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우상과 세습의 나라에도 인터넷 바람은 불고

북한과 닮은꼴 시리아의 독재문화

  • 권삼윤 문명비평가

    입력2006-09-22 10:4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극도로 폐쇄적인 사회주의 체제, 낙후된 경제, 분단된 국토, 철권통치, 세습체제, 독재자 우상화…. 시리아는 여러모로 북한과 흡사한 나라다. 그래서 이 나라를 들여다보면 북한이 보인다. 》
    한반도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이제껏 베일에 가려 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인간적인’ 모습과 북한권력 내부의 면면이 어느 정도 우리에게 드러나기 시작한 지난 6월 중순, 중동의 시리아에선 지난 30년 간 이 나라를 철권 통치하며 마치 김일성 같은 존재로 비쳐졌던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이 사망하고, 그의 둘째아들인 바샤르(34)가 권력을 승계했다.

    우리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아프가니스탄과 쿠바 등 지구상에 몇 안 되는 미수교국의 하나인 시리아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궁금할 것이다. 이 나라의 권력이양이 앞으로 중동의 국제정세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미리 점쳐보자는 의도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시리아라는 나라를 살펴봄으로써 향후 우리의 정치는 물론, 삶의 구석구석에까지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게 될 북한이라는 대상을 이해하는 데 꽤 도움이 될 것 같아서다.

    남북정상회담이 성공했고, 곧 남북한 이산가족의 만남이 예정돼 있고, 남북 경제교류도 활발해질 텐데 굳이 머나먼 시리아를 통해 북한을 바라봐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지금과 같은 권력체제를 유지하는 한 우리가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들이 바깥 세상에 보여주는 것은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 또는 보여줘도 괜찮은 것이지,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나 보여줘서 안 되는 것은 앞으로도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테니까.

    아사드, 김일성과 닮은꼴



    시리아는 사회주의 국가이고 1인 독재국가다. 그런 만큼 매우 폐쇄적이며, 경제적으로 낙후돼 있고, 전략요충지인 골란고원을 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래 이스라엘에 내준 이후 국토의 일부가 분단된 상태다. 이런 국내외적인 환경이 안으로 철권통치를 더욱 부추기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북한의 사정과 많이 닮았다.

    시리아는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것처럼 20세기 전반 내내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독립은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얻었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은 더러 터키 말도 하고 프랑스 말도 알아듣곤 한다.

    식민지배 시절 지하에서는 터키와 프랑스, 영국 등 식민지배자들을 몰아내려는 독립운동 혹은 아랍통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으며, 그 핵심에는 아랍사회주의 운동이 자리했다. 운동의 선봉은 지금 시리아와 이라크를 장악하고 있는 바트사회당이었다. 자유·평등·아랍통합·사회주의를 지상목표로 내걸고 있는 바트당은 그런 의미에서 해방군이었기에 쉽게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트당이 시리아를 비롯한 아랍국가에서 곧장 권력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내부의 사정이 너무나 복잡했기에 얼마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하페즈 알 아사드가 바트당에 입당한 것은 아랍통합 열기가 한껏 고조됐던 해방 이듬해, 즉 1946년으로 그가 15세 때였다. 그는 55년 사관학교에 들어갔고, 시리아 혁명의 성공으로 바트당이 권력을 잡은 63년에는 이미 공군 총사령관이 돼 있었다. 70년엔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꿈에 그리던 권좌에 올랐고, 그 이듬해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 뒤 99년까지 7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다섯 번이나 당선돼 시리아를 통치했는데, 재임 중 그가 추구한 최고의 목표는 자신의 권력 유지, 이스라엘에 빼앗긴 골란고원의 회복, 아들에의 권력 승계였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능란한 외교술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신의 권력에 대항하는 세력을 조기에 제거하는 일이었다. 그에게 늘 ‘철권통치자’니 ‘독재자’니 하는 별명이 붙어다닌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82년에는 자신에게 대항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이슬람 원리주의는 ‘움마’라고 부르는 이슬람 공동체의 건설을 목표로 하기에 세속 권력과 자주 충돌한다)인 ‘무슬림 형제단’을 공격해 2만5000명을 학살했으며, 98년에는 부통령이었던 친동생 리파트가 2인자로 부상한다는 소문이 돌자 그를 부통령에서 물러나게 한 뒤 국외로 추방했다.

    또한 지난 5월에는 그 직전까지 총리로 있었던 마흐무드 알 조흐비에게 ‘권력을 이용해 부정축재를 했다’는 혐의를 덮어씌워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는 등 정적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 점 또한 몇 차례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여 권력을 유지해온 김일성과 비교할 만하다.

    초상화와 동상의 나라

    한때 스페인과 포르투갈에까지 세력을 펼쳤던 이슬람 대제국, 우마야드 왕조가 도읍했던 시리아는 전통적인 이슬람 국가라 우상숭배가 금지돼 있을 터인데도 아사드 대통령의 대형 초상화와 동상은 수도 다마스쿠스 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작은 시골 마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웃 요르단은 왕국인데도 국왕 후세인의 초상화는 더러 볼 수 있을지언정 동상은 구경하기가 힘든데, 시리아에는 지배자의 동상이 너무 흔했다. 김일성의 북한과 형제국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아닌게 아니라 북한과 시리아는 실제로 형제의 나라 이상으로 가까웠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에 대표단을 보내기도 했던 시리아가 우리와 아직까지 수교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맹방(盟邦)인 북한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다 보니 ‘꾸리’, 즉 코리아라고 하면 그들은 북한만을 떠올린다. 남한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며칠 머물렀던 다마스쿠스의 오리엔트 팰리스 호텔 지배인은 필자가 몇 차례 ‘꾸리 주누비아(남한)’에서 왔다고 일러줬는데도 어느 날엔가 내게 달려와 김일성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신문에 당신네 나라 대통령의 사진이 나왔다”며 생색을 내기도 했다. 현재 북한은 외교요원과 군사요원, 태권도 교관 등 약 200명을 시리아에 파견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변변한 기업체 지사 하나 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튼 김일성이 북한에서 ‘위대한 수령’으로 불려졌다면 아사드는 시리아에서 ‘현대판 살라딘’으로 추앙받았다.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탈환하라’는 교황의 한마디에 유럽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군의 이름으로 시리아에 쳐들어왔을 때 그들을 섬멸하고 카이로에 이슬람 왕조를 새로이 세우기도 한 용장이 바로 시리아 출신의 살라딘이었다. 그것은 최고의 영웅에게만 보낼 수 있는 찬사인 것이다.

    그런데 96년에 시리아를 두 번째로 찾았을 때는 아사드 대통령의 초상화 곁에 한 청년의 초상화가 함께 걸려 있었다. 궁금해서 사정을 알아보니 그때까지 후계자 수업을 착실히 받다가 94년 6월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사망한 아사드의 장남 바셀의 초상화였다. 아사드 대통령은 장남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그가 죽은 지 2년이 지났는데도 그의 초상화를 걸어놓고는 국민들이 애도를 표하도록 했던 것이다.

    아사드 대통령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 차남 바샤르가 안과의사 교육을 받던 영국에서 학위 취득을 불과 석 달 앞두고 급거 귀국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미 자신의 병세가 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아사드는 마음이 다급했고, 그런 만큼 바샤르의 입지를 높이는 데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샤르 우상화

    아사드는 바샤르를 곧바로 홈스에 있는 공군사관학교로 진학시켜 권력의 중추기관인 군에서 경력을 쌓도록 했다. 아사드는 바샤르가 대령으로 진급했던 지난해 국영TV를 통해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내보내게 했으며, 그의 초상화를 전국에 내걸게 하는 등 국민들을 상대로 본격적인 ‘바샤르 알리기’에 들어갔다. 또 시리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레바논에도 그를 보내 고위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게 했으며, 11월에는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회담을 갖게 해 국제적으로도 후계자로 인정받도록 배려했다.

    조흐비 총리의 숙청에 관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긴 하지만 바샤르는 서유럽 문화에 익숙한 까닭에서인지 컴퓨터와 정보통신기술 방면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이유로 컴퓨터 처장을 맡고 있고, 98년에는 시리아 최초로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하는 등 재주를 발휘했다.

    조용한 성품의 바샤르는 아직 노총각 신세. 겉모습만 보면 그는 절대 권력지향적인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사드가 사망하자 중동의 외교관측통들은 그런 그가 오직 아버지의 후광만으로 군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 있을 것인가를 의심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사정들을 보면 일이 아주 순조로운 것 같다. 시리아의 양대 권력 중추인 집권 바트당과 군부가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한 데 이어 중장으로 승진시켜 군 총사령관에 임명했고, 의회 또한 6월25일 만장일치로 대통령으로 추대했으며, 7월10일의 국민투표에서도 그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올랐다.

    국외로 추방됐던 바샤르의 숙부 리파트가 자신이 형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주장했다고 하지만 아직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미국의 중동담당 특사 데니스 로스는 ABC방송과의 회견에서 바샤르의 권력승계를 가리켜 “매우 매끄러운 권력이행 과정”이라고 평한 바 있고,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바샤르에게 전화를 걸어 애도의 뜻을 전했으며,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도 ‘깊은 슬픔’을 전했다고 외신이 다투어 보도하는 것으로 봐서 바샤르의 대통령직 승계 그 자체에는 별다른 문제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굳이 문제를 찾자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의도대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정도일 것이다.

    권력 핵심기관인 군이 서둘러 바샤르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 지금 시리아가 갑자기 권력진공 상태가 되어 혼란에 빠진다면 국가의 안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 자신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 아닐까 하고 추측된다. 북한이 김일성 사망 이후 과도기적 조치로 ‘유훈통치 기간’을 뒀다고는 하지만, 그 사이에 별다른 권력투쟁 없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중심의 체제가 굳어진 것을 볼 때 북한과 시리아의 기득권층은 아무래도 체제의 관성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경제제재는 오히려 역효과

    잘 알다시피 이라크는 이웃 쿠웨이트를 침공해 걸프전을 일으킨 죄로 90년부터 지금까지 서방측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받고 있다. 그 많은 원유를 수출하지도 못하고 생활필수품마저 수입할 수 없어 국민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다. 최근 이라크 보건당국이 밝힌 바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아사자만도 무려 135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96년에 필자가 이라크를 찾았을 때에도 사정은 아주 어려웠다. 그런데도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딴판으로, 후세인에 대한 주민들의 지지는 전쟁 전인 89년에 이라크를 방문했을 때보다 오히려 더 확고한 것 같았다. 후세인이 쓰러지면 미국의 식민지가 돼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그런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경제봉쇄가 계속되면 생활은 곤궁해지겠지만 그렇다고 후세인이 손을 들 것으로 보이진 않았고, 이라크 국민들도 그걸 원하는 것 같지 않았다.

    미국이 그 동안 리비아 이라크 북한 이란 등에 경제제재나 경제봉쇄를 취했지만, 그 때문에 최고권력자가 내부의 권력투쟁이나 외세의 힘에 의해 물러난 적은 한 차례도 없었고, 그에 대한 국민들의 충성심 또한 식은 적이 없었다. 호메이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란 국민들이 어떻게 했으며,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북한 주민들은 또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아사드 대통령의 유해가 다마스쿠스 시내를 지날 때 시리아 국민들이 보인 슬픔은 또 어떠했던가.

    이제 미국은 이런 나라들에게 휘두를 만한 마땅한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 전쟁도 벌여봤고, 경제제재도 취해봤건만 예상했던 효과를 거두기는커녕 무너뜨려야 할 권력자의 권력기반만 더 탄탄하게 다져주고 말았다. 오히려 죄 없고 힘없는 사람들만 희생됐다.

    궁핍화 통치는 자연 폐쇄지향적이게 마련인데, 서방이 경제제재나 경제봉쇄조치를 취한다면 그건 그쪽의 권력자가 원하는 바대로 이뤄지도록 거들어주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럴 때 그들은 ‘이때다’ 하면서 빈곤과 굶주림이 모두 서방의 경제제재 때문이라며 국민의 분노를 서방으로 향하게 한다. 이보다 더 확실한 권력유지 비법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아랍은 대부분 이슬람 국가이고 이슬람 국가는 자신의 이슬람 전통을 지키려는 경향 때문에 외부세계와의 교류에 적극적이지 못한데, 시리아는 의도적으로 그런 태도를 보인 탓에 폐쇄의 정도가 이웃 나라에 비해서도 극심한 편이다. 그것은 물론 권력자가 독재정치를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독재국가란 내부적으로는 권력지상주의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권력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권력은 자연 국지적인(local)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이런 곳에서는 기업이 자랄 수 없다. 기업은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갈 수 있어야 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권력이 그것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아가 산업국가로 탈바꿈하지 못하는 데에는 자원과 인프라의 빈곤, 기술축적의 부족 같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독재국가라는 정치체제가 기업활동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업이 존재할 수 없는 나라

    이 점은 북한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북한은 60년대까지만 해도 공업 발전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남한을 크게 앞섰을 정도였다. 그랬으면서도 지금은 바닥을 헤매고 있는 원인을 산업정책의 실패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그들의 독재체제 강화, 폐쇄지향적인 정책이 더 큰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북한의 산업생산이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시기와 그들이 독자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한 시기가 너무도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사정을 이해한다면, 북한의 ‘회사’라는 것이 아무리 ‘기업’이란 이름을 내걸고 있다 해도 그것이 관청 또는 당 조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폐쇄주의 권력집단이 갖는 또 하나의 속성은 의사결정이 어떤 절차를 거쳐 이뤄지며, 권한이 단계별로 어떻게 배분돼 있는가를 외부세계에서 전혀 알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북한의 권력서열을 신문지상을 통해 보곤 하지만, 그것만 알고서는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지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 동안 정부 관계자나 기업인, 적십자사 대표, 문화계·종교계 인사 등이 북한의 누구누구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고 또 합의까지 하고 돌아왔다고 했지만, 그대로 실현된 경우는 최근의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극히 드물었다. 이는 권력이 오직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인 것이다.

    국민의 뜻이 처음부터 존재할 수가 없는 폐쇄주의 국가에는 여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론에 의해 대통령도 신념을 바꿀 수 있는 체제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국제 심포지엄 참석차 최근 서울을 다녀간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남북정상회담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한 대통령과 한 독재자의 만남이었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정곡을 찌른 현답이었다.

    시리아는 어떤가. 바샤르가 바트당 실력자와 국방장관 등 군부 실세들과 함께 담소하는 장면을 외국 통신기자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또 비록 홍보 목적이긴 하지만 아사드 대통령의 홈페이지까지 만들어 국민과의 대화채널을 눈곱만큼이라도 열어두고 있으니까 완벽한 폐쇄주의 국가는 아닌 셈이다.

    흔히 권력은 나눠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바샤르는 아직 자신의 권력기반이 약하기 때문에 얼마간은 실세들과 권력을 공유하는 방식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사드의 발목을 잡았던 골란고원 문제(그렇지만 그는 이를 최대한 이용해 독재정치를 폈다)에 대해서도 그는 한결 유연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는 젊기 때문에 변화를 추구하려 할 것인데, 그 과정에서 아사드의 주위에 있던 구세력들을 하나 둘 제거할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폐쇄성이 과거지향적 성향 강화

    폐쇄적인 정치체제는 또한 과거지향적이다. 국민을 과거 속에 가둬두려는 속성이 있는 것이다.

    시리아에는 고대문명 유적지가 참으로 많다. 지금도 곳곳에서 그런 유적과 유물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시리아 문화재관리청의 아드난 부니 고고국장은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집트나 이라크는 찬란한 고대문명의 유산을 갖고 있긴 하나 어느 특정한 시대의 것에 한정돼 있다. 그렇지만 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페니키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비잔틴, 그리고 이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것을 모두 다 갖고 있다. 그것들을 살펴보면 중동 고대사의 수수께끼가 풀릴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문화가 혼재돼 있어서인지 시리아 사람들은 매우 개방적으로 보였다. 이질적인 것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고 관용을 베풀었다. 아랍의 이슬람국가 가운데서 시리아만큼 다른 종교에 대해 폭넓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나라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리아의 권력자는 이런 문화적 전통을 국민을 진취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용하기보다는 오히려 과거지향적으로 만들어 앞을 못 보게 만드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앞을 보고 앞서 나간다면 독재권력이 기댈 언덕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