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설명이 꼭 들어맞는 정치가다. 그는 1942년 7월2일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부유한 농업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했던 이 꺽다리(195㎝) 청년은 멕시코시티의 사립 명문 이베로 아메리카대학에 진학해 경영학을 전공한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미국 하버드대학의 경영대학원(MBA)으로 유학을 갔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폭스가 택한 직장은 코카콜라 멕시코 지사. 관리직도 아닌 영업사원이었지만 미국적 사고방식을 가진 젊은이의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후 폭스는 고속승진을 거듭해 지사장 자리에 올랐다. 잘나가던 폭스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데 대해 측근들은 “당시 경제난이 계속되면서 국민의 삶이 황폐화되다시피 하자 경영 마인드를 정치에 도입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폭스가 본격 정치에 입문한 건 87년 국민행동당에 가입하면서부터. 당시 멕시코는 82년의 대외채무지불유예(모라토리엄) 선언에 이어 88년의 경제대란이라는 이른바 6년 주기의 경제위기를 겪고 있었다.
1968년 올림픽을 개최했을 정도로 선진국 대열에 일찍 합류했던 멕시코가 이렇게 돌변한 건 왜일까. 이 부분은 세계사적으로도 전례가 매우 드문 ‘경영자 같은’ 정치인 폭스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1929년 창당된 제도혁명당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정당 중 하나다. 제도혁명당의 독주가 가능했던 것은 노동자와 농민, 군부 등 사회 각 분야를 총망라하는 조직을 만든 뒤 혁명과업의 계승과 국가의 공식당을 기치로 조합주의(코포라티즘)적 통치를 펼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소유 분배 구조의 왜곡과 빈부격차의 심화로 나타나는 멕시코식 경제성장의 문제점과 ‘가부장적’ 대통령주의에 대한 반발, 부정부패 등 장기집권의 폐해에 대한 염증 등이 부각되면서 집권당의 항로는 순탄하지 못했다. 94년에는 페소화 가치 폭락으로 경제위기가 재연됐고 집권당 대선후보가 암살되는 등 정치·사회적 위기가 겹쳤다.
88년 과나후아토주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폭스가 같은 주 주지사에 출마, 당선된 95년은 멕시코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 편입된 첫해였다. 폭스는 과감한 경제개혁을 바탕으로 가난했던 과나후아토주를 멕시코 31개 주 가운데 5번째 부유한 주로 끌어올렸다.
폭스는 국민행동당 대선후보로 나서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빈곤추방과 부패척결, 실업해소를 내세운 전략은 유권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부정 투·개표의 우려 속에서도 폭스가 무난히 당선되고 만년 야당이었던 국민행동당이 상·하원에서 모두 1당으로 부상한 것은 75%에 가까운 유권자들의 높은 투표율 덕분이었다.
멕시코 국민의 기대를 더욱 불러 일으키는 것은 폭스 당선자가 ‘준비된 대통령’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거국내각을 구성하는 한편 ‘국가투명위원회’를 설치해 과감한 과거청산 작업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경제성장률을 8%대로 끌어올리고 외국인 투자를 2배로 늘려 130만개의 일자리를 새로 창출하겠다는 것도 폭스의 욕심이다.
그의 인기는 외국에서도 상한가를 치고 있다.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은 빌 클린턴 대통령과 여야의 대선후보들이 멕시코계 유권자들을 겨냥해 폭스 당선자의 미국 방문을 잇따라 요청하고 나섰다.
폭스는 이혼남이다. 2남2녀를 두고 있지만 모두 입양한 자식들. 말하자면 멕시코의 퍼스트 레이디 자리는 아직 공석이라는 얘기다. 때문에 누가 이 자리를 메울 것인지도 관심거리다. 일단은 장녀 크리스티나가 영부인 역할을 대신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폭스가 오랫동안 사귀어 온 멕시코 최고의 인기 배우이자 가수인 루시아 멘데스와 결혼할 것이라는 보도도 있다.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