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 캠프는 강한 유대감과 결속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감은 인간적인 신뢰가 전제되지 않고는 형성될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 김대중 총재를 모시고 동고동락해오는 가운데 생겨난 끈끈한 인간적 신뢰가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서양속담이 있는데, 이만큼 동교동 캠프에 어울리는 말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 동교동 동지들은 말 그대로 눈물로 맺어진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
민주당 권노갑 고문은 지난해 9월 출간한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는 자서전을 통해 동교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충성심을 중심으로 뭉쳐진 형제 같은 동지애.’ 이는 동교동 비서진에 대한 수식어이자 만년 야당대통령후보 김대중을 실제 대통령으로 만든 원초적 힘이기도 했다.
하지만 책 출간 이후 채 1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세상은 많이 변했다.
눈물로 맺어졌다는 동교동은 분명 분화과정을 겪고 있다. 권고문이 동교동내 주류라면 한화갑 의원은 비주류로 불리고 있다. ‘양 갑’의 갈등은 부인하지 못할 현실이 됐고 전쟁으로까지 묘사되고 있다.
권고문은 7월12일 ‘팍스코리아나 21’이 주최한 조찬강연에서 “동교동은 나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고 강조했지만, 그날 저녁 한화갑 계보의 한 의원은 “동교동은 한의원 중심으로 똘똘 뭉치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구질서를 유지하려는 측과 신질서를 만들려는 움직임 사이에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보인다. 한의원의 진군나팔은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상황으로 비유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충돌이 사생결단의 대결로 이어질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권고문이 최고위원 경선 출마를 포기함에 따라 일단 정면대결을 피해 놓았기 때문이다.
권고문과 한의원의 애증관계는 30여년 전으로 돌아간다.
알다시피 동교동은 권노갑 고문, 김옥두·한화갑 의원의 3인방 체제다. 권고문이 나이에서 앞서고 동교동 합류시점이 다소 이르긴 하지만 권고문 스스로 세 사람을 ‘동교동 1세대’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도 권고문측은 서열이 매겨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딱히 상하관계를 따질 수 없다는 게 한의원 측근들의 설명이다.
‘장형’권노갑, ‘넘버3’ 한화갑
동교동에서 일을 시작한 시점으로 보면 권고문은 63년, 김의원은 65년, 한의원은 67년 무렵이다.
같은 1세대지만 합류시점상 한의원은 ‘넘버3’이다. 권고문과 김의원이 한의원의 독자노선에 끊임없이 제동을 거는 것도 넘버3이 ‘큰 형님’을 제치고 조직을 장악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감정적 반발기류’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권고문과 한의원은 김대통령에게 합류한 뒤 직책, 업무 성격 등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열혈청년이던 시절 김대통령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찾아간 점은 공통되지만, 권고문은 비교적 빨리 김대통령 측근이 된 반면 한의원은 외곽에서 김대통령을 지원하는 역을 맡았다.
권고문이 김대통령을 처음 찾아간 것은 60년 4·19혁명 직후였다. 김대통령은 당시 장면총리에 의해 민주당 대변인으로 발탁됐지만 이미 4번이나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상태였다.
권고문은 “내가 존경하는 김대중 선배를 반드시 국회에 보내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보탬이 될까 하여 ‘재경 목상동창회’를 조직하고 간사일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동창회 대표 자격으로 김대통령을 무작정 찾아가 선거사무원으로 활약했다. 다행히 김대통령은 그때 국회의원에 처음으로 당선됐다.
권고문은 선거 후에도 김대통령 캠프에 합류하지 않고 있다가 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때 다시 한번 김대통령의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6대 총선에서는 김대통령이 지역구를 옮겨 고향인 목포에서 출마했는데 권고문의 지원이 나름대로 힘을 발휘했다는 평가다. 권고문은 목포상고시절 복싱을 하며 인맥을 쌓았고, 목포여고 영어선생을 하며 목포 유지들과 인간관계를 맺을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목포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권고문은 선거 후 조길환 비서관과 함께 국회의원 비서로 등록하고 본격적으로 ‘비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내가 죽으면 다른 것은 다 놔두고 비석에 ‘김대중선생 비서실장’이라고 새겨주면 영광”이라는 권고문의 말은 이때 시작된 인연에서 비롯된다.
권고문은 특유의 친화력과 마당발로 단시일내에 김대통령의 측근이 됐다. 활동적이고 저돌적인 성향이 대권을 꿈꾸던 김대통령의 눈에 든 셈이다.
반면 한화갑 의원은 비교적 고생스러운 합류과정을 겪게 된다. 한의원은 67년 6·8선거(제7대총선) 때 김대통령 캠프에 합류했다.
6·8선거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DJ를 낙선시키려고 표적공천을 했으며 관권선거를 집중적으로 자행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박대통령은 체신부장관을 지낸 거물급 김병삼씨를 공천한 뒤 지방순시를 명분으로 목포에 내려와 지원연설을 하는 등 선거전을 과열시켰다. 박대통령이 부정선거를 해서라도 DJ를 낙선시키고 말 것이란 우려가 팽배했다.
이로인해 목포에는 ‘DJ를 살리자’는 움직임이 형성됐다. 목포의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 자발적으로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한의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의원은 DJ를 도와야 한다는 정의감이 발동해 선거전에 동참했으며, 이것이 인연의 출발점이었다.
동교동 3인방의 인연
당시 권고문과 한의원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김옥두의원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권노갑비서관은 각 지역의 동책들을 통해 시시각각 올라오는 제반 상황을 종합하여 대책을 마련했으며…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의 한화갑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선거운동원으로 뛰어들었다”고 적고 있다.
동교동 비서출신 모임인 인동회의 방대엽 회장(63년부터 DJ캠프에서 활동)은 한의원이 당시 비선에서 조직을 담당했던 엄창록씨 산하에 있었다고 기억했다. 한의원은 엄창록씨 산하에서 비공식적인 조직비서로 김대통령 활동을 도왔다. 말이 좋아 조직비서인지 맨땅에 기어다니는 식으로 고생을 했다. 담당지역은 경남이었으며 이때부터 쌓은 영남인맥이 한의원의 튼튼한 토대가 되고 있다.
한의원은 80년 계엄고등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동교동내 자신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김대중 선생과 인연을 맺은 이래 지금까지 그분 곁에서 말석을 지키고 있지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단 한번도 실망해본 적이 없다. 나는 결코 김대중 총재 밑에서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장 오랫동안 김총재 곁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은 갖고 있다.”
한의원의 저력은 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앞두고 드러났다.
유진산 총재 시절 김영삼 의원과 김대중 의원이 40대기수론을 내걸고 맞붙었는데 유진산 총재가 김영삼 의원 지지를 선언했으며 대의원 3분의 2가 YS에게 넘어간 것으로 분석돼 있었다. 하나마나한 선거였다. 하지만 김대중 진영은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결국 김대중후보는 458대 410으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승리를 거두고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여기서 놀랍게도 한의원은 경남 대의원 60% 이상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한의원은 71년 대통령선거에서도 경남에서 선거운동을 했다. 선거 후 한의원은 김대통령의 사조직인 내외문제연구소 정책전문위원으로 한등급 격상됐다. 물론 동교동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직에서 맴돌던 한의원은 유신 직후 김대통령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유신이 터지고 김대통령이 망명생활을 하게 되면서 동교동은 사실상 해체됐다. 모두들 생업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는데 유독 3인방만 남게 됐다. 이들은 매일 동교동으로 출근하면서 이희호 여사와 함께 김대통령이 없는 집을 지켰다.
언제 시련이 닥칠지 모를 엄중한 상황에서 서열보다는 동지애가 우선이었다. 권고문에 대한 호칭은 언제나 ‘노갑이 형’이었다. 이들은 역할분담을 한 뒤 나름의 활동을 벌였다. 권고문은 조직과 자금, 김의원은 총무 및 내부관리, 한의원은 공보업무를 맡았다. 권고문과 한의원이 함께 일을 하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각각 다른 파트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출신으로 영어를 할 줄 알았던 한의원은 외신기자들을 집중적으로 만났고 이는 외교인맥을 쌓는 기회로 작용했다. 하지만 권고문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는 직책이었다. 한의원은 그때까지 겨우 ‘외곽조직관리-정책-공보 업무’ 등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한의원은 김대통령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야당시절 “나는 김대중 선생님에게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는 말을 측근들에게 자주 해왔다고 한다. “내가 좋아 지근거리에서 모실 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희호 여사가 끔찍이 아끼는 한의원
한의원은 지금도 김대통령을 대단히 어려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의원은 비서들에게 “김대통령을 만나면 지금도 떨린다. 정동영이나 김한길 같은 사람이 DJ에게 거리낌없이 말하는 것을 보면 부럽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는 것이다.
물론 김대통령은 동교동 3인방을 한결같이 아꼈다. 그러나 한의원의 직책 소외는 계속됐다.
한의원은 78, 79, 80년에 3차례 구속된 뒤 81년 출옥했다. 그리고 85년 김총재가 귀국했을 때 정책전문위원이 됐으며 85년 독일유학길에 오르면서 보좌역 타이틀을 받았다. 86년 민주인권연구회 조사연구실장으로 일하다가 87년 특별보좌역이 됐다. 87년 대선 때는 선거대책본부 상담실장으로 일했다. 이것이 90년대 국회의원 당선 전까지 한의원이 가졌던 직책의 거의 전부다.
한의원은 최근까지도 비서실장 한번 해보지 못한 가신이다. 일부에서는 권고문이 한의원을 견제한 탓이라고도 본다. 권고문은 최근에도 “한의원은 당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입지만 살핀다”며 한의원의 정치적 야심에 대해 불쾌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희호여사는 한의원을 끔찍이 아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70~80년대 동교동에서 동고동락하면서 가장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이여사가 한의원을 지목했다는 추측이다.
95년 전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할 당시에도 한의원은 이여사에게 김대통령의 뜻을 물어봐달라고 부탁, “나가도 된대요”라는 이여사의 대답을 듣고 준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렵사리 DJ의 눈에 조금씩 들기 시작한 한의원과 달리 권고문은 80~90년대에 승승장구했다. 85년 총선에 나설 예정이었으나 김대통령의 만류로 그만뒀지만, 88년 13대 총선에서 동교동 가신 가운데 1순위로 금배지를 달았다.
당시 김대통령은 동교동 3인방에게 똑같은 기회를 줬다. 권고문에게 목포 출마를, 김옥두 총장에게 전국구를, 한화갑 의원에게는 신안 출마를 권했다. 그러나 한의원과 김총장은 78년 받은 실형으로 피선거권이 없다는 선관위의 유권해석에 따라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한의원의 한 측근은 “김대통령이 13대 국회에서 권고문을 조직에, 한의원을 대외교섭에 기용해 쌍두마차 체제를 형성하려 했다”며 “그러나 한의원이 13대에 진출하지 못한 것이 권고문과 격차를 벌여 놓았으며 그 공백을 메운 게 한광옥씨였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한의원이 13대에 진출했더라면 그때 벌써 동교동은 양갑체제로 갔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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