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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상락의 이사람의 삶

‘난치병 名醫’로 소문난 한의사 배원식 옹

韓中日 주름잡은 ‘67년 현역’최고참

‘난치병 名醫’로 소문난 한의사 배원식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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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게 아프신 데는 없습니까?

“다리가 조금 아파요. CT촬영을 해서 확인해봤더니 척추가 굽어지면서 신경을 압박해서 생긴 통증이에요. 젊은 나이라면 칼슘을 섭취해서 뼈를 부드럽게 하면 되는데, 나이가 들수록 힘들어요.”

─그래도 남들은 살아 있기도 힘든 연세에 아직 한의원을 꾸려갈 만큼 정정하시니 ‘건강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종종 받겠습니다.

“선천적으로 건강체를 타고났다고 봐야지요. 문제는 늘 마음이 기뻐야 해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남을 상하게 할 궁리를 하면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몸도 망가져. 스스로 실력을 배양해서 인정받도록 노력해야지. 또 남자 같으면 정수(精水)를 아껴야 해. 부부관계를 하더라도 물은 안 빼내는 게 좋아요. 나는 20대부터 그 사실을 알고 주욱 지켜왔어요.”

─현대 의학에서는 사정을 참으면 전립선에 문제가 생겨서 배뇨장애가 올 수도 있다는데….



“그렇게들 얘기하지. 하지만 실제 한방 임상에서 터득한 바에 의하면 정력이 강한 사람은 전립선 질환 같은 것 안 옵니다. 어쨌든 정수를 아껴야 건강하다는 걸 내가 증명해 보이고 있지 않소.”

그렇다면 우리 식 나이로 여든일곱이나 되는 배옹이 지금도 성관계를 할까? 불손하고 짓궂은 질문이 스멀거렸으나 입 밖에 낼 엄두를 못하고 있는데….

“나는 지금도 합니다. 한 달에 한두번 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에요, 허허허….”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대화를 나눈 대여섯 시간 동안 그가 가장 우러러뵈는 순간이었다.

─사상의학을 하는 사람들은 개개인의 체질에 따라서 섭취를 권장하거나 금기시하는 음식을 정해두고 있던데요?

“난 반대입니다. 본래 이제마 선생이 사상체질의학을 창안하게 된 동기가 뭐냐. 장질부사(장티푸스) 같은 역병이 돌 때, 같은 증상을 보인 환자들에게 똑같은 처방을 했는데 그중에서 약발이 안 듣는 사람이 있더란 말이지. 아, 특이체질이구나 해서 이제마 선생이 질병치료를 위해 체질 분류를 했던 거요. 그걸 악용해서 무슨 기계를 갖다놓고 신체 부위 어디를 두드려서 체질을 감별하고 또 체질에 따라 어떤 음식을 먹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건 틀렸어요. 오늘 뭐가 먹고 싶다고 몸이 부르면 그걸 먹어야 해요.”

의생에서 약종상, 한의사로

─하지만 이제마의 체질의학설을 체계화해서 우리 의학으로 발전시켜나가려는 노력도 필요한 것 아니겠어요?

“태음·태양·소음·소양 하는데, 이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면 다르고 저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면 또 달라요. 내 생각은 뭐냐, 가령 체질을 측정할 수 있는 항목을 10개쯤 정해두고 그중에서 7개 이상이 맞으면 태양인으로 분류한다든지 이런 기준을 만들어야 공신력이 생기지 않겠어요?”

─그럼 선생님께서는 환자를 진단할 때 체질을 어떻게 분류하십니까?

“어디, 작가선생, 시계 풀고 손목 한 번 이리 줘보시오.”

배옹이 내 왼손을 끌어다 맥을 짚었다. 그리고 말했다.

“습담(濕痰)체질이야. 수분이 많다는 얘기지. 지금은 이상이 없지만 앞으로 질병이 온다면 혈관계통에 문제가 있을 수 있어. 근육통이나 척추통 같은. 술은 마셔도 잘 이겨낼 체질이지만 담배는 심하게 피우면 안 좋아.”

술을 마셔도 좋다. 듣던 중 반가운 얘기였다.

1914년 그는 경남 진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가 목재상을 했으니 식민시절이었지만 궁핍을 모르고 자랐다. 보통학교 졸업식에서 1등에게 주는 ‘도지사상’을 받았는데, 상품으로 닭 3마리를 주더란다. 머리가 좋았다는 얘기다.

진주사범에 진학하려 했으나 몸이 아파서 진학을 포기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주선으로 부친의 친구인 김민구 의생이 운영하던 동제의원(한의원)에 들어갔다. 일제 강점기이던 당시에는 우리 의료계가 독일의학의 영향을 받고 있던 일본의학에 지배받고 있던 터라, 한의사는 ‘의생(醫生)’이라는 명칭으로 격하되고 있다.

김민구 문하에서 중국인 이동원이 지은 ‘의학입문’을 팠다. 6개월 후 그는 “한의학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평양 의학강습소로 올라간다. 열일곱 살 때였다.

한의사 자격시험이라 할 의생시험에 응시하려 했으나 무의면(無醫面) 지역에 결원이 생긴 인원만큼만 선발했고, 마땅히 지망할 지역도 없어서 포기했다. 만주로 가는 게 좋겠다는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아무 연고도 없는 국경 너머 만주로 건너갔다. 그가 건너간 곳이 길림성의 신경(新京), 요즘 이름으로는 장춘(長春)이고, 중국식 발음으로는 ‘창춘’이다.

장춘에서 1년쯤 지낸 뒤 수도경찰청에서 주관하는 약종상(藥種商) 시험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한약사에 해당하는데 일제는 그런 종류의 시험을 경찰관서 위생국에서 시행했다. 약종상 문을 여니 개업 첫날부터 손님이 ‘일곱 명이나’ 들이닥쳤다. 당시 약종상들은 약재만 파는 게 아니라 맥도 보고 진단도 했다.

1932년 일제는 중국 동북지방에 괴뢰국가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우게 되는데, 1938년에 만주국 건국 후 처음으로 만주국 한의사 국가고시가 시행되었다. 자격시험에 합격한 그는 약종상 시절에 벌어둔 돈을 기반으로 만주국에 정식 한의원을 차린다. 그러니까 그가 얘기하는 ‘67년 한의사 이력’은 약종상 시절까지 포함하는 것이고, 정식 한의사 자격으로 진료에 임해온 세월만 따진다면 금년이 62년째라 해야 옳다.

만주시절 얘기에 한창 흥이 올라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대학병원 의사의 전화였다. 혈압 관련 질환자 한 사람을 보낼 테니 봐달라는 전화라 했다. 환자만 보내는 게 아니라 의사들이 배원식한의원을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의사의 첫째 목적이 환자 병 낫게 해주는 것 아니오. 나는 양의사들을 우습게 봅니다. 그들은 21세기 첨단 의료기기인 복강경을 이용해 로봇으로 수술을 하지만 나는 얼굴 한 번 쳐다보고 맥을 짚어보면 금방 압니다. 그래서 치료에 성공하고 나면 양의들은 ‘소가 뒷걸음질하다 개구리 밟는 격’이라고 해버려요.”

그러나 천하의 배원식도 못하는 게 있다. 침술이다. 그가 한의학을 공부할 때에는 침 놓는 사람을 ‘침쟁이’라 하여 천시하였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안 배웠다. “배웠더라면 참 재미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그의 아쉬움이다.

최남선과 맺은 인연

장춘에 차린 그의 ‘대륙한의원’은 요즘 표현으로 ‘잘나갔다.’ 당시 그곳엔 한국인 3만여명이 거주했는데 대륙한의원을 찾는 손님은 한국인들뿐만이 아니었다. ‘쪼끄만 한국 한의사가 영험하게 잘 본다’는 소문을 듣고 점령군이던 일본 관동군, 그리고 현지 중국인들까지 몰려왔다.

“모리라는 왜놈 소위가 설사병이 나서 찾아왔는데 약 여섯 첩을 먹고 나았어요. 고놈이 돌아가서 헌병 준장을 소개했어요. 고놈이 또 나았겠다. 그런데 한번은 관동군 사령관이던 헌병 소장이 설사병이 났다고 급히 오라는 겁니다. 사령부에 가서 진맥을 하고 처방을 해서 병을 척 낫게 만들어줬지요.”

오사카로 돌아간 사령관은 후임 사령관에게 배원식을 소개했고, 이후 식민지 출신 의사였던 배원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점령군 간부들의 단골의사가 됐다. 배옹이 잊을 수 없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육당 최남선. 3·1운동으로 투옥됐다 석방된 최남선은 만주로 건너가 만주건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후반기 육당의 친일행적은 여기서는 제쳐두기로 한다).

교수 시절 간장이 나쁘던 육당이 각혈 증세로 대륙한의원을 찾아와 배원식의 처방으로 치료를 받았다. 당시에 서울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두 아들을 두었던 육당은, 장춘으로 올라온 아들들이 치료를 해주겠다고 했으나 마다하고 배원식의 처방을 고집했다는 것. 이후 육당은 대륙한의원과 배원식의 열렬한 선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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