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두 번 자살 시도했죠 이름도 바꿨습니다”

  • 하종대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입력2007-01-17 13:3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고문기술자 이근안씨의 자수로 불행한 시절의 고문사건들에 국민적 관심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관련자 중 주범으로 몰렸던 조한경 당시 치안본부 담당반장이 사건발생 12년 만에 입을 열었다. 조씨는 이 사건이 집권 1년을 남긴 전두환 전대통령의 지시로 공안선풍이 시작되는 와중에 발생한 ‘정치적 사건’이라며 자신은 ‘역사의 희생물’이라고 주장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씨가 잠적 11년 만에 전격적으로 검찰에 자수함으로써 과거 고문사건들에 세인의 관심이 다시 쏠리고 있다. 이 가운데도 가장 주목받은 사건은 고 박종철군(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고문치사사건. 당초 축소조작돼 발표됐다가 뒤늦게 진상이 밝혀지는 우여곡절을 겪은데다, 재판과정에 고문경관들의 진술이 자주 바뀌는 등 석연치 않은 대목이 많았기 때문이다.

    과연 이 사건은 전모가 완전히 드러난 것일까. 당시 치안본부장이던 강민창씨는 이 사건의 최고책임자일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관련자는 없을까. 기자는 이런 의문을 갖고 그들을 추적했다. 그러나 대부분 잠적하거나 만나기를 거부했다. 또다시 여론의 도마 위에 올라 난도질당하고 싶지 않다는 게 당사자들의 이유였다.

    그러던 차에 87년 1월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뒤 94년 4월 형기 3분의 2를 채우고 가석방됐던 조한경씨(54)를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조씨는 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2단 5과 2계 1반 반장으로 박군을 직접 조사했던 인물. 조씨는 그러나 재판과정에 “나는 조사는 했지만 고문현장엔 없었다”며 혐의사실을 부인했다. 이 주장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에게 선고된 징역 10년은 사건 관련자들이 받은 형기 가운데 가장 긴 것이었다.

    99년 11월17일 오후 5시경 서울 마포구 서교동 서교호텔에서 만난 조씨의 얼굴은 수척했다. 7년 3개월간 옥살이를 하며 죄값을 치렀지만 고문치사사건은 아직도 그를 휘감고 있는 듯했다. 12년간 닫혀 있던 조씨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억울하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제 와서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다시 끄집어내겠느냐”는 게 조씨의 말이었다.

    “국립묘지에 묻히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조씨의 입을 열 수 있을까. 대답하기 쉬운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김근태씨(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고문사건과 관련, 최근 조사를 받고 있는 박처원 전 치안감이 경찰간부로부터 10억원을 받아 숨기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봤다.

    “난 정말 실망했습니다. 박씨가 경찰로부터 10억원이나 받아 숨기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동안 명절 때마다 박씨를 찾아뵈었습니다. 갈 때마다 담뱃값이나 하시라고 몇 만원씩 드리고 오곤 했지요. 그런데 10억원이나 갖고 있으면서 나를 이렇게 대했다니….”

    그는 철석같이 믿었던 박씨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지는 듯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좀처럼 열 것 같지 않던 조씨의 말문이 트였다.

    ― 이근안씨 자수를 계기로 고문경관들에 대한 비난과 처벌 여론이 또다시 일고 있는데, 요즘 심경은 어떻습니까.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 왜 그렇습니까.

    “저는 진실로 내가 하는 일이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일했습니다. 우리는 북한과 정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휴전중이지만, 스파이 활동 등 비정규전에서는 여전히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비정규전을 위한 법적 장치가 국가보안법 아닙니까. 당시 우리는, 정치도 썩었고 군도 썩었고 사회의 모든 분야가 썩었어도 대공 분야를 맡고 있는 우리마저 썩으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심정으로 일했습니다. 나는 죽으면 국립묘지에 묻히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 처지가 어떻습니까. 역적으로 몰려 묻힐 곳조차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에서 더 살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박군 고문치사사건의 주범이 돼 징역을 산 것은 나라와 조직을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속은 것 같다고 말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또 조직과 나라도 자신의 ‘우국충정’을 몰라주는 게 억울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 고문 당시 현장에 없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박군을 직접 조사하고 ‘혼내주라’고 지시한 것은 박군이 숨지는데 일조한 것 아닙니까.

    “종철이가 죽은 것은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경찰과 보안사 안기부 등 대공 관련기관이 한꺼번에 대대적인 대공수사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만약 종철이가 죽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 희생됐을 겁니다.”

    ―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종철이가 숨지기 보름 전쯤인가, ‘각하 분부사항’이란 제목으로 대통령의 지시가 내부문서로 내려왔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조직의 배후는 강압적인 수사 없이는 캐낼 수 없다. 따라서 강압수사를 하더라도 ‘조직의 배후를 잡아들여라’. 대통령의 지시사항이 내려오자 치안본부 안기부 보안사 등이 경쟁적으로 공안사범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한 거죠.”

    남영분실에 온 내무장관의 지시사항

    ― 대통령의 지시 때문에 대대적인 공안선풍이 불었다는 말이군요.

    “각하 분부사항이 내려왔을 때만 해도 우리는 일정대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공안수사라는 게 이렇습니다. 조직의 배후와 전모를 밝혀내려면 무조건 관련자가 있다고 해서 잡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관찰과 공작을 거쳐 증거사실을 수집하고 조직의 전모가 대충 밝혀질 수 있겠다 싶으면 한꺼번에 덮치는 겁니다. 그런데 종철이를 데려오기 하루 전 김종호 당시 내무부장관(현 자민련 국회의원)이 치안본부 남영분실에 들렀습니다. 김장관은 경감급 이상의 간부들을 모아놓고 점심을 사면서 ‘대통령 임기가 1년밖에 안 남았다. 정치일정이 있으니까 3월 개학 때까지 모든 사건을 끝내라’고 지시했다는 겁니다. 김씨가 남영분실을 격려차 방문한 날 나는 수사 때문에 바깥에 있었는데 갑자기 삐삐가 울리더라구요. 그래서 사무실로 전화했더니 오늘 저녁엔 빨리 들어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들어갔더니 ‘지금 공작하고 있는 사건 모두 깨라’고 지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과장과 계장에게 항의했죠. ‘내가 12명 잡아넣은 사건을 검찰에 넘긴 게 바로 엊그제다. 직원들도 사람인데 좀 쉬어야 할 것 아니냐. 또 사건이 무르익지도 않아 공작할 시간이 필요한데 어떻게 깨느냐’. 그랬더니 ‘지금 그럴 계제가 아니다. 장관 지시다. 모두 깨고 잡아들여라’는 겁니다. 박종철 사건은 그래서 터진 거죠.”

    조씨는 박종철이 죽지 않았다면 엄청난 공안선풍이 일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물론 자신에게 전혀 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 사건이 터졌고, 따라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은 수사실무자가 조사과정에 실수로 야기한 단순한 고문치사 사건이 아니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정치적 일정이라는 커다란 밑그림 위에서 일어난 정치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특히 당시 조씨의 계획대로 공작을 거쳐 증거를 충분히 수집한 뒤 3월경 관련자를 검거했더라면 이런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조씨에 따르면 엿장수로 위장한 부하직원을 한 달간 잠복시킨 결과 관련자들의 움직임을 이미 포착하고 있었고 증거수집을 위한 공작단계만 남아 있었다.

    ― 당시 공안수사에 투입된 수사팀 규모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치안본부뿐만 아니라 보안사 안기부 등이 모두 동원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공안수사팀은 치안본부에 2개단이 있었고 안기부와 보안사에 각각 2개와 1개씩 있었습니다. 치안본부만 해도 단장 밑에 3개과씩 있었는데 1,2,3과는 1단에 속했고 4,5,6과는 2단에 속했습니다. 또 과 밑엔 2개의 계, 계마다 4개반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치안본부만 해도 40여개 반 전체가 공안사범 소탕작전에 일제히 투입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는 100여개의 수사반이 투입됐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고문은 기 죽이기 위한 통과의례

    ― 그래서 종철이를 갑자기 잡아들이게 된 겁니까.

    “종철이는 원래 참고인에 불과했어요.물론 불법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돼 있긴 했지만 우리가 정작 잡으려 한 학생은 서울대 민중민주화투위 사건으로 수배중인 박종운이었습니다. 당시 깃발사건이라고 굉장히 큰 사건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건관련자가 대부분 붙잡혔는데 박종운만 끝까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박종운을 종철이가 하숙집에서 재워준 적이 있다는 첩보를 다른 관련자로부터 입수하고 종철이를 데려온 거죠.”

    ―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고 종철이를 고문한 거로군요.

    “종철이는 사실 고문다운 고문도 받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데려오는데 길이 막혔거든요. 그래서 오자마자 아침식사를 시켰고, 막 수사를 시작하려는데 사건이 터진 거예요. 잠시 자리를 뜬 사이 ‘큰일 났습니다’라며 허둥지둥 보고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야, 빨리 데리고 나와’ 했더니 이미 다리가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라며 애들을 다독거리고 나서 의사를 부르러 보내고 종철이를 병원으로 데려가고 정신없이 뛰어다녔습니다.”

    조씨에 따르면 당시 종철이가 받은 물고문은 사실 고문이랄 수도 없었다는 것. 피의자를 데려오면 일단 기를 죽이기 위해 으레 한 번씩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는 얘기다.

    “일반적으로 수사관이 피의자를 고문하는 이유는 짧은 시간 안에 선(線)조직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조직이란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오늘 어디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의 전화번호부 몇 쪽을 보면 전화번호가 있는데 그것을 분석하면 점조직원들이 만나는 장소와 시간이 나옵니다. 그런데 만약 거기서 만나지 못했다면 빨리 다른 장소로 옮기고, 그것이 실패하게 되면 조직은 끊어지는 것입니다. 운동권은 점선조직으로 돼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잡히면 선조직을 끊게 됩니다. 선을 끊기 전에 선조직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고문을 하게 되는 겁니다. 수배자를 검거한 뒤 2시간이 지나면 사실 선조직은 깨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쫓는 사람이 치열하게 추적하면 할수록 도망가는 사람도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선조직이 깨지기 이전에 정보를 빼내지 못하면 고문은 하나마나라는 것이다.

    조씨는 ‘고문을 잘 하는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이근안씨가 고문기술자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도 바로 사람을 상하지 않게 고문할 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씨에 따르면 이씨는 고문하기 이전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 상대방의 몸을 모두 체크한 뒤 고문을 했다는 것.

    이씨가 도피중 침술법에 관련된 책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인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조씨의 분석. 사실 박종철이 죽게 된 것도 고문의 ‘고’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겁을 주려다 ‘오버액션’을 해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 그런데 왜 고문주범이 된 겁니까.

    “저는 종철이를 살리려고 의사를 부르고 병원으로 데려가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의사가 사망판정을 내리고 사무실로 보고하러 돌아와보니 이미 시나리오가 짜여 있더라고요.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시나리오는 여기서 나온 겁니다. 그 시나리오를 작성한 사람이 누구인지 제가 잘 아는데, 나중에 보니 훈장까지 받았더라구요.”

    배반감만 안겨준 그들에게 그는 아직도 지켜야 할 신의가 남아 있는 것일까. 계속된 질문에도 그는 문제의 시나리오 작성자가 누구인지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보니까 내가 주범으로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왜 이게 나냐’며 고문치사 주범을 나로 한 데 대해 항의를 했죠. 그랬더니 과장과 계장이 나를 불러 ‘그나마 신임받고 촉망받는 사람은 너뿐이다. 그래야 위에 있는 놈들이 우리를 위해 뛰어줄 것 아니냐. 네가 아니면 그냥 밟아버리고 말지 누가 뒤처리를 해주겠냐’고 사정을 하더라고요. 제가 보안사 대공 분야에서 7년동안 근무하다가 73년 경력자 공채 때 수석으로 경찰에 들어왔거든요. 또 한편으론 사건이 터지자 아랫놈은 아랫놈대로 ‘조반장이 시켜서 조사한 거지 우리가 무슨 죄가 있냐’라며 떠넘기기도 했고요. 그래서 제가 졸지에 주범이 돼버린 겁니다.”

    ― 구속될 것을 각오했습니까.

    “아니죠. 처음엔 걱정하지 말고 감찰조사만 간단히 받고 오면 된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감찰조사를 받으러 갔죠. 그런데 돌아오긴 누가 돌아옵니까. 조사받고 바로 구속된 거죠. 결국 찔끔찔끔 밀려서 구속까지 가게 된 겁니다.”

    당시 조씨는 자신을 주범으로 만든 시나리오를 서랍에 보관해두었다고 한다. 시나리오가 적힌 행정보고서에는 ‘네가 책임을 져라. 그래야만 사건이 해결된다’라는 내용이 모두 들어 있어 자신이 실제 주범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줄 수 있는 결정적인 문서였다. 그러나 이 문서는 햇빛을 보지 못했다. 조씨가 구속된 뒤 집으로 개인물품이 돌아왔는데, 작업복만 달랑 보내주고 나머지 서류는 모두 없애버렸더라는 것.

    ― 대가로 뭘 받았습니까.

    “치안본부 말단인 경위가 고문치사사건의 주범이란 게 말이 됩니까. 그렇지만 내 부하들이 죽였는데 설령 내가 현장에 없었어도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벌을 받은 것입니다.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모시던 박처원씨가 고문사건의 대가로 10억원을 받아 갖고 있으면서 나를 그렇게 대했다고 생각하면 정말 분통이 터집니다.”

    조씨는 상급자로 모신 박처원씨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털어놓은 박씨에 대한 얘기.

    “박처원씨는 원래 북한에서 지주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씨를 비롯해 가족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집 마당에서 공산당한테 총살을 당했습니다. 박씨는 이후 남한으로 도망쳐 내려와 20대 초반의 나이로 경찰에 투신했고, 남대문 서장 등 좋은 자리 다 준다 해도 사양하고 대공에만 매달린 사람입니다.

    박씨는 또 막무가내식으로 공안사건을 처리한 사람도 아닙니다. 예전에 ‘막걸리 반공법’이란 게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술 마시고 취중에 ‘에이 XX, X 같네, 김일성 세상이 더 좋겠다’고 혼잣말이라도 하면 그 말을 들은 택시운전사가 곧바로 경찰서로 신고하고 경찰은 택시운전사 진술서만 받으면 곧바로 당사자를 구속했습니다. 술 깨고 나면 빨갱이가 돼 있으니 당사자는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런데도 3명만 구속하면 곧바로 특진을 하던 시절이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애매한 이유로 구속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체제에 대한 적만 양산하는 꼴이 됐습니다. 그런데 박씨는 치안본부 5조정관으로 있을 때 이런 지시를 내렸습니다.

    ‘앞으로 국가보안법 7조(찬양 고무)를 적용해 사람을 구속하려면 모두 상부의 지휘를 받아라. 그 사람이 한 행태만을 가지고 사람을 처벌하지 말고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떤지, 다시 말해 남북간에 전쟁이 난다면 과연 어느 쪽에 총부리를 댈 사람인지를 가려서 구속하라. 설령 반국가단체를 찬양 고무했다 하더라도 사상이 그렇지 않으면 구류나 며칠 살리고 내보내라.’ 당시 박씨의 지시에 많은 부하들이 불평을 했습니다. 특진할 기회가 갑자기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씨가 전혀 대가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주범으로 총대를 매준 대가로 경찰은 조씨와 강진규(姜鎭圭) 경사에게 위로금 300만원과 매달 30만∼50만원씩 생활비를 대준 사실이 검찰조사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이름 바꾸고 살아

    조씨가 구속된 후 가족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남편이 구속되자 부인은 봉제공장에 다녔지만 생활비가 모자라 1600만원짜리 집도 팔아넘겼다. 그 집이 지금은 2억~3억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94년 4월 가석방으로 출소한 조씨는 얼마 뒤에 경찰공제회에 특채됐다. 월급은 70만원. 그런데 이것도 얼마 못 갔다. 4개월 만에 언론에 들통이 나는 바람에 쫓겨난 것이다. 최근엔 친척 형님의 건물관리인으로 취직했다. 매달 형님으로부터 받는 80만원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조씨는 최근 4000여만원짜리 지하 전셋방을 가압류당했다. 법무부가 구상권을 행사한다며 조씨 등 고문치사사건 관련자 9명을 상대로 2억4000여만원을 청구하는 구상금 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 재산을 가압류했기 때문이다.

    ― 십자가를 진 데 대해 후회는 없습니까.

    “나는 이렇게 심하게 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박군의 고문치사사건은 정치적인 사건이지 단순 고문사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진작 이를 알았다면 내 꼴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조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스스로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별 일도 안 하면서 ‘빽’을 동원해 승진하는 사람, 열심히 일하는 부하 위에서 공치사해서 알겨먹는 사람입니다. 이 가운데 우리 같은 사람은 ‘일벌’입니다. 일하다가 죽으면 그만입니다. 일벌한테는 ‘너희가 없으면 국가가 무너진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죽도록 일만 하다 죽는 거죠. 당시엔 부당한 명령일지라도 국가를 위한 것이라면, 그리고 조직을 위한 것이라면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는 우직한 생각이었죠.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런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내가 보호하려고 했던 조직은 박살이 났고 국가도 더이상 나를 보호하지 않고….”

    조씨는 고문치사사건의 주범은 아니지만 어쨌든 한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일에 일조한 것에 대한 회한이 크다.

    “생명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는 것입니다. 생명을 빼앗는 일은 인간이 하면 안 됩니다.”

    번번이 실패하긴 했지만, 조씨는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이 고문치사범이 된 사실을 참지 못한 나머지 2번이나 자살을 기도했고 호적에서 자신의 이름을 파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름도 바꿔버렸다. 정식으로 법원에서 허가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 조씨의 이름은 조한경이 아니다. 조한평이다. 그는 자신의 휴대전화에 조한평이라는 이름을 써두었다.

    “나는 두 번 용서를 받아야 해요. 한 번은 국가로부터, 또 한 번은 피해자로부터….”

    7년 반 동안의 감옥생활을 통해 그는 국가에는 어느 정도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로부터는 여전히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 박종철군의 아버지 박정기씨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두 차례 보냈다. 그러나 편지는 겉봉도 뜯기지 않은 채 조씨에게 되돌아왔다. 박씨가 편지를 보고 싶지 않다며 되부쳤던 것.

    겉봉엔 박씨가 쓴 ‘편지를 받고 싶지도 않고 용서하고 싶지도 않다’는 내용의 한시가 씌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감옥에 있을 때 많이 도와준 함세웅 신부를 통해 화해를 청했다. 조씨에 따르면 함신부가 “이젠 용서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며 중재를 했으나 박씨로부터 아무런 응답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관련자로서 이 사건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사실 나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종철아, 네가 평범한 인간으로 행복을 누리며 살 수도 있었겠지만, 일찍 죽음으로 인해 이 땅의 고문받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됐다면 너는 행복한 놈 아니냐. 예수가 죽어 역사가 이뤄진 것처럼 네가 죽어 이 땅의 민주화가 앞당겨진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나는 뭡니까. 나는 예수를 죽인 빌라도입니까. 저는 빌라도가 맞을 겁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빌라도 노릇을 해야 했다면, 역사를 만들기 위해 빌라도를 필요로 했다면, 그래서 내가 그 노릇을 한 것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듭니다. 모두가 역사의 희생물인 셈이죠.”

    조씨는 얘기를 마치면서 “나중에 다시 한 번 자세히 얘기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조씨는 이후 생각이 바뀌었는지 연락을 끊어버렸다. 여러 차례 보내 만나자고 제의했지만 답변이 없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훨씬 지났어도 고문치사사건의 멍에가 아직도 그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일까.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