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한 통일의 길
신라가 당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형제 싸움에서 이기려고 강도를 집안으로 불러들인 것과 같은 짓이었다. 그러니 당이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와 백성을 차지하고 나서 신라까지 넘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다음 고구려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소지가 많다는 이유로 문무왕 9년(669) 5월23일에 평양 부근의 고구려 백성 3만8200호를 양자강과 회수 이남 및 사천성·섬서성 등지의 빈터로 강제 이주시킨다. 그리고 신라가 백제의 땅과 백성을 마음대로 차지했다 하여 이를 해명하러 간 각간 김흠순(金純)과 파진찬 김양도(金良圖) 등 신라의 대신급 외교 사절을 잡아 가둔다.
그러자 문무왕은 10년(670) 3월에 사찬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태대형(제2위의 벼슬) 고연무(高延武)로 하여금 각각 군사 1만씩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 당병을 치게 한다. 이에 힘입은 고구려 유민들은 수림성(水臨城, 水谷城, 황해도 평산 협계) 출신의 대형(大兄;14관등 중 제7위) 모잠(牟岑)을 중심으로 궁모성(窮牟城, 弓次云忽, 大峴城, 지금 황해도 서흥)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켜 대동강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당나라 관인들을 살해해 나간다. 이들은 보장왕의 조카 고안승(高安勝)이 마침 사야도(史冶島)에 피신해 있다는 사실을 탐지해 내고 그를 한성(漢城, 황해도 재령 長壽城)으로 데려와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당나라는 좌감문위(左監門衛)대장군 고간(高侃)을 동주도(東州道) 행군총관으로, 우령군위(右領軍衛)대장군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燕山道) 행군총관으로 삼아 모잠의 부흥군을 토벌하게 한다. 그런데 이근행이 말갈 추장의 아들이었다 하니 고간도 고구려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즉 이들이 모두 고구려 출신으로 본국의 부흥운동을 저지하러 왔으니 부흥운동군측으로서는 이쪽 사정에 정통한 저들의 출현이 더욱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에 모잠은 6월에 소형(小兄, 14관등 중 제11위) 다식(多式) 등을 문무왕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한다. 문무왕은 이들을 이용하여 당군을 몰아낼 요량으로 이들에게 금마저(金馬渚, 전북 익산)를 내주어 나라의 근거지로 삼게 한다. 당의 웅진도독부를 배후에서 위협하면서 백제의 곡창지대를 당군의 관할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러면서 신라는 7월에 웅진도독부 유진(留鎭)장군 유인원(劉仁願)에게 대아찬 김유돈(金儒敦)을 보내 이 사실을 통보하고 화해를 요청했다. 그러나 주둔군 사령관으로서 관할권을 무시당했을 뿐만 아니라 배후에 강적을 맞이하게 된 유인원이 이를 용납할 리 없다. 즉각 웅진도독부 사마(司馬) 예군을 서라벌로 보내 거부 의사를 밝히고 문무왕을 힐책한다. 이에 문무왕은 예군을 잡아두고 군대를 보내 백제의 80여 성을 빼앗아버린다. 그리고 8월1일에는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금마저로 보내 고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한다.
결국 유인원은 위기를 느끼고 백제 유민들과 합세하여 신라군을 격파하는 전략적 전환을 모색하는 한편 본국에 신라 정벌군의 증원을 요청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문무왕은 11년(671) 6월에 장군 김죽지(金竹旨)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가림성(加林城, 충남 임천)의 벼농사를 짓밟고 석성(石城)을 공격하게 하여 당군 5300여명을 참수하고 백제 장군 2명과 당 과의(果毅) 6인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린다.
당의 신라 정벌
당 고종은 대로하여 설인귀를 계림도(鷄林道) 총관으로 삼아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 신라를 정벌하게 한다. 설인귀는 7월26일 신라 승 임윤(琳潤)법사 편에 문무왕에게 장문의 서찰을 보내 협박과 회유로 귀순을 권고한다.
그러자 문무왕은 명문장 강수(强首)의 손을 빌려 그보다 더 긴 편지를 써서 신라가 당군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이유를 낱낱이 밝히고 자존(自存) 자구(自救)를 위한 부득이한 자위책(自衛策)임을 강조한다. 또 당 태종이 태종 무열왕에게 약속한 대로 평양 이남의 백제 토지를 돌려주고 신라 정벌 계획을 포기하도록 당 고종에게 권고해줄 것을 당부한다.
사실 당은 그 사이 왜국을 정벌한다는 핑계로 선박을 수리했는데, 이는 신라 정벌을 위한 계획이었다. 신라의 한성도독 박도유(朴都儒)에게 백제 여인을 시집보내 신라 병기를 훔쳐내 백제에 넘긴 것도 당나라의 계책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당이 백제를 다시 세워 신라를 견제하게 하는 것이나 신라의 옛 땅인 비열홀(比列忽, 함남 안변)을 고구려에 돌려주라는 요구는 신라의 자존(自存)을 위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들짐승이 다하자 사냥개를 삶으려는 격이며, 한 고조가 미워했던 옹치(雍齒)를 상주고 위기에 몰린 한 고조를 살려주었던 정공(丁公)을 죽이는 격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중국 고사를 빌려 당의 처사를 힐난하였던 것이다.
결국 명분과 논리에 밀린 설인귀는 더 이상 신라를 공개적으로 성토할 수 없게 되자 신라 침공을 포기하고 회군하고 만다.
설인귀의 대군이 전과 없이 회군했으나 당 고종의 신라 정벌 의지가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문무왕 12년(672) 8월에는 고간(高侃)과 이근행으로 하여금 4만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쳐들어가게 한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이를 물리치려 하지만 여의치 않아 대아찬 효천(曉川)과 사찬 의문(義文) 등이 전사하고 만다.
결국 신라는 문무왕 12년(672) 9월에 급찬 원천(原川)과 내마 변산(邊山)을 당나라에 사죄사로 보내면서 그동안 포로로 잡아두었던 당나라 조운선(漕運船, 양곡을 운반하는 배)의 낭장(郎將) 감이대후, 내주(萊州) 사마 왕예본(王藝本), 웅주도독부 사마 예군 등을 함께 돌려보내고 상표(上表)를 올려 사죄를 청한다. 그 동안의 저항은 백제의 복수설치에 맞서 파멸을 막으려는 자구책에서 나온 것이며, 분골쇄신해도 큰 은혜를 다 갚지 못할 판에 억울하게 흉역(凶逆)의 누명을 쓰게 되었으니 사건 경위와 품은 뜻이나마 전하고 형벌을 달게 받겠다는 비굴한 내용이었다.
신라는 강국의 힘을 빌려 형제 나라를 멸망시킨 과보를 철저하게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은 3만3500분(分)과 동 3만3000분, 금 120분, 우황 120분, 40승포 6필, 30승포 60필 등을 공물로 바친다. 이로써 웅진도독부 관내의 백제 지역에서는 대규모 전쟁이 일단 억제되었다.
한편으로 강수는 명문장으로 당나라 침략의 명분을 잃게 하여 대군을 물리쳤으니 이보다 더 큰 전공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문무왕 13년(673) 정월에 강수에게 사찬(沙)의 벼슬을 주고 해마다 벼 200석을 내려주게 하였다.
어떻든 백제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이 억제되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백제 유민들은 점차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하였다. 당의 식민통치와 신라의 통일의지를 객관적으로 비교하게 된 것이다. 이에 맹목적인 반신라적 적대감만으로는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차차 인식해 나갔다. 강도를 불러들여 집안을 망친 못난 형제가 강도보다도 더 미워서 강도로 하여금 저마저 파멸시키도록 부추겨왔는데, 하다 보니 결국 그것 역시 강도가 원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이미 당의 꼭두각시가 되어 실권 없이 당나라를 드나드는 망국태자 부여 융과 그 일족은 백제를 부흥시킬 수 있는 구심점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백제 유민들은 신라와의 타협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점차 의식을 전환해 나간다.
한편 신라 쪽에서도 백제를 멸망시키기만 하면 쉽게 그 영토와 백성을 차지하여 제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10년 넘게 저항하는 백제 유민의 자세에서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더구나 강도를 끌어들여 집안을 망쳤다는 죄책감과 강도의 야욕이 자신의 집안을 독차지하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스스로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통감하게 된다.
그래서 차차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권익을 보장하며 포용하려는 정책을 펴게 된다. 백제와 고구려의 귀족과 관료 등 지배 계급은 그 지위를 인정하여 기득권을 보장해준다.
이에 백제 유민들은 당나라 주둔군 세력과 신라 세력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자신들의 독자적 안위를 지켜가려는 자세를 보이니 백제 부흥운동의 길목에 서 있던 연기(燕岐) 비암사(碑巖寺)의 비상(碑像) 조각과 그 명문(銘文) 내용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계유명(癸酉銘) 전(全)씨 아미타불삼존비상(碑像)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다방리에 비암사(碑巖寺)라는 절이 있다. 1960년 9월10일 황수영 선생은 이 절에서 사방에 불보살이 새겨진 불비상(佛碑像) 3개를 확인하고, 이를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에 보고하여 국보로 지정케 한 다음 학계에 소개하였다. 그런데 이중 두 개의 불비상에는 연대가 기록된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그 조성 연대와 조성 발원자 및 불보상의 이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면에 아미타삼존상이 새겨진 (도판 1)이다. 현재 국보 106호로 지정된 이 불비상은 마멸이 심하여 명문의 전문 판독은 불가능한 상태다. 그러나 2단으로 이루어진 앞면 아래 테부터 새기기 시작하여 양쪽 측면의 화면 여백에 가득 새겨 놓은 명문 내용을, 읽을 수 있는 글자만 가지고 파악해 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된다.
“전(全)씨들이 마음을 합쳐 아미타불상과 관세음, 대세지 보살상을 석불로 삼가 조성한다. 계유년 4월15일에 내말(乃末) 전씨, 달솔(達率) 진차원(眞次願), 진무(眞武) 대사(大舍), 목(木)아무개 대사 등 50여 선지식이 함께 국왕 대신과 7세 부모의 영혼을 위해 절을 짓고 이 석상을 만들었다.”
이 명문 내용을 분석하면 우선 불비상의 주체가 아미타삼존상이라는 것이다.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하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협시로 하는 삼존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조성 발원의 중심 인물은 내말 벼슬에 있는 전씨였고, 동심(同心) 발원자는 달솔 진차원, 대사 진무, 대사 목씨 등이라 하였다.
전씨(全氏)는 읽을 수 있는 글자 중에서 3자나 발견되어 이 불비상 조성의 주체가 전씨였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내말이라는 벼슬 이름은 신라의 관직이다. 대사 역시 신라 벼슬이다. 이로 보아 신라의 벼슬아치들이 이 불비상을 조성했다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겠는데, 그중에 달솔이라는 백제의 벼슬 이름이 나와 잠시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나 이런 혼란은 ‘삼국사기’ 권40 잡지(雜志) 제9의 백제인 직위 조의 내용으로 명쾌하게 해결된다. 그 내용을 옮겨보자.
“문무왕 13년(673)에 백제에서 온 사람에게 내외 관직을 주었는데 그 위차(位次, 지위의 차례)는 본국에 있을 때의 벼슬에 견주었다. 서울 벼슬 대내마(大奈麻, 신라 17관등 중 제10위)는 본래 달솔(達率, 백제 16관등 중 제2위), 내마(奈麻, 신라 17관등 중 제11위)는 본래 은솔(恩率, 백제 16관등 중 제3위), 대사(大舍, 신라 17관등 중 제12위)는 본래 덕솔(德率, 백제 16관등 중 제4위)이다.”
이로 보면 내마 전씨는 본래 백제의 제3위에 해당하는 은솔 벼슬에 있던 백제 고관이었음을 알 수 있고, 진차원은 백제 제2위의 벼슬인 달솔의 지위에 있었고, 진무와 목씨는 백제 제4위 관등인 덕솔의 지위에 있어 모두 백제의 상층 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가 포용정책을 펴면서 이들의 지위를 인정할 때 위와 같이 그 지위를 원래의 반 이하로 강등했으니 이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76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당나라 점령군의 주둔과 간섭을 청산하지 못했던 큰 원인이 이렇게 속좁은 승자의 우월주의로 백제와 고구려 유민 위에 군림하려 한 데 있지 않았나 한다. 그 이후 삼국 지역의 지방색이 서로 대립적인 양상을 띠며 계승되는 것도 원인을 따지자면 신라의 옹색한 통일방식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당나라 주둔군과 신라군 양쪽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야 했던 백제 유민들은 문무왕의 서찰을 받고 설인귀의 대군이 회군해 가자 이제는 복국(復國, 나라를 되찾음)의 희망을 버리고 불만스럽지만 신라의 회유책에 순응해가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문무왕 13년(673) 계유년에 백제 지배층에게 강등된 지위로 신라 벼슬을 내릴 때 이들은 그 벼슬을 그대로 수용하였던 듯, 바로 그 계유년(673) 4월15일에 이 불비상을 조성해 세우면서 강등된 신라 벼슬을 그대로 써놓고 있는 것이다. 다만 달솔 진차원만은 백제 벼슬을 고집하고 신라 벼슬을 받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에 동참 발원한 인물들의 성씨도 전씨를 비롯해서 진(眞)씨, 목(木)씨 등 백제 최상층 지배 씨족의 성씨들이다. 진씨는 태안반도와 삽교천 유역인 내포 일대를 장악하고 해상활동을 주도하던 씨족이었고, 전씨는 온양과 천안 일대의 곡교천 유역을 세력 기반으로 삼던 지배 씨족이었다.
이로 보면 이들은 내포를 중심으로 한 태안반도 일대에서 부여 복신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치열하게 벌이다가 끝내 실패하자 이곳 전의로 밀려온 백제 유민들인 듯하다. 이들이 이곳으로 몰려든 것은 이곳이 전씨들이 차지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온양과 천안, 목천에서 공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데다 증산(甑山)산성, 운주산(雲住山) 남북산성, 고산(高山)산성 등이 에워싸 외적의 침입이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의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길목이 비암치(碑岩峙)다. 그래서 그 길목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비암사를 세우고 그 절에 아미타삼존상을 새겨 놓은 불비상을 조성하여 봉안했던 것이다. 백제 부흥운동중에 전사한 무수한 생명들이 극락국토에 왕생할 것을 기원하고 그 동안에 돌아간 의자왕과 풍왕, 복신 등 국왕대신들의 영가도 극락에 왕생할 것을 빌며, 자신들의 일가 친척과 돌아간 선조들의 극락왕생도 아울러 기원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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