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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소리 찾아가는 ‘바꿈질’의 즐거움

나만의 소리 찾아가는 ‘바꿈질’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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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디오는 생명체다. 자신만의 성격과 표정과 목소리를 가졌다. 그 각각의 만남에 따라 천변만화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음악에서 빠져나와 오디오 자체에 푹 잠기는 것은 그런 능동성 때문이다. 》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다 3층 높이에서 떨어져 척추뼈가 으깨진 가까운 후배에게 막 병문안을 다녀왔다. 시를 쓴다고 헤맨 끝에 문예창작과에 진학하더니 1년도 못 가 중퇴하고 다시 통계학과에 진학해 근근이 졸업하더니, 세월은 흘러 지금은 엉뚱하게 부동산 컨설턴트로 살아가는 괴짜다.

시인에서 부동산 중개인이라. 아무래도 어울리는 행로는 아니다. 그 와중에 언제 하늘은 날아다녔을까. 혹시 그의 패러글라이딩은 일종의 몸부림 같은 게 아닐까. 날자, 날자, 날아보자꾸나! 하면서 시심(詩心)의 나래를 펼쳐 하늘로 치솟다가 그만 꽈당 하고 부동산에 처박혀 허리를 부러뜨린 게 현실이렷다. 아파 죽겠다고 오금을 못 펴는 환자 앞에서 왜 그리도 키득키득 웃음만 나오던지. 예의상 “빨리 나아라” 한 마디 던지니 냉큼 돌아오는 답변인즉, “기럼요, 얼릉 나아서 또 날아야쥬….”

‘오디오론’을 펼치고자 기(氣)를 모으는 초입에 자꾸만 머리에서 후배의 부동산과 패러글라이딩이 떠나질 않는 게 아무래도 어떤 동병상련의 증세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 다들 뭔가 샛길로 빠져 킁킁대고 허우적거려야 견딜 수 있는 인생길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고 칭찬받는 길인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삽짝 지나 저 건너 샛길에 단봇짐 싼 순이가 손짓을 해댄다. 손짓하는 순이들이 많기도 하여라. 여행에 등산에 낚시에 영화에 춤에 노름에 하다못해 고주망태 주막강아지 노릇까지…. 하여간 교회나 절에 다니는 ‘취미생활’까지를 포함해서 호모 사피엔스의 지위를 지탱하기가 힘겨운 호모 히스테리쿠스들에게는 무언가 다른 ‘별짓’이 필요하다.

별짓, 집착, 마니아 파라디소



별짓할 때만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중독형 인생들. 그런 종족을 일본에서는 ‘오타쿠’라고 한다지. 우리는 ‘마니아’라는 표현을 쓰고. 요즘 들어 부쩍 마니아층에 대해 우호적인 관심이 늘어나는 걸로 보아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대중소멸론의 사회학이 현실로 오기는 오는 모양이다.

산업사회에서 출현한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인 인간군상인 대중. 지배 엘리트들에 의해 조작과 통제의 대상이 되는 이들 대중집단이 앞으로 점차 소멸해가고 특정한 전문성을 가진 소집단으로 분화된 방사형의 사회구성체를 이룰 거라는 게 그 전망인데, 요즘 도나 개나 한두 개쯤은 가입하는 각종 동호회 같은 게 그 전조일 것이다.

하긴 어느 분야에나 온갖 정보와 식견이 흘러 넘치는 판이니 제 아무리 둔중한 태백산맥형 인품잡이여도 문화충동을 아니 느낄 도리가 있겠는가. 삶의 무게가 견딜 수 없어서라도 샛길의 유혹에 빠져들게 되는 판국에 시대의 흐름까지 ‘삶의 질’ 추구라는 훈장을 달고 무슨 별짓이라도 하라며 등을 떠밀고 있으니 바야흐로 마니아 파라디소, 천국이 저들 마니아의 것이로다….

은밀과 비밀의 공유지점에 오디오가 있다.

이쯤해서 오디오로 건너가 보자. 먼저 비교 한 가지. 가령 텔레비전은 쉽다. 왜 쉬운가. 물론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 담긴 내용물이 쉬워서이기도 하겠지만, 텔레비전은 보고 듣고 읽고 등등 동원할 수 있는 감각이 풍부하다는 것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진짜 이유다. 다시 말해 오관의 기능을 많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일수록 이해가 빠르고 그만큼 쉬워진다는 이치다.

오디오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가운데 오로지 청각 한 가지만 사용할 수 있는 매체다. 그만큼 어렵다. 눈만 사용해야 하는 미술품처럼, 코로 결판내야 하는 향수처럼 활용할 수 있는 감각의 수가 적고 그에 대한 판단과 반응이 주관적일수록 집착과 노력은 배가되고 고급화하는 경향이 있다.

역시 주관적인 단정이지만 아무래도 인간의 감각 가운데 청각이 가장 모호하고 불명료한 기관인 것 같다. 여러 종의 오디오 기기 성능을 비교 판정할 때 소위 ‘블라인드 테스트’라고 해서 커튼으로 가려놓고 음악을 들어보는 경우가 많은데, 당대의 평론가라는 고수들도 자칫 헤매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은 걸로 보아 인간의 귀라는 게 그리 신통한 물건이 못 된다는 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막연하고 골 아픈 일을 즐기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먼저 전제할 것이 있다. 오디오에 몰두한다는 것은 음악을 애호하는 것과 부분적으로 겹치지만, 결국은 좀 다른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언어학에서 쓰는 말인 ‘시니피앙(기표)’과 ‘시니피에(기의)’의 차이를 염두에 두면 좋을 듯한데, 음악이 소리의 내용물, 즉 시니피에에 가깝듯이 오디오는 말의 물질적 부분인 시니피앙과 같아서 소리의 성분에 신경을 집중하는 장르다.

그러니까 인생을 빗대기도 해가며 건축물 같은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음악의 원대함보다는 훨씬 범위가 제한되고 ‘좀스러운’ 장르인 게 사실이다. 데면데면 듣자면 거기서 거기인 소리의 극미한 차이와 변화, 현미경적인 척도를 들이대야 파악되는 그 미소한 감흥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바로 ‘오디오질’이라는 것이다.

헌데 그 소리라는 놈이 요물이다.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따오기가 바로 사운드라는 마물인 것. 저역이네 중역이네 고역이네 터럭 같은 소리 한 낱을 화두로 삼아 좀스러운 집중에 집중을 거듭하다 멀쩡한 사람 미쳐돌기도 하고 우주의 기미(?)를 훔치기도 하는 것이다.

어쨌든 따오기와의 기쁨과 절망은 체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영역이다. 무쇠로 만든 스피커 스탠드의 빈 구멍 속에 모래를 한 짐 볶아 넣었더니 축 처졌던 저역이 탱글탱글 맺힌다거나, 3극관으로 파워앰프를 교체하니 사랑스러운 레베카 피존의 목소리가 분무기로 뿜어져 나오듯 아련한 스테이지감을 형성할 때의 묘미는 이웃사랑, 나라사랑 하듯이 널리 나눠 가질 수 있는 흔한 기쁨이 아니다.

반면 마냥 주관적일 것만 같은 소리에 대한 판단에 어떤 공통항과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한 것도 바로 그 은밀과 비밀의 체험에 공유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무척 많은 노력과 긴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 오랜 시간을 들이고 많은 노력을 해서 겨우겨우 깨달아 가는 감동, 그것의 깊이와 한없는 심연을 어찌 인스턴트 놀잇감들이 제공해 줄 수 있으랴.

거듭 말하지만 오디오에 몰두하는 것은 베개만한 두께의 고전명작 소설을 섭렵했을 때의 그 땀 밴 희열처럼 아무 대가 없는 노력과 고생의 소산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는 차원 높은(!) 기쁨인 것이다.

의자 위의 생

본격적으로 음반 모으고 오디오 바꿈질해온 게 근 20년 가까이 된다. 그 결과 약 7000장의 레코드와 3조의 오디오 시스템을 갖게 됐다. 스피커는 대략 서른 번쯤 바꾸었고 앰프도 프리, 파워의 교체횟수를 합치면 그 정도는 되는 것 같다.

20년의 날짜 수를 헤아린다면 레코드는 하루에 한 장 꼴로 산 셈이다. 확률적으로 한 100장을 뒤진 끝에 한 장의 레코드를 구입한다면 그동안 70만장의 레코드를 살펴보았을 것이고, 파트별로 오디오 시스템을 바꾼 횟수를 100회 정도로만 잡는다 해도 평균 두어 달에 한 번 꼴로는 무언가를 바꾸거나 구입한 셈이 된다.

‘석수의 삶은 돌을 깨트리고 채소 장수의 삶은 하루 종일 서 있다’고 시인 이성복은 썼는데, 그렇다면 나의 삶은 대학로 바로크 레코드점 한구석에 서 있거나 세운상가, 용산전자상가의 오디오숍을 서성이며 고스란히 지나갔다.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나의 삶은 레코드점과 오디오숍을 거쳐 집에 돌아와 앉은 의자 위에서 지나갔다. 의자 위의 생. 의자에 앉아, 의자에 들러붙어, 의자에 헝겊처럼 포개져, 마침내 의자가 되어 나의 생은 음악소리를 따라 흘러갔다.

존재의 심연을 가득 품은 시인으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의자가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나마 시인의 모자를 쓰게 만든 단 한 권의 시집도 어쩌다 음악을 멀리한 1년간이 있었던 덕택에 가능했다. 그 옛날 파종기의 풋풋한 열망을 함께 나누었던 글친구들이 점차 화려한 명망으로, 심지어 살아 있는 신화로 제 이름의 그늘을 드넓게 드리우는 과정을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아야 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이성복의 한 구절,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대체 무엇이 나의 인생을 의자로만 내몰았을까. 결코 원만해질 수 없는, 삐죽삐죽 날이 선 성격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사람을 갈망하면서도 나는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다.

굳이 자신을 위로해 보자면 ‘좋은 게 좋은’ 세상의 풍토와 화해하기 힘들었다. 매사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어두운 습성, 멍에처럼 주어진 천성적인 이기심과 무신경함들.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기에는 에고가 너무 강했다. 그러니 의자 위에서 혼자다. 브람스의 겨울 하르츠 여행에 의한 알토 랩소디 혹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 내 사랑하는 고립과 유폐의 선율이 의자 위를 떠돌며 습기 찬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의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

그렇더라도 다시 되물어야 한다. 정녕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역시 기질적인 면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오디오 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귀가 얇다고 한다. 늘 어딘가가 근질거리고 궁금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충동에 이끌리는 변덕스러운 성정, 그리고 산만 신경계. 이런 걸 아마 예술가적 성향이라고 부른다지.

게다가 지금 이곳이라는 낮은 땅의 시간이 항상 불만의 계절로 느껴지는 사람에겐 초월과 몽상의 갈망을 채워줄 어떤 무한, 무변(無邊)의 광막한 영토가 필요하다. 삶이 근질거리는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무변의 영토. 음악과 오디오, 거기 모든 게 있었다. 이 세상 그 누가 소리의 끝을 보았는가.

오디오는 생명체

대체 그 동안 어떤 기기들이 의자 곁을 지나쳐 갔던가. 그걸 일일이 기억해 내기는 참 번거로운 일이다. 충동에 사로잡혔다가 일주일을 못 넘긴 불운한 녀석도 있었고, 백년해로를 맹세했다가 갑작스러운 변심으로 떠나보내고는 땅을 치며 후회했던 아련한 옛사랑 같은 기기도 몇몇 있다.

일본 신도 래브러토리에서 만든 콜톤 EL34 파워앰프와 바이타복스 CN191 스피커가 결합해 만들어 내던 망망대해와도 같은 음의 해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프리앰프는 오디오 리서치의 SP11이었는데 언제고 다시 한 번은 꼭 이 조합을 리바이벌해 보고 싶다.

하도 여러 번 언급해 또 말하기가 좀 머쓱하지만, 기기에 대해 애착을 넘어 진심 어린 사랑마저 느끼게 해준 연인 같은 존재로 미국 청년 폴 헤일즈가 만든 스피커 헤일즈 시스템 시그너처Ⅱ가 있다. 통상 헤일즈 시그너처라고 부르는 이 가상동축형 스피커를 내 식으로 표현해 보자면 저릿저릿 오줌이 마렵게 만드는 음색에 머리칼이 곤두서는 정위감을 가졌다.

하지만 보잭의 무어리시 4000을 주고 맞이해 장장 2년간이나 동거했던 헤일즈도 결국은 윌슨의 와트파피 스피커에 혹해 떠나보내고 만다. 인간사가 그런가 보다. 변덕과 충동 앞에서 영원의 맹세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쯤하자. 오디오 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각종 기기의 모델 이름이나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무슨 암호처럼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적에게 아내와 회사까지 빼앗긴 마크 레빈슨의 70년대 초반 작업이 얼마나 위대한 선견지명이었는지, 스레숄드의 넬슨 패스가 개발한 스테시스 회로가 가졌던 가능성과 그의 최근 작업인 알레프 시리즈가 보인 발상의 전환, 뒤늦게 뚝심을 보이는 크렐의 다고스티노, 오디오리서치의 윌리엄 존슨, 제프 로렌드, 왠지 범접하기 힘든 골드문트 혹은 킴버, 카다스, 트랜스패어런트 같은 케이블들의 용쟁호투….

오디오는 단지 소리를 내주는 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성격과 표정과 목소리를 갖고 사는 생명체에 가깝다. 특히 매칭의 묘미가 오디오 자체라고 하듯 각각의 파트들이 어떠한 조합으로 만났는지에 따라 천변만화의 파노라마를 펼쳐 주므로 ‘오디오 하기’라는 게 마치 인생살이의 축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디오를 하다 보면 떠오르는 상념들이 있다. 가령 오디오와 음악감상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물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을 듣기 위한 도구로 오디오를 시작한다. 그러다 음악에서 이탈해 오디오 자체에 푹 잠겨 버리는 경우는 그 능동성에 매료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음악을 들을 때 제 아무리 머리꼭지 위로 우주를 공 굴리듯이 한다 해도 감상자가 그 음악에 직접 개입할 일이란 거의 없다. 단지 수동적으로 들으며 나름대로 해석하고 상상을 보태고 할 뿐이다. 반면에 오디오는 연주자가 악기를 튜닝하듯이 스스로 사운드의 형태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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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시인·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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