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호

책으로 시대의 흐름 읽는 즐거움

  •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

    입력2004-09-06 14: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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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의 서적역사가들은 독서의 유형이 18세기 무렵에 ‘집중형 독서’에서 ‘분산형 독서’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집중형 독서란 한 권의 책을 완전히 익힐 때까지 읽는 것으로 과거 우리나라의 서당에서 이뤄졌던 독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책의 종수가 늘어나면서 독자들은 한 권의 책을 읽은 다음에 바로 다음 책으로 옮겨가는 분산형 독서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수많은 텍스트를 컴퓨터 액정화면을 통해 읽게 된 지금은 무슨 독서라고 불러야 할까? 아직 서적역사가들이 정확하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지만 ‘검색형 독서’라고 부르면 어떨까?

    나의 직업은 책을 읽고 소개하고 비평하거나 출판시장의 흐름을 분석하는 일이다. 그래서 항상 책을 끼고 산다. 언제나 나의 책상에는 온갖 책들이 나뒹굴게 마련이다. 출판사들이 연구소로 보내주는 수많은 신간들을 최소한 제목이라도 일별해야 하고, 관심을 끄는 책은 일부라도 ‘무조건’ 읽어보아야 한다. 또 화제가 되거나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은 내 개인의 취향을 떠나 ‘무조건’ 훑어보아야 한다. 그래서 아무리 책을 보아도 이 시대의 트렌드를 읽어내기 어려울 때는 무수한 책을 처음에는 검색형 독서로, 그래서 골라진 책은 되도록 완독해야 하는 것이 마치 ‘노동착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책을 소비하는 대상(독자), 만들어내는 주체(출판사), 책이 유통되는 장(場=세계)은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일본의 한 출판인은 “편집자란 아프리카 사바나 지대를 달리는 트럭 위에서 날고 있는 새를 쏘아 맞히는 사람”이라 정의했다. 날아다니는 새(독자)를 맞히는 것도 쉽지 않은데 편집자가 타고 있는 트럭(세계)도 움직이고 있으니 이중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대중의 욕구를 정확히 읽어내어 “강의 상류에 목표를 정하고 보이지 않는 바닥의 흐름을 포착”해내는 일이 바로 나의 일이다.

    3∼5월에는 재테크 서적이 강세



    한 해의 경제·경영서의 흐름을 살펴보면 3∼5월에는 재테크 서적이 강세다. 휴가철인 6∼8월은 비수기이고, 9∼11월에는 처세서가 유행한다. 기업들이 새해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고 신규인력을 뽑기 시작하는 12월 이후에는 마케팅과 비즈니스 관련서 등 큰 테마 중심의 책으로 옮겨간다. 이 시기에는 트렌드, 세계 경제동향, 미래진단서 등도 좋은 반응을 얻는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몸을 떨치고 일어나서 새롭게 돈을 벌어보자고 기지개를 펴는 3∼4월에 유행하는 재테크 서적의 유형을 살펴보면 그해 시중의 돈이 어디로 튈지 예측해 볼 수 있다. 2000년 봄에는 ‘나는 사이버 주식투자로 16억을 벌었다’나 ‘나는 초단타매매로 매일 40만원 번다’와 같이 ‘대박 신화’를 다뤄 은근히 ‘묻지마 투자’를 유혹하는 책들이 기승을 부렸다.

    2001년에는 주식시세가 바닥을 기어 주식책의 인기 또한 형편없었지만, 주식투자에서 자칭 ‘재야고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사이버 애널리스트’들이 주가가 만들어내는 차트와 거기서 나타나는 신호를 보고 매수와 매도를 결정하는 투자방법을 제시하는 ‘기술적 투자’에 관련된 책들이 그나마 대중의 선택을 받았다.

    올해에는 주가가 오랜만에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어 주식책이 좋은 반응을 얻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하다. 과거에는 보통 주가가 750 이상이면 ‘개미군단’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주식책도 덩달아 널을 뛰곤 했지만 올해에는 그런 징후가 전혀 포착되지 않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올해 3월에 가장 좋은 반응을 얻은 책은 ‘한국형 가치투자전략’(서울대 투자연구회, 은행나무)이란 책이다. ‘가치투자’란 좋은 가치를 지닌 기업을 발굴하고 그 기업의 주식이 가치 이하로 거래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식을 매수한 다음 그 주식을 바로 되파는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보유하는 것이다. 즉 제한된 돈으로나마 돈의 흐름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사회적 부를 증가시키는 능동적인 사회기여의 한 방법이다.

    ‘묻지마 투자’와 같은 도박은 한쪽에서 돈을 따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돈을 잃게 되는 자금 순환논리가 적용된다. 하지만 바람직한 주식투자인 ‘가치투자’에서는 꼼꼼히 따지고 자세히 살펴서 투자하기만 하면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다. 따라서 가치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의 가치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책은 그런 능력을 키우는 방법을 일일이 제시한다. 이렇게 불과 몇 년 사이에 ‘묻지마 투자’에서 ‘기술적 분석’으로, 다시 ‘가치투자’로 투자의 유형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분명 긍정적 변화다.

    그러면 경영정신을 다룬 책의 흐름은 어떤가? ‘묻지마 투자’의 시기에는 디지털, IT, 웹, e 등의 단어나 글자가 들어간 책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마치 새 금광을 남보다 빨리 찾으려드는 것처럼. 디지털 기술에 대한 과도한 환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기술적 투자’의 시기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경영’ ‘최고 경영자 예수’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인덕경영’ ‘위대한 CEO 엘리자베스 1세’ ‘비즈니스의 달인 붓다’ ‘모세의 경영전략’ ‘간디 리더십’ 등 역사적 인물의 일대기에서 경영의 비전을 찾는 인간학과 경영학이 접목된 경영서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기술’(이론)에 대한 과도한 환상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속내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관심이 옮겨졌던 것이다.

    이 분야의 책 중에서 올해 우리 출판시장의 한 흐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책이 ‘상경’(스유엔, 더난출판)이다. ‘상경’은 태평천국의 난 등 개혁의 혼란 속에서도 온갖 시련과 경험을 겪으면서 비즈니스 세계에서 불세출의 신화를 이뤄냈던 중국의 거상 호설암의 전략과 경영철학을 집대성한 책이다. 호설암은, 300만 권의 판매를 넘어서고 드라마로도 인기를 끈 ‘상도’(최인호, 여백)의 주인공 임상옥과 비견되기도 한다.

    ‘상경’에서는 호설암의 삶과 사업에 얽힌 많은 사례와 현대 비즈니스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무수한 에피소드들을 제시해, 역경에 처했을 때 인내하며 최고의 기회를 만드는 지혜인 지신(砥身), 인재를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는 진인(盡人), 기회와 시국을 적절하게 결합할 수 있는 축시(逐時) 등 상인이 갖추어야 할 18가지 방법론을 설명한다. 그 사례들은 성인이나 오를 만한 대단한 경지의 것이 아니다. 오늘날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모래알 같은 무수한 ‘점’(사건)들일 뿐이다.

    올해 봄에 처세서의 한 흐름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책은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앤서니 라빈스, 씨앗을 뿌리는 사람)다. 이 책은 개인의 내부에 억압되어 있는 진정한 잠재력, 즉 ‘잠든 거인’을 깨우면서 우리의 인지체계를 혁신하는 탁월한 성과와 성공 변화의 매뉴얼을 제시한다. 게다가 변화의 원리와 방법이라는 매뉴얼도 함께 제시하고 있어서, 특히 성공을 꿈꾸는 개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책이다.

    이 책 이전에는 변화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도태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와 같은 책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은 한때 우리 기업들에 돌풍처럼 번졌던 리엔지니어링, 다운사이징 등 서양식 경영기법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IMF 이후 불안에 휩싸인 대중은 변화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이런 유형의 처세서들을 자본가의 권유에 의해서든, 자발적 선택에 의해서든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키우기 위한 목적을 지닌, 철저한 환경순응의 철학을 제시할 뿐이었다. 따라서 대중이 그런 책을 읽고 변화의 중요성을 분명히 깨달았다 하더라도 제 주머니는 갈수록 가벼워지기만 했다. 이를 자각한 대중은 이제 자본가의 관점이 아닌 바로 자신의 시각에서 자아성찰을 추구할 수 있는 책들을 찾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경제·경영서는 이제 ‘회사 안’에서 ‘회사 밖’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렇게 무수한 책들 중에서 독자의 반응을 제대로 얻은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불과 몇 년 사이에 ‘묻지마 투자’에서 ‘기술적 분석’으로, 다시 ‘가치투자’로 투자의 유형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자신이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경영정신을 추구하고, 변화에 놀라기보다 자아성찰을 통해 내면의 깊이를 갖추어나가는 독자들의 바람직한 독서유형을 찾아낸다. 책의 흐름을 통해서 우리 사회는 좀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두터운 교양서들이 안정적으로 판매되는 인문서 시장으로 이어진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열렬히 읽었던 독자들은 이제 ‘화인열전’을 거쳐 ‘완당평전’(이상 유홍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따라 읽는다. 이런 독자들로 인해 인문 베스트셀러에는 과거에는 전문서라 여겨질 만한 책들이 대거 올라 있으며, 이 책들은 자주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에도 오르곤 한다.

    그 변화의 정점에 오늘의 ‘40대’가 있다. 이들은 오늘날 독서시장의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다. 그들은 책 시장에서 갈수록 긍정적인 소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 사회변화의 역동성을 주도하고 있는 40대는 성장기에 한 권의 책이 갖는 의미를 그 어느 세대보다 절감한 세대다. 그들이 교양중산층 독자군을 두텁게 형성해 수준 있는 책의 출간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작년 말에 나는 한 신문에 “정치, 경제, 신기술, 환경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대중의 불안감이 갈수록 누증되고 있지만 그럴수록 지식인들이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의지가 커질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책임감을 회복하기 시작한 지식인들은 발빠르게 새로운 담론이 담겨진 인문서로 대중과의 접점 찾기를 시도할 것이다. 내년에 있을 여러 선거는 이런 변화의 윤활유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올해 출판시장을 예상했었다. 실제로 그런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 바람은 곧 우리 출판시장에 역동성을 불어넣어 출판시장은 더욱 활력을 얻어갈 것이다. 그래서 우리 출판의 ‘르네상스’를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요즈음 나는 ‘노동착취’의 책읽기를 통해서도 마냥 즐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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