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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年 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少年 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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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9월22일 김정일이 7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가 급사했다. “북한의 고위간부들 사이에 잘 알려진 소문은 김정숙이 6번째 아기를 출산하던 중 난산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한국에 망명한 고영환은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6번째 아이’는 분명 잘못이며 ‘5번째 아이’가 맞다. 그러나 김정숙이 병사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 이유는 나중에 김일성의 후처가 되는 김성애의 존재 때문이다. 김일성과 김성애의 관계에 대해서 고영환은 김일성 부자와 친했던 여자 빨치산이었던 황순희(현재 북한 혁명박물관 관장)로부터 1970년대 초에 들었다고 하는 귀중한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6·25전쟁이 시작한 해인) 1950년 늦가을부터 겨울까지는 무척 추웠고, 제일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최고사령부의 퇴각 행렬에 섞여 자강도의 강계, 만포까지 후퇴했습니다. 먹을 것도 없었고 목욕도 못했기 때문에 이가 몸 속을 돌아다녔습니다. 최고사령관 동지(김일성)도 이 때문에 가려워서 어쩔 줄 몰라 했기 때문에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때 그(김일성)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던 것이 김성애라는 여자였습니다.

김성애는 당시 최고사령부 기술서기, 즉 최고사령관의 기술서기였지만, 김일성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온 우리들보다 김일성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김일성의 식사 준비와 의복에도 신경을 써서 김일성이 가려워하는 것을 보면 깨끗한 손수건을 김일성의 옷 속에 넣어드리곤 했습니다. 이가 손수건에 모이면 꺼내서 불에 태운 뒤 다시 손수건을 넣어드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고영환은 “두 사람의 관계가 이미 전쟁 전부터 시작된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고 쓰고 있다. 김일성 곁에 있었던 홍순관은 다음과 같이 김정숙의 죽음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나처럼 숙청을 피해 중국에 망명한 전 북한간부 일부는 김정숙이 세번째 아기를 출산하는 도중에 난산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북한의 의료수준은 그렇게 형편없지 않았으며, 중앙간부를 진찰하는 평양중앙병원 전문의들은 절대로 김일성의 처를 난산으로 죽게 할 만큼 무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이며 김일성의 경력을 밝히는 데 일생을 바친 이명영은 저서 ‘네 명의 김일성’에서 김정숙의 사망원인에 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 평양에서 유명한 의사였던 조진석 박사와 장기려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숙은 북한의 고급간부들만 진찰받는 특별병원 산부인과 과장 황명곤 박사 밑에 있던 허신 박사에게 진찰을 받았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전치태반(자궁 외 임신)이라는 것은 조금만 늦어도 살릴 수 없는데 김정숙이 바로 그 경우였다고 한다.”

홍순관의 수기에서 김정숙의 장례식은 사망 이틀 후인 9월24일로 돼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총련 총연합회 편 ‘김정일 약전’(웅산각, 95년 발행) 및 김남진 저 ‘김정일·그 지도자상’(웅산각, 96년 발행)의 김정일 활동 연표에 의하면, 김정숙의 사망일은 9월22일이 아니라 장례식이 행해진 9월24일로 돼 있다.

한 책에만 그렇게 표기돼 있으면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두 책 모두 사망일이 변경돼 있는 것은 무언가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그렇지 않다면 김정일 생모의 사망일을 틀리게 쓴 ‘불경죄’로 조총련 관계자는 다음 번 조국(북한)을 방문할 때 강제수용소에 갈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5. 발표되지 않은 학력

김정일은 초등학교시절, 매년 전학하고 있었다! 수많은 김정일 전기는 기묘할 정도로 의무교육 시기 및 그의 학력에 관해서 특히 모호하게 기술하고 있다.

① 삼석인민학교(초등학교)를 한참 다닌 후 평양 제4인민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최인수 저 ‘인민의 지도자’).

② 삼석인민학교를 다니다가 전후(戰後)에는 평양 제4인민학교 및 평양 제1중학교에서, 다음은 남산고등중학교에서 배웠다(김강일 등 공저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③ 전쟁 중에는 만경대 혁명 유자녀학원을 다니고, 정전 후에 평양 제4인민학교, 평양 제1중학교에 입학했다(김강일 저 ‘김정일 지도자’).

이들 기술에서는 입학년도 및 전학 연도가 불명확하다. 전·입학 연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은 1980년대 중반에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재일본 조선청년동맹 편집의 ‘시대와 리더, 젊은 지도자 김정일 서기’라는 소책자밖에 없다.

“1945년에 조국이 해방되자, 김정숙 여사와 함께 조국의 흙을 밟고 1950년 9월부터 54년 8월까지 인민학교에서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54년 9월부터 57년 8월까지 평양 제1중학교에서 공부를 하시고 동 학교를 졸업하신 후 57년 9월부터 60년 8월까지 남산고급중학교에서 공부에 열중하셨습니다.”

일본에서 발행된 이 소책자에는 북한측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김정일이 김정숙과 함께 조국의 땅을 밟고”라고 명확히 쓰여 있어 흥미진진하다.

고영환은 ‘망명 고관이 본 김정일’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김정일)는 1949년 9월에 평양 남산인민학교에 입학했다. 전쟁 중 후퇴가 시작되자 1950년 10월 자강도에 있는 장가산 인민학교로 옮겼다. 오늘날 장가산은 ‘장가산 혁명사적지’가 건립돼 성지로 돼 있다.”

이 장가산은 ‘장자산(將子山)’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전술한 소책자에 나온 연도와 달을 합쳐서 생각해보면 김정일은 전쟁중에 자강도 장강부에 있는 장자산 인민학교에 다닌 것으로 된다. 장자산 인민학교는 전쟁중 김일성이 ‘일시적인 전략적 후퇴’를 했던 자강도 강계시 근처에 있다. 그러나 유엔군이 근처까지 북상함에 따라 김정일은 국경을 넘어 중국 길림성으로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하이에서 발행된 ‘당대국제인물사전’에 “김정일은 51년에서 53년까지 중국동북부의 길림학원에 피신해 있었다”고 돼 있지만, 북한은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중국이 참전해 유엔군을 한반도 남부로 다시 밀어낸 다음, 김정일은 1952년 길림성에서 귀국해서 “11월22일 후방에 가설된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 인민반 4학년에 편입”(‘김정일 서기, 그 사람과 업적’)하여, 다음해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 제1기생으로 졸업하고 있다.

“1953년 8월 전쟁이 끝나자 김정일은 평양시 삼석구역에 있는 삼석인민학교로 전학했다. 휴전협상으로 38도선이 그어지자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군 최고사령부는 정전할 때까지 평양시 삼석구역에 머물렀기 때문에 김정일은 삼석 인민학교에 편입한 것이다. 오늘날 북한 고관 중에는 삼석인민학교 출신이 적지 않다.”

고영환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러한 기술에 다른 정보를 합쳐 보면, 김정일은 초등학교 시절 매년 전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54년 6월에 평양 제4 인민학교를 졸업했다고 생각되는데, 기록은 없다.

6. ‘독일 유학’에 얽힌 오해

한국인 오기환의 ‘김정일 스토리’에는 “(김정일은) 1958년 8월 남산학교 고등반 졸업과 동시에 동독의 항공군관학교에 유학했지만 2년 중퇴 후 북한에 돌아왔다”는 경력이 있다. 또 동베를린의 훔볼트 대학에 유학했다는 정보도 있다. 그러나 나는 김정일의 경력을 조사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 그가 훔볼트 대학에 유학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훔볼트 대학 조선연구소의 홀마 프로흐로스 박사는 북한에 유학한 경험도 있는 북한통인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일의 동생 영일이 1980년부터 4년간 훔볼트대학에 유학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전자공학부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영일의 독일어 스펠링이 ‘JONG IL’이어서, 영어발음으로는 정일이 됩니다. 이 철자를 보고서 김정일이 훔볼트 대학에 유학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전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구동독의 공군사관학교는 동부의 카멘츠에 있지만, 그 곳에 김정일이 유학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1959년 김정일이 사회주의권 나라들을 여행하던 중인 1월27일에 모스크바 대학을 방문했을 때 유학을 제의받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대학명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공식 전기에도 등장한다. 김정일은 그 제의를 거절하고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하겠다고 답했다고 하는데, 소련 유학을 싫어한 진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가 대학 시절에 유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등학교(남산고급중학교) 시절에 유학했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조선의 지도자 김정일’이라는 전기에 남산고급중학교 시절의 학력이 빠져 있는 것은 유학문제와 어떤 관련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정일은 60년 9월1일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 64년 3월18일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군의 위치와 역할’이라는 제목의 졸업논문을 제출하고 3월30일 졸업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 대학은 5년제였다고 하며, 김정일이 대학 2년에 편입했다는 설도 있어 대학입학 연도는 수수께끼다.

7. 몇 번 안 되는 외국체험

김정일이 태어난 고향 러시아로부터 귀국한 후 처음으로 외국을 방문한 곳은 전쟁 때문에 피란했던 중국(길림성)이었다. 중국에 약 1년 체재했다고 생각되지만, 당시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최초의 외유는 아버지와 동행해 소련의 혁명기념행사(57년 11월7일)를 본 남산고급중학교 1학년 때 일이다.

“러시아혁명 40주년에 아버지를 따라 모스크바에 갔을 때, 그는 15세였다. 대사관에서 ‘재미있는 영화 없어요?’라고 하는 등 꽤 거만하게 굴었다.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와는 달리 논리를 세워 이야기하는 것에는 약하다. 국가의 지도자 그릇은 아니다.”

6·25 당시 인민군 소좌로 서울 점령부대의 정치장교를 지냈고, 1950년 후반 소련으로 망명해 국제고려인협회 고문을 지낸 고(故) 허진은 일본 신문 ‘마이니치’(1994년 7월23일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정일의 해외 체험은 사회주의권 국가방문(또는 고교시절의 유학) 이외에는 65년 인도네시아 방문(4월9∼21일) 및 83년 중국 극비 방문(6월1∼13일) 정도만 알려져 있다. 파리의 ‘크레이지 호스’를 극비리에 방문한 일이 있다는 소문도 들리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런 행동을 했다면 아마도 70년대였을 것이며, 80년대에 공식장소에 등장하면서부터는 그러기가 어려웠으리라고 생각된다.

신동아 2000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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