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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법

“그를 놓으면 나도 놓여나리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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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때로 한 우주의 붕괴다.회한, 죄의식, 미칠 듯한 그리움이 가슴을 후벼파고. 그래도 살아내야 할 내 삶, 어떻게 추스르면 좋을까. 소설가 공선옥 씨와 목포대 유금호 교수로부터 죽음을 넘어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정신과 전문의 양창순 씨의 조언도 도움이 될 것이다. 사이사이에 따로 인용한 글은 시설관리공단이 펴낸 책 ‘눈물의 편지’에서 발췌했다. 이 책은 용미리와 벽제에 있는 ‘서울시립 추모의 집’(납골시설)에 비치된 필기대에 유족들이 남긴 글들을 한데 묶은 것이다. 》
[ 나 외로울까봐 눈물을 두고 간 당신 ]

- 공선옥 소설가

그날 나는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호남선 안내원 숙소에서 막 깨어나는 중이었다. 1984년 5월13일, 언니를 따라 나도 고속버스 안내원이 되기 위해 면접을 보러 왔다가 하룻밤 언니 숙소에서 자고 일어나는 참이었다. 언니와 함께 세수를 하고 언니가 하라는 대로 화장도 하면서 나는 그날 오전에 있을 면접에 대비하였다. 우리 집은 그때 경제적으로 비상사태에 직면한 상태였다. 우리 생활을 꾸려가고, 엄마 병원에 입원시키고, 동생 학교 보내고, 아버지가 진 빚 갚아나가려면 언니와 내가 함께 번다 해도 힘든 처지에 있었다. 학교를 휴학한 나는 그전에 직행버스 안내원을 좀 했는데 이번에 월급이 좀더 센 고속버스로 옮길 참이었던 것이다.

그 전날 나는 언니가 승차한 차 운전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동승해 서울로 왔다. 이제 우리 두 자매가 벌면 아버지 빚은 다 못 갚더라도 엄마를 입원시킬 수는 있을 거라며 언니는 희망에 차서 말했다. 언니가 스물네 살, 내가 스물두 살이었다.

아버지는 그때 빚쟁이들에게 쫓겨 집을 나가버린 상태였다. 엄마는 지난 겨울 광주의 우리 자취방에 옷 보따리 하나만 달랑 보듬고 들어오셨다. 봄이 된 어느 날 언니가 역전 어디선가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한 날부터 엄마가 이상해졌다. 우리는 그게 병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엄마가 이상한 행동이나 말을 하면 마구 짜증부터 냈다. 엄마가 바보같이 말하고 행동하다 주인아줌마 앞에서 면박을 당할 때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는 그때 엄마가 자꾸 모자란 사람처럼 구는 것을 단지 시골에서 갓 올라왔기 때문에 도시사람과 비교가 되어서 그런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전에 시골 살 때도 사실 우리 엄마는 말이 느리고 행동도 그다지 야무지지 않았다. 그래서 늘 주위 친척이나 동네사람들한테 구박을 당해온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가장 구박을 많이 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엄마는 아버지한테 살가운 사랑 한번 못 받아보고 지금 저 세상으로 가버리셨다. 불쌍한 내 어머니는.

안내원 숙소의 사감 방에 언니를 찾는 전화가 왔다. 그리고 언니는 엉엉 소리내 울면서 돌아왔다. 언니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서, 선옥아, 어, 엄마가….”

뒷말은 차마 잇지를 못했다. 나도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하늘이 주저앉는 것 같은 깊은 슬픔과 충격이 나를 강타했다. 언니와 나는 광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날이 언니 월급날이었다. 월급은 오후 2시쯤 지급된다고 했다. 낮 12시쯤 광주에 도착해서 언니와 나는 오후 2시까지 은행에서 언니 월급이 입금되기를 기다렸다. 우리 두 자매의 몸과 마음은 이미 뻣뻣하게 굳은 상태였다. 엄마는 이미 그날 오전에 시골집으로 운구가 되어 있었다.

남의 집 문간방에서 홀로 숨 거둔 어머니

우리집은 딸만 셋이다. 언니와 내가 서울로 간 사이 내 바로 밑 동생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여 점심시간에 잠깐 집에 들렀다고 했다. 전날 밤 엄마가 생전 안 하던 요실금을 하고 이따금씩 하던 헛소리를 그날 따라 유달리 자주 했다는 거였다. 엄마는 그때 마흔여섯밖에 안 됐는데도 마치 일흔 살 할머니같이 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고 늘 머리가 아프다면서 하얀 끈 같은 걸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지팡이를 짚거나 벽에 의지해 변소도 가고 골목길에도 나가고 그랬다. 그때 우리는 엄마는 늘 아프시니까, 그저 조금 더 아프셔서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때 이미 엄마 머릿속의 핏줄 하나가 터져버린 다음이었음을 우린 알지 못했다.

머리가 아프다고, 어지럽다고 토하기만 하던 엄마. 그런 엄마 기운 차리시라고 언니는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팥밥을 맛있게 지어놨었다. 오이국도 만들어서 윗목에 차려놓고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섰던 것이다. 그 말도 잊지 않았다.

“엄마, 선옥이 데리고 서울 갔다 올게. 와서 엄마 꼭 병원에 가. 낼 월급 타가지고 맛있는 것도 사 올게, 엄마.”

엄마는 말은 못 하고 어여 가라 손짓했다. 그것이 내가, 우리 엄마 살아 생전 마지막 본 모습이다. 선옥아, 내 강아지야, 하고 부르던 우리 엄마 목소리를 언제 들어본 게 마지막인지. 말도 느리고 행동도 굼뜨다고 만날 딴사람들한테 잔소리를 듣고 살아야 했던 내 어머니. 어머니 살아 생전 한 번도 진정으로 사랑해보지 못했는데, 나는 이제 어쩌라고 엄마는 그다지도 허망하게 가버리셨나. 무에 그리 바쁜 일 있어서….

내가 그때 아주 나쁜 짓을 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는, 빚쟁이한테 시달리다 시달리다 못 견디고 딸들이 자취하는 광주 우산동 산동네 꼭대기방을 물어물어 찾아온 엄마는 그때 이녁 목숨처럼 소중한 돈 2만원을 손수건에 싸서 골마리 속에 넣어 가지고 오셨다. 그것을 또 누가 가져갈세라, 그것 없으면 세상 끝난다는 듯이, 돈 2만원을 벽장 속 구석에 숨겨두었던 것을 내가, 아무리 철없다손 치더라도, 어쨌든 지금 생각하면 미친 것이 분명한 내가 그 2만원을 훔쳐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돈을 어디다 써버렸는지 모르겠다. 어디다 썼는지도 모르게 함부로 써버렸던 것이다. 직행버스 안내원을 그만두고 고속버스 안내원 시험을 보러 가기 전까지의 공백기간, 그러니까 대학 휴학생이기보다 룸펜처럼, 아니 진짜 룸펜으로 살았던 내 스무 살 초반 시절의 일이다.

어디 외출했다 돌아오면 엄마는 이녁 딸들 기다리느라고 골목 밖에 우두커니 나와 있다가 나를 보고는 반갑게 퍼득거리며 달려오곤 했다. 한번도 도시생활을 해보지 않은 엄마가, 그리고 광주 와서도 골목 밖 한번 벗어나보지 않은 엄마가 길을 잃을까봐 나는 늘 조마조마했다. 실제로 엄마가 어떤 골목으로 들어가서는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던 적도 있다. 뒤에서 차가 빵빵거려도 엄마는 재빨리 몸을 피할 능력이 없는 분이었다. 그래서 늘 불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는 엄마가, 그토록 순진하고 그토록 느리기만 한 엄마가, 그리고 이따금 도시사람들한테는 택도 안 닿을 소리를 퉁퉁 내뱉기도 하는 엄마가 나는 창피스러웠다. 그래서 엄마에게 곧잘 화를 내고는 했다. 엄마가 해사하게 웃으며, 절룩거리는 다리를 내게로 옮겨올 적이면 휭하니 몸을 피해 엄마 앞서 집으로 들어와 버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니는 나와 사뭇 달랐다. 나는 돈 벌어 최소한의 생활비만 언니한테 주고 내 맘대로 쓰고 돌아다녔다. 하다 못해 엄마 모시고 목욕탕엘 한번 안 가봤던, 어찌 보면 아버지만큼 무정한 딸년이었다, 나는. 저 놀기 바빠 휴무일에도 집에 붙어 있지를 않았던 나는 왜 불쌍한 울 엄마와 언니와 동생이 꼬물거리며 살고 있는 그 문간 자취방이 그다지도 싫었는지 모르겠다.

동생이 점심시간에 와보니 어머니는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그것도 모르고 동생은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엄마를 보듬고 한숨 자고 일어났던 모양이다. 엄마를 아무리 흔들어봐도 기척이 없어 코에 손을 대보니 숨을 안 쉬더라고 동생은 나중에 울먹이며 말했다. 그리하여 그 어린 동생이 골목 밖 한길가의 공중전화 있는 데로 가서 광주에 살고 있는 유일한 친척인 작은아버지 집에 연락을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작은아버지가 아버지와 서울의 우리한테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아무도 지켜봐주지 않는 남의 집 문간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뇌출혈이라고 어른들이 말해서야 나는 어머니 머릿속에서 핏줄이 터져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시골집에 도착하니 이미 입관이 된 후였다. 아버지가, 낯선 아버지가 아직 관 뚜껑에 못질을 안 하고 있다가 우리가 오자 살짝 관 뚜껑을 열어보였다. 거기 엄마가, 세상에, 우리 엄마가, 하얗게 누워 있었다. 어제 아침에 분명히 어여 가라 손짓도 했던 우리 엄마가 이제는 눈도 꼭 감고 입도 꼭 다물고 얼굴이 좀 부은 듯하고 눈가는 파랗게 변해서 안방 아랫목이 아닌 행랑채 헛간방 윗목에 놓인 관 속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밖에서 죽었기 때문에 안방에 들일 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럴 수는 없다고 악을 썼던 것 같다. 엄마 돈을 훔쳤던 내가, 엄마한테 맛있는 것 한번 사줘본 적 없던 내가, 언제부터 엄마를 그리 애달피 찾았었다고. 그러나 나는 정말로 애달퍼서, 가눌 길이 없는 절망감 속에서 엄마를, 우리 엄마를 살려내라고 악을 써댔던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목이 쉬어서 울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초상을 치르던 그 사흘 간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울지 못했다. 딸만 셋이고 아버지는 차마 나서지 못해 큰집 오빠가 상주노릇을 했다.

“오냐아, 내 새끼야, 내 강아지들아”

나와 동생은 넋을 놓고 방이나 마당 한켠에 쭈그리고 앉아 있기만 했는데 언니는 그나마 맏딸이라고 음식 장만하는 부엌에도 나가보고 이따금 곡을 해야 하는 시간에는 동생들 챙겨서 데리고 들어가 곡도 했다. 상식도 언니가 혼자 다 올리고, 하여튼 그랬다. 가장 효녀였던 언니가 엄마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가장 야무졌다. 동생들은 마치 살아 있는 엄마한테 그러듯 상여 내가지 말라고 떼를 썼다. 꽃상여가 동구 밖을 빠져나갈 때쯤 요령잡이가 그 지방 풍습에 따라 상여를 끝까지 따라가려는 우리를 제지하면서 마지막 하직인사를 올리라 지시하였다. 삼베 치마저고리에 두건을 쓰고 대나무 막대기에 몸을 의지한 우리 세 딸 중에 나와 동생은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버리고 언니만 고요히 절을 네 번 하였다. 엄마는 끝내 이 몹쓸 둘째딸한테서는 마지막 가시는 길에 절 한 번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시고 말았다.

엄마가 떠나간 시골집은 적막했다. 아들 못 낳는다고, 그리고 말과 행동이 야무지지 못하다고 누구보다 엄마를 구박했던 팔십 먹은 고모할머니가 특유의 체머리를 흔들며 그랬다.

“아이구, 칠칠치 못헌 것, 존 꼴 한번 못 보고 그래 죽어부러? 요만큼만 살라고 왔어? 어이구 망할 것.”

나는 눈에 불을 쓰고 그 고모할머니한테도 대들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고모할머니도 엄마가 가여워서 했던 말일진대 그때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원망스러웠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아버지는 다시 아버지 사는 데로 갔다. 우리 딸들도 광주 산동네 문간방으로 돌아왔다. 이제 시골집은 언제 누가 와서 살지 그 앞날을 알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세 딸이 부둥켜안고 날이 새도록 울기도 숱하게 울었다. 어머니 없는 모든 시간이, 모든 계절이, 모든 아침과 낮과 밤 들이 모두 다 허무하기만 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그러니까 아무리 아픈 엄마라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가 있을 때는 백수건달 노릇도 재미있었고 돈을 버는 일도 재미있었다. 한 번도 그 돈 벌어 어머니 위해 써본 적 없지만 하여튼 그랬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틀려버렸다. 노는 것도, 돈 버는 것도 다 내게는 의미가 없었다. 오직 방구석에 틀어박혀 엄마 생각하며 눈물 줄줄 흘리다가 아침과 낮과 밤을 보내는 것이 내 일과의 전부였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세상에 그럴 수는 없는 거였다. 그래도 엄마 장례 치르고 나서 한 달은 아니더라도 일주일만이라도 깊은 슬픔 속에 잠겨 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어야 옳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장례 치르고 나서 곧바로 우리 자취방에 한번 들르고 쌀 한 포대 사주고 부식 값 얼마 주고 나서 가버렸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그때 너무나 삶에 지쳐 있던 양반이었다. 평생을 웬수 같은 돈 때문에 편한 잠 한번을 못 자보고 가신 가여운 내 아버지.

언니는 곧바로 일터로 갔다. 상중이라 하루이틀 더 쉬어도 좋으련만 언니는 굳이 그냥 일터로 갔다. 동생도 학교에 갔다. 아침에 벌떡 일어나 책가방 차곡차곡 챙기고 머리 얌전히 빗고 발목 부분 정갈히 접은 흰 양말 신고 학교에 개근했다. 나만 ‘지랄’을 했다. 엄마 장례 치를 때도 유독 내가 굿을 했던 것 같다. 다 지 죄를 스스로 알아서, 엄마한테 그마저도 안 하면 너무도 죄스러워서 그래서 그런 면구스러운 짓을 벌였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또 나의 그런 행동은 일면 나의 진실이기도 했으니, 지하에 계신 어머니는 당신 둘째딸이 어떻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니 그 모든 것 어여삐 봐주셨으리라.

죽음이 있으면 탄생도 있는 법, 세월이 흘러 우리 엄마와 똑같이 나 또한 아이 셋 낳은 엄마가 되어 있다.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가 셋이나 있다. 엄마가 낳은 세 딸이 엄마를 엄마아, 하고 부르면 우리 엄마는 오냐아, 내 강아지들아, 혹은 내 새끼야아, 했다. 나도 우리 아이들한테 엄마와 똑같이, 우리 엄마 목소리로 그런다. 내 강아지야아, 라고. 내가 그랬듯이 우리 아이들도 내가 저희들을 그렇게 불러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때로 나는 내 아이들이 지 엄마인 내 속을 상하게 할 때 그런다. 꼭 나 어렸을 때 내 동무들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 그러면 너희들 우리 엄마한테 다 일러버릴 거야. 그러면 내 딸들은 배꼽을 잡고 마구 웃어대고 다섯 살 먹은 막내는 엄마 엄마가 어딨는데? 한다. 그러면 나는 또 애기처럼 눈물이 난다.

우리 엄마가 이제 우리 아이들한테는 엄마 엄마가 되었다. 엄마의 엄마. 나는 나를 가리키며 그런다. 여기에 있지. 왜냐하면 내가 우리 엄마와 똑같기 때문이다. 말투도, 목소리도, 하는 행동도. 해먹는 음식도 꼭 우리 엄마가 우리한테 해주던 음식만 해먹는다. 그것을 제일 잘한다. 요즘의 신식 음식은 잘 못해도 옛날 우리 엄마가 해주던 음식들, 개떡, 시루떡, 쑥떡, 반찬도 상추겉절이, 무생채 따위들. 냉장고 없이 살던 시절에는 그렇게 반찬도 젓갈 같은 것 빼고는 그때그때 해먹는 것이 많았다. 내 속에서 우리 어머니를 느낄 때, 나는 든든해진다.

딴사람들 다 우리 엄마 흉봤어도 나는 내가 우리 엄마처럼만 살았으면 싶다. 젊은 내 친구들은 자기들은 결코 자신의 엄마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많은데 나는 안 그렇다. 엄마가 불행했던 건 결코 엄마 탓이 아니니까 그렇다. 우리 엄마처럼만 살면 아무 문제 없는 것이다. 세상에 무슨 죄를 지을 일이 없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그런다. 아, 엄마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어. 상상하는 것조차 싫어. 그러나 나는 안다. 아무리 엄마가 없어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살아지게 된다는 것을. 아무리 엄마, 엄마, 목이 쉬도록 엄마를 부르며 우는 그 순간에도 나는 내 살 궁리를 했던 것이 사실이니까. 허나, 그것이 우리네 인생인 것을 어쩌겠는가. 부모가 저 세상으로 가면, 가고 나면, 자식은 슬피 울게 마련이다. 저를 이 세상에 던져놓고 어찌 부모는 저 세상으로 가버리는지, 자식은 끈 떨어진 매처럼 정처가 없다. 제 정처 없음 때문에 우는 것이다. 정처 없지만 또 살다 보면 정처를 찾게 되는 것이 인간의 자식들이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어느 순간 내가 우리 어머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 모습이 점점 엄마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잠잠했던 눈물이 다시 샘솟듯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어머니 잃고 내가 이만큼 살았구나, 싶은 게 자신에 대한 하염없는 연민과 기특함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뒤범벅된 그런 눈물이었다. 부모 잃고 우는 자식의 눈물은 그 자식 생이 다 끝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때로는 가없는 그리움의 눈물이 되었다가, 회한의 눈물이 되었다가, 때로는 지친 마음 고요히 정화시켜주는 눈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부모 잃은 자식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고아다. 외로운 아이다. 그러면 눈물은 부모 없는 외로운 아이의 친구인가? 너 나 없이 살기 외로울 테니 나 대신 눈물을 주고 가마, 하고 내 부모가 내게 준 선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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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공선옥 / 소설가 유금호 / 이진경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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