일 동안 조사 받을 때도 이런 식으로 취조 당하진 않았다”며 화를 냈다. 워낙 그녀가 정색을 하는 바람에 한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지기도 했다. 사실 그 질문은 사생활 침해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호텔방에서 미국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이화수 대령과 새벽까지 술을 마신 일을 두고 그러는 것 같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를 사생활 영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 7월7일 법원은 린다 김을 법정구속하며 이화수 예비역 대령과의 관계를 언급해 파문을 일으켰다. 재판장은 판결문을 통해 “피고인(린다 김)은 동인(이화수)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동인으로부터 백두사업 관련 군사정보를 제공받아 온 것으로 보여져 그 범정(범죄의 정황)이 극히 불량한 점, 피고인에게 뚜렷한 개전의 정상이 없는 점 등을 참작해 형을 정한다”고 밝혔다.

    린다 김은 그동안 입버릇처럼 “재판이 끝나면 모든 것을 다 말하겠다”고 말해왔다.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엔, 그동안 그녀가 간간이 언급해왔듯, 권영해 전 안기부장, 임재문 전 기무사령관, 무기중개상 조풍언씨 등이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법정구속은 그녀가 폭로할 기회를 앗아가버렸다. 법조계 주변에서 그녀가 구속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다. 웬만한 기자들은 검찰의 ‘3년 구형’을 집행유예로 가기 위한 수순으로 판단했다.

    린다 김은 선고공판 다음날인 7월8일 다시 한번 ‘신동아’와 인터뷰를 갖기로 하고 시간과 장소까지 약속한 상태였다. 지난 5월 ‘신동아’ 인터뷰 후 자신의 사생활 부분만 집중적으로 다룬 여성지들 때문에 “스타일 구겼다”고 불만이던 그녀는 사생활 영역에서 벗어난 인터뷰를 원했다. 그에 따라 예정됐던 인터뷰에서는 백두사업 관련 비화, 무기도입사업을 둘러싼 군내 파워게임 실상과 군수비리 등을 숨김없이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조짐은 지난번 ‘신동아’ 인터뷰 때 어느 정도 나타났다. 당시 린다 김은 “나중에 내 재판이 깨끗이 끝나면 군비리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것”이라며 ‘결전’ 의지를 다졌다.

    기자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7월3일 오전 서울 아미가호텔 커피숍에서였다. 그날 린다 김은 4일 후 법정에 입고 나왔던 검정 치마를 입고 나타났다. 이날 그녀의 입에서는 임재문 전 기무사령관과 윤종호 전 국방부 제2차관보의 이름이 나왔다.

    이틀 후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든 기자는 린다 김에게 전화를 걸어 “집행유예 판결이 나온 걸로 가정하고 미리 인터뷰를 갖자”고 제안했다. 린다 김은 “지금 얘기할 수도 있지만 진짜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다면 며칠만 참아달라”고 했다. 그녀는 선고가 어떻게 나올지 무척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짐짓 여유를 부리긴 했지만 말투엔 긴장감이 잔뜩 배어 있었다. 그동안 통화할 때마다 했던 질문을 또 했다. “기자들은 어떻게 예상하냐.”

    린다 김은 “변호사들이 아무 얘기도 해주지 않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재판 때 와서 위로해 달라”는 것이었다.

    “언론이 나를 죽였다”

    구속된 지 4일이 지난 7월11일 오전 기자는 린다 김을 면회했다. 애초 그녀와 가족들과 협의해 함께 면회하려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아 ‘몰래’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면회가 끝난 후 가족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다.

    린다 김은 원하지 않으면 면회를 거절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의 쾌활하고 자신감 넘치던 모습이 아니었다. 표정엔 공포와 불안의 기색이 역력했다. 빗질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인지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푸석했다.

    ―지내기가 어떻습니까.

    “….”

    린다 김은 잠시 아무 말 없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떨 정도로 격렬하게 흐느꼈다.

    ―잠은 어떻게….

    “통 못 자고 있어요.”

    ―혈압이 원래 좋지 않잖아요?

    “예. 그런데 누구한테 부탁하기도 미안해서 그냥 참고 있어요.”

    린다 김은 오랫동안 저혈압으로 고생해 왔다. 재판을 앞두고 매일같이 병원을 드나들고 심지어 몇 차례나 입원했던 데는 그런 사정이 있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까.

    “….”

    ―잘못된 로비가 있었다면 그 로비를 받고 정책을 결정한 사람들에게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린다 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자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판결이었습니다.

    “… 언론과 기자들이 그렇게 만든 것 아니에요? 기자분들이 저를 이렇게 죽였잖아요?”

    린다 김의 말투가 격해졌다.

    ―구치소에서 많은 생각을 할 텐데….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어요. 지금 보다시피 이런 모습으로 있어요. 뭐가 뭔지 나도 모르겠어요(이 말을 하며 린다 김은 또 한차례 흐느꼈다).”

    기자는 준비해온 질문을 계속 삼켜야 했다. 린다 김은 “(인터뷰)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고 말했다.

    “저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고의가 아니라는 건 아시잖아요…. 권기대 장군님 만나면요, 꼭 전해주세요. 절대 제가 한 짓이 아니에요.”

    권기대씨를 언급하며 린다 김은 또다시 울먹거렸다. 예비역 육군 준장인 권씨는 1998년 백두사업에 대한 기무사 수사 당시 린다 김으로부터 1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권씨는 6월23일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린다 김이 나를 함정에 빠트렸다”고 주장했다. 기무사 수사 당시 권씨가 순순히 돈 받은 사실을 시인한 것은 ‘녹취록’ 때문이다. 그 녹취록은 린다 김과 여직원의 통화 내용을 담은 것이다. 녹취록에 따르면 린다 김은 여직원에게 “권장군 때문에 큰일이야. 오늘 만나기로 했는데 1000만원을 찾아놓으라”고 말했다는 것.

    “조풍언을 기억하세요!”

    권씨는 법정에서 “기무사 수사가 벌어지자 린다 김이 자신의 불법로비실태를 감추기 위해 나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의도적으로 통화를 녹음한 뒤 기무사에 녹음테이프를 넘겨준 의혹이 짙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판사의 질문에 린다 김은 “왜 이런 오해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녹음테이프를 만들어 권장군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고 답변했다.

    린다 김은 정말 억울하고 결백하다는 표정이었다. 권기대씨를 만나 오해를 풀어줄 것을 간절히 부탁했다. 그녀의 입에서, 발작적이고 격렬한 어조로, 조풍언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은 그 직후였다.

    “조풍언이라는 이름을 꼭 기억하세요. 모든 건 조풍언 짓이에요.”

    ‘조·풍·언’을 언급하며 그녀는 거의 울부짖었다. 단단히 한이 맺혀 있는 듯싶었다. 조씨는 현 정권 출범 후 무기중개업계에서 상당한 영역을 확보한 무기중개상으로 알려져 있다.

    ―근거가 있습니까. 근거 없이 함부로 얘기할 순 없지 않습니까.

    린다 김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나름대로 계산을 하는 것일까. 뭔가를 얘기할 듯하면서도 시원시원하게 털어놓지 않는다.

    “백두·금강이 한 세트인 것 아시잖아요. 왜 조풍언이 에이전트였던 금강은 아무 일 없다고 보세요?”

    ―금강을 어떻게 조풍언씨가 맡게 됐지요?

    “제가 따내 넘겨준 것이잖아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여기는 걸까. 아니면 증거가 없어서일까. 조풍언씨에 관한 얘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황명수씨나 윤종호씨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없습니까. 백두사업 사업자 선정과정에 두 사람이 상당한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질문 하지 마세요. 이 안에서 그런 얘기는 더 하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들한테 말하기도 싫고.”

    ―백두사업 운용부대가 추천한 장비와 비행기가 탈락했는데요.

    “OO부대가 선호한 TRW사 장비와 펠콘은 가격이 너무 셌어요. 백두사업, 그렇게 엉터리로 하지 않았어요. 미국 회사들, 그렇게 부도덕하지 않습니다. 한국만 보고 한 사업이 아니에요. 한국에 잘 들어가야 동아시아 다른 국가들에도 진출할 수 있죠.”

    ―98년 기무사 수사 때 사전에 낌새를 챘습니까.

    “전 처음부터 (수사가) 그렇게 진행될 줄 알고 있었어요.”

    ―정권 교체와 관련된 것입니까.

    “자꾸 그런 얘기하는 게 저한테는 도움이 되지 않아요.”

    ―현 정권에서 도와줄 사람은 없습니까.

    7분이라는 짧은 면회에서 이런 ‘잔인한’ 얘기만 늘어놓은 기자가 원망스러울 법도 했다. 린다 김은 “그런 얘기하지 말자”며 눈시울을 붉혔다.

    입회 교도관이 면회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다음에 다시 들르겠습니다”라고 인사하자 린다 김은 “예, 그러세요” 하며 안으로 사라졌다.

    다음은 그동안 기자가 린다 김과 통화하거나 만나면서 나눴던 대화를 날짜에 상관없이 정리한 것이다.

    ―권기대씨는 린다 김이 녹음테이프를 조작했다고 믿고 있어요.

    “권장군은 기무사 유도신문에 걸려든 거예요. 권장군이나 이화수 대령 같은 분들, 참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이에요. 백두사업 진행과정에 반대의견을 내긴 했지만 사업이 잘 되려면 그런 분들도 필요하지 않겠어요. 왜 그렇게 나를 오해하게 됐는지, 참 안타까운 일이에요. 아마도 내가 여직원에게 이렇게 말했을 수는 있을 겁니다. ‘권장군 그 양반 때문에 큰일이야’라고. 그러나 전화로 돈을 얼마 찾아 놓으라, 이런 얘기는 한 적 없어요. 돈을 찾으면 그냥 찾지, 뭣하러 여직원에게 돈 줄 사람 이름까지 얘기하겠어요? 그 여직원이 전해줄 돈도 아닌데. 외국 같으면 법정에서 권장군처럼 얘기하면 판사가 당장 제지해요. 그런데 한국 법정에선 판사가 그냥 내버려두더라구요.”

    ―권기대씨는 “린다 김이 나한테 미안해 한다면 이제까지 전화 한 통화 없었겠냐”고 하던데요.

    “재판이 끝나면 권장군한테 위로전화 드리려고 했어요. 그분도 참 억울할 거예요. 그 돈은 정말 뇌물이 아니었거든요. 어떻게 명예회복시켜 드릴 방법이 없을까요.”

    ―96년부터 기무사가 추적을 시작했는데, 뭣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당한 건 육군 것까지―백두사업은 공군과 관련돼 있지만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사업은 육군 것이잖아요―건드렸기 때문 아닌가 싶어요. 당시 군부 실세였던 L장군은 프랑스 톰슨사 것을,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문민정부 실세 K씨는 독일 것을 지원했어요. 그 사람은 프랑스제 미스트랄 미사일 등 몇 가지 무기도입사업에 관여했어요. 왜 그런 사람은 가만히 놔두는지 모르겠어요. 미스트랄 미사일,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잘 아시잖아요. 또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도 엉망이라고 들었어요. 그때 꼭 이스라엘 것을 들여왔어야 했는데… 스위스 정부가 보증까지 할 정도로 훌륭한 장비였는데, 지금도 아쉽습니다.”

    린다 김의 말대로 미스트랄 미사일과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는 도입 후 그 성능을 두고 잡음이 뒤따랐다. 백두사업(신호정보수집 정찰기)을 비롯해 금강사업(영상정보수집 정찰기) 하피사업(공격용 무인항공기) 포파이사업(공대지미사일) 등 린다 김이 따냈던 사업들은 대부분 공군과 관련돼 있다.

    ―98년 기무사 수사 배경으로 짚이는 게 있습니까.

    “기무사가 수사에 착수하기 전 몇 가지 새로운 사업을 거의 손에 넣은 상태였습니다. 어떤 무기와 관련해 이스라엘 IAI사와 로비스트 계약을 맺었어요. 또 차세대전투기사업(FX)과 관련해 미국 보잉―맥도날드사와 계약 직전까지 갔습니다. 조기경보기도 제 손에 있었어요. 누군가 경쟁에서 나를 배제하기 위해 음해한 겁니다. 백두사업 운영부대장으로 사업을 중단시키려 했던 P장군이 기무사 출신이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겁니다. 누군가, 아마도 조풍언이 기무사와 (현 정권 사이에) 연결고리가 됐을 거예요.”

    “왜 금강은 문제 안 삼나”

    지난 5월17일 국회 국방위에서 한나라당 이신범 의원은 린다 김과 조풍언씨의 관계를 언급해 눈길을 끈 바 있다. 이의원은 “린다 김의 활동이 부자연스럽게 된 시점에 대통령과 특별한 친분이 있는 재미교포 조풍언씨가 무기구매사업의 일부를 인수하기 시작한 정황이 있다”며 조씨가 미국 방산업체와 거래를 계약한 서류 사본을 제시했다. 그는 또 “조씨가 미국 록히드마틴사(금강사업 사업자)와 계약할 수 있도록 린다 김이 도와주고 조씨는 현 정권 출범 후 무기거래 쪽에서 크게 성장했다”는 주장을 폈다.

    린다 김은 조풍언씨에 대해 아주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신동아’ 6월호 인터뷰에서 그녀는 “한때 내 밑에서 에이전트 일을 하며 내 덕을 봤던 조풍언씨가 정권이 바뀐 뒤 나를 배신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조씨가 대통령 부부와 친하다는 것을 내세우며 실세 행세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후로도 린다 김은 기자에게 조씨 얘기를 여러번 했다.

    “왜 금강은 문제삼지 않습니까. 언론도 참 이상해요. 금강도 백두와 똑같이 호커800(백두사업 기종)을 사용하는 겁니다. 백두가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금강도 마찬가지지요. 백두는 이준영씨(린다 김이 회장인 IMCL 부사장·사장 역임)가 에이전트였고 금강은 조풍언씨가 에이전트였어요. 둘 다 제가 따내서 넘겨준 겁니다.”

    숙적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싶은 린다 김과 조풍언씨의 관계. 린다 김의 얘기를 확인하기 위해 미국 LA에 있는 조씨의 사무실과 집에 전화를 걸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사무실의 여직원은 “회장님은 유럽 출장중”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용건을 말하고 조씨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기사 마감 마지막날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다음은 자신의 사생활과 관련한 몇 가지 의혹에 대한 린다 김의 해명.

    ―미국에 건너간 시기와 연예계 활동경력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제가 얘기했잖아요. 그 시기는 제가 아주 힘들었던 때라고. 말하기 곤란한 부분이 있는 겁니다. 도미 시기는 맞아요. 다만 미국에 간 후에도 한국을 자주 들락거렸어요.”

    ―부모가 몹시 어렵게 살고 있는데요. 친부모가 아니라는 얘기는 또 뭡니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예요. 그동안 들어간 돈이 얼마인데…. 기자들 만난다고 돈을 요구하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제가 오죽하면 그러겠나, 생각해보세요.”

    ―전 남편의 형으로부터 몇 해 전 미국에서 보증 피해와 관련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당하고 얼마 전엔 국내에서도 고소를 당했지요?

    “미국에선 변호사 실수로 궐석재판으로 처리돼 패소한 것입니다. 판사가 괘씸죄를 적용했대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긴 일이에요. 보증 피해인데 나도 2차 보증인으로 나섰다 피해를 입었어요. 이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국내에서 내 사건이 터지자 고소한 의도가 뻔하지 않습니까.”

    린다 김의 설명이야 어쨌든 검찰 주변에선 그녀가 이 사건으로 추가기소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7월3일 아미가호텔에서 만났을때 린다 김이 마지막으로 던진 말은 “임재문(전기무사령관)과 권영태(전안기부장) 커넥션을 추적해 보라”는 것이었다. 한편 린다 김의 가족들은 기자에게 면회 때 나눈 얘기를 기사화하지 말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어찌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방부가 통신감청용 정찰기 도입사업(일명 백두사업)에서 성능 미달 장비를 선정한데다 무기중개상의 로비 사실이 드러나 군 수사당국이 전면수사를 벌이고 있다.

    국방부는 통신감청용 정찰기들이 군의 요구성능에 미달된다는 지적에 대해 지난 8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 전문가들을 투입해 전면 재평가작업을 벌여 일부 문제점을 발견, 성능을 보완하도록 미국측과 협상을 벌이고 있다.

    군 수사당국은 14일 미국 무기중개업체 IMCL사로부터 돈을 받고 백두사업 관련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모정보부대 1급 군무원 권기대(예비역 육군 준장)씨를 구속한 데 이어 전·현직 군 고위관계자들이 IMCL 미국 본사 회장 린다 김(한국명 김귀옥·46·여) 등으로부터 로비를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이에 앞서 국군 기무사는 지난달 28일 백두사업 추진 과정에 무기중개상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군사기밀을 유출한 백두사업 주미연락단장 이화수(50) 공군 대령 등 영관장교 4명과 IMCL사 관계자 2명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국방부는 오는 20일 방한하는 미국측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사업을 전면 재검토할 방침이다.”

    이상은 1998년 10월14일자 한 일간지 기사다. 당시 약 두 달 가까이 진행된 기무사 및 군검찰의 수사는 로비스트 린다 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 사건 여파로 린다 김이 회장을 맡고 있는 무기중개업체 IMCL 한국 지사는 쑥밭이 됐다. 서울 강남에 있던 사무실엔 기무사와 군검찰 수사요원들이 들이닥쳐 압수수색을 벌였다. 이어 사장과 부사장이 린다 김에게 군사기밀을 넘긴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이 사건과 관련돼 구속된 사람은 모두 7명. 현역 장교가 이화수 대령을 비롯해 4명, 군무원이 1명, 그리고 민간인이 2명이었다. 주인공인 린다 김은 운 좋게도(?) 미국에 있었기에 화를 면했다. 서울지검은 그녀를 기소중지자 명단에 올렸다.

    백두 찬성파 vs 반대파

    백두사업 관련 로비 여부를 파헤친다며 자못 거창하게 시작한 기무사와 군검찰 수사는 그러나 변죽만 울린 채 막을 내렸다. 관심을 모았던 정치권 및 전·현직 군 고위관계자들에 대한 린다 김의 로비 실태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그나마 구속된 사람들도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7명 중 이화수 대령을 비롯한 현역 장교 4명은 기소유예 또는 선고유예로 모두 풀려났다. 백두사업 운용부대인 OO부대의 체계관리단장으로 사실상 백두사업을 총괄관리했던 권기대씨는 공군 준장 출신인 IMCL 사장 신동윤씨와 더불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유일하게 실형 선고(징역 1년)를 받은 사람은 IMCL 이사 김장환씨. 그러나 김씨마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왜 이런 ‘허망한’ 결과가 나왔는가. 한마디로 수사가 졸속으로 진행된 탓이다. 이는 당시 수사관계자들의 증언으로도 확인된다. 기무사는 왜 그토록 섣부르고 무리한 수사를 벌여야 했을까. 기무사 수사자료를 넘겨받은 군검찰이 더 이상 수사를 진전시키거나 확대시키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린다 김이 수사망에서 빠져나간 건 우연이었나 봐주기였나.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기무사 수사의 배경을 살피는 것은 린다 김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 수사는 백두사업과 린다 김의 관계를 공론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잖아도 그해 들어 운용부대 내부의 이견 노출과 감사원 감사, 국방부 특별평가단의 평가를 통해 적지 않은 문제점을 드러낸 백두사업은 이 수사를 계기로 의혹 투성이 사업으로 낙인찍혔다. 검은 로비가 작용한 부실 덩어리 사업. 이것이 당시 백두사업에 씌워진 굴레다.

    수사는 의도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백두사업 진행에 큰 타격을 입힌 것이다. 당시 군내에선 잇따라 드러나는 백두사업의 문제점을 두고 사업 찬성여론과 반대여론이 엇갈리고 있었다. 백두사업 운용부대인 OO부대도 사정은 비슷했다. 대북정보수집이 주요 임무인 이 부대의 백두사업팀 관계자들은 사업 진행과 관련해 심각한 내부 갈등을 겪고 있었다.

    구속된 군 관계자 5명은, 굳이 구분하자면 하나같이 찬성파, 곧 문제점을 개선해서라도 백두사업을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반면 이 부대 부대장을 비롯한 반대파들은 사업 자체의 효용성을 문제삼는, 말하자면 백두사업의 필요성과 가치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갈등 속에 느닷없이(?) 진행된 기무사 수사는 백두사업 찬성파들을 움츠러들게 했다.

    이런 정황은 당시 수사의 초점이 린다 김의 로비 여부가 아니라 백두사업 자체에 맞춰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기무사 수사의 성격을 이른바 자주국방론자와 연합방위론자 또는 용미파(用美派)의 충돌로 보는 견해다. 그 배경엔 백두사업은 한국군의 독자적인 정보수집력 확보를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은 미국의 정보종속국이다. 미국이 정보를 주지 않으면 한국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백두사업은 자주국방론자들에겐 한국군의 정보자주화를 이루는 데 절실한 사업으로 비칠 만했다.

    국회 국방위 관계자 K씨는 “당시 군 안팎에서 백두사업을 반대하던 세력 중엔 전통적인 친미주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많다”고 주장한다. K씨에 따르면 그들은 “정보는 한·미연합자산을 활용하면 된다” “한국이 자주정보력을 가지면 한·미관계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등의 명분을 내세워 ‘백두 무력화’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1998년 기무사 수사에 숨은 뜻은 자주국방론자들에 대한 연합방위론자들의 공격이다.

    또다른 국방위 관계자 B씨도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다. 한국군의 무기체계는 전통적으로 지상군 중심으로 운용돼왔다. 그런데 정보수집의 귀(신호정보)와 눈(영상정보)에 해당하는 백두·금강사업은 그 범주에서 벗어난 사업으로 지상군, 곧 육군 중심 무기체계를 선호하는 세력으로부터 심한 견제를 당했다는 게 B씨 주장의 골자. 그에 따르면 독자적인 정보수집력을 원했던 자주국방론자와 그에 반대한 연합방위론자의 충돌이 극명히 드러난 게 바로 1998년 기무사 수사다. 그리고 그 분쟁의 불길에 부채질을 한 사람이 바로 린다 김이라는 것.

    누구보다도 백두사업 진행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는 권기대씨에 따르면 백두사업 운용부대인 OO부대가 당시 백두사업을 둘러싸고 내분에 빠진 것은 사실이다. 1997년 하반기 권씨를 비롯한 사업 실무자들의 반대로 한차례 홍역을 치른 백두사업은 이듬해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그해 4월 OO부대의 부대장으로 부임한 P소장은 전통적인 용미론자였다. 그는 백두사업의 가치와 효용성을 철저히 부정했다.

    린다 김은 ‘신동아’ 6월호 인터뷰에서 그를 가리켜 “기무사 출신으로 비행기의 비자도 모르는 사람” “무기 구매에 대해 전혀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린다 김에 따르면 P소장은 백두사업의 부정적 측면만 부각시켜 국방부에 사업중단을 지속적으로 건의했다.

    린다 김의 주장은 사실에 가깝다. 국회 국방위 관계자들과 권기대씨에 따르면 기무사에서 잔뼈가 굵은 P소장은 백두사업을 중단시키려 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미군의 정찰기가 있으므로 한국군의 독자적인 항공정보수집이 불필요하다는 점. 둘째, 성능에 문제가 많다는 점. 셋째, IMF상황이니만큼 달러를 아끼자는 것. 운용부대의 책임자가 이렇듯 강력히 반대하자 국방부는 사업을 계속 추진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가 됐다. 사업자 선정이 확정된 1996년 이후 매년 일정액의 돈이 미국측에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P소장의 ‘소신’ 덕분에 국내사업단과 주미사업단으로 나뉘어 있던 OO부대의 백두사업팀은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국내사업단에는 부대장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백두사업의 실효성에 회의를 품고 있었다. 반면 미국에 파견돼 있던 주미사업단은 백두사업을 계속 추진하려는 쪽이었다. 백두사업을 총괄 관리하는 위치에 있던 권기대씨도 주미사업단과 같은 의견이었다.

    국방부의 백두사업 추진 방침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부대장 방침이 그렇다보니 대세는 주미사업단쪽에 불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권씨가 린다 김과 그 부하 직원으로부터 11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조사받기 한달 전인 1998년 8월엔 백두사업단장인 양택남 대령이 보직해임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국회 국방위 관계자 B씨는 OO부대 내부의 갈등과 알력이 기무사 수사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본다. 백두사업을 긍정적인 방향에서 추진하던 사람들은 보직이 변경되거나 구속됐다. 기무사 수사가 결과적으로 ‘백두 반대파’의 논리를 뒷받침한 셈이다.

    린다김에 대한 통화 감청

    그렇지만 요란만 떨었지 실속은 없는 수사였다. 주미사업단 소속 장교들의 군사기밀보호법 위반혐의는 매우 가벼운 것이었다. 그들은 구속만 됐을 뿐 법정에 서지는 않았다. 뇌물이나 향응 액수도 작았다. 기무사로부터 수사자료를 넘겨받은 군검찰 관계자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기무사와 달리 군검찰은 린다 김의 로비 여부를 밝히는 데 관심이 많았다. 군검찰 관계자 A씨의 증언.

    “처음부터 무리한 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은 거창하게 했는데 나중에 흐지부지됐다. 기무쪽에서 일을 벌여놓고는 군검찰에 뒤치다꺼리를 맡긴 셈이다. 그렇다 보니 나중에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공소취소 기소유예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무죄로 떨어질 사안이 많았던 것이다. 당시 IMCL 부사장 이준영씨의 경우 기무사에서 검찰을 통해 몇 차례 영장을 청구했으나 기각당했다. 현역장교들의 군사기밀법 위반은 경미한 수준이었다. 권기대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군검찰은 린다 김을 조사해야만 이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린다 김이 국내에 들어올 때까지 내사만 하고 (정식 수사는) 미루자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 상황에선 관련자들에 대한 공소유지 자체가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기무사에서 그냥 밀어붙였다. 검찰관들은 기무사가 보강수사자료를 주지 않는 데 분개했다. 압수수색이나 계좌추적 자료도 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많았다. 기소 이후 검찰관들 사이에선 ‘군검찰을 바보로 만드는 것 아니냐’며 기무사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기무사가 린다 김을 추적한 것은 1996년 3월경부터. 백두사업 때문이라기보다는 동부전선 전자전사업 때문이었다. 당시 린다 김과 이양호 국방부장관은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백두사업 로비전에서 승리한 린다 김은 그 즈음엔 동부전선 전자전사업을 따내기 위해 이스라엘 IAI사의 로비스트로 뛰고 있었다. 린다 김에 대한 이장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이스라엘 장비는 뒤늦게 수주전에 참가했으면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장관이 그해 10월 수뢰죄로 구속된 후 이스라엘 장비는 후보군에서 아예 탈락했다.

    그후에도 린다 김에 대한 기무사의 추적은 멈추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98년 군사법원의 영장전담판사였던 배아무개 변호사에 따르면 기무사는 그해 10월 백두사업 관련자들을 구속할 때까지 린다 김 주변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군검찰도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군검찰에 따르면 기무사는 약 2년 동안 린다 김에 대한 감청영장을 지속적으로 청구했다. 린다 김이 언제 국내에 들어와 어느 호텔 어느 방에 또 언제까지 묵을지 미리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 따라 기무사는 한꺼번에 몇 달치 감청영장을 청구해 받아놓곤 했다. 감청 결과 특별한 범죄 혐의가 드러나지 않는데도 영장청구가 계속되자 군판사가 제동을 걸기도 했다.

    어쨌든 그토록 철저한 감시 덕분에 기무사는 린다 김의 행동반경을 손아귀에 넣고 있었다. 기무사의 통화감청은 한편으로 보면 린다 김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불법 요소가 강한 것이었다. 당시 기무사가 확보한 이양호 전장관과의 통화기록 중엔 지난 5월 언론을 통해 공개된 편지내용보다 더 ‘진한’ 애정 표현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장관은 린다 김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건넸다. 또 호텔방에서 새벽까지 같이 있었던 날 아침엔 “집에 잘 도착했느냐” “당신은 잘 잤느냐” 등의 인사를 주고받았다. 1997년 12월말 이 전장관이 집행유예로 출소하자 린다 김은 조카를 보내 양복지를 선물했다. 이런 사실은 모두 통화감청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감청기록 중엔 린다 김이 미국에 있는 딸과 국내 남자탤런트 L씨를 두고 주고받은 대화까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생활보호 측면에서 보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군정보기관인 기무사가 민간인의 통화를 이처럼 공공연히 감청한 점은 범죄 혐의를 떠나 한번쯤 짚어볼 일이다.

    이화수 대령의 경우 린다 김이 묵고 있는 호텔에서 새벽에 나오는 모습이 기무사 요원의 사진기에 잡히기도 했다. 기무사는 이를 근거로 뒷날 그에게 린다 김과의 관계를 추궁했다. 이대령은 기무사 조사 당시 성관계를 시인했으나 군검찰에 가선 ‘강압에 의한 허위자백’이라며 부인했다. 물론 린다 김도 이를 부인하고 있다.

    황명수 계좌추적 건의

    어쨌든 당시 기무사 수사는 축소 의혹을 받고 있다. 군검찰 내에선 “왜 송사리만 잡아넣느냐” “장군들도 잡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지만 곧 묻혀버렸다. 백두사업 진행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윤종호 전 국방부 제2차관보(현재 도로공사 부사장)도 린다 김의 로비 대상자로 의심받았다. 군검찰이 백두사업의 진행과정을 조사하는 과정에 그의 이름이 등장했던 것. 군검찰은 윤씨가 회의석상에서 린다 김이 로비한 장비와 기종을 적극 지지하는 등 백두사업 사업자 선정 과정에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고 판단, 수사를 벌이려다 그만둔 것으로 전해진다. 군검찰 관계자의 증언.

    “린다 김을 만난 것 자체는 죄가 될 수 없는 것 아니냐. 만약 기무사가 건들지 않은 부분을 군검찰이 건드렸다가 아무런 소득이 없다면 큰일 날 일 아닌가. 그런 이유로 수사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린다 김을 만났거나 린다 김이 로비한 장비와 기종이 선정되는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이는 소장급 이상 국방부 고위관계자들은 다 수사대상에서 빠졌다.”

    현재 민주당 고문인 황명수 전의원이 당시 수사대상에서 빠진 사정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백두사업 사업자 선정 당시 국회 국방위원장이었던 황 전의원은 린다 김을 몇 차례 만난 외에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소개하는 등 린다 김의 로비를 도와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5월 황 전의원은 주간지 ‘내일신문’이 보도한 기무사 감청 내용으로 곤욕을 치렀다. ‘내일신문’에 따르면 기무사가 감청한 린다 김의 통화내용 중 “그 늙은이에게 1000만원 더 줘라”는 얘기가 있는데 그 늙은이로 지칭된 사람이 바로 황 전의원이라는 것. 이에 대해 황 전의원은 언론을 통해 “린다 김에게 돈을 받았다면 할복하겠다”며 강하게 부인했다. 린다 김도 “그런 통화를 한 적조차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신동아’가 최근 새롭게 확인한 증거에 따르면 린다 김이 그런 통화를 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1998년 10월 린다 김 수사에 관여했던 검찰관들은 그 통화기록을 두고 “왜 (황 전의원은) 조사하지 않냐. 계좌추적을 해야 한다”며 상부에 문제제기를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신동아’는 그와 관련한 군검찰 관계자의 증언을 확보했다. 그에 따르면 린다 김이 전화로 비서에게 그런 얘기를 한 것은 황 전의원과 통화한 직후라는 것.

    이에 대해 황 전의원은 강력히 부인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린다 김과 관련해 확인할 게 있다.

    “확인할 게 없다.”

    ―당시 군검찰에서 황 전의원을 조사하려 한 사실을 알고 있나.

    “전혀 조사한 바가 없다. 군검찰에서 나를 부르거나 (린다 김에 관해) 물어본 적도 없다.”

    ―기무사가 확보한 린다 김 통화내용 중 “그 늙은이에게 1000만원만 더 줘라”는 얘기가 있는데, ‘그 늙은이’가 바로 황 전의원이라고 한다.

    “사실무근이다. 전혀 아니다. 받으면 몇 억을 받지, 겨우 1000만원을 받겠나. 그런 사실 없다. 말도 안 되지.”

    ―기무사가 수사에 착수할 무렵 국민신당에서 국민회의로 당적을 옮겼는데….

    “국민신당 사람들이 국민회의로 한꺼번에 옮길 때 같이 움직인 것뿐이다. 누가 자꾸 그런 엉터리 얘기를 하나.”

    ―군검찰 관계자의 증언이 있다.

    “그놈 데리고 오라.”

    ―린다 김을 만난 건 사실 아닌가.

    “국방부장관(이양호)에게 ‘나라에 이익이 되고 성능이 좋은 장비라면 한번 검토해 보라’고 린다 김을 소개해준 일밖에 없다. 이 황명수의 인격을 그렇게밖에 보지 않나.”

    국민신당 고문이었던 황 전의원은 1998년 9월 이인제 국민신당 고문, 이만섭 국민신당 총재와 나란히 국민회의로 당적을 옮겼다. 그가 맡은 직책은 부총재. 그의 말마따나 당적 이탈과 군검찰 수사시기는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집권여당의 부총재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을 정황만으로, 더욱이 주인공인 린다 김의 진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조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무사 수사의 목적이 린다 김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백두사업을 치려는 것이었다면 기무사가 넘겨준 수사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군검찰의 수사방향은 뻔한 것이었다. 군검찰은 수사를 확대할 만한 어떠한 증거도 가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확보할 여건도 안 됐다.

    국방부 주변에선 기무사 수사를 정권교체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백두사업은 지난 정권, 곧 문민정권 시절 진행된 사업이다. 정권이 바뀌면 과거 정권에서 벌인 사업들이 도마에 오르게 마련이다. 2400억원이 넘는 대형 사업, 그것도 전통적으로 비리 소지가 많은 무기도입사업은 새 정권이 개혁성을 과시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호재’다.

    희생양 만들기

    기무사는 이미 1996년부터 린다 김의 통화를 감청하는 한편 정치인 장관 군장성들을 만나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기무사가 린다 김의 로비 행태를 정권이 바뀐 다음에야 알게 됐다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시비 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것은 기무사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동부전선 전자전장비사업에 관한 린다 김의 로비가 진행되고 있을 때인 96년 여름 임재문 기무사령관은 이양호 국방부장관을 찾아가 린다 김과 만나는 데 대해 강하게 경고했다. 기무사는 어떤 이유에선지 YS 정권 시절엔 린다 김을 치고 싶어도 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의문은 린다 김의 정치권 로비 실태가 밝혀지면 자연스레 풀릴지 모른다.

    그런가 하면 당시 기무사 수사를 그보다 3개월쯤 전 벌어진 OO부대 비리에 대한 수사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해 6월 합참 정보본부장 박현진 중장이 업무상 횡령 혐의로 기무사에 의해 구속된 사건이 있었다. 현역 중장이 비리로 구속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 박장군은 국방부로 오기 직전 부대장으로 근무한 부대에서 부대시설 및 장비 유지비 일부를 자신의 통장에 입급하는 방법으로 모두 1억5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았다.

    그가 부대장으로 있던 부대가 바로 백두사업 운용부대인 OO부대였다. 당연히 백두사업은 그의 책임하에 진행됐다. 그는 후임자인 기무사 출신 P장군과는 달리 백두사업을 계속 진행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의 비리를 적발한 것은 기무사가 아니었다. OO부대 내부의 고발이었다. 말하자면 후임자가 전임자를 친 것이다. 그런 사정을 헤아리면 비리 혐의로 구속된 전임 부대장의 책임하에 진행된 백두사업이 기무사의 수사대상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한편 권기대씨의 시각은 또 다르다. 권씨는 당시 기무사 수사에 ‘공작’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공작엔 린다 김이 관련됐다고 본다. 권씨에 따르면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군내엔 린다 김을 보호해야 하는 세력이 있었으며 그 세력이 기무사에 영향을 끼쳐 수사가 적당선에서 끝나도록 했다는 것. 기무사가 린다 김이 미국에 있는 동안 수사를 밀어붙인 건 그녀를 봐주기 위한 것 아니었느냐는 의혹이다. 권씨의 주장을 좀더 들어보자.

    “백두사업 운용부대의 부대장이 계속 문제를 삼고 감사원 감사에서 백두사업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국회에서도 시끄러워지자 ‘기무사는 그동안 뭐했냐’는 지적이 나올 만했다. 그 정도 선의 수사는 서로 좋은 일이었는지 모른다. 린다 김을 치는 척하면서도 실제론 봐준 것이며, 기무사 체면도 서고, 또 ‘백두 반대파’인 OO부대장 P장군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기무사 수사의 성격에 대해선 여러 가지 시각과 견해가 있다. 그것들은 서로 맞물리기도 하고 상반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그것은 당시 수사가 린다 김 사건의 핵심을 짚지 못했으며 그 결과 희생양을 만들었을 개연성이 크다는 점이다. 부적절한 로비실태를 파헤치기엔 부적절한 수사였던 셈이다.

    1991년부터 약 8년 동안 백두사업 운용부대인 OO부대의 체계관리단장으로 근무했던 예비역 육군 준장 권기대씨(57)는 백두사업의 산 증인으로 불린다. 국방부 주변에서 백두사업 진행과정에 대해 권씨만큼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1998년 10월 린다 김과 그 부하직원에게서 각각 1000만원, 1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돼 1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그는 최근 대법원으로부터 원심과 같은 내용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는 린다 김에게 한을 품고 있다. 린다 김 때문에 자신이 구속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린다 김 사건을 맡은 재판부(서울지법 형사12단독. 재판장 정영진 판사)에 린다 김을 엄벌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재판부는 6월25일 열린 결심공판 때 그를 증언대에 세웠다.

    권씨의 법정 증언에 따르면 기무사는 그를 조사할 때 녹취록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 녹취록엔 린다 김이 부하직원에게 “권장군(권기대씨)에게 줄 1000만원을 준비하라”고 지시하는 통화내용이 담겨 있었다는 것. 그는 “린다 김이 내게 화장품 선물로 위장해 돈을 준 것은 나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것이었다”며 “기무사가 통화를 감청한다는 사실을 알고 의도적으로 그런 얘기를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근거로 ‘신동아’ 6월호에 실린 린다 김 인터뷰 기사를 내세우기도 했다(린다 김은 ‘신동아’ 인터뷰에서 기무사가 자신의 통화를 감청하는 걸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린다 김에 대한 결심공판 다음날인 6월24일과 린다 김이 구속된 후인 7월11일 두 차례에 걸쳐 약 7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권씨는 백두사업 진행과정에 얽힌 비화를 상세히 털어놓았다. 그는 백두사업 선정과정 비리와 린다 김의 로비행태에 대해선 강하게 비판했지만 백두사업 자체에 대한 비판에는 신중했다. 백두사업에 대한 언론의 ‘일방적 매도’에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백두사업에 대해 애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권씨는 인터뷰에 응하게 된 동기부터 말했다.

    “내가 뭐 잘 했다고 큰소리를 치겠습니까. 공직자로서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군 후배들에게 굉장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린다 김이 방송에 나가 자신을 PR하는 걸 보고 그런 식으로 사회정의가 전도돼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법정에 서게 된 동기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 일은 내게 고통과 슬픔을 안겨줬습니다. 35년 동안 몸담았던 군이라는 직장을 잃어버렸고 연금도 박탈당했습니다. 또 어머니가 충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후배들 중에 나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다시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별규정 논란

    1989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권씨가 백두사업에 관여한 것은 1991년 국방부 1급 군무원으로 임용되면서부터. 그가 맡은 직책은 백두사업 운용부대로 지정된 OO부대의 체계관리단장. 대령급인 백두사업단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으며 백두사업 진행을 총감독하는 자리였다.

    권씨에 따르면 백두사업의 뿌리는 198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OO부대는 월남전에서 활약한 C―46기에 무전장비를 실은 원시적인 통신감청 비행기를 운용하고 있었는데 비행기가 너무 낡아 불만이었다. 그래서 신형 정찰기를 요구했지만 국방부는 예산 문제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한미군이 그간 대북첩보수집용으로 활용해오던 정찰기 U2R기와 가드레일을 1995년에 철수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에 따라 독자적인 첩보수집을 위한 정찰기 도입이 불가피해졌다. 그것이 백두사업의 출발이다.

    ―백두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내가 (OO부대로) 갔을 때 이미 4개 회사가 백두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어요. 레이시온, E시스템, ESL(나중에 TRW에 통합) 등 미국의 3개 회사에 이스라엘의 라파엘이 가세한 상태였지요. 그러나 그때만 해도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국방부는 우선 장비와 비행기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통신감청)장비는 OO부대에, 비행기는 공군에 맡겼습니다. 공군은 영국제인 호커800과 미국의 사이테이션3, 프랑스의 펠콘50을 후보기종으로 검토했습니다. 나는 장비에 대한 자료수집을 위해 국방부에 해외출장을 건의했습니다. 그래서 91년 11월초∼91년 12월초까지 약 한 달 동안 요원들을 데리고 해외로 나갔습니다. 먼저 미국에 가 레이시온과 ESL, E시스템사를 둘러본 후 이스라엘로 날아가 라파엘사까지 방문했습니다.

    그중 제일 여건이 좋은 건 이스라엘 회사였습니다. 라파엘사는 우리를 사막으로 데리고 가 실제 거리를 놓고 장비를 제작하는 광경을 보여줬습니다. 아울러 시스템 설계 단계부터 한국측을 참여시키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시스템 자체만 놓고 보면 E시스템사에서 만들 장비가 가장 좋아 보였습니다. 다른 회사 장비보다 가볍고 성능이 우수한 것으로 판단됐습니다.

    92년 초 국방부에 이런 내용을 담은 출장결과를 보고했습니다. 백두사업 계획이 무르익은 것은 91년 12월 이양호씨가 국방부 정보본부장에 취임한 후입니다. 그때만 해도 린다 김의 로비 같은 건 없었습니다. 이씨의 주도로 국방부에 백두·금강사업단이 만들어졌고 서태석 준장이 초대 사업단장을 맡았습니다.”

    이양호 전 국방부장관과 백두사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92년 사업단은 창설됐지만 백두사업은 국방부의 의지 부족으로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주한미군이 정찰기 철수 방침을 철회하는 바람에 정찰기 도입의 필요성 자체가 흔들렸다. 이때 꺼져가던 백두사업의 불씨를 되살린 사람이 바로 이 전장관이었다. 합참의장 시절 백두사업을 조금씩 진전시킨 이 전장관은 1994년 12월 국방부장관이 된 후 적극 나섰다.

    백두사업은 통신감청장비를 실은 비행기로 대북정보를 수집하는 사업이다. 그래서 장비와 비행기의 체계결합이 중요하다. 1995년 1월 국방부는 ‘탑재장비 회사가 비행기를 선정한다’는 특별규정을 만들었다. 즉 그때까지 따로따로 진행돼오던 장비·비행기 선정작업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이 특별규정은 뒷날 논란이 됐다. 린다 김의 로비가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 때문이다.

    린다 김을 로비스트로 고용한 미국의 E시스템사는 처음엔 기종으로 사이테이션3를 선택했다가 나중에 호커800으로 바꿔 응찰했다. 문제는 그후 호커800 제작사와 E시스템이 백두사업 수주경쟁에 나섰던 또다른 미국 회사 레이시온사에 통합된 것. 이를 두고 국방부가 장비와 비행기를 특정 회사에 몰아주기 위한 사전조치 아니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 특별규정이 린다 김의 로비에 영향받은 것이라고 볼 만한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한때 린다 김 밑에서 활동한 문아무 예비역 중령이 백두사업 사업자 선정이 끝난 직후인 1996년 6월 국방부 등에 제출한 진정서에 따르더라도 린다 김이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과 연결된 것은 1995년 2월 이후다. 국방부에 따르면 이 규정이 결정된 것은 1994넌 9월 획득심의회를 통해서다. 국방부 현 백두사업단 관계자의 설명엔 일리가 있다.

    “주장비와 항공기 선정작업을 분리해 추진하다보니 체계결합에 대한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협상이 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주장비회사에서 주장비와 체계결합이 가능한 항공기를 선정해 시험평가 및 협상을 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권기대씨의 설명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장비와 비행기를 따로따로 선정하려다 보니 체계결합에 대한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다”며 “특별규정 자체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 장비업체들만 먼저 평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차 평가 대상이 미국의 3개 회사로 국한된 것은 미 정부의 FMS(대정부간 구매) 규정 때문입니다. 미 정부는 오래 전부터 미국 회사 무기를 사는 나라에 대해 FMS 방식에 따를 것을 요구해 왔습니다. 자국의 고도기술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정부 차원에서 통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미 정부가 3개 회사의 입찰과정에 모두 관여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중 하나를 선정하는 작업부터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선정된 미국 회사와 다른 나라 회사들을 놓고 최종 심사에 들어간다는 계획이었습니다.”

    ―1차 평가 대상인 미국 장비회사들이 선택한 비행기는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레이시온은 호커800을, ESL(이때쯤 TRW에 흡수)은 펠콘50을, E시스템은 사이테이션3를 골랐습니다. 특별규정을 만든 후 국방부는 OO부대에 백두사업 시스템 전체를 평가하는 권한을 줬어요. 그에 따라 OO부대 백두사업팀은 95년 4월 ADD(국방과학연구소) 요원들, 공군 관계자들과 함께 2주 동안 합숙하며 3개 회사의 장비와 비행기 성능을 심사했습니다.”

    ―E시스템이 레이시온에 통합된 것을 언제 알았습니까.

    “1차 평가 과정에 알게 됐습니다. 원래 E시스템 기술진은 사이테이션을 선호했습니다. 그런데 평가 직전 E시스템이 비행기를 사이테이션에서 호커로 바꾸더군요. 알고 보니 호커 제작사를 사들인 레이시온이 그때쯤 E시스템도 사들인 겁니다.”

    ―OO부대 사업단의 평가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TRW+펠콘 체계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줬습니다. 감청장비만 놓고 보면 E시스템 것이 가장 좋았지만 비행기와의 결합 측면을 따질 때 TRW만 못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단점은 값이 비싸다는 점이었습니다. 3개 비행기 중 펠콘이 가장 비쌌어요. 장비도 TRW 것이 비쌌지요. 그 다음이 E시스템, 레이시온 순이었습니다.”

    잘못된 기종 선택

    권씨에 따르면 백두사업에 이상기류가 흐른 것은 이때부터. 5월초 OO부대는 평가결과보고서를 국방부에 제출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 석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사업단장인 이정한 대령이 직접 보고서를 들고 국방부 정보본부장 Y중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보고서 결론을 본 Y본부장이 ‘어, 이거 아니잖아. 접수시키지 마’ 하고 공문접수를 막더래요. 이대령이 내게 전화해 어떡하냐고 묻기에 부대장에게 얘기했습니다. 부대장은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당장 접수시켜’ 하고 소리치더군요. 그래서 국방부 획득과장을 통해 정식으로 공문을 접수시키긴 했지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국방부 참모들은 장관(이양호)의 의중을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전에 E시스템으로 내정돼 있었다는 얘기입니까.

    “95년 6월1일 국방부에서 심의가 열렸습니다. 조달본부장 군수국장 획득실장 전략기획부장 등 국방부 및 합참의 고위관계자들과 ADD부소장이 나왔는데 운용부대인 OO부대에선 내가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심사 자격은 없는, 옵서버였지요. 그런데 심의 절차가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OO부대장이 책임지고 평가하라고 해놓고는 막상 회의장에 가보니 OO부대 안말고도 정보본부 안과 ADD 안이 나란히 제출돼 있는 겁니다. 그 두 안은 모두 E시스템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준 것이었습니다. 심의위원들은 한 사람만 빼고 모두 E시스템에 손을 들었습니다. 심의위원장인 윤종호 국방부 2차관보가 ‘이대로 장관에게 보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회의가 끝나기 전 내가 일어나 약 10분 동안 OO부대 의견을 밝혔습니다. 주로 비행기에 대해서였습니다. 첫째, 펠콘은 나머지 두 비행기보다 동체가 크고 높이 뜨며 오래 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보수집량이 많다는 것을 뜻합니다. 값이 비싼 게 흠이지만 가격보다 정보수집력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둘째, 안정성 면에서도 펠콘이 뛰어납니다. 다른 비행기는 발이 두 개인데 펠콘만 삼발이입니다. 셋째, 성능도 펠콘이 가장 좋습니다. 내 얘기를 듣고 난 후 윤종호 심의위원장은 ‘운용부대에선 그런 말 할 수 있다’며 ‘장관 결정에 따르자’고 말하더군요.”

    ―성능 차이가 어느 정도입니까.

    “우리가 운용하려는 정찰기 성능은 미공군 정찰기 U2R기와 미육군 정찰기 가드레일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E시스템은 U2R기 제작에 참여했고, ESL(TRW)은 가드레일 탑재장비를 만든 회사입니다. E시스템 것이 더 좋긴 했지만 사실 어느 회사 것이 더 뛰어나다고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둘 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전자회사들이거든요. 굳이 따진다면 통신장비시스템은 TRW가 최고였고, 컴퓨터시스템이나 전자정보 분야에선 E시스템이 앞섰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성능은 분명히 차이가 났습니다. 예컨대 E시스템에 90점, TRW에 85점을 준다면 펠콘과 호커는 100점 대 85점 정도로 차이가 컸습니다. 더 좋은 것은 사이테이션이었구요.”

    당시 국회 국방위 소속으로 백두사업을 감사했던 이동복 전의원의 설명도 권씨의 주장과 대체로 맞아떨어진다. 이 전의원은 항공업체 임원을 지낸 덕에 항공기 지식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따르면 호커는 1950년대 생산된 낡은 비행기로 크기도 작고 고도도 낮다. 또 전산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것도 단점.

    반면 1970년대 생산된 사이테이션은 완전 전산화가 이뤄진 비행기다. 펠콘은 셋 중 가장 최근에 생산된 기종으로 호커의 단점과 대조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 전의원은 “호커 용량이 작으니까 장비 크기를 줄여 맞추려 했다”며 국방부의 주먹구구식 사업추진을 비판했다. 이 전의원이 1998년 국회에서 그 문제를 지적했을 때 비행기값(600여억원)은 이미 거의 다 지불된 상태였다.

    한편 국방부는 ‘신동아’에 보낸 답변서를 통해 “당시 수요부대가 TRW와 펠콘50 체계를 건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E시스템과 호커800 체계가 주장비 성능 및 가격조건이 우수해 선정했다”고 밝혔다.

    호커800이 선정된 데 대해 OO부대 백두사업팀 관계자들은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1995년 9월 이양호 국방부장관은 백두사업 진행과정을 알아보기 위해 OO부대장을 찾았다. 마침 부대장이 출장중이라 권기대씨가 대신 장관실로 갔다.

    “이장관은 대뜸 ‘E시스템이 제일 좋다면서? 이미 1950년대에 U2기(U2R)를 만들었다는데?’ 하면서 은근히 E시스템을 추겨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쏘나타로도 되는데 굳이 그랜저 탈 필요 있냐’고 그럽디다. 그래서 각 회사 장비와 비행기의 장·단점을 설명해준 다음 ‘장비만 따지면 E시스템 것이 우수하지만 비행기와 결합해 평가하자니 TRW를 선정할 수밖에 없었다’며 OO부대의 의견을 전달했습니다.”

    그해 11월 2차 선정, 곧 백두사업 사업자를 결정하기 위한 최종심의가 열렸다. 사이테이션3와 호커800을 각각 파트너로 정한 프랑스 톰슨사와 이스라엘 라파엘사가 1차 심의 때 선정된 미국의 E시스템+호커800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최종 선정과정은 문제 없었습니까.

    “그해 11월 열린 최종 선정 심의는 아주 정상으로 이뤄졌습니다. 운용부대인 OO부대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었죠. 중요한 건 1차 선정과정이었습니다. 1차 때 미국측 장비회사가 결정된 이상 2차 때 다른 나라들의 입찰은 들러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OO부대가 미군의 장비를 쓰고 미군과 정보를 공유하는 한·미연합부대이므로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 장비를 고르기가 힘들었죠. 미제를 쓰지 않으려면 별도 부대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또 E시스템사 장비가 톰슨이나 라파엘사 것보다 비싸긴 했지만 성능은 더 우수했습니다. 그래서 최종 선정 때는 OO부대도 E시스템을 지지했어요.”

    FMS, 현실 인정해야

    ―일부 군사전문가는 FMS 방식을 선택한 것 자체를 강하게 비판하는데요. 말하자면 미국 정부에 맡기다 보니 우리 돈 주고 우리 맘대로 하지 못하고 기술력도 갖지 못한다는 겁니다.

    “FMS로 하면 미 정부가 품질을 보증하므로 안정성 면에선 좋지요. 그러나 그만큼 값이 비싸고 추가 관리비가 든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국방부도 처음엔 FMS로 안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백두는 현존 장비가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제작사와 문제가 생기면 골치 아프거든요. 결국 FMS 방식을 선택한 건 안정성을 택한 겁니다. 미국 정부가 FMS 아니면 안 판다는데 어떡합니까. 현실여건을 무시한 원론적인 비판입니다.”

    ―사업자 선정 계약 후 항공기 구매방식이 FMS에서 상용구매로 바뀐 데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지 않았습니까. 국방부는 예산 절감 차원에서 변경했다고 하지만(국방부에 따르면 약 200만달러 절감), 상용구매는 로비자금이 몇 만 달러로 제한되는 FMS와 달리 제한이 없기 때문에 이것 또한 린다 김의 로비로 바뀐 것 아니냐는 의혹인데요.

    “미국은 장비와 비행기 둘 다 FMS로 구매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돈 아끼려고 상용으로 바꾼 겁니다. 상용구매이긴 하지만 장비와 체계결합이 FMS로 진행되므로 비행기 성능도 같이 보증받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린다 김은 E시스템사 로비스트입니다. 내가 알기로 호커800의 로비스트는 따로 있었습니다. 어쨌든 우리쪽에서야 싸게 구입할 수 있어 좋은 건데 그것도 문제가 됩니까.”

    ―일부 전문가는 거꾸로 장비는 기술력 확보 차원에서 상용구매로, 비행기는 FMS로 구입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호커800은 군용기가 아닙니다. 미 정부도 FMS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아무나 살 수 있는 비행기입니다. 그걸 왜 돈을 더 주고 FMS로 합니까. 반면 시스템은 미 정부가 기술을 통제합니다. 상용으로 할 수가 없어요. 얼토당토않은 논리입니다.”

    권씨는 백두사업 진행과정에 대한 비판에 무척 민감했다. 한마디로 그렇게 엉성하게 일을 진행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린다 김을 처음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97년 5월 E시스템사에 갔다가 공군 대령 출신인 이준영씨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91년에 만났을 때는 무기중개업체인 윤일통상 부사장이었는데, 그때 보니 E시스템사의 에이전트가 돼 있었습니다. 귀국해서 얼마 안 지나 이씨가 집에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한국에 와 있는데, 소개할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여자라. 저녁만 먹고 헤어졌는데 내가 주로 부탁을 많이 했습니다. 계약서대로 잘 진행시켜 달라고 말입니다. 그 여자는 내 앞에서 유력 인사들 이름을 대면서 거물 행세를 하려 했습니다만 그러려니 하고 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가 바로 린다 김이었어요.”

    ―국방부에 백두사업 중단을 건의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97년 6월부터 10월까지 미국에서 백두사업과 관련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미 공군성이 주관했는데 제작사인 E시스템측과 양택남 백두사업단장을 비롯한 OO부대 관계자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E시스템은 처음 제시했던 제안서와 다르게 장비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애초 우리가 요구한 성능에 훨씬 못 미치는 장비였습니다. 논쟁이 붙었는데 급기야 회의를 중단하고 귀국해버렸습니다.

    97년 7월 말 계약서를 다시 검토한 후 국방부에 사업 중단을 건의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측에서 전화가 왔는데 ‘한국 기술자들이 우리 설명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오해가 생겼다’며 한국에 오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술자는 필요 없고 E시스템사 사장이 직접 오라고 통보했죠. 8월 말인가 린다 김이 E시스템사의 백두사업본부장, FMS 담당자와 함께 입국했습니다. 같이 회의를 했는데 E시스템측은 ‘충분히 검토해 한 달 안에 답변을 주겠다’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뭘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가 없어요. 그래서 10월 말쯤 다시 한번 강력히 사업 중단을 건의했습니다.”

    이처럼 OO부대가 강력히 반대하자 E시스템측은 태도를 바꿔 국방부에 ‘중단하려면 중단하라’고 통보해왔다. 그렇지만 국방부는 중단하고 싶어도 맘대로 중단할 수 없는 처지였다. FMS 규정에 따라 미정부에 이미 돈이 순차적으로 건너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E시스템측이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셈이다. 린다 김이 다시 한국에 온 것은 그때쯤이다.

    ―린다 김에게 뇌물을 받은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는데요.

    “내가 그 돈 받고 뭐 하나 린다 김에게 해준 게 없습니다. 당시 린다 김에게 뇌물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오히려 린다 김에게 부탁할 처지였습니다. E시스템사(백두사업 사업자)에 잘 얘기해 계약대로 장비를 잘 만들어 달라고 말이죠. 내가 국방부에 사업중단을 요청한 것은 E시스템사가 당초 약속한 것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장비를 제작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반대한다고 중단될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국방부 방침은 변함이 없었거든요. 국방부는 ‘중단을 할 정도로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 제작사측과 잘 협의해 계속 추진하라’고 주문하고 있었습니다. 린다 김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린다 김에게 돈을 받게 됐습니까.

    “97년 10월 말 만나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이준영씨와 셋이 저녁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약속시간에 조금 늦은 린다 김은 ‘대선 캠프에 들렀다 오느라 늦었다’고 말하더군요. 자리에 앉기 전 ‘미국에서 사온 화장품인데 사모님에게 선물하라’며 들고온 쇼핑백을 슬쩍 제 옆에 놓기에 대수롭잖게 여겼지요. 그날 린다 김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내가 ‘E시스템이 제작비를 줄이려는 것 아니냐’ ‘커미션을 줄여라’ 하고 몰아붙이자 린다 김은 ‘(사업이) 되는 쪽으로 진행하자’ ‘사업이 진행돼야 나도 돈 받는다’고 하더군요. 집에 돌아가 쇼핑백을 열어보니 500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린다 김이 그토록 적극적으로 사업진행과정에 개입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로비스트의 책임이지요. 사업자 선정으로 임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업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양쪽을 오가며 협조하도록 E시스템과 계약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사업이 중단되면 에이전트 몫이 없어지는 문제도 있고요. 또한 E시스템사도 회사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되니 좋을 건 없었지요. 어쨌든 중단하면 서로 손해인 것은 분명했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손해지요. 이미 건너간 돈이 있으니.”

    ―그해 12월10일 린다 김으로부터 또 500만원을 받았는데요.

    “그날 오후 린다 김의 소개로 E시스템사 사장과 직원 일행을 만났습니다. 대여섯 시간 동안 회의를 했는데 사장이 ‘개선’을 약속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는데 린다 김이 전화를 걸어와 가는 길에 자신이 묵고 있는 아미가호텔에 들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만나서 나눈 얘기는 주로 대통령 선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린다 김은 OOO 총재, OOO 캠프를 거론하며 ‘선거자금을 요구한다’ ‘어디에 어떻게 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헤어질 때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나는 돈 많은 여자입니다. 권장군님이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용돈으로 드리는 겁니다’ 하면서. 그런데 사람 맘이 참 묘합디다. 알고 받았든 모르고 받았든 한 번 받은 게 있으니 두 번째는 거부감이 덜한 거예요. 린다 김도 ‘신동아’(6월호) 인터뷰에서 내게 준 돈은 뇌물이 아니며 ‘사업자 선정이 끝난 다음에 뇌물을 주는 바보가 어디 있냐’고 했는데 그 말은 맞은 말입니다. 맹세코 나는 그 돈을 뇌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린다 돈, 뇌물 아니다

    권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까지 했지만 법원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린다 김 사건 담당 재판부도 마찬가지. 판결문엔 ‘권기대에 대한 뇌물공여는 백두사업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사업중단을 건의하는 동인(권기대)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에 대해 권씨는 “판사가 당시 상황을 잘 모른 채 돈이 오고간 점만 갖고 판단한 탓”이라며 원망과 아쉬움을 나타냈다.

    ―백두사업 진행과정에 문제점으로 지적된 사항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예컨대 방향탐지기 오차정확도 등이 제안서와 맞지 않았습니다. 그쪽에선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비행기 중량도 문제가 됐습니다. 알려진 바와 달리 백두 비행기에는 조종사 부조종사 외 다른 사람이 탈 필요가 없습니다. 비행기가 자동으로 신호정보를 수집해 지상으로 보내주거든요. 설계도대로라면 비행기 내부가 너무 좁아 비행중 잠깐 쉴 공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행사가 쉴 수 있는 휴게의자 하나 놓아달라고 요구했는데 중량이 커져서 안 된다는 겁니다.”

    ―OO부대가 지적한 문제점들에 대해 국방부는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미정부 FMS 담당요원들과 주한미군 관계자들과 협의한 후 ‘큰 문제가 아니고 상호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니 보완 및 개선이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문을 통해 ‘OO부대는 계속 사업을 추진하라’고 지시하더군요. 당시 장관이나 정보본부장이 로비를 받아 그렇게 한 건 아닙니다. ‘처음 하는 사업이라 시행착오가 불가피하며 사업 중단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다들 동감했습니다. 실제로 제작사측과 협의를 거쳐 문제점으로 지적된 부분들이 많이 개선돼 갔습니다. 처음에 적당히 하려다 우리가 강력히 항의하자 태도를 바꾼 겁니다.”

    권기대씨에 따르면 한 차례 고비를 넘기고 ‘잘 가던’ 백두사업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은 이듬해인 1998년 4월 OO부대장이 바뀌면서.

    “새로 부임한 P장군은 ‘백두는 필요치 않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미군 정찰기 U2R기와 가드레일이 있으므로 백두가 별로 이바지할 게 없으며, 성능 문제로 시끄러운데다 IMF체제로 외화가 부족한 판에 엄청난 외화를 들이는 사업을 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부대장의 의견에 처음 사업자 선정과정부터 불만을 품었던 실무자들이 장단을 맞췄습니다. 거기에 감사원 감사, 국방부 특별평가가 이어지자 ‘백두를 계속 하자는 놈은 다 돈 받은 놈’이라는 식의 극단적 논리가 판쳤습니다. P장군은 부대장 소신으로 ‘백두 불가’ 보고서를 국방부에 제출했습니다. 기무사가 내사에 들어간 것은 그 즈음입니다.

    98년 8월 국방부 특별평가팀이 구성돼 백두사업에 대한 평가가 시작되자 P장군은 주미사업단 소속 장교들을 국내로 불러들였습니다. 특별평가기간에 ‘너희들은 매국노’라며 BOQ(독신장교숙소)에 가둬놓다시피 하고 외출을 통제하는 한편 외부인과 접촉하는 걸 막았습니다. 그 사람들 중 일부가 E시스템 직원들과 백두사업 관련 자료를 팩스를 주고받다 군사기밀유출죄로 구속됐습니다. 국방부에서 감사를 받고 있는 주미사업단장 이화수 대령에게 필요한 자료를 건네주려 한 일이었는데, 나중에 재판도 받지 않고 다 풀려난 데서 알 수 있듯 그건 죄도 아니었습니다.”

    ―왜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고 보십니까.

    “당시 구속된 사람들은 백두사업을 제대로 해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미사업단은 백두사업을 계속 끌고 가려고 했고 나도 그들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P소장에 의해 보직해임된 백두사업단장 양대령과 내가 한 얘기가 있습니다. 만약 사업자가 우리가 추천한 대로 TRW사로 결정됐다면 둘 다 죽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당시 국방부 검찰부장 말을 들어봐도 기무사가 수사를 서둘러 종결시키려 한 건 분명합니다. 어떻게 돈을 준 린다 김에 대한 조사도 없이 돈 받은 사람만 구속할 수 있습니까. 큰 걸 감추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은 겁니다.”

    ―희생양이라 하면?

    “백두사업과 린다 김의 관계가 드러나는 걸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당시 기무사 수사는 불가피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운용부대 내부에서 ‘한다, 안 한다’로 시끄러운데다 감사원에서 지적하고 국회에서 떠드니 일을 벌이긴 벌여야겠는데 적당선에서 마무리지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어쩌면 정권 교체도 한몫했을지 모릅니다. 전 정권에서 진행된 사업에 대한 흠집내기 차원일 수 있지요. 어쨌든 린다 김이 위기감을 느꼈을 법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군 안팎에 린다 김을 보호해야 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는 사건을 적당히 덮을 희생양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후 OO부대 백두사업단은 어떻게 됐습니까.

    “기무사·군검찰 수사가 끝난 후 P장군은 국방부로부터 질책을 당했습니다. OO부대는 국방부 지시로 백두사업에서 손을 뗐습니다. 대신 지난해 1월 국방부에 백두사업단을 새로 만들어 사업을 국방부가 직접 관리하고 있습니다. 현 주미사업단장 안아무대 대령에 따르면 지금은 미국측과 오해도 없고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불가피한 시행착오

    권기대씨의 얘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백두사업은 린다 김 로비와 상관없이 자주정보력 확보 차원에서 시작된 것으로 꼭 성공시켜야 하는 사업이다. ▲장비 및 기종 선정과정에 린다 김의 로비가 작용했다. ▲로비 결과 운용부대가 추천한 장비와 기종이 선정되지 않았다. ▲운용부대가 한·미연합부대니만큼 미국 장비회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업자인 E시스템이 제안서대로 장비를 만들지 않아 한때 사업중단을 건의했다. ▲운용부대의 강력한 반발로 몇 가지 문제점들이 개선됐다. ▲새로 부임한 부대장이 ‘백두 불가론’을 들고 나와 한때 사업 중단 위기를 맞았고 그것은 기무사 수사로 연결됐다. ▲기무사 수사는 린다 김의 로비실태를 덮기 위한 희생양 만들기였다.

    백두사업에 대한 갖가지 비판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기술력을 전수 받을 수 있는 체계결합사업을 총이나 대포 구입하듯 파는 쪽, 즉 미 정부에 맡겨버렸다는 점이다. 군 전문가들은 진정한 정보자주화, 자주국방을 생각했다면 단순히 장비를 사들이는 데 그칠 게 아니라 기술력을 확보하는 쪽으로 사업을 진행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한 권씨의 설명은 그야말로 실무자다운 것이다.

    “처음에 미국 장비를 FMS로 구매하기로 결정한 이상 기술 이전이나 소프트웨어 개발은 물 건너 간 겁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것을 선택했다면 가능했을지 모릅니다. 그나마 지금은 전보다 나아졌습니다. 장비 제작과정에 처음엔 우리쪽에서 운용요원만 참여했는데 지금은 기술요원까지 참여하고 있습니다.”

    국방부 백두사업단에 따르면 1998년 특별평가 때 문제점으로 지적된 12개 항목 중 ‘과도한 요구사항’으로 판단된 6개를 뺀 나머지 6개 항목은 한·미간 협의를 통해 체계규격서에 반영됐다고 한다. 최근 미국에서 있었던 백두 정찰기의 시험비행결과는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백두사업 진행과정에 겪은 시행착오는 향후 한국 국방사업에 귀중한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내년에 국내에 들어올 백두 정찰기가 린다 김이라는 무거운 그림자를 떼내고 훨훨 날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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