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좋아하는 타입의 여성은 알려져 있지만, 김정일의 본처가 누구인가 하는 점은 아직도 수수께끼고 결혼 경력도 분명하지 않다. 신영희가 증언하는 고영희는 알려진 바에 따르면 네 번째 처(애인)다.
“1975년부터 고영희라는 무용수가 언제나 김정일의 파트너를 맡게 됐다. 그녀는 1953년 일본에서 태어나 60년대 전반 가족 전원이 북한으로 귀국한 재일 조선인으로 72년에 만수대 예술단에 무용수로 입단했다. 73년과 74년 만수대 예술단의 일본공연에서 각광을 받았고, ‘눈이 내리네’라는 15분 정도의 단편영화에 주연을 맡은 적도 있었다.
1977년 들어 고영희는 연회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다. 김정일에게서 철봉리에 있는 별장을 받아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그녀는 79년 후반인가 80년에 창광산 관저에 들어가 그 곳의 ‘안주인’이 됐다.”
이한영의 증언도 구체적이지만 신영희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영희는 만수대에서도 유명한 무용 배우였고 김정일의 마음에 들었다. 김정일은 이따금 연습실까지 찾아와서 그녀의 연습을 지켜볼 정도로 열을 올렸다고 한다. 고영희는 이목구비가 반듯한 얼굴로 키도 크고 스타일이 좋은 미인이었다. 춤솜씨도 뛰어나고 무대에서의 인상도 화려하여 주변에서 높은 평판을 받고 있었는데, 김정일도 그런 점에 주목한 듯하다. 그러던 중에 고영희는 점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됐고, 뒤에 김정일과 동거하고 있다거나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 나돌게 된다.”
고영희가 임신했기 때문에 김정일은 그녀를 창광산 관저에 살게 했고, 1981년 두 사람 사이에서 김정철이 태어났다. 이한영에 의하면 장남인 김정남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공부한 반면 김정철은 베른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김정일의 첫 결혼에 대해서 강명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68년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내각 사무국 지도원 한 사람을 지명해 주었다. 귀여운 여성이었다. 약혼 단계까지는 진전된 것 같은데 결혼까지는 못 간 듯하다. 현재 그녀는 어느 초대소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강명도는 그 여성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볼 때 이 여성은 김일성 종합대학 러시아문학부를 졸업한 혁명 유자녀인 홍일천으로, 김정일과 연애 끝에 1967년(66년 가을이라는 정보도 있음)에 결혼, 68년에는 혜경이라는 딸을 낳았지만 3년 후 (일설에는 5년 후) 이혼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홍일천은 그 후 1980년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돼 정무원 보통교육부 부부장(문교부 차관)을 거쳐 지금은 김형직 사범대학 학장이 돼 있다. 때문에 얼굴 사진을 볼 수 있다. 지적 미인이지만 그녀가 김정일의 첫 부인이라는 결정적 증언은 없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망명소동을 일으킨 성혜림이다. 1955년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입학한 성혜림은 56년에 딸을 낳은 후 그 딸의 아버지인 이평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리고 재학중이던 59년 ‘경계선의 마을에서’라는 영화에 출연해 배우로 데뷔했다.
당시 김정일은 남산고급중학교 동창생(월북작가로 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이었던 이기영의 아들) 집에 자주 놀러다녔는데, 그 동창생의 형수가 바로 성혜림이었다고 한다.
이한영에 의하면 “숙모는 이평과의 사랑없는 결혼에 실망하고 있었고 68년 경부터는 김정일과 비밀 데이트를 즐기게 됐다”고 한다. 성혜림은 68년 ‘어느 자위단원의 운명’을 마지막으로 영화계를 떠나 69년부터 김정일과 함께 살게 된다. 그 당시 성혜림은 33살, 김정일은 5살 연하인 28살이었다.
김정일이 중앙당을 통해 이평을 강제로 이혼시켰다고도 하지만 성혜림이 임신하자 200평 정도의 ‘15호 관저’를 세워서 성혜림을 본처로 대우했다. 성혜림과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것은 그녀에게 결혼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1971년 5월10일 성혜림은 고관 전용인 봉화진료소에서 김정남을 출산했다. 김일성이 김정남의 존재를 안 것은 4년 뒤의 일로, 그 때까지 김정일의 아들은 극비로 취급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성혜림은 마음고생이 많아 73년에는 모스크바 크렘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다. 74년 봄 평양에 돌아온 성혜림은 다시 15호 관저에서 생활을 시작했으나 모스크바에도 아파트를 갖고 평양과 모스크바를 오가며 살았다. 그리고 1996년 망명을 시도한 후 현재까지 그녀의 거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내 4명에 자식 7명, 본처는 누구?
사랑도 많이 하는 김정일 앞에 세 번째 여성이 등장한다. 다시 이한영의 증언을 들어보자.
“김정일은 자신의 타이피스트가 마음에 들어 관계를 맺었다. 김정일이 첫눈에 반한 여성은 김영숙이라는, 1973년 당시 17살 처녀였다. (생략) 숙모가 충격을 받은 것은 김영숙이 여자아이를 낳아 김일성이 대단히 기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김정일은 74년에 김영숙에게서 장녀인 설송을 낳았다.”
김영숙은 혁명가 집안에서 태어나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타이피스트로 일하던 시기에 김철만 장군의 소개로 김정일을 만났다고 한다. 김영숙에게는 설송 외에도 1남1녀가 더 있다고 전해지며, 지금은 김정일의 본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55년 생인 ‘김혜숙(김애숙)’이라는 여성이 본처라는 정보도 있다. 김혜숙은 함경북도 회령군 출신의 미인으로 부친은 청진사범대학 학장이라고 한다. 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972년(73년설도 있다)이라고 하며, 자녀도 있다고 한다.
이한영의 증언을 신뢰한다면 김영숙과 김혜숙의 생년월일이 거의 일치하며, 같은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1988년에) 소련의 예술가가 출연한 어떤 연회에 김정일은 부인과 딸을 데리고 나타나 일등석의 리더에게 소개했다. 김정일과 처자식은 6시간이나 연회에 참석했으며, 11∼13세로 보이는 딸은 일제 비디오 카메라로 계속 녹화를 했다.”
러시아의 제빈 기자는 ‘내가 본 김왕조’라는 책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딸이 태어난 연도는 1976년 또는 77년이며 김영숙의 차녀라고 생각된다.
이상의 정보를 정리하면, 제1부인(홍일천)과의 사이에 딸(김혜경) 한 명, 제2부인(성혜림)과의 사이에 아들(김정남) 한 명, 제3부인(김영숙)과의 사이에 1남2녀(김설송과 남동생 및 여동생), 제4부인(고영희)과의 사이에 1남(김정철) 1녀라는 가족 구성이 이뤄진다.
이 외에 김정일에게는 다수의 애인이 있다는 정보가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다른 자료 및 증언을 가지고 크로스체크해보는 것이 불가능한 소문들이다. 그러나 다음의 정보는 다른 곳에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꽤 신뢰성이 있는 것 같다.
“김정일은 80년대 초부터 현재 러시아주재 대사인 손성필의 여동생 손희림(1950년생)과 관계를 가져 딸 두 명을 얻었다. 손희림은 1991년 김정일에게 버림받은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걸려 현재 오빠 손성필의 도움을 받아 딸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살면서 치료를 받고 있다.”
6.맹렬한 야맹성
평양의 김일성 광장에서 보면 인민대학습당 뒤로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가 있고, 1호 청사 구내에는 3층짜리 당 조직지도부 건물이 있다. 건물 3층에는 ‘85집무실’이라고 불리는 김정일의 사무실이 있다. 3층 전부가 김정일 전용이며, 당 조직지도부 서기실이라고 불린다.
이한영은 “김정일은 낮 12시경에 일어나 심야까지 집무한 후 새벽 무렵에 관저에 돌아와 자기 때문에 저녁식사는 밤 11시 아니면 12시경이 된다”고 말했다. 또 고영환은 “낮에는 거의 일을 하지 않고,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집무한다”고 쓰고 있다. 이런 김정일의 야행성 생활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정일의 전기에는 심야에 호출당한 간부들의 에피소드가 여러 편 실려 있다. 김정일의 근면성을 칭찬하려고 쓴 글이지만, 뒤집어보면 부하들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전기는 ‘1980년 10월5일’ 하루 동안 김정일의 업무가 소개돼 있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김정일의 맹렬한 하루 일과를 살펴보자.
“집무실에서 새벽을 맞이한 김정일은 새벽 일찍 어떤 건설현장을 방문해 실무지도를 한다. 정오를 한참 지났을 무렵에 현장을 떠나 점심도 먹지 않은 채 모란봉 경기장(현재의 김일성 경기장)에 가서 2시간 정도 제6회 당대회 경축 매스게임인 ‘당의 깃발 밑에서’를 지도하고 간부단의 배치를 확인. 오후 5시경 경기장을 나와 평양 제2 백화점에 들러 축일을 위한 상품 준비상황을 확인. 그 다음에는 신축한 중앙통신사 사옥을 시찰하고, 완공을 앞둔 창광거리로 향한다. 30층 맨션 최상층 베란다에 올라가 시내를 굽어보면서 건물의 전망에 대해서 말한다. 그 후 점심 겸 저녁을 먹고 당 중앙청사에 돌아와, 집무실에서 밤 12시까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를 처리한다.”
이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강명도에 의하면 김정일은 통상 요일별로 각 부서의 안건을 처리한다고 한다. 월요일 - 당 조직지도부, 화요일 - 인민무력부, 수요일 - 주석 및 당 재정 경리부, 목요일 - 정무원, 금요일 - 당 중앙위원회, 토·일요일 - 연휴.
이렇게 요일별로 업무를 나누어 하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 김정일의 이야기가 연상된다.
“수령님은 살아 생전 나에게 절대로 경제생활에 깊게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말려들면 당 활동도 할 수 없게 되며, 군사 활동도 할 수 없게 된다고 몇 번이나 당부하셨다. (생략) 경제활동은 당 활동가와 행정경제 활동가들이 책임지고 해야 한다.”
이것은 1996년 12월, 김일성 종합대학을 시찰한 후 간부들에게 행한 비밀연설 중 한 구절이지만, 김정일은 무책임하게도 경제부문의 책임을 부하에게 전가하고 있다. 업무처리에 경제부문을 처리하는 날이 없는 것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게 아닌가 라는 추리를 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증언도 납득할 수 있다.
“그(김정일)는 한국이 북한에 비해 군사력을 제외한 전 부문에서 우수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김정일은 한국은 단지 외국 부품을 가져와 조립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혹평만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북한의 공장은 60%가 가동을 못하고 있다는 고민도 솔직히 밝히고 있다.”
신상옥은 이렇게 쓰고 있지만, 공장 가동률이 40%였던 것이 1984년(8월4일 담화)의 일이다. 지금이라면, 김정일은 무책임하게도 “가동률 10% 이하”라고 말할 것이 틀림없다.
7.지워졌던 육성(肉聲)의 비밀
김정일은 지금까지 공개 장소에서 연설한 적이 없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 때 비로소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나 그때도 연설은 하지 않았다. 김대통령의 방북 전까지 그의 목소리는 최은희·신상옥이 녹음한 테이프 이외에는 인민군 창건 60주년 열병식에서 행한 “조선인민군에게 영광 있으라”는 단 한마디 육성이 알려져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온갖 억측이 난무한다. 최은희·신상옥 부부에 의하면, 억양에 평안도 특징이 있지만 평안남도 사투리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김정일)는 우리와 이야기할 때는 액센트는 좀 달라도 거의 표준어에 가까운 말을 사용하지만, 자기들끼리 이야기할 때나 지시를 내릴 때는 ‘…하그래(하십시오)’와 같은 사투리를 자주 사용했다.”
또 러시아 외무성 조선부의 스히닌 참사관은 김일성 종합대학 졸업 후 평양의 소련대사관에서 12년 근무한 북한 전문가인데, 1988년 북한 건국40주년 기념식 때 소련대표단 통역을 한 경험이 있다.
“그때 김정일도 발언했지만, 정상적이었고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서방에서는 온갖 억측이 난무하지만 그의 발언에서 특별히 이상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스히닌 참사관의 말처럼 김정일이 일상 대화는 물론 기지에 번득이는 풍부한 대화도 가능하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김정일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연설을 안 하고 뉴스 등에서도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오래된 기록영화에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선전선동 담당비서였던 당시의 김정일이 그렇게 지시했기 때문이다. 즉 김정일은 의도적으로 모든 기록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지우고 있다. 그토록 철저한 일관성은 그의 패션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신비성을 높이려고 목소리를 지우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김정일은 자신의 결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감이 없어서 부끄러움을 많이 탔고, 얼굴도 금방 빨개졌다. 그 습성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모른다.
8.김정일이 정말 싫어하는 것
“김정일 비서가 당간부의 생활과 품성 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허식과 아부다.
비서는 항상 당중앙위원회 재정경리부에 있는 같은 연배 어떤 간부의 인간성을 칭찬했다. 어느 날 같은 부서의 사람들에게 ‘내(김정일)가 왜 그 사람을 좋아하느냐 하면 성실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허식과 아부입니다. … 혁명가는 처세술을 배워서는 안됩니다.’”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이라는 전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지만, 같은 발언이 다른 전기에도 등장한다.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표리부동입니다. 앞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뒤에서는 책략을 꾀하는 무리들이 제일 위험합니다.”
김정일의 이와 같은 말은 신상옥의 증언으로도 뒷받침된다.
“김정일은 (환호하는) 밴드 대원들에게 손들어 답례하고, 그 정도로 충분하다는 손짓을 했지만 환성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김정일은 내 왼손을 잡고 앞뒤로 흔들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입에 올렸다. ‘신선생, 저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설령 김정일이 술에 취해서 한 말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술김에 본심이 나타난 것처럼 들렸다.”
강명도는 김정일에게 아첨한 인간의 무상한 최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기쁨조를 발안했던 당 통일전선부의 이동호는 김정일의 오른팔이던 존재로, 김정일 옹립을 위해서 ‘유일사상체계’를 입안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82년 이동호가 주관한 김정일 40세 탄생 축하 생일파티가 성대히 열렸다. 그 자리에서 술 취한 이동호가 김정일과 나눈 대화를, 강명도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누군가 했더니 동호 아니야.’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지도자동지 기쁜 생신이니까 제가 지도자동지의 만세를 한번 부르고 싶습니다.’ ‘동호, 술 취했구먼, 자리에 돌아가라.’ ‘수령님이 살아 계신다고 한들 도대체 얼마나 더 사시겠습니까? 10년 더 사시겠습니까? 20년을 더 사시겠습니까? 제가 여기서 만세를 부르겠습니다.’
당시는 ‘유일 후계자’ 문제가 해결된 시점이었지만, 처세술을 익힌 혁명가의 아부가 문제되면 안된다고 걱정한 김정일은 그 자리에서 결단했다.
‘거기, 호위병 있는가! 이 자를 끌어내 즉시 총살에 처해라.’ 연회장은 갑자기 어수선해졌고, 함께 있던 간부들이 이동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부탁했지만, 김정일은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 새끼, 아무리 술 취했다고 해도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하면 안 되는 게 있어. 당간부라는 인간이 수령님에 대해서 무례를 범하는가.
나도 수령님 앞에서는 지도자 동지가 아니라 일개 전사에 지나지 않는다. 본보기가 되도록 이 놈을 죽여버리겠다. 그리고 이 놈을 살려달라는 사람도 이 놈과 같은 작자다. 호위장교는 뭘 머뭇거리고 있느냐! 얼른 끌어내 총살해라!’”
이렇게 김정일은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부하를 처단했다. 이 사건은 장소와 때를 가리지 못하고 김정일에게 아부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생각하는 대로 바로 행동에 옮기는 성격을 모자람없이 보여준다.
강명도는 김정일에 대해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이다. 다만 기질이 격하고 급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강명도는 또 “한 마디로 말해 대단히 급하다. 측근에게 야단을 칠 때는 더 심하다. 변덕쟁이며 오늘은 기분이 좋은가 하면, 내일은 다르다. 저돌적이고 맹목적인 부분도 있다. 또 술을 마시면 잘 울기도 한다”고 말한다.
한편 이한영은 “그(김정일)는 본질적으로 대단히 교양있는 사색형의 인간이다”고 전한다. 나는 이들 세 사람의 관찰이 다 맞다고 생각한다. 교양있고 사색형이면서 기질은 격하고 성격이 급한 인간도 있다. 어쨌든 김정일이 머리가 빨리 돌고, 무능하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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