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대한민국 영어 선생님들 당신네 죄를 아는가

  • 이문장 영국 에딘버러대 교수·신학

    입력2007-01-23 15: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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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말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중학교 입학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을 영어에 투자했다. 다른 사람들의 영어학습기를 읽으면서 거기 소개된 별난 작업들도 다 해봤다. 영어 청취 강사, 통역 등을 하면서 영어선생도 했다.

    그러다가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뒤인 1989년 초에 영어학습에 관한 오랜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대학시절의 선생님을 찾아가 내가 발견한 영어학습 방법론을 설명드렸더니 “신학을 그만두고 영어학을 하라”고 권유하셨다. 그러나 이미 신학에 뜻을 두었던 때라 그러기는 어려웠다.

    당시 내가 깨달은 것은 한국인의 조음구조와 영어 조음구조의 차이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그 후 2년여에 걸쳐 영어의 조음구조를 만드는 훈련을 그야말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했다. 그 결과, 예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영어의 소리 그 자체가 들려왔고, 영어의 세계가 보였다. 영어 발음뿐만 아니라 영어학습의 전반적인 방법론을 깨닫고, 전통적인 영어학습 방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 후 나는 예전에 배웠던 단어 공부, 숙어 공부, 문법 공부, 독해, 듣기, 발음 등 모든 것이 오류투성이였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요구하는 방법대로 긴 세월을 허송세월했다는 게 억울했다.

    그 후 약 9년간 미국과 영국에 살면서 그 방법을 정리하고 검증했다.

    그동안 한국인을 위해 이 영어 교육방법을 공개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신학으로 학위 과정을 시작한 입장이라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중 영국에서 신학박사 학위 논문이 끝나가던 지난 96년 여름, 에딘버러 대학의 응용언어학과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97년 10월부터 응용언어학을 공부하면서 내 이론을 체계화하고 영어교재 집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97년 3월 신학부 교수에 임용되는 바람에 응용언어학 공부는 당분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도 영어교재 집필작업은 틈틈이 해오고 있으며, 한국의 영어교육을 혁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다. 머지않아 종합적인 영어학습 방법론을 출판할 계획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공교육 부문의 영어교육이 정상화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필자 약력

    · 1959.1.30 출생 · 고려대 영문과 · 고려대 대학원 사학과 · 총신대 신학대학원 · 미국 고든-콘웰 신학교 · 미국 예일대 신학부 · 영국 에딘버러대 신학부 · 현재 에딘버러대 신학부 교수(1997년∼) · 영어와 관련해 공군참모총장 비서실 영문담당 장교 근무, 시중 학원, 문화센터 등에서 AFKN TV 강사. 선교사훈련원, 신학교 등에서 실용영어 음성학 강의. 1990년 TOEFL 673점


    얼마 전 한국 신문에 ‘내년부터 조기유학 전면 자유화 추진’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교육부의 재외동포 교육담당관이 자비유학 규제완화 방안 공청회에서 내년부터 초·중·고교생이 누구나 자유롭게 해외 유학을 갈 수 있도록 할 계획임을 밝혔다고 한다.

    이 기사가 특별히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이 계획의 이면에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흐름이란 다름아닌 영어에 대한 한국인의 좌절감이다. 영어로 인해 쌓인 좌절감은 그동안 영어연수 자유화, 초등학교 조기 영어교육 시행 및 영어 공용화론 등으로 표출돼 왔다. 여기에 국내 교육환경에 대한 불만이 겹치면서 조기 유학 욕구를 상승시켰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세계화의 바람과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정보화 시대의 도래가 영어의 필요성을 더 절박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국내 교육환경에 대해 불만이 많고, 영어에 대한 좌절감 및 필요성이 함께 고조돼 있는 상황이라면, 더 이상 조기 유학을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유학으로 발생하는 비용이 연간 몇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국내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분석도 일반의 정서를 억제하는 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조기 유학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손상을 가져오고, 국내 교육의 황폐화를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그러나 암울한 국내 교육환경에 계속 변화가 없고 교육 내실화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조기 유학 이외에 이런 현실을 타개할 방책이 정녕 없는 것일까? 영어로 인한 한국인의 좌절감과 한을 풀어줄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한국의 영어 공교육은 자포자기 상태로 방치될 수밖에 없는가? 이 글은 영어에 맺힌 한국인의 한은 한국의 영어 교육계가 발벗고 나서 풀어야 하며, 한국인에 맞는 영어 방법론를 찾아낸다면 엄청난 돈을 낭비하면서 ‘민족이동’을 감행하지 않아도 영어를 정복할 수 있음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영어 한(恨)은 풀어야 한다

    우리 민족은 한이 많은 민족이다. 한은 우리 민족의 내면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개념으로 여겨져 한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여러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도 한이 많다는 한국인들에게 영어 때문에 또 다른 한이 맺히는 기막힌 상황을 본다. 우리 부모들처럼 교육열이 높은 민족도 그리 많지 않다. 초·중·고교 시절에 한국 학생들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나라도 드물다. 그렇게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는데, 10년을 공부해도 외국인과 자연스러운 대화는커녕 영어로 말 한 마디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은 도대체 누구 잘못인가? 내가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잘못 배워서 그런가?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별로 똑똑한 친구가 아니었고, 학교 성적도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한 3년쯤 지난 뒤 그 친구를 만났는데,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라도, 완벽한 발음의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필자도 그 사이 한국에서 거의 대부분 시간을 영어 공부에 할애하며 그야말로 죽어라 공부했는데, 그 친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필자는 영어에 관해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았다. “나도 미국에 가면 너보다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어린 가슴에 한으로 맺혔다. 영어에 대한 그런 한은 그 후 오랫동안 풀리지 않고 오히려 쌓여만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영어에 대한 한국인의 한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이고 어른이고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다.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대학생은 대학생대로 영어가 골치다. 대학마다 취직을 위해 전공은 제쳐두고 영어 공부에 매달린다는 말도 들린다. 유학생들은 스트레스가 더 많다. 학기마다 제출하는 논문들, 시험들…. 한 마디로 영어가 원수다.

    영어를 정복했다는 사람들의 체험담을 읽으면, 길거리에 지나가는 외국인을 붙잡고 영어 한 마디를 연습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필자 역시 그런 일을 많이 했다. 그때는 용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얼굴이 붉어진다. 말 한 마디 구걸하려고 그런 궁색한 짓을 했다는 것이 한심한 것이다.

    외국에 살면서 한국을 바라보니 더 속상하다. 영어 때문에 한국인들이 수모를 당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영어에 쏟아붓는 돈은 얼마인가? 학교에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영어 교육을 시키는가?

    이제 한국의 영어교육은 정말 근본적인 전환 없이는 정말 곤란하다. 영어에 대한 한국인의 한은 영어 공용화나 조기유학 규제 완화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그러면 조기 유학을 허용할 경우, 조기 유학을 못 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한국에 남아 있는 어른들은 자포자기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가? 영어에 대한 한국인의 한은 영어 교육계가 풀어야 한다. 조기 유학을 보내려는 생각이나 영어 공용화라는 발상의 근원이 영어에 맺힌 한이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은 영어 교육을 통해서 풀어야 한다.

    모두가 잘못된 영어 교육의 피해자

    지금까지 한국에서 영어 교육을 받고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따라 한 사람들이야말로 영어 교육의 피해자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한국의 중·고교 영어 교과서의 수준과 분량 때문이다. 현재 국내 중·고교에서 사용하는 영어 교과서는 한 마디로 한심할 정도로 수준이 낮다. 그런 수준의 교재와 분량을 가지고 영어를 잘하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것이다.

    현재 중학교 1학년 영어 교과서의 내용을 보라. 그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해 보면 어떻게 이런 내용을 1년씩이나 가르칠 수 있을까 답답하기 짝이 없다. 중 1 영어 교과서와 중 1 국어 교과서를 비교해보면 영어 교과서의 내용이 형편 없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고등학교 3학년 영어 교과서의 내용을 한국말로 번역해봐도 중 1 학생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중학교 1학년이면 신문이나 잡지를 읽고 이해할 나이다. 만일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를 영어로 번역한다면, 대학생들이 읽는 영어 교재 수준에 육박할지 모른다. 물론 영어를 배우려면 쉬운 것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외국어로 배우는 영어와 모국어로 익힌 한국말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전통적인 설명이고, 상투적인 발상일 뿐이다.

    현행 중·고 영어 교과서를 갖고는 절대로 영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 영어 교과서의 분량을 보자. 현행 교과서의 한 과 본문 분량은 4∼5쪽밖에 안 된다. 1년에 12∼13과를 공부하는데, 그 정도 분량으로 어느 세월에 영어다운 영어를 익힐 수 있겠는가? 학교 수업시간에 가르치기에는 그 정도가 알맞은 분량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교과서 이외의 독해는 각자 알아서 해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또는, 그 정도의 진도도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이 부지기수라고 변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현행 중·고교 영어 교육을 충실하게 받고서 영어를 읽고, 말하고, 듣고, 쓰는 데 과연 어느 정도 실력을 키울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영어 교육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영어에 관한 잘못된 고정관념들

    한국인은 모두 잘못된 영어교육 방법론의 피해자들이다. 한국의 영어 교육은 언어 습득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을 죽이는 교육이다. 두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첫째는 한국의 영어 교육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둘째는 한국의 영어 교육은 영어식 사고를 못 하게 만들었다.

    요즘에는 학교에서 듣기 훈련을 강화하고 듣기 평가도 도입해서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학교에서 실시하는 듣기 교육은 방향이 잘못돼 있다. 학교에서는 영어 단어를 가르치면서 철자(spelling)를 외우게 한다. 그런데 이것이 듣는 능력을 죽이는 것임을 모르고 있다.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면 철자는 힘들이지 않고도 알게 된다. 영국이나 미국에는 철자 맞추기 대회(spelling bee)가 있다. 여러 음절의 단어를 발음하면 아이가 철자를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어에 입문할 때부터 철자를 외우게 했다. 몇 년에 걸쳐 그 엄청난 단어의 철자를 일일이 다 외웠다. 철자를 모른다고 야단도 많이 맞았다. 그 결과 소리를 듣고 철자를 알아맞추는 능력이 죽어 버렸다.

    한국에서 웬만큼 영어를 공부했다는 사람들도 영어의 소리 그 자체를 듣지 못한다. 눈앞에 스펠링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영어의 소리 자체는 철자를 익히기 전에 습득해야 한다. 문자의 세계로 들어가기 이전에 소리의 세계로 들어갔어야 했다. 일단 문자의 세계로 들어가고 나면 소리의 세계는 들어가기가 어려워진다.

    예컨대 ‘스쿨’이라는 소리가 들리면 머릿속에서 학교가 연상돼야 하는데, s-c-h-o-o-l이라는 철자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영어를 들을 때, 뜻을 듣지 말고 소리를 들으라고 해도 영어 단어가 눈 앞에 어른거리고 영어 문장이 어른거린다. 영어 소리를 들으면 곧장 뜻을 알아야 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일단 단어나 영어 문장이 눈앞에 나타나고, 그것을 해석하고 있다.

    원래 듣기(listening)는 소리를 들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듣기는 뜻을 들으려고만 하고 있다. 우리 귀에 들어오는 것은 소리다. 소리가 들어오고, 그 소리가 자동적으로 뜻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소리는 듣지 않고 뜻을 들으려고 한다. 영어가 잘 들린다는 말을 뜻을 알겠다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건 말이 안되는 소리다.

    영어에 대한 잘못된 고정 관념들이 너무 많다. 한국의 영어 학습자들은 영어 방송이나 테이프를 틀어놓고 무슨 뜻인지 들으려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소리를 듣는 능력을 죽여놓고서 뜻을 듣도록 듣기 훈련을 시키는 것은 병 주고 약 주는 꼴이다.

    영어식 사고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영어교육은 영어식 얼개를 습득하도록 가르친 적이 없으면서도 한국인 학습자들에게 영어식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오히려 영어의 얼개를 갖지 못하게 하는 교육을 받았다. 분통 터지는 일이지만 사실이다.

    한국인은 영어에 입문할 때부터 영어 문장을 번역하도록 교육받았다. “This is a book.”을 읽고 “이것은 책이다”로 번역했다.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영어 수업, 교실 바깥의 모든 독해는 이런 연습의 연장이었다. 읽기는 영어를 읽었는데, 그것을 한국어로 깨트려 한국식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영어식 사고는 “이것은/이다/한 권의 책”인데, 우리는 그런 영어식 논리를 익혀본 적이 없다.

    우리는 흔히 영어는 어학에 재능이 있어야 잘할 수가 있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렵다는 말을 한다. 이것도 역시 영어 교육이 낳은 잘못된 고정 관념이다. 아니면, 현재의 영어교육 시스템을 고수하는 한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지금과 같은 시스템에도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어학에 재능이 있다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학생들이 어학적 재능이 모자라거나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에 영어를 못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제는 이런 고정관념을 버려도 좋다. 중·고교 시절에 나름대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부지기수다. 월말, 중간, 기말, 학년말 고사가 버티고 있는데 영어 공부를 하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는가? 영어 성적이 형편없는 것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야단맞기도 했다. 사정이 이랬으니 영어를 못 하는 것은 어학에 재능이 없는 것이고, 내가 열심히 하지 않은 탓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 아님은 외국에 나와서 현지 학교에 들어가는 한국 아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온 아이는 대부분 제 나이에 맞는 학년으로 들어간다. 영어권에 처음 왔다고 해서 “I am a boy. This is a book.”부터 시작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한국에서 영어를 공부하지 않았던 아이도 경험상 대개 6개월이 지나면 기본적인 대화를 하고 선생님 말을 알아듣는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1년 정도 지나면 읽기도 웬만큼 따라간다.

    이런 현상을 두 가지로 해석해볼 수 있다. 하나는, 영어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영어만을 사용하는 환경이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며, 한국에서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영어 환경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또 다른 해석은, 한국에 있는 한국 아이들도 어학적 재능과 상관없이 그렇게 영어를 습득할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외국에 나오는 한국 아이들이 모두 어학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영국이나 미국의 학교에 들어가서 한결같이 영어를 습득하는 것을 보면, 어학적 재질이 꼭 있어야 영어가 트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어학적 재능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영어 학습의 올바른 방법론이 문제다.

    한국의 영어 교육은 한국인의 한국어 실력을 영어화하는 방법으로 개발해야 한다. 중·고등학생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한국에 있는 중학교 1학년이나 미국, 영국의 중학교 1학년이나 언어습득 수준은 비슷하다. 언어해독 능력, 구사능력도 마찬가지다. 단지 한국 학생은 한국어를 잘하고 영어권 학생들은 영어를 잘하는 차이일 뿐이다. 한국 학생들의 언어 능력이 모자란 게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한국어를 읽고 이해하고, 또 쓸 수 있는 내용들을 영어화시켜 주는 방법을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한국 학생이 가지고 있는 언어 데이터의 70∼80%만이라도 영어화시킬 수 있다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이면 자기가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말이나 글로 웬만큼 표현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외국의 현지 초등학교 5∼6학년이면 한국의 고등학교 교과서 수준의 영어는 쉽게 이해한다. 읽는 분량도 매우 많다. 우리가 영어로 그들과 경쟁하려면 우리의 영어 교육의 수준과 부피를 늘려야 한다. 한국의 초등학교 5학년에 해당하는 필자의 큰아이가 같은 반 아이들이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 Digest)’를 읽고 재미있다고 해서 자기도 읽는다고 했다. 현지의 중학교 1학년이 되면 영어 수준은 더 올라간다. 외국에 있는 한국 초등학교 5학년생이 (개념어를 이해하는 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겠지만) 한국 고등학교 2~3학년 수준의 영어 교과서를 어렵지 않게 해독한다면, 한국에 있는 한국 아이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한국의 중·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한국 학생들, 한국인들의 어학적 재능을 더 이상 탓하지 말자. 이제는 영어 교육계의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 방법론상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영어 소리의 세계

    우리가 가진 영어의 한은 공교육에서 풀어야 한다. 물론 사교육 현장에서 갖가지 방안들이 실험되고 제시되고 있지만, 공교육을 책임진 사람들이 나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줘야 한다. 조기 유학, 영어 연수, 영어 공용화론 등 현상의 이면에는 영어 교육의 실패라는 현실이 있다. 공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반성하고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두 가지 측면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첫째는 소리 영어의 세계를 익히는 방법을 찾아주어야 하고, 둘째는 한국어를 영어로 옮기는 방법을 찾아주어야 한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지구상의 모든 언어는 활자(문자)의 세계와 소리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한국어를 배운 것도 소리의 세계와 문자의 세계를 함께 배웠다. 과거에는 소리의 세계는 익혔지만 문자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문맹자들이다. 필자의 할머니도 평생 한글을 깨치지 못하고 사셨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는 아직도 문자문화(literal culture)가 아닌 소리 문화(oral culture)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말은 문맹자가 아닌 사람들보다 더 잘할 수 있다. 시각 장애인의 경우 청각이 특별히 발달하는 것이 이와 유사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관찰은 영어 교육과 관련하여 중요한 점을 시사해 준다. 즉, 문자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아도 소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자세계를 몰라도 유창하게 말하고 듣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소리의 세계를 교육해야 한다는 것은 발성훈련, 듣기훈련을 강화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소리의 교육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방법론의 개발을 요구한다. 앞에서 문자의 세계를 모르면서도 소리의 세계에서 언어를 훌륭히 터득하고 일평생 언어생활을 무리없이 영위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언급했다. 이러한 상식적인 관찰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실은, 소리의 세계에도 문자의 세계와 동일한 법칙과 체계가 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소리를 통한 단어 습득, 소리를 통한 숙어 습득, 소리를 통한 말법(문자세계의 문법)의 습득은 가능하다. 한국의 문맹자도 소리를 통해서 단어, 숙어, 문장, 말법을 터득했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상대방이 내는 소리를 들으면 상대가 외국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정확한 모국어의 소리를 익혔기 때문이다. 이 단계가 발성 및 듣기훈련이다.

    그 다음은 단어를 습득하고, 단어들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열하는 법을 체득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전과정이 소리의 세계에서 이뤄진다. 한국의 영어 교육계는 바로 이 과정을 규명하고 교육해야 한다. 이러한 소리의 세계를 규명하고 교육할 수 있다면, 한국인의 영어 정복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여기에서는 간략히 자음, 모음의 발성 단계만 검토해 보려고 한다.

    정인석씨의 발성훈련법에 대해서

    영어의 소리세계를 규명하기 위한 첫번째 과제는 우리말 소리와 영어 소리 사이의 차이를 밝히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어와 영어의 소리에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째서 다른지, 그 차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등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아직 없었다. 우리말의 [이] 소리와 영어의 [i] 소리는 다르다. 영한사전의 발음 설명을 보면, 영어의 [i]는 우리말의 [이]보다 혀의 긴장을 풀고 발음해야 한다든지 혹은 우리말의 [이]와 [에]의 중간 소리라고 설명돼 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을 이해할 수 있는 한국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첫째, 영어의 개별 자음, 모음들이 우리말의 자음, 모음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야 한다. 둘째, 영어 음절들 사이에 나타나는 소리의 패턴, 리듬의 패턴이 한국어를 말하는 방식과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한국어를 말하는 것을 들으면 아주 우스꽝스럽게 발음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어를 발음할 때 영미인들에게는 아주 우습게 들릴 것이다. 그들은 왜 그렇게 발음하는지, 우리는 왜 영어 발음이 잘 안 되는지 이론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한국어의 소리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이 한국인의 고민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듣고 따라 하세요(listen and repeat)”라는 말이 전부다. 외국인은 한국인의 틀린 발음을 지적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교정할 수 있는지 설명해 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1999년 6, 7월호 ‘신동아’에 소개된 정인석씨처럼 독자적으로 발성이론을 개척한 사람들의 주장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필자가 정인석씨를 언급하는 것은 그가 주장하는 방법에 모두 동의하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현행 영어교육 방식이 계속된다면 영어에 한을 가진 사람들이 정인석씨처럼 홀로서기를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정인석씨가 지적하는 영어 교육의 문제점들은 이미 잘 알려진 것들이다. 글보다 말이 앞선다는 지적이나 한국어 소리와 영어 소리가 다르다는 지적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의 주장에서 특기할 부분은, “그렇다면 한국인이 어떻게 영어의 본토발음을 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변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정인석씨는 한국인의 구강구조를 바꾸고 발성훈련을 통해 본토 발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사실 이런 말은 영어학자들도 이론적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문제는 체험적인 차원에서 그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영어학자가 한국에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주장을 공개적으로 내놓으려면, 자신이 먼저 본토 발음을 체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영어학자들 혹은 영어 교육자들 중 본토 발음을 체득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

    필자가 ‘신동아’에 소개된 내용을 근거로 판단해 볼 때, 정인석씨의 발성훈련은 조음구조(소리를 만드는 구강구조)를 바꿀 수 있는 훈련은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우리 말 소리와는 다른 영어의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한 방법을 익히는 훈련이다. 우리는 조음구조를 말할 때 구강을 움직이는 근육과 혀의 위치에 주목한다(이 말은 필자 나름의 이론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한국인은 한국어를 발음하기에 가장 편한 구조를, 영미인은 영어를 발음하기에 가장 편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이 영어를 발음하기 어렵고, 영미인이 한국어를 발음하기 어려운 것이다. 똑같은 사람의 입이지만 차이가 있다. 발성할 때 움직이는 근육과 혀의 위치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정인석씨의 주장처럼 영어의 소리는 한국어 소리와는 달리 하복부로부터 올라오고 구강 안에서 빙빙 도는 굴절음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가 설명하려는 현상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영어의 음가가 한국어와 다르고, 영어를 발음하기 위한 근육의 운동이나 혀의 움직임이 다르기 때문에 영어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조음환경을 자연스럽게 만들려면 발성할 때에 힘이 들어가야 한다. 배에 힘을 주고 세게 발음하면 영어 발성이 쉽다. 그러나 영어 발성에 어느 정도 숙달되면 의식적으로 배에 힘을 주지 않고, 한국어를 발음할 때와 비슷한 발성 환경에서 발음해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게 된다. 영미인들도 입 안에서 중얼중얼하는 사람이 많다.

    발음은 꼭 좋아야 하는가

    우리가 가진 조음구조는 아기의 옹알이로 시작하여 대개 12세 전후에 완성된다. 태어날 때부터 조음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 태어난 한국 아이가 영어를 주로 사용하면 영어의 조음구조를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해 조음구조는 후천적이다.

    12세가 지나면 이러한 조음구조는 고착되고 굳어진다. 따라서 12세를 훨씬 넘긴 30대, 40대 혹은 칠순 노인들이 조음구조를 바꾼다는 것은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필자는 한국에 있을 때 조음구조 전환 훈련을 몇 년에 걸쳐 했고, 그 결과 한국어 조음구조와 영어의 조음구조를 동시에 활용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그것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내가 보기에도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의 별난 연습을 요하는 것이었다.

    조음구조가 바뀌어서 영어 소리를 내는 사람은 예전에 심야 토크쇼를 진행하던 쟈니 윤과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영어의 조음구조로 바꾸지 않아도, 연습과 모방을 통해 훌륭하게 본토 발음에 유사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항은, 우리가 꼭 본토 발음을 내려고 애쓰거나 그것 때문에 주눅이 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가르치는 학생들 가운데는 영미 쪽 학생도 있지만, 아프리카, 남미, 인도, 중국계(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학생들도 많다. 인도 학생은 인도식 발음으로, 중국계 학생은 중국식 발음으로, 아프리카 학생들은 아프리카식 발음으로 영어를 한다. 그들이 각양각색의 악센트로 발음한다 해도 그들의 영어는 대단히 수준 있고 유창한 것이다. 학문적으로 심도 있는 내용들을 토론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한국 사람이 한국식 악센트로 영어를 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다만 그 사람이 하는 말에 어떤 내용이 실려 있는지, 들을 만한 말을 하는 것인지 그것이 문제일 뿐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학생이라고 모두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것은 영어를 매개로 전달되는 대화나 글의 내용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좋은 발음을 습득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발음이 훌륭하다고 해서 반드시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필자는 조음구조까지 바꾸면서 영어를 익힐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외교관, 영어 선생, 스파이, 그리고 선교사 정도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연습한 것에 비추어 영어 발성의 특징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영어 발성과 한국어의 발성은 서로 사용되는 근육이 다르다.

    ② 영어는 구강의 상하운동 및 좌우운동이 한국어보다 더 크다.

    ③ 영어 발성의 경우, 혀는 보통 아래에 내려와 있고 혀 끝이 아랫니 뒤에 살짝 닿아 있지만, 한국어의 경우에는 혀가 위의 잇몸에 붙어 있다(이 글을 읽는 독자는 현재 혀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 보라).

    ④ 영어의 소리는 공명이 되는 것으로 들리는데, 그것은 혀가 이동하면서 소리가 나오는 통로를 위쪽으로 밀어 올리기 때문이다.

    ⑤ 영어의 음절 사이에는 리듬이 (달리 말해서 강세가) 반드시 들어가는데, 그것은 영어 조음구조에서는 그렇게 발음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이런 리듬은 한국어에는 없다.

    영어에는 소리의 강약만이 아니라 장단도 있다. 길게 발음하기 위해서 강하게 소리내는 것이고, 짧으면 약하게 발음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차이를 알고 연습하면서 소리를 따라해 보면 발성 감각이 현저하게 달라진다. 한국인 영어학자 혹은 음성학자들은 영어 소리와 한국어 소리의 이러한 차이를 규명하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 외국인이 자기네 소리를 규명한 영어 음성학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한국인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의 영어교육은 소리의 세계를 밝히는 데에 실패했다. 그렇다면 문자 영어 교육은 어떠했나? 필자가 보기에는 문자 영어 교육도 방법론상 문제가 많다. 문자 영어의 세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영어를 읽고 그것을 한국어로 독해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어를 영어로 옮기는 작업이다.

    이중 우리의 영어 교육은 전자에 집중돼 있다. 한국에서 발간되는 거의 대부분 영어 교재들은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을 영어 독해라고 부른다. 영어 독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영어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단어, 숙어, 문법 등을 공부한다.

    영어의 소리 학습이 중요하지만, 문자를 익히기 위한 문법 학습도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법 위주의 영어 교육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문법은 문법대로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인이 배운 독해는, 영어를 읽고 곧장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한 과정이 더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읽은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translation) 혹은 해독(decoding)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즉, 한국의 문자 영어교육은 영어를 가능한 한 빠르게 한국어로 해독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엄밀히 말하면 독해라기보다는 ‘빠른 번역’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숙달되면 영어를 읽고 바로 이해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수준에 이르러서도 그것은 엄연히 ‘빠른 번역’이 좀더 빨라진 것에 불과하다.

    이것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직독직해 방법들이 고안됐다. 이러한 번역과정 자체가 문제 되지는 않는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렇게 독해를 가르치면 영어식 사고 혹은 영어식 논리를 배울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예컨대 한국인은 ‘I go to school.’이라는 문장을 읽은 다음, 그것을 ‘나는 학교에 간다’는 한국어로 변환시켜 머리에 입력하도록 배웠다. 읽기는 영어로 읽고, 그것을 한국어 구문으로 깨트리고 바꾸어서 이해하도록 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영어 말의 흐름을 한국어의 구조로 재빠르게 변환시키는 것을 영어 실력이 좋다고 말했다. 영어를 읽으면서도 우리는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말을 이상하게 한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다. 만일 어떤 한국 사람이 “나는/간다/학교에/버스로/일찍/아침마다” 이렇게 한국말을 했다면, 아마도 “저 사람 혹시 어떻게 된 거 아니야?”라고 할 것이다. 우리의 언어 감각과 큰 차이가 즉각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어 문장으로 “I go to school by bus early every morning.”이라고 읽으면 그런 감각상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I/every morning/early/by bus/to school/go.”라는 한국어 구조(나는/아침마다/일찍/버스로/학교에/간다)로 바꾸어 입력을 했고, 그것이 영어와 한국어 사이의 논리적 차이를 감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영어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영어를 한국어화시키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는 단어’도 쓰지 못하는 이유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할 때에는 영어의 한국어화가 필요한 일이지만, 이것은 영어 독해의 본래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우리는 영어세계 그 자체, 즉 문자영어의 세계로 들어가는 교육을 받았다기보다는, 영어를 한국어로 빠르게 해독하는 하나의 시스템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을 갖고서 영어의 문자세계로 들어가서 빠른 읽기를 익힌 사람들은 정말로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영어 교육이 이런 방법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단어, 숙어, 문법을 공부하는 방식이 틀렸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내가 아는 단어야” 혹은 “나는 이 단어를 외웠어”라는 말은 그 영어 단어의 한국어 뜻을 안다는 말이다.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grape’라는 단어를 보면, ‘포도’라는 한국어가 먼저 떠오른다. 물론 자주 접해서 익숙한 단어인 경우 한국어와 실제 그림이 동시에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 한국인들은 단어를 처음 익힐 때, ‘grape’라는 단어는 한국어로 ‘포도’라고 외웠다.

    우리는 한국어로 ‘포도’라는 단어를 보면, 즉각적으로 그림이 연상되고, 먹고 싶다든지 시다는 감각적 반응을 보인다. 다시 말해, 단어와 그림 사이에 다른 언어가 개입되지 않는다. 번역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영어를 습득할 때에는 반드시 한국어로 입력했기 때문에, 단어를 보면 어쩔 수 없이 한국어 번역이 먼저 떠오르게 된다. 이럴 때 영어를 읽으면서 한국어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영어를 읽고 곧장 그림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개발돼야 한다.

    우리말을 영어로 옮기는 작업은 그보다 더 답답한 상황이다.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영어로 옮길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런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아본 적이 없다. 작문이라고 해서 조금 끄적거려 본 적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독해와 대등하게 중요한 작업임을 깨닫지 못했다.

    우리말을 영어로 옮기는 작업이 소위 말하는 ‘작문’은 아니다. 주어진 한국어 문장을 영어로 옮기는 것은 번역이지 작문이 아니다. 본래 의미의 작문은 영어학습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한국어 작문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는 별개의 문제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학생들도 작문을 어려워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문자 영어로 옮기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생각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문장으로, 영어다운 영어로 옮기는 훈련이 필요하다. 한국어로 떠오르는 우리의 생각을 곧장 영어로 옮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사람을 이중언어자(bilingualist)라고 부른다.

    생각은 한국어로 하되, 그것을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 대한 방법론적인 연구가 있어야 한다.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도 학습의 법칙이 있듯이, 한국어를 영어로 옮기는 작업에도 필요한 방법과 훈련이 있다. 단어 공부, 숙어 공부, 영어 문장의 얼개 연습, 문법 공부 등에 새로운 방법이 더해져야 한다.

    한국어를 영어로 옮기는 작업을 하다 보면 (영어로 말하는 경우에도 그렇지만) 내가 안다고 생각한 단어들을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 상황에 적합한 단어를 구사하지 못해 쩔쩔매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우리가 단어를 외우는 방식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어 단어가 한국어로 무슨 뜻인지만 열심히 외웠지, 반대로 한국어 단어를 영어로는 무어라고 하는지는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영어 고민, 한국인이 풀어야

    이렇게 보면 현행 영어교육이 영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인지, 아니면 방해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한국어를 영어다운 영어로 표현할 수 있으려면 영어의 얼개를 익혀야 하고, 영어 문법을 이론이 아닌 감각으로 체득하고, 또한 한국어에 해당하는 영어식 표현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런 부분을 배운 적이 없다. 그렇다고 외국인이 이런 부분을 도와줄 수도 없다. 외국인은 한국어의 세계를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인이 한국어를 영어로 옮기려고 할 때 어떤 고민이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알 턱이 없다. 이는 한국의 영어 교육계가 풀어야 할 숙제인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한국인의 영어 학습에서 고질적인 문제점들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지적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잘못된 시스템이 잘못된 고정관념을 낳았다. 영어교육에 관한 한 한국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당연한 것인 양 말하고 있다. 이게 모두 영어교육계가 잘못한 탓이다.

    필자는 영어에 맺힌 한국인의 한은 공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발벗고 나서 해답을 찾아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것은 (공)교육이 국민의 한을 풀어주고 실력을 키워주는 책임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한국의 영어교육은 (영어학자들의 역할을 포함해서)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효율적인 영어학습 방법을 연구, 개발 및 적용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필자의 진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은 모두 잘못된 영어교육의 피해자라고 감히 항변하는 것이다.

    한국의 영어교육이 한국인 영어 학습자들이 안고 있는 고민을 해결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을 찾지 못했던 이유는, (필자의 생각에는) 부분적으로 외국어 습득에 대한 외국 학자들의 이론이나 방법론을 도입해 실험했기 때문이다. 한국어의 소리 세계를 모르는 외국의 음성학자들이 어떻게 한국인들의 고민과 어려움을 알 수 있는가?

    한국 영어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꿔야만 한다. 영어의 문자 세계와 더불어 소리 세계를 습득하는 방법을 규명하고, 영어를 읽고 영어로 이해하는 방법, 그리고 한국어를 영어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규명해줄 수만 있다면 영어에 맺힌 한국인의 한을 풀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새 천년의 문턱에서 영어를 정복하고 국제적인 지도력을 갖출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영어교육 방안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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