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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정신? 자부심도 돈도 떠났는데…”

“히포크라테스 정신? 자부심도 돈도 떠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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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흠대씨는 “우리가 받는 돈이 무작정 적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며 “같이 생활해 봐서 알겠지만 전공의나 수련의 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도 보건복지부 관리들은 의약분업을 둘러싼 의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월급 몇푼 올려주면 조용해질 것이라는 둥 상황인식을 잘못 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신들이 무조건 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국가가 시행해온 의료정책의 부조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의료인들이 정부의 시책에 맞서 항거하지 못하고 밀월관계를 유지해 오다가 뒤늦게 병원을 집단적으로 폐업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것. 하지만 젊은 전공의나 수련의들이 파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된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레지던트 2년차인 신동아씨도 “이번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의약분업을 실시하되 제대로 된 의약분업을 하라는 요구일 것”이라며 “의과대학을 포함해 15년에 가까운 세월을 수련의 기간으로 삼는 의사들이 해야 할 진료행위를 학부에서 4년간 공부한 약사에게 분담시킨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사이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1년차 레지던트 황교준씨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주치의 브리핑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 필름을 판독하고 차트를 분석해 환자의 특성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뇌를 비롯한 신경계통에 큰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순간적으로 위급한 상황에 빠질수도 있기 때문에 병실에 있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도 게을리 할 수 없다. 성공리에 수술을 마친 환자라도 환부에 염증이 생기지는 않는지를 세심히 살피고 하루에도 3,4차례 소독을 해줘야 한다. 이런저런 일들을 하다보면 어느새 먼동이 터오는 날이 부지기수다.



밤을 새는 것은 1년차 레지던트 뿐만이 아니다. 신경외과 중환자실 한구석에서 열심히 차트를 정리하는 김대야씨는 인턴이다. 김씨는 7월8일 연세대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전공의 비상총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자리에는 바쁜 와중에도 대다수의 전공의가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투표결과도 90% 이상이 현재의 의약분업안이 그대로 유지될 경우 재파업에 돌입해야 한다고 밝혔다”고 말했다.

시계가 새벽 1시를 넘어가도 인턴과 레지던트들은 활동을 멈출 줄 모른다. 병동에는 심전도를 체크하고 환자의 환부를 드레싱 하는 전공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응급실에는 수시로 밀려오는 응급 환자들을 돌보는 손길이 멈출 줄 몰랐다.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이 눈꺼풀의 무게라고 했던가. 중환자실에서 환자들에게 처방전을 쓰던 레지던트 1년차 조준형씨가 연이은 야근의 피로를 이기지 못해 고개를 자주 떨군다. 옆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간호사가 “저래가지고는 오늘 밤 안에 일 안 끝나지. 처방전 ‘오더’는 내려야겠으니 불안하고, 그렇지만 피곤하고 졸립기는 하지. 괴롭겠어 정말”이라며 놀려댄다.

“후회할 시간조차 없어요”

후배 전공의들만 밤잠을 자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레지던트 4년차 치프들이 숙소로 사용하는 의국에서도 밤을 밝히는 사람이 있었다. 신경외과 소아과 척추파트 레지던트 치프 신준재씨(30). 근무시간에 짬을 내기 어려우니 일과가 끝난 뒤부터 학위논문을 쓰느라 졸린 눈을 비빈다.

자신도 인턴 때는 착한 의사였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신씨는 시간이 지나 4년차 레지던트가 된 지금에 와서는 슬프게도 더 이상 착한 의사가 아니라고 말했다. 인턴 때 같으면 지치고 병든 환자들이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여도 어지간하면 참고 웃으려던 자신이었지만 이제는 환자가 조금이라도 성질을 건드릴라 치면 먼저 발끈하고 성을 내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 하지만 이런 일이 모두 5년 넘게 전공의 생활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체득한 습성 아니겠느냐며 씁쓸해 했다.

신씨는 의사가 된 것을 후회한 적도 있다. 영동세브란스 근무 시절에 한 입원환자가 사망한 일이 있었다. 병원이나 의사의 과실이 아니었고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었는데도 유족들이 병원으로 몰려와 난동을 부리는 장면을 목격한 것. 흥분한 유가족들은 의사나 간호사 등 보이는 사람마다 멱살을 잡으며 상소리를 해댔고 심지어는 따귀를 때리기까지 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한 것을 처음으로 후회한 때였다.

여러 전공의 수련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어느새 동이 텄다. 새벽6시 병원은 벌써부터 활력이 넘친다. 황교준씨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밤새 환자기록을 정리하고 브리핑에 대비한 탓이지 수척해 보인다. 잠을 못자서 그런지 눈도 충혈된 것 같다.

6시반 권흠대 치프가 와 환자들 차트와 CT필름을 보면서 설명을 해보라 한다. 나름대로 설명하는 황씨지만 권씨는 이맛살을 찌푸린다. 급기야 설명을 중단시키고 이것저것 물으니 황씨의 목소리는 더 작아지고 있었다. 권씨의 입에서는 불호령이 떨어지고 기본기를 제대로 갖추라는 ‘설교’가 10여분간 이어졌다.

잠시 담배를 피러 나온 황씨는 “세게 훈련시킨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강도가 심하다”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는다. 의사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도 “후회할 시간조차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담배 몇 모금을 급히 빨아들인 황씨는 또다시 잰걸음으로 병동을 향했다.

레지던트와 인턴의 생활은 약간 다르다. 이미 자신의 전공분야를 선택한 레지던트와 달리 인턴은 매년3월부터 1년간 1개월 단위로 각과를 돌며 기초수련을 받는다. 한 과에서 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수련하기 때문에 각과의 전문적인 영역까지 간여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 인턴이 맡는 일은 의사와 간호사 업무의 중간 정도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7월5일 밤8시 서울대병원에서 내과인턴 생활을 하고 있는 김성환씨(26)를 만났다. 190㎝가 넘는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이다. 서울대 인턴 대표를 맡고 있는 김씨는 마침 오늘 당직이니 차분하게 얘기하자며 8층에 있는 인턴 당직실로 안내했다. 화장실을 개조해 만들었다는 당직실은 2층 침대 2개가 있어 사람 3명이 서 있기 곤란할 정도로 협소했다. 내과와 안과, 비뇨기과 인턴들이 숙소 겸 휴식공간으로 활용하는 곳이다.

서울대 인턴은 자잘한 일이 많기로 유명하다. 김씨 스스로도 수련의라 부르기에 민망한 일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보통 다른 병원에서는 간호사들이 하는 ▲채혈 ▲환부소독 ▲정맥주사 등을 모두 인턴이 하는 것. 간호사로부터 정맥주사를 잘못 맞은 환자가 중태에 빠진 일이 발생한 뒤 취해진 조치다. 이런 일은 대부분 새벽6시부터 시작된다. 보통 오전9시경 수술이 시작되므로 아침 일찍부터 서두르지 않으면 시간에 대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씨가 근무하는 병동은 내과계 질환 중에서도 콩팥의 기능이 정상적이지 않은 환자들이 모인 특수병동. 정상적으로 소변을 보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소변을 체외로 걸러주는 일을 자주한다. 남자환자들의 경우 간호사들이 바지를 벗기고 소변을 걸러주는 것을 껄끄러워 해 거의 인턴들이 그 일을 전담한다.

하루 당직비 1만원

의사들은 ‘퐁당퐁당’이란 말을 다 안다. ‘당’은 당직을 ‘퐁’은 정상근무를 말한다. 대부분의 인턴들은 하루걸러 하루 당직을 서서 퐁당퐁당이다. 하지만 말이 퐁당퐁당이지 많은 인턴들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 집에 가는 것이 관례다. 그래서 인턴 숙소에 보면 큼지막한 여행가방이 여러 개 놓여있다. 물론 가방안에는 일주일치의 내의와 양말, 그리고 셔츠가 가득 담겨 있다.

김성환씨는 의사들이 당직을 서면 당직비가 얼마쯤 될 것 같냐고 물었다. 내심 그래도 3만원은 주겠거니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하룻밤 당직비가 고작 1만원이란다. 그나마 내과 응급실 당직은 아예 당직비를 받지 못한다. 그래도 서울대는 좀 나은 편으로 여타 병원들은 5000원이나 6000원인 경우도 허다하다. 서울대 병원의 인턴 기본급은 70만원대고 연봉은 2000만원 정도다.

김씨는 “전공의나 수련의들은 각기 자기 분야에서 일이 바쁘기 때문에 일단 업무에 복귀한 뒤에는 한 자리에 모여 토론을 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며 “모이기 힘든 만큼 재파업을 한다거나 하는 등의 집단행동을 다시 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 스스로도 의사집단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아래쪽의 의견이 위로 전달되는 것이 그리 자유로운 편은 아니라고 말했다.

지난달 파업에서도 인턴들의 목소리는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 김씨는 “의사의 업무 특성상 인턴은 레지던트에게 종속된 사람입니다. 레지던트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에 따라야 한다는 묵계가 있는 셈이지요”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파업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의사의 대표기구인 의사협회가 파업을 결정한 마당에 반대의견을 말해 분란을 일으키기보다는 일치단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는 것.

1주일간 파업을 하고 나서 가장 껄끄러웠던 것은 환자를 다시 만나는 일. 김성환씨는 “솔직히 병실에 들어가는 것이 좀 망설여지더라”며 “제 앞에서 대놓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는 환자는 없었고 대부분 ‘고생하셨지요’라며 안부를 묻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환자나 보호자들이 의사에 대해 ‘선생님’이란 호칭을 붙이며 예우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동은 아니라는 것이 대다수 의사들의 생각. 김씨는 “어려운 병을 치료해주면 의사의 당연한 의무라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멱살부터 잡고 보는 것이 요즈음 풍토”라며 씁쓸해 했다. 심지어 ‘아저씨’라고 부르는 환자도 부쩍 늘고 있다는 것.

같은 병동에서 내과 인턴으로 일하는 김유일씨(27)는 흉부외과에서 일한 한 달을 잊을 수 없다. ‘가정파탄과’라고도 불리는 흉부외과는 신경외과와 함께 업무강도가 세기로 유명하다. 수술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수술을 위한 마취준비부터 수술이 끝나고 난 뒤 회복실에 옮겨져 마취가 풀려 의식을 회복할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생명과 직결되는 장기인 심장 폐 등에 질환이 생긴 환자라 까딱 잘못하면 생명을 잃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옆 내과병동 인턴인 김계완씨도 “외과파트는 업무는 고되지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날 경우 환자에게 새 생명을 안겨주는 경우가 많아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맞장구를 친다. 유로2000 축구대회가 열렸던 지난주에는 낙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나마도 없어 서운하다며 농담을 하는 김씨는 “여유가 생겼을 때 통닭 시켜 놓고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 마시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며 환하게 웃었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원자력 병원은 암환자 전문병원이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은 레지던트 1년차 김성진씨(29). 오전11시 녹색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일반외과 수술실에 들어가니 위암환자 수술이 한창 진행중이다. 집도의인 방호윤 과장, 레지던트 3년차 김인경씨, 그리고 김성진씨가 81세 된 환자를 수술하고 있다. 복부를 절개한 환자의 내장이 훤히 들여다 보이고 수술실 안에는 피가 흥건한 수건이 가지런히 모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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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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