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호

‘브랜드 농업’으로 지역경제 살렸다

  • 양영훈 < 여행작가 > travelmaker@hanmir.com

    입력2004-09-03 15: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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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군은 관광자원과 농업자원이 풍부한데도 오랫동안 낙후지역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 그러나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농산물의 다각화와 고급화, 관광자원의 효용성 극대화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봄기운이 농익은 4월에 고창 땅을 여행하는 것은 행운이다. 유난히 아름답고 찬란한 봄빛을 완상(玩賞)할 수 있기 때문이다. 풋풋한 봄바람을 맞으며 고창 땅 곳곳을 쏘다니다 보면 이맘때쯤의 봄날이 연출하는 풍경과 정취를 죄다 만날 수 있다. 천년고찰 선운사에서는 불꽃같은 정념을 품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모양성의 성벽을 따라 늘어선 벚나무는 가녀린 바람결에도 함박눈 같은 꽃비를 우수수 흩뿌린다.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황토언덕은 온통 보리밭으로 뒤덮여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초록빛 바다를 이룬다.

    동쪽으로는 노령산맥의 끝자락에 안기고, 서쪽으로는 칠산바다에 발을 적신 고창에는 자랑거리가 참 많다. 그중 고창사람들이 첫손에 꼽는 자랑거리는 선운산 도립공원이다. 이 공원에는 동백숲, 송악, 장사송 같은 천연기념물을 길러낼 만큼 잘 보존된 숲과 서해안 제일의 명찰 선운사를 비롯해 민불(民佛), 동불암마애불, 진흥굴, 용문굴, 도솔암, 낙조대 등의 명소가 즐비해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선운산을 찾는 관광객들은 풍천 장어구이를 안주로 복분자술을 한 잔 곁들이는 일도 결코 잊지 않는다. 풍천장어와 복분자술 역시 선운산의 넉넉함과 풍요로움이 낳은 산물이다. 남자들의 양기를 돋우는 데에 최고라는 복분자술은 선운산 자락의 산딸기로 만든 전통 민속주. 오래 전부터 맛있는 민물장어의 대명사가 된 풍천장어도 선운산 언저리를 휘돌아 흐르는 풍천(또는 인천강)이 제 고향이다.

    고창은 흔히 ‘판소리의 중흥조’라 일컫는 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1812∼1884)와 ‘국화 옆에서’ ‘선운사 동구’ 등으로 유명한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1905∼2000) 시인의 고향이다. 오늘날 고창이 전통문화의 향훈(香薰)이 그윽한 고장, 향토적이고도 서정적인 풍정이 넘치는 고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이 두 사람의 공이 적지 않다. 더욱이 그들이 고향에 남긴 자취는 오늘날 고창군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모양성(牟陽城) 입구의 동리고택은 ‘판소리 중흥의 메카’답게 고창을 찾는 외지 관광객들이 꼭 한번 둘러보는 명소다. 동리고택 좌우에는 동리국악당과 고창판소리박물관이 들어서 판소리의 계보와 역사를 한눈에 파악하고, 직접 소리 한 대목을 익혀보는 체험학습장으로 활용된다.



    미당 시문학관은 서정주 시인이 나고 자란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마을의 선운초등학교(폐교) 자리에 있다. 고창군이 10억원을 들여 지난해 11월 개관한 이 문학관은 전시실과 영상실, 세미나실, 휴게실 등을 갖춘 종합문화공간으로 꾸며졌다. 전시실에는 미당의 육필원고, 각종 사진과 상장, 서적 등 시인의 손때가 묻은 유품 1만여 점이 전시돼 있다. 문학관 부근에는 미당의 생가가 말끔하게 복원돼 있고, 마주 보는 산기슭에는 그의 묘소가 있어 서정 넘치는 미당의 시심(詩心)에 매료된 문학도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고창읍내의 모양성(사적 제145호)과 고창군 일대의 고인돌군(지석묘군)도 빼놓을 수 없는 관광자원이다. ‘고창읍성’이라고도 불리는 모양성은 우리나라 읍성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평지(平地)의 읍을 에워싸고 있는 여느 읍성과는 달리 읍 뒤편의 낮은 야산에 산성처럼 둘러처져 있는 점이 독특하다. 이 성은 원래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호남 서해안 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되었기 때문에 평소엔 군사훈련장으로 쓰이다가 전시에만 방어요새로 활용됐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자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인지 여자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성벽 길을 세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사후에 극락 간다는 속설도 전해진다. 지금도 모양성을 찾는 이들 중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밟기(踏城)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성벽 위에 올라 고창의 너른 들녘을 내려다보는 기분이 여간 상쾌하지 않다. 특히 4월 초쯤에는 성벽과 성내 곳곳에 벚꽃이 만발해 눈부시도록 화사한 꽃세상이 열린다.

    고창군은 세계적으로도 고인돌이 가장 밀집한 지역 중의 하나다. 2.5㎞ 남짓한 거리에 이웃한 고창읍 매산리·죽림리·도산리, 아산면 상갑리 일대에만 약 450기의 고인돌이 몰려 있다.

    이곳의 길가나 산비탈 솔숲에 나뒹구는 바위덩이의 대부분은 고인돌임에 틀림없다고 여겨도 될 만큼 고인돌 천지다. 지상석곽식, 남방식, 북방식 등 고인돌의 양식도 다양하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고인돌 양식을 모두 볼 수 있다. 고창 고인돌군은 2000년에 강화도와 화순의 고인돌군과 함께 우리나라의 여섯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고창군에 이처럼 많은 고인돌이 밀집한 것만 봐도 이미 선사시대부터 이곳의 농업생산력이 대단히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인돌은 대체로 청동기시대 부족장이나 그 가족들의 묘로 추정되는데, 이처럼 거대한 가족 묘역을 조성하려면 매우 강대한 권력과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고창의 농경지는 군 전체 면적의 약 40%를 차지할 정도로 넓다. 반면에 산지(임야) 면적은 우리나라 평균치(70%)에 훨씬 못미치는 45% 정도에 불과하다. 공업화, 도시화의 진행속도가 매우 빠른 요즘도 고창군에서는 전체 인구의 63%가 농업과 어업 같은 1차산업에 종사한다. 그에 비해 2차산업인 광공업 종사 인구는 6%, 3차산업인 서비스업과 기타 산업은 31%밖에 되지 않는다.

    이처럼 고창군은 관광자원과 농업자원이 풍부한 고장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낙후지역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 농업생산성이 경제력을 좌우하던 시대에는 넓은 들녘이 부(富)의 원천이었으나, 근대공업화 사회에서는 2차산업의 비중이 경제력의 가장 중요한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변변찮은 공장 하나 없는 데다가 교통조차 불편했던 고창군은 자연히 낙후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선운사를 비롯해 도처에 널린 관광자원도 지역경제에 별 보탬이 되지 못했다. 연계관광코스가 개발되지도 않았거니와 관광객들을 붙들어맬 만한 편의시설과 휴양시설도 미흡했던 탓이다. 이런 지역 실정을 파악한 이호종(李昊鍾·73) 고창군수가 민선군수직을 연임하면서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정책도 ‘농산물의 다각화와 고급화’ ‘관광자원의 효용성 극대화’였다.

    고창군은 쌀 생산정책을 양보다 질 위주로 바꿨다. 쌀이 남아도는 현실을 감안하면 품질이 떨어지는 쌀은 제값을 받기는커녕 판로를 찾기조차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공무원들부터 팔을 걷어붙이고 대대적인 퇴비증산운동을 벌였다. 농민들에겐 “고품질의 쌀을 생산하려면 화학비료와 농약의 사용을 줄이고 대신 퇴비를 많이 넣어 지력을 높여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또한 농가에는 오리농법 같은 친환경농법을 권장하고, 볍씨의 98%를 양질의 품종으로 보급하는 한편, 경지정리와 용수개발을 통해 농업생산의 기반을 강화했다. 이렇게 생산된 고창지역의 쌀은 ‘고창황토쌀’과 ‘고창고인돌쌀’이라는 고유 브랜드가 붙어 경향 각지로 팔려나간다.

    고창군의 이같은 농정 성과는 대외적으로도 널리 인정을 받았는데, 특히 ‘쌀생산 종합대책 평가’에서 고창군은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6년 연속 전라북도 최우수 군으로 선정됐다. 또 1998년과 2001년에는 전국 최우수 군으로 선정됐다. 그동안 ‘쌀생산 종합대책 평가’에서 받은 상금만도 37억3000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밖에도 고창군은 지난해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당시 각국 지도자들이 즐겨 마셨던 술로 유명해진 복분자술의 원활한 공급과 농가소득 증대를 위해 복분자 재배농가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전국 생산량의 20%에 달하는 고창 수박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수박축제도 개최한다. 그리고 양식산(養殖産)이 주종을 이루는 풍천장어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갯벌에서 키운 ‘갯벌풍천장어’를 개발해 그 이름을 고유상표로 등록했다.

    고창군이 관광자원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실시한 사업도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고인돌군 보존관리사업, 석정온천휴양지 조성사업, 선운산 생태숲 조성사업, 무장읍성 복원사업 등이다.

    고인돌군 보존사업은 1996년부터 2005년까지 10년 동안 계속되는데, 총 265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고창 고인돌 유적지를 세계적인 거석문화관광지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내년에는 세계 고인돌축제도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석정온천휴양지 조성사업은 ‘거쳐가는 관광지’에서 ‘머무르는 관광지’로의 변화를 꿈꾸는 고창군이 가장 기대를 거는 사업 중 하나다. 민간이 주도하는 이 사업은 한때 시공업체의 부도로 주춤했으나, 현재는 국내 유수의 건설업체가 새 사업주체로 확정되어 사업 추진에 가속도가 붙었다. 더욱이 몇 해 전에는 석정온천 인근에서 이른바 ‘도깨비도로’ 구간이 발견되어 이색적인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선운산 생태숲 조성사업은 생태환경이 좋은 선운산을 자연생태학습과 관광휴양기능을 겸비한 관광단지로 발전시키려는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다. 올해 안에 마무리될 무장읍성 복원사업에는 10억원의 사업비가 소요될 예정이다. 무장읍성은 갑오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의 1차 기병 현장이자 호남 서해안의 방어진지였는데, 지금은 성벽 일부와 객사, 누문(樓門), 동헌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이곳이 제 모습을 되찾으면 고창의 여러 사적지를 연계하는 관광벨트가 형성됨으로써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적잖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고창군이 농업과 관광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무엇보다 두드러진 성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재정운용의 효율성과 건전성이다. 고창군도 여느 지방자치단체와 다름없이 재정자립도가 10.84%(올해 기준)로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러니 지역살림을 튼실하게 꾸려가려면 중앙정부의 지원수입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예산을 효율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그런데도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전시효과를 노린 사업을 추진하는 바람에 자치단체의 재정상태를 파탄지경까지 몰고 간 자치단체장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하지만 고창군은 부채를 조기 상환하기 위해 예산절감계획을 꼼꼼히 세우고 예산을 집행했다. 예컨대 업무추진비 등과 같이 불요불급한 예산은 20%, 일반운영비 등의 경상비용은 10%를 절감한다는 목표를 설정했으며, 선심성 예산은 아예 입안하지 않도록 했다. 그 결과 지난해에만도 18억8900만원의 예산을 절감했고, 이자를 포함해 78억9400만원의 지방채를 조기에 상환하는 성과를 올렸다.

    게다가 고창군 지방채의 약 80%를 차지하던 부안댐 통합정수장의 건설부담금을 내년부터는 사업주체인 한국수자원공사가 떠맡게 됨으로써 그동안 고창군의 채무로 계상됐던 88억7900만원의 부담을 덜게 됐다. 여기에다 이미 상환한 14억3400만원을 환급받으면 고창군의 채무는 곧 ‘제로’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성과 덕분에 고창군은 감사원으로부터 재정운용의 모범사례로 꼽혀 행정자치부의 표창권고까지 받는 영예를 안았다.

    지난해 말 서해안고속도로 전구간이 개통되면서 고창으로 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졌다. 선운산 도립공원을 찾는 관광객의 수도 곱절 가까이 늘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가 고창군의 지역경제에 보탬이 될 것은 분명하다. 고창군이 머지않아 서해안지역의 대표 관광지로 부상할 수 있는 잠재력 또한 충분하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관광지가 되더라도 동리와 미당의 고향, 향토적 서정이 넘치는 고창에서만큼은 여느 유명 관광지의 얄팍한 상혼과 닳고닳은 인심과 맞닥뜨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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