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분단된 지 만 55년을 맞은 경진년(庚辰年, 2000년) 정초, 한학자이자 주역의 대가로 손꼽히는 대산(大山) 김석진(金碩鎭·홍역학회 회장·73)옹은 뭔가 짚이는 바가 있어서 주역 64괘 중 ‘천지(天地) 수’를 의미하는 55번째 괘(卦)를 뽑아보았다.
이름하여 뇌화풍(雷火豊) 괘. 육효(六爻)를 풀어보니 “그 짝이 되는 주인(配主)을 만나되 비록 평등하게 하나 허물이 없으니, 가면 숭상함이 있으리라”하고, “그 평등한 주인(夷主)을 만나면 길하리라”는 구절도 있다.
여기서 주인은 누구를 말하는가? 김옹은 99년 3월에 펴낸 저서 ‘대산주역’(한길사)에서 스승인 야산(也山) 이달(李達, 1889~1958)이 남긴 ‘남북통일의 시’를 뇌화풍 괘 풀이란에 소개해놓음으로써 그 ‘주인’되는 사람들이 남북의 두 정상이 될 것임을 암시했다.
대산의 스승이자 사학자 이이화씨의 부친인 야산은 평생 주역을 연구해 중국, 일본과는 다른 한국식 주역을 창시한 인물. 그는 우리나라를 중심에 놓고 주역을 해석, 경원력(庚元歷)이라는 독특한 역학 체계를 완성했으며 이후 그 전통이 대산 김석진에게로 이어졌다.
그런데 김옹은 스승인 야산 역시 분단 55년 만에 남북의 정상이 만날 거라고 예고한 바 있다고 한다. 야산은 6·25전쟁을 겪은 지 얼마 후 대산을 비롯한 제자들과 문답을 나누었다.
“이 땅이 두 조각 나고 우리 민족이 갈라져 동기간에도 오가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언제 서로 만나게 되겠습니까?”
이에 야산은 제자들에게 법성게(法性偈;신라시대 화엄종조 의상대사가 지은 것으로 ‘화엄일승법계도’ ‘해인도’라고도 함)를 가르쳐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공부하면 알 수 있다.”
법성게는 한자 7자(7언시)씩 30구로 된, 총 210개의 한자가 등장하는 게를 말한다. 또 각 한자 사이를 선으로 연결해 ‘미로찾기’처럼 꾸며놓은 것을 법성진(法性陣)이라 한다. 그 배열은 상단과 하단의 중앙에 있는 ‘법(法)’이란 글자로 시작해서 맨 끝자인 ‘불(佛)’자에서 만나도록 돼 있는데, 이른바 ‘법불(法佛)이 만나는 자리’라고도 한다.(뒷페이지 법성진 그림 참조)
법성진은 그 꼬불꼬불한 굽이가 54곡(曲)인데, 이는 54고비를 지나 55가 되면 법과 불이 만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법성게 210개 문장 안의 숫자 총합이 묘하게도 55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 불법(佛法)에서도 분단 55년만에 남북 정상의 만남을 예언했던 셈이다.
지난 6월 한반도에서 남북의 정상이 처음으로 만나는 극적인 장면이 벌어졌을 때, 김옹을 비롯한 홍역학회 회원들은 “법성게에서 법불이 55에서 만나듯 남북이 분단 55년 만에 만났다”며 환호했다.
흥미롭게도 남북 정상이 만나는 것을 의미하는 또다른 주역 괘도 있다. 홍역학회에서는 한반도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3·8선이 화택규(火澤) 괘(주역에서 38번째 괘)로 일명 ‘남북분단 괘’라고 말한다. 그런데 남과 북이 어긋났다는 규괘에서도 서로가 불신하고 갈등을 일으키다가 나중에 주인이 만나 모든 의심을 풀게 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육효(六爻)에 ‘주인을 후미진 곳에서 만나면 허물이 없으리라(遇主于巷 无咎)’라는 구절이 그것. 이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두 주인이 정식으로 거처하는 자리가 아닌 ‘후미진 곳’(백화원 초대소)에서 만나 일을 성사시킨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경진년과 ‘바꿔‘ 열풍
지난 7월5일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홍역학회 사무실에서 대산 김석진옹을 인터뷰했다. 올초 남북정상의 만남을 전망한 그를 통해 앞으로 남북한 관계 및 주변 강대국들의 흐름을 짚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고희를 넘긴 나이인데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서기 2000년, 경진년의 의미부터 먼저 짚었다.
“서기 2000년은 서양 역법(曆法)으로 1000년이 바뀌는 해라고 해서 서양 사람들이 특별히 생각하듯이, 동양 역법에서도 ‘경진’이라는 태세(太歲)는 우리한테 엄청난 변화를 몰아오는 해로 암시돼 있습니다. 60갑자로 경진의 경(庚)은 ‘고칠 경’으로 혁신을 의미하며, 진(辰)은 용(龍)으로 변화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즉 그동안 헤어져 있던 남북이 만나는 일을 비롯해 모든 것을 새롭게 고쳐나가는 변화의 해지요.
물론 경진이라는 태세는 60년 만에 한번씩 돌아오는 것이지만 지금의 경진년이 특히 ‘혁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역학자들이 말하듯 삼원(三元)의 마지막인 하원갑자(下元甲子;1984년 갑자년부터 시작하는 60년 시기. 흔히 새시대를 의미하는 후천세계의 기점으로 삼고 있음)에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경진년을 주역으로 풀어봐도 마찬가지다. 10간12지지의 순서 배열상 ‘경’은 7번째로 칠간산(七艮山) 괘가 되고, ‘진’은 5번째로 오손풍(五巽風) 괘가 된다. 이 두괘를 합하면 주역의 산풍고(山風蠱) 괘인데, 김옹의 풀이가 예사롭지 않다.
“이 괘는 좀먹을 고(蠱)라는 한자에서 보듯이 한마디로 부패한다는 의미입니다. 온 사회가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사람들은 재물 축적에만 열심이고, 권력층에서는 진퇴를 모르고 정권을 유지하려고만 하니 부패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지요. 지금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또 유달리 사건과 사고도 많이 생기게 되고요. 그런데 극(極)에 달하면 반(反)한다고(極則反), 경진년이 부패의 극을 달리다보니 반하는 기운으로 ‘바꿔’ 바람이 이는 것입니다. 전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총선시민연대가 나선 것도 바꿔보자는 경진의 기운에서 나온 것으로 풀 수 있어요.”
김옹은 또 경진년을 산풍고 괘로 보든, 분단 55년 만에 두 정상이 만나는 뇌화풍괘로 보든 두 괘 모두에 변혁의 기운이 왕성하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1984년 하원갑자에 들어선 이후 선천(先天)시대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후천(後天)이 됐음을 선포하는 해가 경진년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반목과 갈등으로 극에 치달으면서도 새시대를 개창한다는 의미가 담긴 경진년은 음력 9월(병술월) 이후 남북의 만남과 화합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게 김옹의 진단.
또 2002년(壬午)부터 본격적으로 통일의 길이 열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비결서인 ‘격암유록’에서 ‘용의 해(2000년)와 뱀의 해(2001)에 성인(聖人)이 출현하고, 말의 해(2002년)와 양의 해(2003년)는 즐거움이 가득하다’는 예언과도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북통일은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해서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이웃의 눈치도 살펴야 하는 게 국제 정세다. 남북통일에 대해 내심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는 한국의 움직임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역학자는 역학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데, 역으로 풀어보지요. 주역 곤(坤) 괘에 ‘서남(西南)은 벗을 얻어 유유상종하고, 동북(東北)은 벗을 잃고 나중에 혼인을 이뤄 경사가 있다’는 말이 있어요. 즉 서남쪽은 미국 같은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해 같이 논다는 의미가 있고, 동북쪽은 소련 같은 벗을 잃지만 나중에 화합해 경사가 있다고 했으니 이는 남북통일을 의미하겠지요.
또 우리나라 분단의 원인 제공자인 일본은 손(巽)괘에 해당해 겸손해진다는 의미가 있고,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은 진(震)에 해당해 움직인다는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 이들 나라는 속으로는 어떻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한반도 통일을 도와주는 쪽으로 움직이게 돼 있는 것입니다.”
김옹은 역은 수시변역(隨時變易;때를 따라 변역하는 도리)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 남북분단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친 4대 강국은 후천의 때로 바뀐 시점에 좋든 싫든 남북한 통일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밖에 없는 운으로 접어들었다는 해석이다.
마지막으로 김옹은 사회의 젊은층이 하는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젊은 여성들이 너덜너덜하고 구멍을 숭숭 뚫은 바지를 유행처럼 입고 다닌 것은 바로 우리 사회가 IMF라는 경제난에 봉착해 거지신세가 될 것임을 암시했으며, 여성들이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유교사회가 금기시한 동성동본 혼인을 허용하는 일을 예고했다는 것. 또 여가수의 노래인 ‘바꿔’가 히트한 것으로 보아 앞으로 정치권을 비롯해 사회 전반에 탈바꿈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말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이치라는 것이다.
휴전선은 ‘3·8 도덕선’
대산 김석진옹 이전에 역학 연구를 통해 남북통일과 우리나라 국운을 진단한 인물로는 단연 탄허스님(1913∼1983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36년 당시 조선 선종의 총본산인 오대산 월정사에 주석한 방한암 종정의 제자로 들어간 탄허스님은 스승으로부터 참선(參禪)보다는 경(經)을 수도하라는 분부를 받은 뒤 줄곧 불경번역사업 등 학승(學僧)의 길을 걸어왔다.
당대 최고의 학승으로 대접받은 탄허스님은 주역과 정역(구한말 김일부가 완성한 역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대중에게는 탁월한 예언력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에 전쟁을 예지하고 피란을 준비했는가 하면, 70년대 초 월남전에 미국이 개입했을 때 미국이 망신만 당하고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그의 예언은 철저하게 역학 지식을 근거로 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월남전에 대한 탄허스님의 예측은 이러했다.
‘미국은 주역 8괘의 방위상 서방(兌)이요, 5행으로는 금(金)이요, 사람으로 치면 소녀(小女)에 해당한다. 월남은 방위상 남방(離)이요, 5행으로는 화(火)요, 사람으로 치면 중녀(中女)에 해당한다. 미국의 월남전 개입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소녀나 중녀 모두 같은 음(陰)으로서 서로 조화되지 못하기 때문이요, 또 쇠인 미국이 타오르는 불인 월남에 뛰어들면 녹을 수밖에 없는 이치다.’
이런 식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방위상 동북방(艮)에 해당하고, 5행으로는 목(木)이요, 사람으로 치면 소남(小男)에 해당한다. 탄허스님은 한국의 괘인 ‘간(艮)’에 대해 그의 속가(俗家) 제자인 장화수교수(중앙대 사회과학대 교수·60)와 대담하며 이렇게 풀이한 바 있다.
“간이란 나무 목(木)이요, 수리(數理)로는 3(陽數)과 8(陰數)이요, 그친다(止)는 의미요, 도덕(道德)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휴전선은 ‘3·8 도덕선’으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가르는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대립선으로 한반도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또 간은 주역 계사(繫辭)에서 ‘만물을 시작하고 종결짓는 것이 간괘보다 더 성함이 없다(始萬物終萬物者 莫盛乎艮)’고 했듯이, 열매를 맺고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 뜻에서 한국의 남북분단 문제와 민족통일 문제는 전체 인류의 차원에서 보면 아주 작은 문제 같지만 오늘날 국제정치의 가장 큰 쟁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한반도 문제의 해결은 곧 세계 문제의 해결과 직결돼 있기 때문에, 어느날 세계정세가 급변하면서 우리 문제도 풀린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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