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심층취재

개교 100년 경기고 신화

개교 100년 경기고 신화

2/2
이 4개교 중에서 ‘제1고’가 경기고라는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경기고는 교모에 ‘제1’을 뜻하는 백선(白線) 하나를 둘렀다. 두 번째로 생겨난 평양고는 가는 백선 두 개를 둘러 ‘2고’임을 내세웠고, 세 번째인 대구의 경북고는 가는 백선 3개로 ‘3고’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생긴 순서로는 뒤지지만 ‘2고보’란 호칭을 받았던 서울의 경복고는 아래에는 굵은 백선, 위에는 가는 백선을 친 교모를 써, 이름만은 명실상부하게 ‘제2고보’였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한성고등학교로 개칭되던 1906년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44호를 공포해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바꿔 부르게 했다. 동시에 한성고등학교에 수업 연한 1년의 ‘예과’(豫科) 과정을 뒀는데, 예과를 설치한 것은 한성고의 인기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예과는 고등학교에 설치한 보통학교 고등과에 해당한다). 한성고등학교가 인기가 떨어진 것은 정치적-민족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후 일제는 관립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주로 가르치게 했다. 그러자 유력 집안에서는 자제들을 한성고등학교 입학이 보장된 관립 보통학교의 고등과가 아니라 사립 보통학교로 보내게 되었다.

이로써 한성고등학교의 인기가 급전직하로 떨어지자, 당황한 대한제국 정부는 사립 보통학교 졸업자도 한성고 예과에 들어와 1년을 공부하면 한성고에 진학할 수 있다는 자격을 주고, 동시에 사립 고등학교를 대대적으로 폐쇄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유력 집안들은, 다시 자제들을 관립보통학교 고등과에 입학시키거나 한성고 예과에 넣기 시작했다. 이러한 세 몰이는 아마 경기고가 명문이 되는데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을 것이다. 이 제도가 성공을 거두자 1909년 예과를 폐지했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이 이뤄지고, 그해 10월1일 조선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재편되었다. 한성을 경성(京城)으로 개칭한 조선총독부는, 고등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바꾸게 했다. 이에 따라 한성고등학교는 ‘경성고등보통학교(경성고보)’로 개칭되었다. 고등보통학교를 줄여서 고보(高普)라고 하는데, 고보는 일제의 식민지 차별 교육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일본은 소학교 6년-중학교 5년-고등학교 3년-대학교 3년(문과), 4년(이과)의 학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은 보통학교 3, 4년-고보 4년(그나마 여자고보는 3년)-전문학교 3, 4년만 다니게 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조선에 사는 일본인을 위해 일본과 똑같은 6년제 소학교와 5년제 중학교를 개설케 했다(일부 친일파 조선인의 자제들도 이 학교에 입학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을 위해 만든 중학교가 ‘경성중학교’(1909년 개교)와 ‘용산중학교’(1917년 개교)였다. 경성중학교에는 총독부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둔 일본 학생들이 주로 다녔다. 당시 일본군은 지금의 미 8군 자리에 주둔했는데, 여기서 가까운 학교가 용산중학이었다. 이런 이유로 용산중학교에는 일본군인의 자제가 많이 다녔다(광복 후 경성중은 서울고로, 용산중은 용산고로 새 출발했다).

조선에서 중학교를 마친 일본 학생은 일본에 건너가 고등학교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보를 나온 조선인은 일본에 건너가도,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 진학하려면, 먼저 중학교 5학년에 편입해 중학교 졸업장을 받아야 했다.

朴憲永과 朴烈의 모교

한일합병이 되었으니 관립 고보에는 일본인 교장이 취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2년 4월 경성고보 교장에 일본인 오카 모토스케(岡 元輔·제7대)가 부임했는데, 오카 교장은 역대 일본인 교장 중에서 최장기인 8년 6개월간 재임하며 경기고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카 교장은 조선의 중등교육 전체를 좌우하는 조선 총독의 중등교육 자문관이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 때문에 경성제1고보로 불리던 1934년 제1고보는 교정에 오카 교장 흉상을 제막했다. 경기공립중학교이던 1941년 그가 일본 도쿄에서 죽자, 이와무라 도시오(岩村俊雄) 당시 교장은, 자신이 제주가 되어 성대한 학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요즘 대학입시에서도 재능이 뛰어난 일부 학생들은 특차나 (논술)시험 등을 치르지 않고 무시험 전형으로 대학에 들어간다. 그와 마찬가지로 경성고보는, 입학생 중 절반 정도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서류 전형만으로 합격시켰다. 무시험 전형자들은 보통학교 성적이 아주 뛰어나 보통학교 교장의 추천을 받은 학생들이었다. 그때도 ‘내신’만으로 당락을 결정하는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시험을 치르고 입교하는 학생들은 대략 15대1의 경쟁률을 뚫어야 했다. 응시생 자체가 13도의 수재들인만큼 15대1의 경쟁률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이때 경성고보는 교복이 없어, 학생들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하지만 백선을 하나 넣은 교모는 반드시 쓰고 다녔다. 당시 평양고보는 백선 둘, 대구고보는 백선 셋의 교모를 썼는데, 백선 숫자가 고보의 서열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성고보 학생들도 참여해 27명이 사법처리를 받았다. 3·1운동은 일본인이 다니는 중학교와 비교했을 때 차별 교육을 받아온 경성고보 학생들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은 “왜 우리는 보통학을 배우지 못하고 실과 교육만 주로 받느냐” “왜 우리는 중학교가 되지 못하느냐”는 것 등을 이슈로 내걸고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1919년 11월의 동맹 휴학은 경성고보생 3분의 1이 퇴학당할 정도로 거셌다.

이때 경성고보를 자퇴한 학생 중 한 명이 그 유명한 ‘박열’(朴烈·본명은 朴準植·경기고 16회에 해당)이다. 박열은 그후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조선인 비밀결사체인 혈권단(血拳團)과 흑도회(黑濤會)에서 활동하다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1923년 그는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裕仁)를 암살하려고 폭탄을 소지했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돼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고 광복을 맞아 감옥에서 풀려나 귀국했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이 시기 경성고보에는 공산 사상을 흡수해 조국을 해방해야겠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있었다. 박열보다 한 해 먼저 경성고보에 입학한 박헌영(朴憲永·15회)이 대표적인 경우. 박헌영은 그후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서울 종로의 장안빌딩에서 1929년 해체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박헌영은 그후 북한으로 넘어가 부수상을 지냈으나, 김일성에 의해 미국의 첩자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을 때 자문위원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했던 윤기복(尹基福·74)은 경기 40회다. 함남 북청이 고향인 그는 제1고보를 마치고 일본에 건너가 제3고에 들어갔다가, 광복 후 북한으로 넘어가 김일성대를 마치고 소련 모스크바대학에서 유학했다. 윤기복은 그후 대남 문제 전문가로 성장해, 조평통 부위원장과 로동당 대남담당 비서를 거쳐 범민련 북측 본부 의장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로동당 최고 기관인 중앙위원회의 위원과 최고인민회의(국회에 해당) 대의원을 맡고 있다.

두루마기 교복, 다이아몬드 배지

공산계열의 경성고보생들은 1926년의 6·10만세운동, 1927년의 동맹휴업 사건 등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자 1922년 총독부는 고보의 수업연한을 중학교와 같은 5년으로 늘리고, 1924년에는 일본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경성제대 예과’를 만들었다(경성제대 예과는 고등학교에 해당한다). 이로써 고보 졸업자는 일본에 있는 고등학교나 조선의 경성제대 예과에 진학하고, 경성제대 예과를 마친 다음에는 당시 조선에서는 유일한 대학이던 경성제대나 일본에 있는 대학에 응시할 수 있게 됐다.

1924년 경성제대 예과가 처음으로 신입생을 뽑았을 때 조선인 합격자는 44명이었다. 이중 1고보가 가장 많은 15명을 합격시켰고, 그 다음이 평양고보(6명), 대구고보(5명) 순이었다. 1고보 출신은 1등에서 10등까지를 석권했는데, 일본인을 포함한 전체 수석합격자는 훗날 고려대 총장과 신민당 당수를 지낸 유진오(兪鎭午·20회)였다. 이때부터 1941년까지 1고보(경기중)는 단 한번도 1위를 뺏기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경성제대 예과 합격자는 1고보-2고보-평양고보 순으로 고착됐는데, 1고보 출신은 2위보다 3∼5배 많이 합격했다. ‘경기불패(京畿不敗)’ 신화가 달궈지기 시작한 것이다.

경기고의 상징은 高자 옆에 백선 하나와 더불어 눕혀놓은 다이아몬드 모양의 배지와 이름표다. 다이아몬드형의 배지는 ‘1고보생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준재들이니 모름지기 자신을 갈고 닦아 더욱 빛나게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는 배지를 ‘금장(襟章)’이라고 했는데 이 금장을 만든 이는 도화(圖畵·미술)를 담당했던 일본인 교사 기타가와(北川達友)였다. 기타가와 선생이 이 금장을 만든 데는 사연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여름방학이 되면 학생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전국 여행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개중에는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하는 학생이 있었다. 당시 전국의 고보는 高자만 달린, 거의 비슷한 교모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익사자가 고보생으로 판단되면 경찰은 무턱대고 제1고보로 ‘당신네 학생이 죽었다’고 연락해왔다. 이게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1고보생을 타 고보생과 구분할 목적으로 다이아몬드 금장을 만들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조선을 중국 침략의 중간기지로 삼으려 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며 조선을 일본화하는 작업에 집중하게 되었다. 1938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해 새로운 조선 교육령(3차)이 선포되는데, 그 내용은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로 된 조선의 학제를 일본과 똑같이 ‘소학교-중학교(고등여학교)’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외형상 조선인에 대한 차별 교육은 없어졌으나 조선을 일본과 동일시한다는 차원에서, 조선어 교육을 폐지해버렸다. 이에 따라 제1고보를 비롯한 전국의 고보들은 교명을 바꾸느라 고심하게 되었다. 1고보생들은 일본의 관립 고등학교가 설립 순서에 따라 1고-2고-3고로 불렸으니, 그와 마찬가지로 1고보가 1중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1고보는 경성제1중학이 되고, 일본인이 다니던 경성중과 용산중은 경성제2중학과 경성제3중학, 조선인이 다니던 2고보는 경성제4중학으로 하자는 주장이 매우 강했다. 이러한 1고보생의 주장을 대변한 이가 1고보 교장인 일본인 와다(和田)였다.

日人 경기도지사가 京畿로 명명

당시 경성은 지금의 서울특별시처럼 경기도 등의 도(道)와 동급의 자치단체가 아니었다. 경성은 경기도의 도청소재지로, 경기도에 속한 ‘경기도 경성부’(府)였다. 따라서 공립학교로 전환한 후 1고보의 운영 주체는 경기도가 되었다. 경기도지사인 칸자(甘蔗義邦)는 1고보를 경성제1중으로 하고, 경성중을 경성제2중으로 하는 것은 “일본인의 자존심을 허무는 것”이라며 결사 반대했다.

이로 인해 와다 교장과 칸자 도지사는 상당한 언쟁을 벌였는데, 와다 교장이 물러서지 않자, 칸자 도지사가 직권으로 “제1고보의 명칭을 경기(공립)중학교로 정한다”고 공포해버렸다. 오늘날의 ‘경기고등학교’란 교명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일인들이 다니는 경성중은 그대로 경성중이 되고, 제2고보는 경복궁과 가까이 있다고 해서 경복중(景福中)으로 개칭되었다.

교명 다툼은 지방 도시에서도 일어났다. 신의주에서는 일본인이 다니는 신의주중학이 있기 때문에, 신의주고보는 신의주동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광주고보는 광주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광주서중’이 되었고, 해주고보는 ‘해주동중’, 전주고보는 ‘전주북중’이 되었다. 그런데 유독 평양에서만은 일본인이 다니던 평양중이 ‘평양1중’이 되고, 평양고보는 ‘평양2중’이 되었다. 그러자 흥분한 평양고보 학생들이 야밤에 평양중에 몰려가 평양1중 간판을 떼내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동안 경기중 학생들은 다른 중학과 마찬가지로 각종 근로사업에 동원되었다. 교복은 국방색으로 바뀌었고 무릎 아래에는 각반을 차게 되었다. 연합군의 공습에 대비해 날마다 방공호로 숨는 훈련을 반복했다.

민흥기 경기고등학교 교장

“수월성 교육에 관심을 가져달라”재임 중에 경기고 100년을 맞게 된 민흥기(閔興基·58) 교장은 경기고 55회 동문이다. 민교장은 “평등 개념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 사회는 평준화 교육을 두부모 자르듯, 정원수 자르듯, 기하학적으로 똑같이 잘라내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다 보니 유전인자가 좋은 나무까지도 잘려나가고 특별히 맛있는 두부도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평준화 교육을 재검토해야 한다. 우리나라 수준의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처럼 획일적인 평준화를 하고 있는 곳은 한 나라도 없다. 일본도 10년 전에 평준화를 그만두었다”고 지적했다.

현재의 교육 형편에서 특히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으로 그는 ‘수월성(秀越性) 교육’을 거론했다. 수월성 교육이란 능력있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계발하여 마음껏 발전시켜 나가도록 도와주는 교육을 말한다.

민교장은 영어교육 곧 과학교육 강화식의 과학 제일주의 사고방식에서 과학 분야의 수월성 교육만 강화하다 보니 인문사회 분야가 상대적으로 소홀해진 감이 있다. 인문사회 분야의 수월성 교육 기관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경기고는 훌륭한 전통과 어느 학교보다도 뛰어난 교육 환경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부모와 동문들로 부터 열성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으므로 정부에서 수월성 교육기관을 뽑는다면 당연히 도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동아 2000년 8월호

2/2
목록 닫기

개교 100년 경기고 신화

댓글 창 닫기

2019/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