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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 위 댄스? 스탭을 밟으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쉘 위 댄스? 스탭을 밟으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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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층의 춤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과거처럼 일부 계층의 일탈행위가 아니다. 영화 ‘쉘 위 댄싱’의 주인공처럼 우리시대의 중년층은 춤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 춤을 통해 인생을 새롭게 발견하고, 머지않아 다가올 황혼을 준비하는 것이다. 》
느릿느릿 플랫폼으로 들어서는 퇴근길 지하철. 으스름 저녁, 차창 너머로 비치는 검푸른 하늘 아래 별처럼 드문드문 외로이 떠 있는 도심의 네온사인들…. 흔들리는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중년남자의 초점 잃은 시선이 무심히 흘러가던 창 밖 어딘가에 머물며 한순간 생기로 빛난다.

허름한 건물 2층, ‘견학자유’ 안내문구가 걸린 댄스교습소. 창가엔 텅 빈 공간을 뒤로 한 채 하릴없는 눈길로 거리를 응시하고 있는 여인의 아름다운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희미한 불빛 아래 홀로 춤을 추는 마이, 40대 경리과장 스기야마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린다.

아내와 아이, 평생토록 발목을 잡고 있을 것만 같은 서류더미 위의 숫자놀음…. 소박한 성공 뒤에 가려진, 청춘을 지나온 삶의 피로와 허탈감이 짙게 밴 중년의 후줄근한 일상. 달리는 지하철을 뒤로 한 채, 스기야마는 마이를 통해 ‘춤’과 ‘일탈’의 행로에 몸을 싣는다.

직장동료이자 라틴댄스 신봉자인 아오키, 억척스레 살아가는 시장 아줌마 토요코, 자신과 비교해도 고만고만한 인생을 걸어왔을 또다른 샐러리맨들. 일탈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부대끼며, 꿈도 생기도 없이 지루하게 흐르던 스기야마의 ‘인생시계’는 어느새 ‘댄스스탭’처럼 빨라지기 시작한다. “Shall we dance?”

주인공 스기야마가 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실은 저녁 시각, 서울 강남의 한 댄스교습소에서 스기야마와 비슷한 연배의 남녀 10여명과 마주쳤다.



“투 쓰리 차차 원∼”

“투 쓰리 아웃 원∼”

“턴 앤 투!”

“따라라라∼뒤로 투!”

“투 쓰리 차차 원, 투 쓰리 차차 원∼”

“지현 엄마, 시선 두리번거리지 마세요.”

“김선생님, 어깨 힘 빼시고…. 그렇지, 잘 하시네요.”

“코로 숨을 쉬세요. 입으로 숨을 쉬면 자이브 한 곡 뛰고 기진맥진합니다.”

“종아리에 힘이 가는 춤을 추면 안됩니다. 허벅다리로 눌러 줘야죠, 이렇게∼”

“룸바는 스탭에서 체중이 완전히 앞으로 나갑니다. 차차차는 뒤에 체중이 약간 남아야죠. 좋아요, 다시 한 번∼”

댄스교습소에 50대가 몰린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강사의 날카로운 지적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수업시간. 얼핏 보기에도 쉽지 않은 춤동작을 따라 가느라 몸 전체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이사장님, 턴할 때 왼쪽 다리 흔들지 마세요. 남자가 다리에 힘없다는 소린 듣지 말아야지….”

순간 중년의 수강생들 사이에 왁자한 웃음이 터지고, 팽팽하던 수업 분위기가 일시에 풀어진다.

사방 벽이 거울로 된 연습장 한편 소파. 그들이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넥타이와 양복상의, 여성 핸드백, 신발들이 뒤엉켜 있다. 그 틈에서 댄스교습 시간에 맞춰 서둘러 나오느라 일거리를 챙겨왔을 법한 중년남성의 낡은 서류가방이 눈에 띈다.

“스탭을 끌면서 시선 처리를 잘못하니까 자꾸 여성을 잡아당기게 됩니다. 시선은 정면을 보시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면 안됩니다.”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강사의 매서운 꾸중에 한 50대 초반 남성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서 있다. 그의 이마에는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강습이 끝나고 땀을 식히던 50대 남성은 “자그마한 사업체를 꾸리고 있다. 춤을 배운 지는 5개월 정도 됐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지금 20∼30대와 달리 우리는 남녀가 함께 손을 잡고 춤추는 분위기에 익숙하지 못하다. 거기다 몸은 굳었지, 파트너인 여자 얼굴이 코 앞에 있는데 어떻게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 춤출 때마다 쑥스럽고 어색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며 얼굴을 붉힌다.

그는 “그래도 처음보다 한결 나아졌다. 그땐 손도 다리도 다 후들후들 떨리고, 수업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로 자신을 위로한다. 50을 넘긴 나이로, 안 배워도 그만일 춤에 뛰어들어 강사의 ‘야단’까지 듣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자주는 아니지만 직원들하고 회식할 때 사장이랍시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으니까 영 분위기도 썰렁하고 직원들한테 미안했다. 젊은 직원들하고 같이 섞여 놀 줄 알아야겠다 싶어 춤을 배우게 됐다.”

50대 중반 주부는 결혼한 딸과 사위의 성화에 떠밀려 7개월 전 이곳을 처음 찾았다고 한다. “이 나이 여자들 갱년기 우울증 앓는다더니 내가 그걸 실감했다. 밥맛도 없고 쇼핑을 다녀도 심드렁하고, 매사 관심 가는 게 없고 귀찮기만 했다. 사위가 학원도 알아보고 수강료까지 챙겨줘서 마지못해 시작했는데 요즘은 춤이 없으면 사는 낙이 없을 것 같다. 매일 교습소 가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생활에 활력이 생겨서 좋다”며 밝은 표정을 짓는다.

“남편이 살아 있다면 싶다. 댄스 스포츠는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가 있어야 함께 즐기면서 빨리 배울 수 있다. 부부가 나란히 와서 땀 흘리는 광경을 보면 나도 모르게 부러운 심정이 된다.”

남편 대신 같이 춤출 수 있는 남자친구라도 하나 만들어야 할 모양이라던 그가 때마침 ‘삼바’ 음악이 나오자 경쾌하게 몸을 일으켜 플로어로 나간다.

춤의 기본은 파트너와의 호흡

강남의 다른 댄스교습소에서 만난 홍경식(49)·변종진(47) 부부는 함께 춤을 배운 지 2년 남짓 됐다. “아내가 당뇨로 심하게 고생했다. 병원에서 유산소 운동을 하라고 해서 처음에는 아내 혼자 에어로빅을 배웠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이 없을까 고민하다 댄스스포츠에 입문했다.”

아내 덕분에 인생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홍씨. 그는 “춤을 배우기 전에는 골프에 빠져 있었다. 사업상 필요하다는 구실로 주말마다 혼자 취미생활을 즐긴 셈이다. 우리 연배 남자들이 노는 게 뻔하지 않나. 그저 모이면 술 마시고 화투치고 노래 부르고…. 춤을 배운 뒤로 술은 와인 한 잔 정도만 마시고, 담배는 완전히 끊었다. 담배 피고 술 마시면 폐활량이 줄어 춤추는데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또 아내 건강도 몰라보게 좋아져서 가정생활에 윤기와 활력이 생겼다”고 말한다.

홍씨 부부는 요즘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행복해진다.

“나비넥타이에 턱시도를 차려 입고, 파티복을 입은 아내와 대문을 나설 땐 정말 행복감에 휩싸인다. 춤이 아니었다면 언제 그런 기회가 있겠는가. 파티장에서 음악이 나오면 아내와 왈츠를 추고 와인도 마시고…. 지난 연말에는 직원들 앞에서 그동안 배운 춤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준 일도 있다. 춤을 배우면서 터득한 인생의 지혜가 있다. 부부 어느 한쪽이 상대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남자들이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하기는 어려운 일 아닌가. 아내와 함께 춤을 출 때 ‘나는 운전자, 아내는 차’라는 기분으로 춘다. 남자가 리더가 되어 호흡을 맞추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운전자와 차가 호흡이 안 맞으면 사고밖에 더 생기겠는가.”

한편 동아문화센터 ‘토요모임’에서 만난 재미동포 사업가 김경호(48) 씨는 “장기출장 온 길에 이곳에서 3주째 볼룸댄스 강습을 받고 있다”고 한다. 현재 미국 보스턴에 거주하는 김씨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년쯤 전이다. 미국에서 볼룸댄스 프로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아내의 권유가 계기였다.

“미국인가족댄스클럽연맹인 ‘마사바다(massabada)’ 보스턴지부가 있다. 이곳에서 봄·가을로 워크숍을 여는데 한 번에 몇만명씩 몰린다. 아내를 따라 참석해도 내가 춤을 못 추기 때문에 아내가 다른 파트너와 춤추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아내가 각종 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항상 가방을 들어다 줬다. 미안했던지 아내가 함께 춤을 추자고 해서 배우게 됐다.”

춤을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김씨는 이상한 마력이 생겨 마치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살면서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고. 그는 볼룸댄스를 함께 추어보면 상대방의 성격을 금세 파악하게 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음악에 빠져 한창 감정을 잡고 춤을 추는데, 갑자기 고난도 테크닉을 구사해 파트너를 당황시키거나 감정 흐름을 깨뜨리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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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경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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