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가 통신감청용 정찰기 도입사업(일명 백두사업)에서 성능 미달 장비를 선정한데다 무기중개상의 로비 사실이 드러나 군 수사당국이 전면수사를 벌이고 있다.
국방부는 통신감청용 정찰기들이 군의 요구성능에 미달된다는 지적에 대해 지난 8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 전문가들을 투입해 전면 재평가작업을 벌여 일부 문제점을 발견, 성능을 보완하도록 미국측과 협상을 벌이고 있다.
군 수사당국은 14일 미국 무기중개업체 IMCL사로부터 돈을 받고 백두사업 관련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모정보부대 1급 군무원 권기대(예비역 육군 준장)씨를 구속한 데 이어 전·현직 군 고위관계자들이 IMCL 미국 본사 회장 린다 김(한국명 김귀옥·46·여) 등으로부터 로비를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이에 앞서 국군 기무사는 지난달 28일 백두사업 추진 과정에 무기중개상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군사기밀을 유출한 백두사업 주미연락단장 이화수(50) 공군 대령 등 영관장교 4명과 IMCL사 관계자 2명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국방부는 오는 20일 방한하는 미국측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사업을 전면 재검토할 방침이다.”
이상은 1998년 10월14일자 한 일간지 기사다. 당시 약 두 달 가까이 진행된 기무사 및 군검찰의 수사는 로비스트 린다 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 사건 여파로 린다 김이 회장을 맡고 있는 무기중개업체 IMCL 한국 지사는 쑥밭이 됐다. 서울 강남에 있던 사무실엔 기무사와 군검찰 수사요원들이 들이닥쳐 압수수색을 벌였다. 이어 사장과 부사장이 린다 김에게 군사기밀을 넘긴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이 사건과 관련돼 구속된 사람은 모두 7명. 현역 장교가 이화수 대령을 비롯해 4명, 군무원이 1명, 그리고 민간인이 2명이었다. 주인공인 린다 김은 운 좋게도(?) 미국에 있었기에 화를 면했다. 서울지검은 그녀를 기소중지자 명단에 올렸다.
백두 찬성파 vs 반대파
백두사업 관련 로비 여부를 파헤친다며 자못 거창하게 시작한 기무사와 군검찰 수사는 그러나 변죽만 울린 채 막을 내렸다. 관심을 모았던 정치권 및 전·현직 군 고위관계자들에 대한 린다 김의 로비 실태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그나마 구속된 사람들도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7명 중 이화수 대령을 비롯한 현역 장교 4명은 기소유예 또는 선고유예로 모두 풀려났다. 백두사업 운용부대인 OO부대의 체계관리단장으로 사실상 백두사업을 총괄관리했던 권기대씨는 공군 준장 출신인 IMCL 사장 신동윤씨와 더불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유일하게 실형 선고(징역 1년)를 받은 사람은 IMCL 이사 김장환씨. 그러나 김씨마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왜 이런 ‘허망한’ 결과가 나왔는가. 한마디로 수사가 졸속으로 진행된 탓이다. 이는 당시 수사관계자들의 증언으로도 확인된다. 기무사는 왜 그토록 섣부르고 무리한 수사를 벌여야 했을까. 기무사 수사자료를 넘겨받은 군검찰이 더 이상 수사를 진전시키거나 확대시키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린다 김이 수사망에서 빠져나간 건 우연이었나 봐주기였나.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기무사 수사의 배경을 살피는 것은 린다 김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 수사는 백두사업과 린다 김의 관계를 공론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잖아도 그해 들어 운용부대 내부의 이견 노출과 감사원 감사, 국방부 특별평가단의 평가를 통해 적지 않은 문제점을 드러낸 백두사업은 이 수사를 계기로 의혹 투성이 사업으로 낙인찍혔다. 검은 로비가 작용한 부실 덩어리 사업. 이것이 당시 백두사업에 씌워진 굴레다.
수사는 의도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백두사업 진행에 큰 타격을 입힌 것이다. 당시 군내에선 잇따라 드러나는 백두사업의 문제점을 두고 사업 찬성여론과 반대여론이 엇갈리고 있었다. 백두사업 운용부대인 OO부대도 사정은 비슷했다. 대북정보수집이 주요 임무인 이 부대의 백두사업팀 관계자들은 사업 진행과 관련해 심각한 내부 갈등을 겪고 있었다.
구속된 군 관계자 5명은, 굳이 구분하자면 하나같이 찬성파, 곧 문제점을 개선해서라도 백두사업을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반면 이 부대 부대장을 비롯한 반대파들은 사업 자체의 효용성을 문제삼는, 말하자면 백두사업의 필요성과 가치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갈등 속에 느닷없이(?) 진행된 기무사 수사는 백두사업 찬성파들을 움츠러들게 했다.
이런 정황은 당시 수사의 초점이 린다 김의 로비 여부가 아니라 백두사업 자체에 맞춰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기무사 수사의 성격을 이른바 자주국방론자와 연합방위론자 또는 용미파(用美派)의 충돌로 보는 견해다. 그 배경엔 백두사업은 한국군의 독자적인 정보수집력 확보를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은 미국의 정보종속국이다. 미국이 정보를 주지 않으면 한국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백두사업은 자주국방론자들에겐 한국군의 정보자주화를 이루는 데 절실한 사업으로 비칠 만했다.
국회 국방위 관계자 K씨는 “당시 군 안팎에서 백두사업을 반대하던 세력 중엔 전통적인 친미주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많다”고 주장한다. K씨에 따르면 그들은 “정보는 한·미연합자산을 활용하면 된다” “한국이 자주정보력을 가지면 한·미관계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등의 명분을 내세워 ‘백두 무력화’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1998년 기무사 수사에 숨은 뜻은 자주국방론자들에 대한 연합방위론자들의 공격이다.
또다른 국방위 관계자 B씨도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다. 한국군의 무기체계는 전통적으로 지상군 중심으로 운용돼왔다. 그런데 정보수집의 귀(신호정보)와 눈(영상정보)에 해당하는 백두·금강사업은 그 범주에서 벗어난 사업으로 지상군, 곧 육군 중심 무기체계를 선호하는 세력으로부터 심한 견제를 당했다는 게 B씨 주장의 골자. 그에 따르면 독자적인 정보수집력을 원했던 자주국방론자와 그에 반대한 연합방위론자의 충돌이 극명히 드러난 게 바로 1998년 기무사 수사다. 그리고 그 분쟁의 불길에 부채질을 한 사람이 바로 린다 김이라는 것.
누구보다도 백두사업 진행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는 권기대씨에 따르면 백두사업 운용부대인 OO부대가 당시 백두사업을 둘러싸고 내분에 빠진 것은 사실이다. 1997년 하반기 권씨를 비롯한 사업 실무자들의 반대로 한차례 홍역을 치른 백두사업은 이듬해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그해 4월 OO부대의 부대장으로 부임한 P소장은 전통적인 용미론자였다. 그는 백두사업의 가치와 효용성을 철저히 부정했다.
린다 김은 ‘신동아’ 6월호 인터뷰에서 그를 가리켜 “기무사 출신으로 비행기의 비자도 모르는 사람” “무기 구매에 대해 전혀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린다 김에 따르면 P소장은 백두사업의 부정적 측면만 부각시켜 국방부에 사업중단을 지속적으로 건의했다.
린다 김의 주장은 사실에 가깝다. 국회 국방위 관계자들과 권기대씨에 따르면 기무사에서 잔뼈가 굵은 P소장은 백두사업을 중단시키려 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미군의 정찰기가 있으므로 한국군의 독자적인 항공정보수집이 불필요하다는 점. 둘째, 성능에 문제가 많다는 점. 셋째, IMF상황이니만큼 달러를 아끼자는 것. 운용부대의 책임자가 이렇듯 강력히 반대하자 국방부는 사업을 계속 추진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가 됐다. 사업자 선정이 확정된 1996년 이후 매년 일정액의 돈이 미국측에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P소장의 ‘소신’ 덕분에 국내사업단과 주미사업단으로 나뉘어 있던 OO부대의 백두사업팀은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국내사업단에는 부대장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백두사업의 실효성에 회의를 품고 있었다. 반면 미국에 파견돼 있던 주미사업단은 백두사업을 계속 추진하려는 쪽이었다. 백두사업을 총괄 관리하는 위치에 있던 권기대씨도 주미사업단과 같은 의견이었다.
국방부의 백두사업 추진 방침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부대장 방침이 그렇다보니 대세는 주미사업단쪽에 불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권씨가 린다 김과 그 부하 직원으로부터 11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조사받기 한달 전인 1998년 8월엔 백두사업단장인 양택남 대령이 보직해임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국회 국방위 관계자 B씨는 OO부대 내부의 갈등과 알력이 기무사 수사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본다. 백두사업을 긍정적인 방향에서 추진하던 사람들은 보직이 변경되거나 구속됐다. 기무사 수사가 결과적으로 ‘백두 반대파’의 논리를 뒷받침한 셈이다.
린다김에 대한 통화 감청
그렇지만 요란만 떨었지 실속은 없는 수사였다. 주미사업단 소속 장교들의 군사기밀보호법 위반혐의는 매우 가벼운 것이었다. 그들은 구속만 됐을 뿐 법정에 서지는 않았다. 뇌물이나 향응 액수도 작았다. 기무사로부터 수사자료를 넘겨받은 군검찰 관계자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기무사와 달리 군검찰은 린다 김의 로비 여부를 밝히는 데 관심이 많았다. 군검찰 관계자 A씨의 증언.
“처음부터 무리한 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은 거창하게 했는데 나중에 흐지부지됐다. 기무쪽에서 일을 벌여놓고는 군검찰에 뒤치다꺼리를 맡긴 셈이다. 그렇다 보니 나중에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공소취소 기소유예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무죄로 떨어질 사안이 많았던 것이다. 당시 IMCL 부사장 이준영씨의 경우 기무사에서 검찰을 통해 몇 차례 영장을 청구했으나 기각당했다. 현역장교들의 군사기밀법 위반은 경미한 수준이었다. 권기대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군검찰은 린다 김을 조사해야만 이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린다 김이 국내에 들어올 때까지 내사만 하고 (정식 수사는) 미루자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 상황에선 관련자들에 대한 공소유지 자체가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기무사에서 그냥 밀어붙였다. 검찰관들은 기무사가 보강수사자료를 주지 않는 데 분개했다. 압수수색이나 계좌추적 자료도 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많았다. 기소 이후 검찰관들 사이에선 ‘군검찰을 바보로 만드는 것 아니냐’며 기무사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기무사가 린다 김을 추적한 것은 1996년 3월경부터. 백두사업 때문이라기보다는 동부전선 전자전사업 때문이었다. 당시 린다 김과 이양호 국방부장관은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백두사업 로비전에서 승리한 린다 김은 그 즈음엔 동부전선 전자전사업을 따내기 위해 이스라엘 IAI사의 로비스트로 뛰고 있었다. 린다 김에 대한 이장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이스라엘 장비는 뒤늦게 수주전에 참가했으면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장관이 그해 10월 수뢰죄로 구속된 후 이스라엘 장비는 후보군에서 아예 탈락했다.
그후에도 린다 김에 대한 기무사의 추적은 멈추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98년 군사법원의 영장전담판사였던 배아무개 변호사에 따르면 기무사는 그해 10월 백두사업 관련자들을 구속할 때까지 린다 김 주변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군검찰도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군검찰에 따르면 기무사는 약 2년 동안 린다 김에 대한 감청영장을 지속적으로 청구했다. 린다 김이 언제 국내에 들어와 어느 호텔 어느 방에 또 언제까지 묵을지 미리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 따라 기무사는 한꺼번에 몇 달치 감청영장을 청구해 받아놓곤 했다. 감청 결과 특별한 범죄 혐의가 드러나지 않는데도 영장청구가 계속되자 군판사가 제동을 걸기도 했다.
어쨌든 그토록 철저한 감시 덕분에 기무사는 린다 김의 행동반경을 손아귀에 넣고 있었다. 기무사의 통화감청은 한편으로 보면 린다 김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불법 요소가 강한 것이었다. 당시 기무사가 확보한 이양호 전장관과의 통화기록 중엔 지난 5월 언론을 통해 공개된 편지내용보다 더 ‘진한’ 애정 표현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장관은 린다 김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건넸다. 또 호텔방에서 새벽까지 같이 있었던 날 아침엔 “집에 잘 도착했느냐” “당신은 잘 잤느냐” 등의 인사를 주고받았다. 1997년 12월말 이 전장관이 집행유예로 출소하자 린다 김은 조카를 보내 양복지를 선물했다. 이런 사실은 모두 통화감청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감청기록 중엔 린다 김이 미국에 있는 딸과 국내 남자탤런트 L씨를 두고 주고받은 대화까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생활보호 측면에서 보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군정보기관인 기무사가 민간인의 통화를 이처럼 공공연히 감청한 점은 범죄 혐의를 떠나 한번쯤 짚어볼 일이다.
이화수 대령의 경우 린다 김이 묵고 있는 호텔에서 새벽에 나오는 모습이 기무사 요원의 사진기에 잡히기도 했다. 기무사는 이를 근거로 뒷날 그에게 린다 김과의 관계를 추궁했다. 이대령은 기무사 조사 당시 성관계를 시인했으나 군검찰에 가선 ‘강압에 의한 허위자백’이라며 부인했다. 물론 린다 김도 이를 부인하고 있다.
황명수 계좌추적 건의
어쨌든 당시 기무사 수사는 축소 의혹을 받고 있다. 군검찰 내에선 “왜 송사리만 잡아넣느냐” “장군들도 잡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지만 곧 묻혀버렸다. 백두사업 진행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윤종호 전 국방부 제2차관보(현재 도로공사 부사장)도 린다 김의 로비 대상자로 의심받았다. 군검찰이 백두사업의 진행과정을 조사하는 과정에 그의 이름이 등장했던 것. 군검찰은 윤씨가 회의석상에서 린다 김이 로비한 장비와 기종을 적극 지지하는 등 백두사업 사업자 선정 과정에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고 판단, 수사를 벌이려다 그만둔 것으로 전해진다. 군검찰 관계자의 증언.
“린다 김을 만난 것 자체는 죄가 될 수 없는 것 아니냐. 만약 기무사가 건들지 않은 부분을 군검찰이 건드렸다가 아무런 소득이 없다면 큰일 날 일 아닌가. 그런 이유로 수사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린다 김을 만났거나 린다 김이 로비한 장비와 기종이 선정되는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이는 소장급 이상 국방부 고위관계자들은 다 수사대상에서 빠졌다.”
현재 민주당 고문인 황명수 전의원이 당시 수사대상에서 빠진 사정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백두사업 사업자 선정 당시 국회 국방위원장이었던 황 전의원은 린다 김을 몇 차례 만난 외에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소개하는 등 린다 김의 로비를 도와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5월 황 전의원은 주간지 ‘내일신문’이 보도한 기무사 감청 내용으로 곤욕을 치렀다. ‘내일신문’에 따르면 기무사가 감청한 린다 김의 통화내용 중 “그 늙은이에게 1000만원 더 줘라”는 얘기가 있는데 그 늙은이로 지칭된 사람이 바로 황 전의원이라는 것. 이에 대해 황 전의원은 언론을 통해 “린다 김에게 돈을 받았다면 할복하겠다”며 강하게 부인했다. 린다 김도 “그런 통화를 한 적조차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신동아’가 최근 새롭게 확인한 증거에 따르면 린다 김이 그런 통화를 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1998년 10월 린다 김 수사에 관여했던 검찰관들은 그 통화기록을 두고 “왜 (황 전의원은) 조사하지 않냐. 계좌추적을 해야 한다”며 상부에 문제제기를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신동아’는 그와 관련한 군검찰 관계자의 증언을 확보했다. 그에 따르면 린다 김이 전화로 비서에게 그런 얘기를 한 것은 황 전의원과 통화한 직후라는 것.
이에 대해 황 전의원은 강력히 부인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린다 김과 관련해 확인할 게 있다.
“확인할 게 없다.”
―당시 군검찰에서 황 전의원을 조사하려 한 사실을 알고 있나.
“전혀 조사한 바가 없다. 군검찰에서 나를 부르거나 (린다 김에 관해) 물어본 적도 없다.”
―기무사가 확보한 린다 김 통화내용 중 “그 늙은이에게 1000만원만 더 줘라”는 얘기가 있는데, ‘그 늙은이’가 바로 황 전의원이라고 한다.
“사실무근이다. 전혀 아니다. 받으면 몇 억을 받지, 겨우 1000만원을 받겠나. 그런 사실 없다. 말도 안 되지.”
―기무사가 수사에 착수할 무렵 국민신당에서 국민회의로 당적을 옮겼는데….
“국민신당 사람들이 국민회의로 한꺼번에 옮길 때 같이 움직인 것뿐이다. 누가 자꾸 그런 엉터리 얘기를 하나.”
―군검찰 관계자의 증언이 있다.
“그놈 데리고 오라.”
―린다 김을 만난 건 사실 아닌가.
“국방부장관(이양호)에게 ‘나라에 이익이 되고 성능이 좋은 장비라면 한번 검토해 보라’고 린다 김을 소개해준 일밖에 없다. 이 황명수의 인격을 그렇게밖에 보지 않나.”
국민신당 고문이었던 황 전의원은 1998년 9월 이인제 국민신당 고문, 이만섭 국민신당 총재와 나란히 국민회의로 당적을 옮겼다. 그가 맡은 직책은 부총재. 그의 말마따나 당적 이탈과 군검찰 수사시기는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집권여당의 부총재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을 정황만으로, 더욱이 주인공인 린다 김의 진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조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무사 수사의 목적이 린다 김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백두사업을 치려는 것이었다면 기무사가 넘겨준 수사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군검찰의 수사방향은 뻔한 것이었다. 군검찰은 수사를 확대할 만한 어떠한 증거도 가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확보할 여건도 안 됐다.
국방부 주변에선 기무사 수사를 정권교체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백두사업은 지난 정권, 곧 문민정권 시절 진행된 사업이다. 정권이 바뀌면 과거 정권에서 벌인 사업들이 도마에 오르게 마련이다. 2400억원이 넘는 대형 사업, 그것도 전통적으로 비리 소지가 많은 무기도입사업은 새 정권이 개혁성을 과시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호재’다.
희생양 만들기
기무사는 이미 1996년부터 린다 김의 통화를 감청하는 한편 정치인 장관 군장성들을 만나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기무사가 린다 김의 로비 행태를 정권이 바뀐 다음에야 알게 됐다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시비 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것은 기무사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동부전선 전자전장비사업에 관한 린다 김의 로비가 진행되고 있을 때인 96년 여름 임재문 기무사령관은 이양호 국방부장관을 찾아가 린다 김과 만나는 데 대해 강하게 경고했다. 기무사는 어떤 이유에선지 YS 정권 시절엔 린다 김을 치고 싶어도 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의문은 린다 김의 정치권 로비 실태가 밝혀지면 자연스레 풀릴지 모른다.
그런가 하면 당시 기무사 수사를 그보다 3개월쯤 전 벌어진 OO부대 비리에 대한 수사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해 6월 합참 정보본부장 박현진 중장이 업무상 횡령 혐의로 기무사에 의해 구속된 사건이 있었다. 현역 중장이 비리로 구속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 박장군은 국방부로 오기 직전 부대장으로 근무한 부대에서 부대시설 및 장비 유지비 일부를 자신의 통장에 입급하는 방법으로 모두 1억5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았다.
그가 부대장으로 있던 부대가 바로 백두사업 운용부대인 OO부대였다. 당연히 백두사업은 그의 책임하에 진행됐다. 그는 후임자인 기무사 출신 P장군과는 달리 백두사업을 계속 진행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의 비리를 적발한 것은 기무사가 아니었다. OO부대 내부의 고발이었다. 말하자면 후임자가 전임자를 친 것이다. 그런 사정을 헤아리면 비리 혐의로 구속된 전임 부대장의 책임하에 진행된 백두사업이 기무사의 수사대상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한편 권기대씨의 시각은 또 다르다. 권씨는 당시 기무사 수사에 ‘공작’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공작엔 린다 김이 관련됐다고 본다. 권씨에 따르면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군내엔 린다 김을 보호해야 하는 세력이 있었으며 그 세력이 기무사에 영향을 끼쳐 수사가 적당선에서 끝나도록 했다는 것. 기무사가 린다 김이 미국에 있는 동안 수사를 밀어붙인 건 그녀를 봐주기 위한 것 아니었느냐는 의혹이다. 권씨의 주장을 좀더 들어보자.
“백두사업 운용부대의 부대장이 계속 문제를 삼고 감사원 감사에서 백두사업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국회에서도 시끄러워지자 ‘기무사는 그동안 뭐했냐’는 지적이 나올 만했다. 그 정도 선의 수사는 서로 좋은 일이었는지 모른다. 린다 김을 치는 척하면서도 실제론 봐준 것이며, 기무사 체면도 서고, 또 ‘백두 반대파’인 OO부대장 P장군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기무사 수사의 성격에 대해선 여러 가지 시각과 견해가 있다. 그것들은 서로 맞물리기도 하고 상반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그것은 당시 수사가 린다 김 사건의 핵심을 짚지 못했으며 그 결과 희생양을 만들었을 개연성이 크다는 점이다. 부적절한 로비실태를 파헤치기엔 부적절한 수사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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