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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통일 드라마의 연출가 임동원 국정원장

DJ 통일 드라마의 연출가 임동원 국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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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7일(토) BH(Blue House;청와대) 여야 영수회담 배석 ▲6월19일(월) BH 언론사 사장단 초청 만찬 브리핑 ▲6월20일(화) BH 국무회의 배석 ▲6월21일(수) BH 주례 업무보고 ▲6월22일(목) 국회 정보위 출석 ▲6월23일(금) BH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초청 오찬 배석 및 1급 부서장 인사안 결재 보고….

언뜻 보면 청와대 비서실장 일정표 같다. 물론 아니다. 비서실장이 국회 정보위에 출석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바로 ‘대통령특별보좌역’으로 평양에서 열린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6월13~15일)을 성공리에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직후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한 임동원(林東源) 국가정보원장의 동선(動線)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측근에서 대통령을 보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느라 국정원 1급 부서장 인사도 6월23일에야 단행되었다.

국정원의 정기 인사는 6월과 12월 두 번이다. 공무원 인사규정에 따라 6월과 12월에 퇴임하는 직원들이 생겨 그때 인사 요인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원래의 규정대로라면 6월1일 정기인사를 했어야 한다. 더구나 대공정책실장, 대공수사국장, 대북공작국장, 정보관리국장 등 무려 4명의 부서장이 승진, 퇴임, 신병을 이유로 길게는 몇 달째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임동원 국정원장은 이미 오래 전에 6월 정기인사를 정상회담 이후로 미뤄놓았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번 정상회담 자체가 전적으로 대북전략국을 중심으로 한 국정원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DJ가 삼고초려로 얻은 백만 원군



99년 12월23일 당시 임동원 통일부 장관이 ‘설화(舌禍)’로 물러난 천용택 국정원장의 후임으로 임명되었을 때 정치권은 매우 의아해 했다. 왜 하필 임동원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4월 총선이 넉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하필이면 현 정권하에서 가장 비정치적인 인물을 가장 정치적인 자리(국정원장)에 임명한 DJ의 의중이 과연 뭔가 하는 물음이었다.

청와대 주변에서는 김대중 대통령(DJ)이 그를 발탁한 배경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그가 통일-외교-안보 세 분야를 두루 섭렵한 전문가라는 점. 둘째는 신중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로 조직 장악력이 뛰어나다는 점. 셋째는 정치적 야망이 없어 야당의 정치 개입 시비로부터 자유롭다는 점.

그러나 정작 DJ가 임장관을 국정원장으로 중용한 것은 인간적 신뢰감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사실 임원장은 DJ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우선 그는 빈틈없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인데다 신중하고 합리적이며 정치적 야욕이 없다.

그의 배경도 DJ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요인이다. 역대 선거에서 DJ에 대해 뿌리깊은 적대감을 보여왔던 이북(평북 위원) 출신인데다 한때 DJ에 대한 공개적 ‘비토 세력’이었던 군(육사 13기) 출신이다.

군 출신이지만 그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수학했으며, 나이지리아·호주 대사 등을 역임해 외교관으로서 국제적인 안목을 가졌다. 또,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통일부 차관을 거치면서 외교·안보·통일 3박자 감각을 두루 갖춘 흔치 않은 인물이다. 이 정도 출신과 배경이라면 으레 북한에 대한 극우적인 시각을 가질 만도 한데 그는 묘하게도 DJ와 같은 ‘비둘기과’였다.

그런데 놀랄 만한 사실은 DJ와 임동원 국정원장의 관계는 5년 남짓밖에 안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임원장의 어떤 면모가 DJ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95년 1월 당시 DJ는 92년 대통령선거에서 실패한 뒤 떠났던 영국 유학생활에서 돌아와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임원장 또한 93년 3월 김영삼(金泳三) 정부 출범과 함께 통일원차관에서 물러나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으로 일하며 35년 남짓했던 공직 생활을 조용히 마무리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다음은 임원장의 40년 지기인 박택규 교수(전 건국대 도서관장)가 들려준 DJ와 임동원의 첫 만남에 얽힌 일화다.

“1월 어느 날 임원장은 당시 영국에서 돌아온 김이사장으로부터 ‘한번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DJ는 세 차례나 사람을 보내 만나자고 했지만 임원장은 한사코 피했다. 그러다 결국 김이사장을 만나게 되었고 DJ는 처음 만난 임원장에게 ‘재단 사무총장을 맡아 곁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다. 하지만 임원장은 김이사장의 제의에 선뜻 응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 자신이 뿌리깊은 DJ ‘비토세력’ 집단인 군과 실향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원장은 당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그 뒤에 DJ는 세 차례나 임원장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화를 거듭할수록 임원장은 DJ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이 통일과 안보를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DJ는 더 임원장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자신감을 가진 DJ는 95년 1월 임동원 전 통일부차관이 아태재단 2대 사무총장에 내정되었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표함으로써 그의 퇴로를 막아버렸다. 결국 고민 끝에 임원장은 아태재단에 합류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지금이야 DJ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혁명적 결단’이었다.

그 뒤로 임원장은 2월1일 아태재단 사무총장에 취임했고 봄에 김대중-이희호 부부가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임동원 사무총장-장행훈 기획조정실장 환영 리셉션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김이사장은 임총장을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책임감 강한 공무원’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인품의 소유자’ ‘남북통일문제 전문가’ 등으로 소개하며 ‘민족에게 통일 비전을 제시한 행동하는 양심’인 임차관(전 통일원차관)이 오심으로써 자신이 관심을 기울여온 남북 통일문제에서 백만 원군(援軍)을 얻었다고 극찬을 했다.”

군(軍)·이북 출신의 DJ 비토세력 설득

군(軍)-이북 출신 집단에서는 당시 임원장이 DJ 캠프에 가담한 것 자체가 ‘사건’이었다. 심지어 임원장 주변에는 DJ가 대통령이 되면 “이민 가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긴 DJ도 그런 말을 많이 들어 가슴에 맺혔기 때문인지 99년 1월 외환 위기 극복 후 신년사에서 “그런(이민 가겠다) 말 하신 분들이 있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임동원 사무총장의 존재는 군과 실향민 집단의 DJ에 대한 거부감을 상당히 완화해주었다. 역시 같은 실향민인 박택규 교수의 말이다.

“97년 대선(大選) 직전에 이북 5도민회가 내는 ‘월간 동화’에서 대통령 후보를 소개하는 특집을 실었는데 당시 임동원 사무총장이 ‘김대중 후보는 이런 사람이다’는 글을 썼고 이회창 후보에 대해서는 박성범 의원이 썼다. 그런데 그 글을 보고 결판이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공 보수주의자인 자신이 왜 DJ를 지지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반공 보수세력의 거부감으로 DJ가 또 다시 선거에서 실패하면 그 사람들은 나중에 DJ에 대한 빚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쓴 글이었다. 그때 적어도 이 글을 읽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이북 출신 상당수의 마음이 움직일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역대 선거에서 DJ가 받은 실향민 표가 2%쯤이었다면 지난 대선에서는 20%쯤 얻었고, 거기에는 임동원이란 인물을 끌어들인 덕이 컸다.”

실제로 임원장은 아태재단 사무총장을 맡고 나서 군 선후배와 실향민 단체들을 오가며 자신이 ‘DJ 편에 선 이유’를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이들을 설득했다. 당시 임동원 사무총장이 ‘월간 동화’에 DJ를 어떻게 소개했는지 보자.

임총장은 85년부터 10여년간 ‘뉴스위크’ 도쿄 특파원을 지낸 버나드 크리셔가 96년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DJ와 YS(김영삼) 중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한국에 더 도움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저는 김대중씨가 죽고 나면 그때 가서야 한국인들이 김대중씨에게 정말로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를 위해 DJ를 활용하자”

“김대중 총재는 지난날 5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년 감옥생활, 10년 연금 및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민주통일의 신념을 굳건히 지키며 ‘행동하는 양심’으로 헌신해왔다. 크리셔씨가 아쉬워하는 대목은 그가 죽은 후에 ‘큰 빚’을 졌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미 때가 늦으니, 살아 있을 때 그를 ‘활용’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국가를 위한 DJ 활용론’이었다. 임원장은 이어 당시 ‘신동아’(97년 7월호)가 여야 대선 후보에게 7개 분야별 정책현안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묻는 정책설문조사에서 사계 전문가들로부터 DJ가 최고학점(A학점)을 받은 사실과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공동으로 실시한 국정 수행능력 여론조사(97년 8월1일자)에서도 DJ가 경제-안보문제, 남북관계, 리더십 등에서 이회창 후보를 ‘더블 스코어’로 압도한 사실을 제시하고 실향민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이런 각종 여론조사 수치는 무엇을 말하는가. 김대중 후보가 국정 운영능력이나 자질면에서 월등하다는 국민 여론을 반영한다. 그런데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항목에서는 약간 다른 현상이 나타난다. 능력 있고 똑똑하고 경제를 살리고 평화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지도자가 틀림없는데도 표 찍기를 망설이거나 정계 은퇴 또는 사망한 후에야 큰 인물, 민주 지도자라고 생각한다면, 무엇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 아닐까.

얼마 전 이북 고향 친구들 모임에 나갔더니 화제가 온통 대통령후보 TV토론회에 집중되었다. ‘김대중후보가 자질이나 능력이나 뭐로 보든지 다른 후보들에 비해 뛰어난 대통령감이더군. 확실히 인물은 인물이야. 그런데 임장군, 그 사람 정말로 믿을 수 있는 거요? 빨갱이 아니라는 보장만 있다면 한 번 생각해볼 만 하더군.’ 여러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모아졌다.”

이어서 그는 육군사관학교에서 ‘공산주의 비판’과 ‘대공 전략론’을 강의했고, 합동참모본부와 육군본부에서 국가 안보정책과 군사전략을 다뤄온 자신이 아태평화재단에서 3년간 근무하면서 김대중 이사장과 외교·안보·통일문제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토론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40여년간 DJ가 쓴 논문과 연설문, 국회 발언록 등을 샅샅이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고 전제하고 “DJ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요, 합리적 보수주의자”라고 보증했다. 또 그가 내세운 것은 DJ야말로 북한을 다룰 줄 아는 지도자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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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당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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