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호

史記에 길을 묻다

충고하고 지적하고 바로잡으라!

제나라 위왕의 ‘소통 리더십’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입력2016-02-22 14: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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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외교 할 것 없이 연일 ‘불통 리더십’이 지면을 달군다.
    • 리더에게 요구되는 많은 자질 중에서도 소통은 맨 윗자리를 차지한다.
    • 불통 리더십에서 소통 리더십으로 거듭나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이끈 역사적 사례를 통해 우리 현실을 성찰해본다.
    소통을 모르는 통치자와 정권은 예외 없이 사상과 언론을 통제하고 탄압한다. 이로 인해 독재 정권과 권위주의 정권은 늘 유언비어에 시달리고 이를 두려워한다. 이런 정권 아래서 발생하는 유언비어는 학자들이 진단하듯 병적인 것도 아니고 남을 속이려는 수법의 결과물도 아니다. ‘불안하고 애매모호한 상황을 이해하려는 백성들의 은밀하고도 성실한 시도’일 따름이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은 사상·언론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다. 유언비어조차 극단적인 방법으로 통제했다. 그 결과물은 ‘우어기시(偶語棄市)’라는 말로 압축된다. 두 사람이 짝을 지어 속닥거려도 저잣거리에서 공개 처형한다는 악법이었다. 백성의 생활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사기(史記)’에서 이 성어는 두 군데 나타난다. 하나는 이 가혹한 법을 제정한 장본인 진시황의 행적을 수록한 ‘진시황본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 법을 비롯해 진나라의 가혹한 법들을 폐지해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요약한 한나라 고조 유방의 일대기 ‘고조본기’다. 참으로 공교롭다.    
    ‘우어기시’라는 극단적 조치는 이사(李斯)의 발상에서 나왔다. 이 조치는 사상 탄압의 일환으로 ‘시(詩)’나 ‘서(書)’에 대해 두 사람 이상이 이야기를 하면 처형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고조본기’에 와서는 ‘모여서 의논하는 사람들은 저잣거리에서 사형을 당했다’는 의미로 확대됐다. 언론 탄압의 범위가 애매하고 포괄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당초 ‘시’나 ‘서’에 대한 논의를 처벌하던 것에서 그저 두 사  람 이상이 모여 수군거리기만 해도 극형에 처하는 것으로 법 적용이 확대된 건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雍蔽之, 國傷也

    사상과 언론이 탄압을 받으면 유언비어가 전염병처럼 퍼진다. 궁극적으로 정권마저 감염시켜 쓰러뜨린다. 유언비어는 표면에 드러난 말보다 더 많은 걸 말하고 싶어 하며, 그 은밀함 때문에 더 중요하고 타당할 때도 있다. 그 속에 백성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정권이 유언비어를 두려워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유언비어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려는 자들이 있다. 백성은 이 점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옹폐지(雍蔽之), 국상야(國傷也)’는 언론이 통제되거나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점을 함축한 명언이다. 진나라가 그리도 빨리 무너져버린 원인을 따지는 자리에서 사마천이 한나라 초기 정치사상가 가의(賈誼·기원전 200~168)가 진나라의 실정(失政)을 전문적으로 비평한 ‘과진론(過秦論)’이란 글을 빌려 한 말이다.
    ‘옹(雍)’은 물의 흐름을 막는다는 뜻이고 ‘폐(蔽)’는 차단하고 가린다는 의미다. 요컨대 위의 뜻이 아래로 전달되지 못하고, 아래의 감정은 더욱 위로 전달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서로 감추고 숨기는 바람에 나라의 혈관이 막힌다. 그다음은 멸망의 길이다. 정보 전달 기능을 상실한 조직이 활력을 잃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론 분별없는 저질 언론, 확고한 자기 철학과 방향성을 상실한 언론 또한 나라를 망치는 주범이다. 언론이 불통의 통치자에게 어떤 행태를 보이는지 사납게 지켜봐야 할 중요한 이유다.
    기원전 379년 전인(田因)은 제(齊)나라 제후이던 아버지를 계승해 새 제후가 됐다. 전인은 오(吳)와 월(越)나라의 뒤를 따라 제후 명칭을 버리고 스스로를 왕으로 불렀으니, 그가 바로 제 위왕(威王)이다. 위왕은 자만에 빠져 매일 가무와 여색에 도취해 조정을 돌보지 않았다. 여기에 부패한 정치의 틈을 노려 한(韓), 위(魏), 노(魯), 조(趙)나라 등이 서로 군대를 일으켜 계속 공격하니 제나라를 지키려는 변방의 장수들은 싸울 투지마저 없어 매번 전투에서 패했다. 적지 않은 국토가 적국의 손에 넘어갔다.
    이런 마당에도 위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 당시 일개 하층 지식인에 불과하던 추기(鄒忌)의 마음은 불타는 듯 초조했다. 그는 나라의 면모를 개변하려면 반드시 위왕의 정신상태를 돌려놔야 하고, 이를 위해선 어떤 방법을 쓰든 위왕을 자극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추기는 사흘 밤낮을 고민한 끝에 한 가지 방책을 생각해냈다.

    거문고와 統治의 이치

    추기는 의복을 갖춰 입고 왕궁으로 가서 사람을 넣어 왕을 만났다.
    “대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거문고에 대해 나름 연구한 게 있어 찾아뵙게 됐습니다.”
    음주가무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던 위왕은 추기가 거문고 얘기를 하자 몹시 들떠 좌우 시종들에게 명해 거문고를 추기의 면전에 놓게 했다. 추기는 거문고 줄 위에 손을 얹고는 눈을 감았다. 위왕은 잔뜩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추기를 바라봤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추기는 줄에 손을 얹은 채 요지부동이었다. 위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선생께서 스스로 거문고에 대해 잘 안다고 하여 거문고 타는 솜씨를 감상하려는데 줄만 어루만지니 혹시 거문고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오? 아니면 과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겝니까?”
    추기는 거문고를 한쪽으로 밀어놓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신이 잘 안다고 말씀드린 것은 거문고 소리에 관한 이치입니다. 거문고를 타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건 악공(樂公)의 몫이지요. 신이 비록 거문고 소리의 이치를 알고 있다고는 하나 그걸 듣고 왕께서 욕하시면 어쩌나 걱정돼서 이렇게 머뭇거립니다.”
    위왕은 다소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러면 먼저 거문고의 이치에 대해 말해보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추기는 이렇게 말했다.
    “거문고를 뜻하는 ‘금(琴)’이라는 글자는 ‘금(禁)’자와 통합니다. 즉 음탕하고 사악한 것을 금하고 모든 것을 올바르게 돌려놓는다는 뜻입니다. 태고 때 복희씨(伏羲氏)가 거문고를 만들면서 길이는 석 자 여섯 치 일곱 푼으로 하여 1년 366일을 본떴고, 그 폭은 여섯 치로 육합(六合)을 상징했습니다. 앞이 넓고 뒤가 좁은 것은 귀한 것과 천한 것을 구분하기 위해섭니다. 위가 둥글고 네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상징합니다. 줄이 5개인 것은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오행을, 큰 줄은 군주를, 작은 줄은 신하를 말합니다. 소리에 완급이 있는 것은 청탁(淸濁)을 표현하고자 함인데, 탁한 소리는 너그럽되 절제가 있으니 이는 임금의 도를 말하고, 청한 소리는 깨끗하나 어지럽지 않으니 이는 신하의 도리를 말합니다. 군신 간에 서로 믿게 되면 정치의 명령이 조화를 이룹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이치와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위왕은 추기의 설명에 흥미를 갖긴 했지만 여전히 그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말했다.
    “거문고에 대한 선생의 설명은 참으로 좋습니다. 선생께서 이미 거문고의 이치를 깨닫고 있으니 필시 그 음(音)에도 정통하리라 생각하오. 원컨대 선생은 나를 위해 거문고를 한번 타보시기 바라오.”


    누가 더 잘생겼나

    그러자 추기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의 업은 거문고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라 거문고에 정통한 건 당연합니다. 하온대 대왕의 업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인데 어찌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에 정통하지 못하십니까. 대왕께선 신이 거문고를 어루만지기만 하듯 나라를 9년 동안이나 어루만지기만 할 뿐 다스리지 않으시니 백성의 마음이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
    추기의 이 말에 위왕은 문득 깨달은 바 있어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황급히 말했다.
    “선생의 뜻을 알았습니다. 과인이 삼가 선생의 말씀을 따르겠소이다!”
    위왕은 추기를 자기 침소의 오른쪽 방에 머물도록 했다. 다음 날 아침 위왕은 목욕재계한 다음 추기를 불러 치국(治國)의 도리를 물었고, 추기는 치국의 이치와 방법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얼마 후 위왕은 추기를 재상으로 삼고 자신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게 했다. 위왕은 이렇게 대오 각성하고 추기와 호흡을 맞춰 제나라 중흥을 위한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추기는 미남이었다. 일쑤 거울을 보며 잘생긴 용모에 스스로 감탄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에게 도성 북쪽의 서공과 자신을 비교할 때 누가 더 미남이냐고 물었다. 아내는 “당연히 당신이 더 잘생겼지요”라고 대답했다. 첩에게 물어도,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물어도 답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서공의 실물을 보니 아무리 봐도 자기보다 더 잘생겼다. 추기는 ‘이들은 왜 내가 더 잘생겼다고 할까’ 하며 고민에 빠졌다.
    얼마 뒤 추기는 위왕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며 “아내는 저를 사랑하기에, 첩은 총애를 잃을까 겁이 나서, 손님은 제게 바라는 게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왕의 곁에도 이런 부류가 넘쳐나니 정작 바른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충고했다.
    이를 들은 위왕은 전국에 포고령을 내렸다. 첫째, 왕 앞에서 대놓고 충고하는 사람에겐 1등상을 준다. 둘째, 글을 올려 왕의 잘못을 바로잡는 사람에겐 2등상을 준다. 셋째, 사석에서라도 왕의 잘못을 지적해 그 얘기가 왕의 귀에 들리면 3등상을 준다. 그로부터 1년 뒤 위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위왕은 자신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충실히 귀 기울여 잘못을 바로잡았고, 이 때문에 지적할 잘못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개혁으로 이어진 용인술

    추기 등의 보좌를 받으며 부국강병을 추구한 위왕의 정책 중에서도 인재를 등용하는 용인 정책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는 먼저 지방 관리에 대한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제나라는 두 자리의 중요한 지방관을 뒀는데, 즉묵(卽墨, 지금의 산둥성 평도 동남쪽) 대부와 아(阿, 지금의 산둥성 양곡 동북쪽) 대부였다.
    즉묵 대부는 황무지를 개간하는 등 지역을 잘 다스려 세금이 날로 늘었다. 성격이 강직해 권세가들의 비위를 맞출 줄 몰랐고, 이 때문에 위왕 측근 대신들은 늘 즉묵 대부에 대해 험담을 일삼았다. 아 대부는 농사를 제대로 안 챙겨 논밭엔 잡초만 무성하고 창고도 텅 비어 방어력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위왕 측근들에게 뇌물을 자주 바치는 등 아부를 일삼아 위왕 측근들은 아 대부를 칭찬하는 말을 늘어놨다.
    위왕은 두 사람에 대해 조사한 뒤 그들을 불러들였다. 위왕은 즉묵 대부에게 “그대가 즉묵으로 간 다음 자네에 대한 뒷공론이 무성했다네. 그래서 내가 사람을 보내 즉묵을 살피게 했더니 곳곳이 논밭으로 변해 있었고, 백성은 풍요롭고 관리들은 청렴해 모두가 편하게 살고 있다더군. 이는 그대가 나의 측근 대신들에게 아부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네”라며 1만 호나 되는 땅을 다스리게 했다.
    이어 위왕은 아 대부에게 “그대가 아 지역으로 간 다음 오로지 칭찬하는 말만 들리더군. 그래서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논밭은 농사를 짓지 않아 잡초만 우거지고 백성은 고생에 허덕이더군. 옛날 조나라가 견(甄)을 칠 때 그대는 견을 구하지 못했고, 위나라가 설릉(薛陵)을 칠 때도 알지 못했지. 너는 재물로 내 측근들을 매수해 나를 속였더군”이라고 호통을 친 뒤 “아 대부와 그의 죄를 숨겨준 자들을 끓는 물에 던져 죽이라!”고 엄명을 내렸다.
    즉묵 대부에게 상을 내리고 아 대부를 징벌한 것으로 볼 때 위왕은 진짜 잘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가릴 줄 알았고, 상벌의 원칙이 분명해 큰 업적을 이룰 가능성을 보여줬다. 실제로 위왕은 탁택(濁澤)에서 위나라와 싸워 이기고 혜왕을 포위했다. 혜왕은 화해를 구걸하며 조나라에게서 빼앗은 제나라의 장성을 돌려줬다. 위왕은 집권 이전 제후국들의 혼전(混戰) 상황을 짧은 시간에 수습했다. 국내에서 실시한 일련의 정책은 제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건전한 생활과 인간관계를 누릴 수 있게 했고, 모두가 성실히 살도록 자극해 제나라는 번영을 구가했다. 이후 20년 동안 어느 제후도 제나라를 건드리지 못했다.
    제후들이 제나라를 넘보지 못한 건 위왕이 유능한 인재를 기용한 덕분이기도 하다. 위왕 곁에는 추기 외에도 손빈(孫臏), 순우곤(淳于髡) 등의 인재가 있었다. 손빈은 뛰어난 군사가였는데, 위나라에 갔다가 동문수학한 방연(龐涓)의 질투와 모함으로 무릎 아래를 잘리는 극형을 받고 제나라로 도망쳤다. 제나라 장군 전기(田忌)는 위왕에게 손빈을 추천했고 위왕은 그를 참모로 앉혔다.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손빈은 위나라를 포위해 조나라를 구한다는 ‘위위구조(圍魏救趙)’ 책략으로 계릉(桂陵)에서 위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이로써 제나라는 최강의 제후국으로 부상해 천하를 호령했다.

    보물 같은 인재들

    위왕은 이렇듯 정치·군사 등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인재들을 거느렸다. 위왕은 유능한 인재를 기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알았고, 그래서 인재를 나라의 보물처럼 자랑스러워했다. 그가 양(粱) 혜왕(惠王)과 나눈 의미심장한 대화를 보자.
    “대왕의 나라엔 보물이 얼마나 있습니까.”
    “없습니다.”
    “과인의 나라는 비록 작긴 하지만 한 치짜리 구슬로 수레 12대는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왕의 나라는 대국인데 어째서 보물이 없다고 하십니까.”
    “과인의 보물과 당신의 보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게는 단자(檀子)라는 신하가 있는데, 남쪽 성을 굳게 지켜 초나라 사람들이 동쪽을 넘보지 못하고 12제후가 공물을 바치게 합니다. 반자(盼子)라는 신하가 고당(高唐)을 지켜 조나라 사람들은 그 동쪽 강에서 감히 고기도 잡지 못합니다. 검부(黔夫)라는 신하는 서주(徐州)를 지키는데 북문과 서문에서 제사를 지내는 연나라와 조나라 사람 7000호가 우리 쪽으로 이주해 왔습니다. 종수(種首)라는 신하는 도적을 막는 능력이 특출해 그의 관할 지역에선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답니다. 이런 인재들을 어찌 열두 수레를 채우는 보물과 비교하겠습니까,”
    양 혜왕은 위왕의 말을 듣고는 부끄러워 얼른 자국으로 돌아갔다. 위왕과 그 후의 선왕은 여러 방법과 수단으로 인재를 끌어들였고, 덕분에 제나라는 인재로 흘러넘쳤다. 제나라는 사상적으로도 개방됐고, 수도 임치(臨淄)의 서문인 직문(稷門) 밖엔 오늘날의 대학교나 전문 연구기관 같은 학교가 들어섰다. 이를 직하학궁, 그곳에서 강의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직하학파(稷下學派)라고 일컬었다. 직하학궁에선 국적을 초월해 뛰어난 학자를 두루 받아들였다. 각국의 문인과 학자, 사상가들이 운집했는데 추연, 순우곤, 전병(田騈), 접여(接予), 신도(慎到), 환연(環淵) 등 70명에 이르는 학자가 녹봉과 상대부라는 자리를 받아 학문을 연구하고 국사를 논의했다. 한창 번성했을 땐 학자가 수천 명에 달했다. 대사상가 맹자와 순자도 이곳에서 강의한 적이 있다.


    共生同趨, 以賢薦賢

    제나라가 유능한 인재를 많이 끌어들일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군주가 인재를 중시하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함께 살고 함께 발전해나가는 ‘공생동추(共生同趨)’ 현상이 나타났다.
    어느 날 순우곤은 선왕에게 하루 동안 7명의 인재를 한꺼번에 추천했다. 선왕이 의아해하며 “내가 듣기에 1000리 안에 현명한 선비 한 사람만 있어도 인재가 몸에 부딪칠 정도로 많다고들 하며, 100대에 성인이 한 사람 나와도 발꿈치가 닿을 정도로 인재가 많다고들 하는데, 나는 오늘 하루 만에 7명을 얻었으니 너무 많은 것 아니오?”라고 물었다. 순우곤의 대답은 이랬다.
    “사람은 뜻이 같은 사람끼리 모이고, 사물은 같은 종류끼리 모이는 법입니다. 오늘 추천한 이들은 모두 천하에 둘도 없는 인재입니다. 대왕께서 제게 인재를 구하라는 것은 강물에서 물을 얻고 불더미에서 불씨를 얻으라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러니 7명 추천한 것을 어찌 많다고 하겠습니까.”
    인재는 고립된 상황에서 출현하는 게 아니라 일정한 조건이 되면 식물들의 공생관계처럼 무더기로 자라나며, 같은 이상과 포부를 지닌 인재는 조건만 맞으면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뜻이다. ‘현명한 사람이 현명한 사람을 추천한다’는 ‘이현천현(以賢薦賢)’의 법칙이다.
    위왕은 추기로부터 소통의 이치에 대한 충고를 듣고 9년에 걸친 생활 태도와 사고방식을 완전히 뜯어고쳤다. 그러고는 백성과 적극 소통했다. 그 결과 어떤 관리가 좋고 나쁜지를 정확히 알게 됐고 손빈, 전기 같은 군사 전문가를 발탁할 수 있었다. 나아가 당대 최고의 사상가들을 대거 초빙해 학궁을 만들고 자유롭게 학술 토론을 하도록 지원했다. 그 결과 제나라와 수도 임치는 당시 최고 수준의 문화를 누리는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은 다름 아닌 통치자의 소통 의지와 실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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