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다임러 크라이슬러와의 전략적 제휴효과가 대우차 인수 실패에 따른 손실을 커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이다. 다임러 크라이슬러가 투자자들로부터 취약점으로 지적받은 것은 동유럽 지역의 기반 미비가 아니라 소형 승용차 부문의 노하우 부족이었기 때문에 현대와의 제휴는 대우 인수와 관계없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
다임러 벤츠는 대형 승용차와 상용차 부문에서, 크라이슬러는 미니밴과 SUV(Sports Utility Vehicle), 소형 트럭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두 회사의 합병은 여러 모로 상호보완 효과가 있었지만, 소형 승용차 부문은 여전히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다.
소형 승용차는 조만간 황금어장으로 떠오를 아시아 등의 신흥 시장을 겨냥한 전략 차종일 뿐 아니라 벤츠와 크라이슬러의 기존 대형차 판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다. 갈수록 강화되는 자동차 환경규제는 특정 업체가 생산하는 전체 차종의 평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대형차 메이커들도 연비가 높은 소형차를 만들어 배출량 평균치를 낮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임러 크라이슬러가 독자적으로 소형차를 만들 경우 고비용과 ‘과잉품질’ 때문에 경쟁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더욱이 다임러 크라이슬러가 어렵사리 개발한 2인승 스마트카가 테스트 도중 뒤집혀 벤츠의 자존심에 먹칠을 하는 사건까지 터졌다.
결국 다임러 크라이슬러는 소형차 개발을 위해 일본의 미쓰비시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는데, 미쓰비시 역시 생산비가 만만치 않은데다 재무상태도 취약했다. 더구나 미쓰비시는 신흥시장 중에서도 핵심지역이라 할 중국과 인도에는 사업기반이 없었다. 이 때문에 다임러 크라이슬러는 생산비와 기술 면에서 소형 승용차 부문의 톱 메이커일 뿐 아니라, 중국·인도와도 제휴관계를 맺고 있는 현대에 손을 내밀게 된 것. 3사는 소형 승용차(월드카) 공통 플랫폼(엔진, 트랜스미션 등 차체를 제외한 차의 중요부분)을 함께 개발하는 것은 물론 생산과 판매에서도 협력하기로 했다.
현대는 이와 같은 제휴관계를 통해 기술이전, 판매망 확대, 브랜드 가치 상승 등을 기대하고 있다. 현대는 오는 연말께부터 미국에 수출할 예정인 그랜저 XG를 최근 미국에 가져가 현대 로고를 뗀 상태에서 블라인드 테스트를 실시했는데, 차를 몰아본 운전자들은 대당 3만5000달러 수준의 승용차로 평가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차에 현대 로고를 붙이고 테스트했더니 평가가격이 7000∼8000달러나 떨어졌다. 미국 소비자들이 현대라는 이름을 아직도 값싼 소형차 메이커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테스트에 참가했던 현대 간부는 “이는 현대가 만든 승용차에 벤츠 로고를 붙여 팔 경우 어떤 효과를 나타낼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라고 해석했다.
주는 게 있어야 받는다
현대가 다임러 크라이슬러와 제휴한 데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각이 대부분이다. 이런 시각은 특정 기업 주식의 미래 가치를 분석해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증권가에서도 볼 수 있다. 굿모닝증권 기업분석부의 손종원 애널리스트는 “3월까지만 해도 현대차에 대해 매도의견을 냈으나, 다임러 크라이슬러와 제휴설이 알려진 3월말부터 매수의견으로 돌아섰다”고 전한다.
“그 이전에는 중·장기적으로 현대의 생존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봤다. 현대가 ‘빅 5(GM·포드·다임러 크라이슬러·도요타·폴크스바겐)’의 우산 아래 편입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데, 이런 제휴는 합리적인 전문경영인이 최고경영자로 있는 기업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재벌오너는 제휴에 따르는 구속이나 불편을 싫어하기 때문에 현대도 무모하게 ‘독자생존’을 고집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경영권 분쟁에 휩싸이면서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어깨에서 힘을 빼고 전략적 제휴에 적극 나선 것 같다.”
부자, 형제간의 경영권 다툼이 오히려 현대차엔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아이러니다. 한국의 자동차회사 주식을 사라고 하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외국인 투자자들도 현대-다임러 크라이슬러의 제휴논의가 본격화된 6월부터는 꾸준히 현대차 주식을 사들이고 있다고 한다.
현대차 관계자는 “대우는 포드로부터 동유럽과 아시아 시장을 공략할 저가형 브랜드 역할을 부여받게 될 가능성이 높지만, 현대는 자립성을 훼손받지 않는 전략적 제휴를 택했기 때문에 저가형 브랜드에 머무르지 않고 중·대형 고급차로 사업 중심을 옮겨갈 수 있게 됐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현대가 다임러 크라이슬러와 이런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기술이든 경영이든 마케팅이든 어느 한 분야에서 확실한 ‘주특기’가 있어야 한다. 제휴란 서로 주고 받는 것이지,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하는 관계가 아니다. 메이저들을 중핵으로 합종연횡하는 세계 자동차업계의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당당한 주력군 지휘관으로 대접받으려면 누구나 탐낼 만한 장기 하나쯤은 갖춰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R·D와 플랫폼 개발 등 고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하고 하청 조립생산에나 급급한 ‘변방의 용병’ 신세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일본 혼다가 그 좋은 예다. 혼다의 연 생산대수는 약 200만 대. 업계에서는 1년에 400만∼500만 대 이상을 생산하지 못하는 회사는 독자생존이 불가능하다고 전망하지만, 누구도 혼다가 메이저들과 경쟁해 무릎 꿇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선진국 업체들이 대개 매출액의 4∼5%를 R·D에 투자하는데 비해 혼다는 무려 8%를 쏟아붓는다. 오토바이 엔진 제작에서 출발한 창업주 혼다 기이치로의 장인정신이 이어져오면서 기술제일주의 뿌리내린 것. 그 결과 혼다는 엔진 분야 등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게 돼 톱 메이커 GM이 혼다로부터 엔진을 공급받고 있을 정도다. 혼다가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 알루미늄 차체 기술도 실용화될 경우 차체 생산비용을 크게 낮추고 연비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어 표준화 기술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다.
과연 현대는 이처럼 메이저들에게 큰소리 치며 내세울 만한 주특기를 갖고 있을까. 당장 내세울 만한 게 없다면 주특기를 키울 만한 기반과 여건은 갖추고 있는 것일까.
MK·MH 지분 경쟁설
현대차의 계열분리를 둘러싼 정주영·몽구·몽헌 3부자의 갈등은 아직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현대그룹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퇴진 선언 후 오히려 현대차 지분을 추가 매입, 보유지분을 9.1%로 늘렸다. 개인으로선 몽구 회장(MK)을 제치고 최대 주주가 된 셈이다. 정 전 명예회장의 현대차 지분은 몽헌 전 회장(MH)의 우호지분, 다시 말해 몽구 회장의 적대지분으로 파악된다.
MK측은 경영권 방어를 자신하고 있다. MK의 개인 지분은 4%에 불과하지만, 현대정공 7.8%, 우리사주 12%, 다임러 크라이슬러 10%, 미쓰비시 4.8% 등 우호지분이 39%에 육박한다는 것. 현대차측은 다임러 크라이슬러가 주주협약서에서 현 경영진에 대한 지지를 약속한 것은 물론, 현대차에 대한 적대적 M·A 시도가 있을 경우 현대차와 공동 대응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못박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MK측은 여전히 MH측의 현대차 경영권 장악 의도를 경계하는 눈치다. 실제로 증권가에서는 MH측이 역외펀드를 이용해 현대차 지분을 꾸준히 매입하고 있다는 루머가 나돌았다. 또한 현대차 주변에서는 ‘아직 현대차와 다임러 크라이슬러의 제휴가 공식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다임러 크라이슬러는 현대차 재무실사가 끝나는 8월에나 현대차 지분을 받게 된다) MH측이 그 전에 안정 지분을 확보, 임시주총을 소집해 반전을 노린다’는 설이 꼬리를 물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차를 그룹에 남겨놓고 MH 계열사를 분리한다는, 이른바 역계열분리안이 나온 것은 현대전자가 현대차 전장품을 만들고, 현대종합상사가 현대차 수출업무를 대행하고, 현대상선이 현대차를 수송하고, 현대건설이 현대차 설비공사를 맡고 있는 현실에 MH가 현대차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 관계자는 “말도 안되는 억측”이라며 “스스로 경영권 방어를 자신한다는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지 모르겠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현대차측의 ‘불안감’은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현대차 임원 출신이 많은 현대산업개발이 현대차 지분을 사들이고 있다든가 현대차 협력업체들이 지분경쟁에 동원됐다는 설 등이 그것. 실제로 동해전장과 화신은 6월말과 7월초 각 34만 주, 14만 주의 현대차 주식을 ‘투자목적’으로 매입했다고 공시했다. 두 회사는 생산 부품 전량을 현대차에 납품하며 현대차를 ‘모기업’이라고 부를 만큼 현대차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 때문에 MK 지원에 ‘성의’를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문제는 이런 불안감이 기업의 내실있고 장기적인 발전을 추구하기보다는 외형과 실적 위주의 단기적인 경영전략으로 귀결될 우려가 있다는 점. ‘안정적인 입지를 다지려면 빨리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정말 중요한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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