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뽕짝 테크노의 원조 ‘신바람 이박사’

“자 한번 놀아 봅시다, 우르리리히~”

  • 이나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09-22 10: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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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 드라이브 뮤직계’의 황태자 이용석. 신바람 이박사로 더 잘 알려진 그는 관광버스 안내원 출신의 뽕짝 메들리 전문 가수다. 키지(Kitch)와 테크노(techno)의 유행을 타고 N세대 우상으로 부상한 40대 남자. 그 때묻지 않은 ‘블루 칼라의 목소리’를 듣는다. 》
    우르리리히~! 안녕하세요, 저는 코리아의 신바람 이박삽니다~!

    만장하신 여러분, 정말 반갑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요즘 ‘반갑습니다’라는 북한 노래가 유행이라지요? 그 노래도 잘 배워놔야겠어요. 그쪽 노래꺼정 합치면 제 트로트 메들리 레퍼토리가 훨씬 풍부해질테니까요.

    자, 그럼 도대체 신바람 이박사가 누구냐, 법학박사냐 의학박사냐 미술박사냐, 그것이 궁금한 분들을 위해 제 소개를 좀 헐까 합니다.

    제 이름은 이용석이라고 합니다. 54년 생이니 우리 나이로 마흔 일곱이지요. 구구절절 살아온 인생사는 퍽퍽하기 한이 없지만 그건 좀 있다 풀어놓는 걸로 하고, 한마디로 말해 저는 관광버스 안내원 생활 11년 만에 탁월한 목청과 애드립으로 카 드라이브 뮤직계(그러니까 리어카 판매 카세트테이프 업계)를 평정, 이후 또 11년 동안 전국 운전기사 여러분들의 절대적 사랑과 지지를 한 몸에 받아 온 뽕짝 디스코 메들리의 황태자입니다.



    이거 너무 지 자랑이 심한 거 아니냐고 하실 분도 있으실 텐데, 사실 저는 건방진 거 하고는 거리가 한참 먼 사람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카세트테이프야 원 없이 팔아봤지만 큰돈을 벌었나요, 스타 대접을 받아봤나요, 그야말로 끼 하나 타고난 거말고는 쥐뿔도 없는, 우리나라 방방곡곡 어디를 가도 길가다 툭 어깨 마주치기 십상인 40대의 평범한 남잡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제가 요즘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마구 뜨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홍대 앞 테크노 바, 여러분 그런 데 가 보셨어요? 저는 가 봤습니다. 그냥 가 보기만 한 게 아니라 거기서 공연을 했어요. 모두 두 번을 했는데 장소가 어디였느냐, 요즘 그 동네에서도 제일 잘 나간다는 ‘명월관’이랑 ‘nbinb’였어요.

    뽕짝 테크노, 애드립의 황제

    그럼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 6월 ‘nbinb’에서 이루어졌던 제 공연의 이모저모를 아주 사실적으로다가 묘사해드릴까 합니다. 아, 그리고 제가 그 테크노 바 이름을 한글이 아닌 영어로 써서 ‘역시 저 인간은 잘난 체를 해’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으시다면 그만 오해를 풀어주십시오. 사실 저 그걸 우리말로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 몰라서 헐 수 없이 이러고 있는 거거든요.

    하여튼, 거두절미허고, 제가 그 바에 공연을 하러 뜩 갔는데 이건 가게 자체가 장난이 아니에요. 인기 탤런트 이제니 송혜교 씨, 인기 힙합그룹 DJ DOC 같은 분들이 자주 찾는다길래 참 좋은 덴가보다 짐작은 했는데 역시 대단하더라구요. 시쳇말로 ‘물’이 아주 다르더라 이 말입니다. 노란 머리, 빨간 머리, 보라색 머리, 총천연색 칼라 머리카락에 위로 솟아 묶은 분수형, 조명발에 반짝반짝 윤이 나는 빡빡이형까지 정말 없는 게 없는 거라. 그야말로 싸이키델릭 하더만요.

    제 공연 시간은 밤 11시 좀 넘어서였는데 그 전에 웬 예쁜 언니 셋이 무대에 등장해 ‘바비인형의 해체기’라는 퍼포먼스를 했어요. 뭐 저야 거기 무슨 깊은 뜻이 숨어 있는지 아나요, 그냥 제 공연 준비에만 바빴지요. 하여튼 그 언니들 춤이 좋고 메시지도 좋았는지 관객들이 소리를 질러가면서 열광하더라고요. 그 다음 순서가 바로 저였는데, 사실 약간은 긴장이 됐죠. 과연 저 10대 청소년들이 내 모습, 내 노래, 내 무대 매너를 좋아할까 싶어서요.

    그러나 제가 누굽니까. 노래 부르는 거라면 산전 수전 공중전 다 겪은 자칭타칭 대한민국 언더그라운드 대중음악계의 숨은 재주꾼 아닙니까. 무대에 서면 그저 기분 좋지 떨리는 건 없는 저인지라 평소대로 기세 좋게 달려나갔지요. 모시 바지저고리 정갈하게 차려 입고 초록색 반짝이 조끼까지 딱 걸쳐 입고요. 아, 탬버린, 탬버린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박삽니다~!” 재빨리 인사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지요. 제 특기 있잖습니까, 뽕짝 디스코 메들리에 죽이는 애드립. 어허어허, 뛰리디리, 좋아좋아, 미쳐미쳐, 또로로로로로하, 넘어가요, 요시요시, 돌리고 돌리고, 짜라잔짠, 하 아 어 허 허… 한번 놀아 봅시다!

    아주 제가 신이 나서 막 불러 제끼니까 이 어린 친구들이 얼마나들 좋아하는지요. 형형색색 머리채를 마구마구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어떤 애들은 아예 ‘꺄아아악’ 비명을 질러요. 이거 솔직히 천호동 둥근달 캬바레 식인데 그냥 여자 친구를 돌려가며 그렇게 춤을 잘 추더라구요. 아, 그 놀러온 사람들 중에는 제 팬클럽 회원들이 적지 않았다는 말씀도 드려야겠네요.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제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뜨고 있다는 사실, 이제 여러분도 믿으실 수 있겠지요?

    국악인이었던 아버지, 어머니

    사실 제게 이런 날이 올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물론 96년 일본 진출해 한 3년 대단한 인기를 누렸지만, 한국에서는 어렵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걸랑요. 저처럼 배운 것 없는 사람이, 비쩍 마른 게 볼품도 없고 나이도 많고 남의 노래나 요리조리 돌려 부르는 사람이 어찌 스타 되기를 꿈꿀 수 있겠습니까. 또 애초 마음적으루다가 그렇게 큰 욕심도 없었구요. 어 이 친구 보게, 이젠 또 지나친 겸손 부리네, 그렇게 비웃고 싶으신 분들, 제 살아온 얘기 한 번 들어 보실랍니까. 아마 이런 제 심정 100% 이해가 가실 겁니다.

    저는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요즘엔 거기 통기타 가수 나오는 라이브 카페가 참 많지요? 저 어릴 때만 해도 다시 없는 촌구석이었어요. 하여튼 제가 거기서 태어났는데 그때 우리 아버지 연세가 예순 하나였다고 그래요. 어머니요? 그 한 반쯤밖에 되지 않으셨죠. 참 우리 아버지 재주가 좋으셨던 모양이라.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아버지가 근동에서 유명한 국악인이셨어요. 소리만 잘 하시는 게 아니라 공부 많이 해 학식도 있고 자존심도 강하고, 하여튼 타고난 한량이셨답니다. 그런 양반이 어디 집에 가만히 붙어 계시겠습니까. 일제 때는 비행기 타고 일본 공연도 갔다 오고 해방 난 다음에도 방방곡곡 유랑 다니는 게 일이셨다니, 젊디 젊은 우리 어머니 밤톨같은 아들 셋 데리고 무진장 고생하며 사신 거죠.

    우리 아버지는 임종도 객지에서 맞으셨데요. 제가 갓난애 때라니 당연히 아버지 얼굴이야 본 기억이 전혀 없죠. 그런데 속으로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자꾸 생각해서 그런지, 언젠가는 아버지가 제 꿈에 나타나셨어요. 갓 쓰고 도포 입고, 아주 인품 있게 잘 생긴 어른이십디다. 저는 지금도 꿈에 본 그 모습이 우리 아버지 꼭 그대로일 거라고 믿고 있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나 생시 같을 수가 없지요.

    우리 어머니도 소리를 참 잘 하셨어요. 얼마나 목청이 좋았느냐, 근동 어디 무슨 자리가 있다 하면 뽑혀다니면서 부를 정도였으니까. 육자배기도 하시고 경기민요도 하시고, 참 깐깐하고 말수도 적은 양반이셨는데, 제가 노래 좀 하는 거, 그거 다 아버지 어머니한테 대물림 한 것 같아요. 이건 증거도 있다니까요. 위로 쉰아홉 된 농사 짓는 우리 큰 형님, 지금도 논 매다 소리 한 자락 구성지게 뽑아내면 동네 아줌마들이 막 오줌 싸고 야단이야. 또 올해 쉰일곱 먹은 둘째 형님, 젊은 시절 읍내 콩쿨대회 나가면 상이란 상은 다 휩쓸었던 타고난 소리꾼이었어요. 우리 집안 내력이 대강 이렇다 그 말씀입니다.

    각설하고, 전 딱 초등학교 졸업하고 공부는 땡 쳤습니다. 원래 공부를 싫어하고 잘 하지도 못했지만 아마 집에 돈푼만 좀 있었으면 울 어머니가 중학교쯤은 어떻게든 보내주셨겠지. 그때야 다들 어려웠으니까 뭐 그렇게 죽자고 나혼자 불쌍한 처지는 아니었다고 봐야지. 하여튼 그 와중에도 노래 부르는 거 하나는 참 좋아해서 초등학교 3학년쯤부터 남인수 씨 노래 같은 건 아주 꿰고 다녔어요. 애수의 소야곡, 무너진 사랑탑, 뭐 그런 것들 있잖아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집 농사일 거들면서 그냥저냥 몇 해를 보냈어요. 그래도 아주 공부를 안한 거는 아니었어요. 다 우리 어머니 극성 때문이었는데, 먹을 양식도 없는 처지에 한 달에 겉보리 한 말씩을 주고 친구 아버지인 스님한테 가 한문을 배운 거라. 그걸 한 달도 빼놓지 않고 꼭 3년 동안 했어요. 어찌 보면 어린 놈이 제법 근성은 있었던 모양이지. 또 어머니한테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웠지요. 지금도 그때 배운 가락들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기억하고 있어요.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지니 나도 밥벌이를 해야겠다 싶어 첫 직업을 가졌어요. 아이스케키 장사 말예요. 읍내 가 한 번에 100개씩 떼서 팔았는데 어디 그 시골에 돈 가진 집이 있나. 통마늘 3개에 1개, 감자 5알에 1개, 그렇게 물건 대 물건으루다가 박치기를 해버렸죠. 그냥저냥, 안 한 것보다는 좀 나은 정도였어요.

    열일곱 살 되던 해 처음 남의 집 살이를 갔어요. 거기가 어디냐, 바로 요정. 그 중에서도 맨 밑바닥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새끼뽀이였어요. 딱 3개월 하고 그만뒀지. 이때부터 내 파란만장한 직업 인생이 펼쳐지는 거라.

    두 번째 직장은 읍내 양복점이었어요. 재단 기술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3년을 버텼어요. 그때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냐, 점심을 집에 가서 먹고 와야 되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 그럴 시간이 없는 거지. 어떡해요, 그냥 집 쪽으로 어느 정도 걸어가다 되돌아 오고 또 그 다음날도 그렇게 가다 되돌아 오고, 그렇게 점심 굶기를 그야말로 아주 남들 세 끼 밥 챙겨먹듯 했어요. 한참 먹성 좋던 그때 하두 못 먹고 구박 받고 일만 많이 하고, 그래서 지금도 내가 이렇게 삐쩍 마르고 몸이 약한가봐.

    14가지 직업 전전, 밑바닥 생활

    스무살 다 돼가니 그때부터 서서히 끼가 발동하더만요. 담배는 그 한참 전에 배웠고 술도 살살 마시기 시작했죠. 소주 한 병쯤은 그냥 물 마시듯 했는데, 사실 내가 그렇게 술이 잘 받는 체질은 아니야. 말 그대로 악으루다가 깡으루 마신 거지요. 그래야 동네 양아치들이 우습게 보질 않거든.

    그렇게 당구 치고 술 마시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직장 일이 시들해졌어요. 또 뭘 할까 찾다 저기 교문리 근처 도농리라는 데서 이발소를 다녔어요. 그러니까 양복점 시다에서 이발소 시다로 신분이 바뀐 거지. 근데 이것도 또 그렇게 고생스럽습디다. 뭣보담두 물 가득 채운 빠께쓰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게 아주 힘에 부쳐요. 그때만 해도 아무 데서나 수돗물 콸콸 나오고 그런 시절이 아니었거든. 자, 그렇게 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다음 이어진 직업이 우체국 편지 배달 5개월, 중국집 짜장면 배달 5개월, 다방 주방 심부름 7개월, 당구장 4개월, 대강 요 정돕니다.

    여기까지 들으신 여러분들은 또 이런 생각을 하시겠지요. ‘거 참 인간이 왜 그렇게 끈기가 없냐’. 뭐 양복집 말고는 1년 이상 계속 다닌 데가 없으니 욕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허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제가 진짜,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 힘이 딸렸걸랑요.

    제 키가 160㎝, 몸무게가 45㎏입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말이 45㎏이지, 아니할 말루다가 여자가 이 정도 말라도 섹시한 구석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만큼 진짜 비쩍, 걸어다니면 뼈다귀 부딪치는 소리 날 지경 아닙니까. 그 어렵던 시절에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 태어나 공부 못 하고 딴 재주도 없으면 힘 하나라도 좋아야 하는데, 저는 흔히 ‘몸으로 때운다’할 때 그 ‘몸뚱이’ 자체가 여엉 받쳐주질 못했던 거예요.

    그래도 오기는 있어서 남들 노는 식으루다가 놀기는 다 놀아봤죠. 어쩌다 친구들 간에 쌈질이라도 나면 코피 터지고 아주 아작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악착같이 달겨들었지요. 그래서 동네 애들이 그랬어요. 용석이 무서운 놈이다, 쟤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저 놈 무서운 놈이다…. 한마디로 말해 박력의 사나이다 그런 뜻인데, 지금 생각하면 다 꼴값 한 거지요.

    하여튼 그리하여 마침내 1973년 5월이 되었습니다. 왜 요 때가 중요하냐, 이 때 제가 드디어 노래로 뭔가 빛을 볼 조짐이 보였거든요. 당시 KBS에서 민속백일장이라는 걸 했어요. 전국 각지에 좀 놀 줄 안다는 인물들은 다 참가하는 일종의 콩쿨 같은 건데 제가 거기 지역 예선에서 입상을 한 거죠. 마침내 서울에 올라가 보무도 당당하게 본선 참가를 했는데, 그만 쭈루룩~ 미끄러져버렸어요.

    유원지 ‘남자 기생’이 되다

    그래도 어렵게 서울까지 올라왔는데 그냥 빈손으로 내려가기 싫어 어떻게든 가수가 되기로 마음먹었지요. 종로 2가 백제약국 2층에 있던 쬐그만 개인작업실에서 작곡가 임종수 선생님한테 배웠어요. 악보 보는 법도 배우고, 하여튼 가수 되는 기초는 귀동냥으로나마 제법 얻어 챙길 수 있었지요. 뭐 그 전에도 제가 벌써 기타 치고 하모니카 불고 그런 건 제법 했습니다. 기타는 열여덟살쯤 독학했고 하모니카는 초등학교 때부터 아주 날렸어요. 또 동네 다방 디제이 하면서 딥 퍼플, CCR, 산타나 그런 노래들도 엄청 불렀댔거든요.

    그렇게 서울에서 1년을 버텼답니다. 돈은 어쨌냐구요? 아, 벌었죠! 청량리역에서 구두닦이를 했거든. 고생이 참 막심했는데, 일단 잠 잘 데가 마땅찮아서 맨바닥에 신문지 덮고 달달 떠는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었어요. 나중에는 정말 못해먹겠드라구요. 그래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죠.

    그리고 또 1년 못 되게 다시 양복점에 다녔어요. 그래도 지 버릇 개 못 준다고 기타 들고 밤 마실 가는 건 여전했지요. 고 다음에는 요정에서 아가씨들 상대로 창을 가르쳤어요. 뭐 창말고 그런 것도 가르쳤지, 젓가락 장단. 제가 원래 리듬감각은 좀 타고 났으니까.

    76년에는 아예 양복점 하나를 세내 직접 경영했어요. 5개월 하다 쫄딱 망해 먹었죠. 현리에 있는 남의 양복점 가서 라면만 먹고 5개월 악착같이 돈 모은 다음에 또 다시 양복점을 냈어요. 역시 실패. 까짓거 삼세판이다 싶어 가지고 요번에는 친구집 땅을 농협에 잽혀먹고 그 돈으로 세번째 양복점을 냈지요. 제목은 ‘용석라사’. 그건 뭐 그런대로 장사가 됐어요. 그런데 영 재미가 없는 거라. 궁리 끝에 남한테 넘겨 친구 빚 갚아주고 새 직업을 찾았지요. 그게 오늘의 이 신바람 이박사를 있게 한 바로 그 일, 관광버스 안내원이었답니다.

    당시 알고 지내던 누가 그러드라구요. 관광버스 가이드 하면 노래도 맘껏 부를 수 있고 돈도 제법 벌린다구요. 여기저기 팔도유람하면서 공짜로 밥 먹고 실컷 노래 부르고 돈까지 벌 수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1년 전쯤 결혼까지 한 처지라 사실 생활 안정이 참 중요한 때였어요. 그래서 ‘기생’이 됐지요. 남자 기생, 오빠 기생이요.

    요즘이야 뭐 묻지마 관광 그런 거 빼면 별거 없지만, 그 때는 여행하면 대개 관광버스 전세 내서 움직이는 걸 말했어요. 대학생, 회사원, 노인분들 단체가 참 많았죠. 그 때 한 달 월급이 12만원, 하루 뛰면 기본 팁이 1만원. 박할 것까지야 없었지만 몸 고생하는 데 비하면 그렇게 많은 돈은 아니었지요.

    관광업계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대한민국 수만대 관광버스 안내원 중에 남자는 저 딱 한 사람 뿐이더만요. 흔한 일이 아니라 그런지 손님들 관심이 남달랐어요. 일단 호칭부터 쉽지가 않았지요. 안내양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제가 손님들 편하시라고 나는 남자 기생이요, 오빠 기생이요 하고 다녔지만 또 기생오라버니, 그렇게 불러달라 그럴 순 없고, 그래서 그냥 ‘새거’라고 해달라 그랬어요. 한 3년 그렇게 뛰고 나니까 내 이름 부르는 손님은 하나도 없어요. 다 ‘어이, 새거’ ‘이보게, 새거’ 그렇게들 하시더라구요.

    전 단골 손님이 참 많았어요. 처음 3개월 지나면서부터 벌써 그랬어요. 글쎄, 왜 그랬을까, 심부름 잘하고 노래 잘 한다고 예쁘게 봐주신 것 같기도 하고. 전 아무리 피곤해도 버스 타면 어떻게든 손님 즐겁고 편안하게 모시려고 무진 애를 썼어요. 식당 가도 그냥 앉아있질 못하고 물방구리처럼 계속 돌아다녔죠. 왜냐. 우리 손님들 맛있는 거 조금이라도 더 많이 자시게 할라고.

    여러 손님이 있지만 제가 젤로 좋아했던 건 어르신네들이었어요. 어찌어찌 자식 키워놓고 이제 겨우 효도관광이라고 모시 적삼에 고무신 닦아 신고 먼길 설레며 버스 오르신 분들. 참 그렇게 내 어머니 같고 내 아버지 같고, 창 하나를 해도 좋다 좋다 예쁘게만 봐주시고, 헤어질 때는 눈물 바람에 잡은 손 놓지 못하시던 정 많은 분들.

    처음 2년은 그렇게 아주 재미가 들어 돌아다녔어요. 그 다음에도 손님 모시는 거야 천직이려니 하고 좋아했는데, 잠 못자고 피로한 건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구요. 보통 새벽 5시에 버스가 출발하는데 밤 11시쯤 목적지 도착해 그 때부터 청소하고 뭐 그러다 보면 금세 새벽 한두 시, 집에 갔다올 시간이 없어 차안에서 새우잠 조금 자고 나면 다시 아침, 그런 식으로 계속 이 마른 몸을 휘둘렀어요.

    노래 부르다 졸 만큼 무지하게 피곤해하면서도 못 그만둔 건 ‘예약’ 때문이었어요. 보통 봄에 모신 손님들이 재밌었다고 “가을에도 보자”시며 예약을 해놓고 가시는데 약속을 지키려면 천생 그해 가을까진 일을 계속 해야잖아요. 그렇게 한 해 두 해 날을 넘기다 보니 어느새 11년, 자그마치 11년 동안이나 버스 손잡이를 놓지 못했던 겁니다요.

    그 때쯤엔 이미 제 별명도 신바람 이박사로 바뀐 다음이었어요. 가방끈도 짧은 제가 어찌 박사 소리를 듣게 됐는지, 그리고 그 애드립이란 건 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건지, 지금부터는 그 얘기를 좀 할까 합니다.

    제가 한 3년 버스 탄 다음부턴 실적이 좋아 월급도 100만원쯤 되고 영업주임 거쳐 차장으로 승진도 했어요. 근데 그게 저절로 된 게 아니에요. 저는 또 지 나름대로 프로가 될랴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관광안내책자 펴놓고 늘 공부하고, 손님들한테 재미있는 얘기 들려드릴랴고 ‘대망’, ‘삼국지’ 같은 소설책부터 유머집까지 잠 줄여가며 읽고. 트로트, 팝송 할 것없이 인기곡들은 다 섭렵했는데 남도 소리, 서도 소리, 경기민요도 빠지지 않았죠. 한마디로 말해 어떻게 하면 관객을 사로잡을까 그 생각만 한 거예요.

    맹세코 돈 욕심 나서 그런 건 아녜요. 버스 일 시작한 얼마 후 우리 식구는 고향을 떠나 서울 달동네로 이사와 있었는데, 사글세 살고 그러면서 늘 어렵고 힘들었지만 돈 많이 벌어 뭘 어떻게 해보겠다, 그런 생각에 정신 빠져 살진 않았어요. 그냥 이 바닥에서라도 최고가 되겠다, 나도 즐겁고 듣는 사람도 즐거운 관광버스의 남인수, 나훈아가 되겠다, 뭐 그런 정도의 포부를 품은 거였지.

    처음엔 노래를 불러도 그냥 있는 그대로 했는데 언제부턴가 가사를 제 맘대로 바꿔 부르는 데 재미를 붙였어요. 그러니까 관광지를 돌 때마다 거기 맞는 식으루다 가사를 바꾸는 거라.

    반주 없이 2시간 만에 녹음한 1집

    손님들이 참 좋아하시대요. 그 다음에 한 일이 바로 애드립 넣는 거였어요. 나이 많이 자신 분들은 기억나실텐데, 옛날 관광버스에는 리듬박스라는 게 있었어요. 그러니까 구식 노래방 기계 같은 거지. 소리 나오는 거라곤 쿵 작 쿵 작 그런 리듬 뿐인데, 하여튼 거기에 맞춰 별노래를 다 불렀다구. 근데 나는 그게 재미가 없는 거라. 심심하고 맥 빠지잖아요. 그래서 입으로 이런저런 소리를 넣기 시작했지.

    예를 들어 ‘목포의 눈물’이다, 그러면 리듬박스 반주 나올 때 입으로, 딩 디리 딩 디리 디리리리리디리리리 딩 디리리리리~ 얼쑤, 뭐 이런 식으로 전주를 넣어주는 거예요. 그 뿐인가, 입으로 간주도 하고 사이사이마다 앗싸좋아, 찌리리리, 짜가자가잔짠, 우리리리히 뭐 그런 소리들도 부지런히 넣어주고. 아, 손님들이 막 웃느라고 뒤로 넘어가고 박수 치고…, 진짜들 좋아하셨어요. 난 그때 내가 하는 게 뭔가 몰랐는데 나중에 음악책을 찾아보니 그게 애드립이더구만.

    근데 그게 있잖아요, 들으면 쉬운 것 같고 누구나 할 것 같지만, 부르는 노래 가사랑 리듬이랑 멜로디를 완전히 꿰고 있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저도 처음부터 무작정 한 게 아니라 노래책 펴놓고 연구하고 그랬어요. 물론 어느 정도 지난 다음에는 절로 입이 뚫리고 귀가 뚫려 준비 없이도 다 됐지만.

    안내원 생활 막판쯤 되자 손님들이 절 신바람 이박사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어쩌면 그렇게 노래를 많이 아느냐고, 노래 박사라고. 사실 맘만 먹으면 여섯 시간, 일곱 시간씩 쉬지 않고 트로트 500곡쯤 가뿐히 뽑아낼 수 있었으니까.

    그럼 카세트테이프는 어떻게 내게 됐느냐, 그게 또 우연이었어요. 친구 중에 관광버스에서 테이프 파는 이가 있었거든.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날 와서는 테이프 한 장 내자는 거예요.

    그래 백암온천 일 갔다 오는 길에 바로 청주로 내려갔죠. 거기 맘보스 태광음반이란 데서 녹음을 하기로 했거든. 반주가 있나 뭐가 있나, 그 리듬박스 하나 틀어놓고 딱 2시간만에 녹음을 끝내버렸어요. 그냥 청산유수로 좌악 불러제낀거지. 쉬는 시간도 없이 메들리로 말이요.

    근데 제목을 붙이자니 마땅한 게 없어. 그냥 김용석 1집, 이러기도 우습고. 그래, 내 별명대로 가자, ‘신바람 이박사’로 하자, 그렇게 결정을 봤죠. 1989년 4월. 드디어 내 인생 최초의 뽕짝 디스코 카세트 테이프가 세상에 나온 겁니다.

    진짜 놀라 자빠질 일은 그 다음에 생겼어요. 그 엉성한 테이프가 3개월 만에 40만장도 더 팔린 거예요. 그게 또 다가 아니지. 청량리 리어카, 세운상가 뒷골목 가면 지금도 취급하는 데가 있으니까, 한마디로 말해 얼마나 나갔는지 며느리도 모르는 진짜 슈퍼 밀리언셀러가 탄생한 거라고나 할까. 그 때 제 테이프 팔아 집 산 음반도매상이 한 둘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었어요. 하여튼 관광버스, 고속버스, 시내 돌아 다니는 택시마다 그 테이프 한 장 실려 있지 않은 경우가 없었고, 덕분에 신바람 이박사야 진짜 왕창 떠버린 거지. 물론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나 알아주는 그저 그런 이름없는 딴따라였지만….

    테이프가 너무 잘 팔리니까 사례라고 태광음반에서 2000만원을 줍디다. 그게 제가 가수 길로 접어든 후로다 젤로 많이 받은 액수였어요. 태광음반에서 ‘유원지 남자기생’이란 제목으루 ‘신바람 이박사 2집’을 낸 다음엔 서울 오아시스레코드로 적을 옮겼어요. 그 좀 전에 관광버스 타는 거는 그만뒀지.

    오아시스에선 3년 계약에 500만원을 받았어요. 액수가 좀 적지요? 거기서 낸 뽕짝 디스코, 민요 디스코 카세트가 5개나 되니 음반사는 제법 돈 좀 벌었을텐데. 그게 제가 무명이고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제 진짜 이름으루다 판 몇 장을 내주기로 한 약속 탓이 더 컸어요.

    40만집 팔린 1집, 실패한 정식 음반

    90년부터 92년까지 정말 제 이름 단 판 두 장을 냈는데, 물론 요건 남의 노래 부르는 게 아니라 순전히 절 위해 작곡된 곡들 위주루다가 짜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둘 다 흥행에 실패해버린 거예요. 제가 애드립 안 넣고, 메들리 안하고 그러면 뭔가 허전한가요? 웃기지 않고 팔딱거리지 않으면 잘 부르는 것 같지가 않은 건가요? 글쎄,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별볼일 없이 제 도전은 끝이 나고 말았죠.

    그리고 95년까지 테이프를 3장 더 냈어요. 그러니까 도합 10장인가요. 테이프마다 반주는 늘 똑같아요. 김수일 씨라고 키보디스트인데, 그 사람이 두드리는 전자 올갠, 딱 그거 하나 밑그림 삼아 부르고 또 불렀어요. 우리 참 죽 잘 맞았지. 96년에 저 일본 진출할 때 그 사람도 같이 가, 잘 나가는 한국 출신 테크노 아티스트라고 제법 인기 많이 얻고 돌아왔죠. 지금은 단란주점에서 노래 반주하고 있어요.

    테이프는 여전히 잘 나갔지만 돈은 별로 받지 못했어요. 오아시스 전속 끝나고 문화레코드라는 데서 테이프 2장에 2000만원, 그 다음에 나온 ‘서울 깜박이’는 알고 지내던 형님이 생활이 어렵다고 해 100만원 받고 그냥 녹음해줬어요. 그게 1집만큼 많이 팔려 그 형님은 목돈깨나 벌었다는데 저는 동전 한 푼 더 안 받았어요. 조금 얄밉기도 했지만 뭐, 괜찮아요, 그러시라고 도와드린 건데요 뭐.

    쭉 들어보셔서 아시겠지만, 그 정도 가지고야 어디 처자식 먹여 살릴 수 있겠습니까. 밤무대랑 회갑잔치, 진갑잔치 그런 데를 많이 다녔죠. 그때 다닌 밤무대가 상계동 노원카바레, 의정부 로얄카바레, 천호동 둥근달카바레 등등이었어요. 주로 뭐 불렀냐구요? 뽕짝, 부루스, 디스코, 민요…. 그런데 애드립은 안했어요. 그거 하면 싸구려로 보인다 그래서.

    근데 그 밤무대 생활이 보통 고달픈 게 아니에요. 영업시간은 보통 밤 8시에서 다음날 새벽 2시까지쯤인데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지, 아프다고 하루 쉴 수도 없지, 스타들이야 한 달에 한 번쯤 빠져도 그러려니 하지만 우리 같은 무명이야 빵꾸 한 번 냈다 하면 다음 달 바로 일을 주지 않아버리니까.

    그러면서 가정적으루다가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남편 새벽까지 안 들어오고 그런 게 싫었나, 애엄마가 집을 나가버린 거예요. 간단히 말해 이혼을 하게 된 거지. 재산이라고 조금 있는 건 전부 마누라 이름으로 해 놨으니 그 사람이 다 가져갔고, 저랑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랑은 남의 집 지하 단칸방에 세들어 사는 처지가 됐죠.

    재혼은 생각보다 빨리 하게 됐어요. 지금 우리 애들 엄마지. 저보다 열 살 아래인데, 사실 알고 지낸 지는 10년이 더 넘었어요. 제가 89년 MBC 인간시대에 나왔는데 그 사람도 88년 당시 남편이랑 같이 인간시대에 출연했던 사람이거든요. 그 집 부부, 우리 부부, 서로 잘 알고 지냈는데 그 쪽은 남편이 너무 가정을 멀리 하니까 딸 하나 데리고 헤어져버렸고 저는 또 저대로 불쌍하게 된 처지였고. 아들이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 아줌마를 엄마 삼고 싶다 하기에 그러자고 했지요. 덕분에 예쁜 딸까지 하나 생겼어요. 지금 우리 아들이 23살, 딸이 12살, 얼마 전 태어난 막내 아들놈이 20개월. 터울이 꼭 11살씩 지니 그것도 참 재미있는 일 아니유?

    이제 제 인생에서 젤로 화려했던 시절을 말씀드릴 때가 됐네요. 96년부터 98년까지 일본에서 활동하던 때 얘기 말입니다. 어느날 소니뮤직 코리아에서 연락이 왔어요. 일본 소니에서 저를 관심 있어 한다구요. 그때 일본에선 한창 테크노 붐이 일고 있었는데, 왜 일본이 우리보다 유행이 한 3,4년 빠르지 않습니까, 하여튼 그래서 젊은이들이 온통 거기 빠져 있는데 제가 부르는 뽕짝 메들리가 어쩌면 그 동네 입맛에 아주 잘 맞을 것 같단 설명이었습니다.

    그 전에 일본의 무슨 작은 레코드사에서 제 테이프를 CD로 만들어 팔았는데 그게 벌써 앞서가는 젊은이들 사이에선 제법 인기를 얻고 있다구 하더군요. 조건도 좋고 하길래, 하자, 그랬지요.

    그 때부턴 모든 게 정신없이 돌아갔어요. 의논하길, 소니사가 저작권을 갖고 있는 일본 노래들을 한국말로 번역해 제 식으로다가 소화한 뽕짝 음반을 내기로 했거든요. 96년 3월 21일 드디어 일본에서 첫 음반이 나왔어요. 제목은 ‘이박사의 뽕짝 디스코 파트 1·2’. ‘이박사’나 ‘뽕짝’ 같은 단어는 우리말 소리 나는 그대로 ‘E-Pak-Sa’ ‘Pon-Chak’, 이렇게 적었어요. 그게 더 이국적이고 제 노래 성격을 잘 나타내는 거라나요. 반주도 일부러 김수일 씨 키보드 하나로 한정하고 최대한 코리아 이박사가 부르는 원조 뽕짝 맛 나게, 그런 식으로다 만들었습니다.

    사실 뽕짝이란 말을 쓰기 시작한 게 그렇게 오래 전 일은 아닌데, 전 누구한테 들어서라기보다 저절로 트로트를 뽕짝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 같아요. 왜 보통 노래 반주는 쿵 짝 쿵 짝 그러잖아요? 그런데 전자올갠으로 두드리는 트로트 반주는 뽕 짝 뽕 짝 하는 소리가 나요. 꼭 심장 뛰는 소리 같이, 뽕 짝 뽕 짝…. 누군가는 저보고 뽕짝의 원조라고도 하던데, 잘 모르겠네요, 제가 정말 원존가요?

    소니랑 1년 계약 후 다시 2년 연장해 3년 동안 모두 6장의 음반을 냈어요. 다 합쳐 한 20만장쯤 나갔나, 조용필, 김연자 씨에 비하면 못하지만 그래도 젊은 댄스 그룹들이 낸 성적보다야 수백배 나은 형편이죠. 재미있는 건 제 한국말 노래 해석하려고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한 일본 청소년이 무척 많았다는 거예요. 그중에는 우리나라 연세어학당에 유학와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돌아간 친구들도 있어요. 저한테 보내는 팬레터는 꼭 한국말로 쓰고 얘기도 한국말로 하구요. 덕분에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 한국어붐이 불었다며, 마음 뿌듯하다, 그런 말씀하시는 재일동포 분들 여럿 만났어요.

    일본에선 참 원없이 활동했어요. 일본판 세종문화회관이라고, 무도관이라는 데서 데뷔 콘서트를 했는데 1만 명쯤 되는 일본 팬들이 우리말로 “사랑해요, 이박사”를 외쳐대며 열광하는 바람에 감격의 눈물을 흘린 적도 있어요. 일본 시청률 1위라는 권위있는 가요 프로 ‘헤이 헤이 헤이, 뮤직 캠프’에도 나갔고 신문이나 잡지 인터뷰도 숱하게 했지요. 제일 재미있었던 건 ‘긴초’라는 제약회사 CF에 출연한 거였어요. 그 회사 광고는 워낙 특이해 지난 30년간 나올 때마다 히트를 쳤다는데 제가 출연한 것도 마찬가지였죠. 외국인으로 첫 모델인데다 CM송으로 우리 강원도아리랑을 사용했다구 해서 일본 스포스신문이랑 일간지 같은 데 1면 기사로 나고 그랬어요.

    제가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촌스럽고 한 물 간 아저씨, 아줌마들이나 좋아하는 가수로 돼 있었잖아요. 어디 공부 많이 하고 세련된 분들이 제 노래 같은 거 들어보기나 하셨겠어요. 그런데 일본에선 정반대였어요. 10대, 20대, 그것도 아주 최첨단을 걷는다는 센스있는 사람들이 주로 좋아해주니 처음에는 얼떨떨했죠. 도대체 날 왜 좋아하냐, 그러면 이렇게들 말해요. 노래를 잘 부른다, 애드립이 죽인다, 뽕 짝 뽕 짝 전자올갠 반주가 웬만한 유럽 테크노 뺨 치게 매혹적이다….

    그리구 뭐랄까, 제가 참 경박하고 촌스럽다나요. 그러니까 꾸며서 촌스러운 게 아니라 원래 그렇다 이거예요. 왜, 키치라고, 촌스러운 척 하는 뭐 그런 게 요즘 애들 사이에 대유행이잖아요. 그런데 전 일부러 애 쓰지 않아도 생긴 거나 하는 짓 그 자체가 원단 ‘키치’라 이거지요.

    달파란과 볼빨간, 그리고 이박사

    일본 활동은 98년으로 막 내리고 좀 쉬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뭐 좀 해봐야겠다 싶었는데, 인터넷인가를 통해 제가 갑자기 유명해지기 시작했어요. 일본에서 낸 음반을 MP3 파일 뭐 그런 걸로 받아 들어본 아이들이 그냥 뿅 갔다나요. ‘나우누리’나 ‘다음’ 같은 데 저도 모르는 사이 팬클럽이 생기고 여기저기서 이박사님, 이박사님 하며 우루루 따라다니기 시작하더라구요. 어떻게 알았는지 핸드폰으로 막 전화를 해대고, 사인 해 달라, 공연 좀 해 달라, 그러니까 덩달아 신문사 같은 데서도 관심을 보이고….

    그러던 중 왜 ‘거짓말’이라고, 장선우 감독이 만들어서 외설이냐 예술이냐 그런 말싸움 붙었던 영화 있잖아요, 거기 달파란이라는 테크노 뮤지션이 ‘이박사 스타일’이라면서 곡 몇 개를 만들어 넣었어요. 그중에 ‘나는 육체의 판타지’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건 또 달파란이 아니라 달파란과 이박사를 동시적으로 존경한다는 볼빨간이란 젊은이가 작사 작곡한 거예요. 제가 일본에서 낸 노래 중에 ‘나는 우주의 판타지’라는 게 있거든요. 그걸 따다 재미있게 바꿔 놨던데, 그 노래가 제 팬들이 젤로 좋아하는 곡인 건 사실이구요.

    전 요즘 10대들이 절 좋아하는 걸 보면서, 애들은 확실히 옛날 어른들이랑 다르다, 그런 생각을 해요. 옛날에야 제 노래 듣고 참 좋더라도 점잖은 체면에 어디 가서 나 이박사 팬입네, 그럴 수가 있었나요. 근데 요즘 젊은이들은 내가 좋다는데 어쩔 거냐, 그렇게 딱 말하고 막 그러는 거예요. 한마디로 당당한 거지.

    “자, 한번 찐하게 놀아봅시다~!”

    어떤 팬이 인터넷 팬클럽 게시판에 이런 글을 쓴 걸 봤어요. ‘이박사 음악의 원류는 뽕짝이다. 그런데 다른 뽕짝 가수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음반사나 밤무대가 아니라 고속버스에서 성장한 때문일까, 버스 승객들과 들썩거리고 흥을 맞추면서 그는 신기의 애드립이라는 대중적, 민중적 기교를 익혔다. 이박사의 시도는 과거 판소리 놀이마당 혹은 무성영화변사의 그것과 유사하다’(다음 카페 이박사 팬클럽, 글쓴이 노상방변).

    그 팬은 또 제 목소리를 ‘우리 사회 블루 칼라의 목소리’라고 해놨더만요. 제도권 고등교육에 때묻지 않은 목소리라 그 뜻이래요. 도덕 교과서 같은 교훈적 말씀이라면 닭살 돋아하는 요즘 애들이 그래서 제 음악에 더 사족을 못 쓰는 거라구요.

    그런데, 전 잘 모르겠어요. 뭐 복잡한 말들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전 그냥 여러분이, 너 노래 참 죽인다, 너 기막히게 잘 논다, 너 보면 신나고 재밌어서 어깨춤이 절로 난다, 그냥 그렇게들만 말씀해 주시면 최고로 행복하겠어요. 무명이면 어떻고 또 유명해지면 뭘 어째요. 어차피 이불 한 장, 요 하나 덮고 깔고 자긴 매한가진데.

    사람들이 그래요. 제가 나이답지 않게 순수하다구요. 웃는 모습을 보면 더 그렇데요. 정말 그래선지는 모르겠는데 어린 애들하고 만나도 격이 없고 그냥 친구 같고…. 아마 제 스스로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사람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인가봐요.

    근데 말입니다, 저는 제 웃는 얼굴이 꼭 그렇게 좋지만은 않아요. 해맑다, 뭐 그런 느낌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사실 주름진 눈꼬리 뚫어지게 들여다보면 무슨 썩은 눈물 같은 게 몇 방울 맺혀있는 것도 같거든요. 그래요. 전 또 그런 제가 편안해요. 잘난 것 없고, 유식한 말 할 줄 모르고, 내내 당하면서만 살아왔고…. 누구한테 맘껏 큰 소리 한번 쳐 본 적 없지만 그래도 사람 즐겁게 하는 재주 하나만큼은 타고 났잖아요.

    저 좀 있으면 소니뮤직 코리아에서 우리말로 된 음반 한 장 내요. 일본에서 인기 끌었던 곡들만 한데 모아봤는데, 반응이 어떨지 모르겠어요. 음반사에선 나름대로 절 세련되고 요즘 테레비 방송 타는 애들 스타일루다 꾸밀려구 고생하시는 것 같은데, 전 예전 제 모습 그대로도 버릴 것 없이 다 좋아요. 백구두에 반짝이 양복, 기름 발라 귀 뒤로 넘긴 70년대식 장발, 그러구 막 탬버린 치고 마이크 돌리면서 불러 제끼는 거죠. 자 언니 오빠들, 어디 한번 찐하게 놀아 봅시다~! 돌리고 살리고, 앗싸 좋아, 미쳐 좋아, 뛰리디리 어 허 허 히, 우르리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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