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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월드컵 끝나면 큰 꿈 꾸겠다”

정몽준 2002월드컵조직위원장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월드컵 끝나면 큰 꿈 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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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중국 민항기가 김해공항에 착륙하려다 추락했습니다. 지난해 월드컵 조추첨을 앞두고 중국팀의 예선경기를 한국으로 끌어오기 위해 노력하신 분으로서 가슴이 철렁했을 것 같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국가대표팀 평가전이 4월27일 인천에서 열릴 예정인데, 그때 1만명 이상의 중국 축구팬이 들어올 예정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비행기 사고는 우리쪽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고 중국 조종사의 실수이기 때문에 월드컵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지금 중국은 2008년 하계올림픽을 개최한 뒤 2020년 월드컵 유치를 준비하고 있어요. 그래서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이번 월드컵에 더욱 관심이 높은 거죠.”

―월드컵이 두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아쉬운 점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 경기를 해보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됐어요. 북한이 월드컵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는 FIFA의 요구조건을 맞춰야 하는데 그중에 미디어석 1000석 이상이 문제가 됐어요. 북한이 그런 것까지 신경쓰는 걸 보고 ‘월드컵에 관심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결국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월드컵을 계기로 일본과의 관계도 더 가까워지길 바랐는데 역사교과서 문제 때문에 제동이 걸렸어요. 하지만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크게 좋아진 것 같아요. 1986년에 일본에서 ‘전세계에서 싫어하는 나라’를 조사했었는데, 그때 결과가 1등 소련, 2등 북한, 3등 한국으로 나왔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일본 국민의 절반 정도가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월드컵은 우리 국민들이 화합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스페인이나 프랑스가 월드컵을 통해 국민화합을 달성했고요. 지역감정이나 계층갈등 같은 문제도 ‘월드컵 푸닥거리’를 제대로 해내면 잘 풀릴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당장 지방선거가 월드컵 도중에 열리고 대통령선거도 눈앞에 있고 해서 힘든 점이 많아요. 다들 정치일정에 쫓기다 보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고요. 아무튼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의 국민대화합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게 아쉬워요.”

―월드컵이 임박했는데도 월드컵 열기가 달아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현 단계에서 다소 미흡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앞으로 남은 기간동안 한국대표팀의 A매치가 몇 차례 열리고 5월부터 외국팀들이 들어와서 캠프를 차리면 많이 달라질 것으로 봐요. 월드컵 열기는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때가 되면 밖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안으로 모아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정위원장은 1993년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2002년 월드컵을 한국에 유치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FIFA 부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선거결과는 1표 차의 신승. 이후 정위원장은 FIFA 회원국을 드나들며 일본과 치열한 유치경쟁을 벌였는데, 공교롭게도 고 정주영 회장이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위해 뛰던 모습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두번 모두 상대국가가 일본이었고, 한국은 불리한 조건에서 값진 승리를 거두었다. 한마디로 부전자전이다.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을 공동개최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들려주시죠.

“처음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일본이 우리보다 5∼6년 먼저 관심을 가졌고, 유치위원회도 2년 빨리 만들었거든요. 저는 유치위원회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영국에서 막 돌아온 이홍구 대사를 만났습니다. 제가 이홍구 대사에게 유치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더니 그분이 금새 알아듣고 청와대 정무수석을 두 번 만났대요. 그런데 정무수석이 나서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서 롯데호텔에 기자분들을 모셔놓고 ‘월드컵유치위원회 초대위원장 이홍구 박사 추대’라는 현수막을 걸었죠. 법적인 효력이 전혀 없는 행사였는데도 기자들이 기사를 잘 써주었어요. 다음날 이홍구 대사가 차를 타고 가는데 청와대에서 들어오라고 전화가 왔대요. 그날 김영삼 대통령이 이홍구 대사에게 “월드컵조직위원장 취임을 축하한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사고부터 치고 허가를 받은 셈이죠.

한국과 일본이 경쟁할 때 제가 “절대 로비하지 말자. 양국이 축구시합을 해서 이기는 나라가 월드컵을 치르자”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1994년에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FIFA 회장 선거가 있었는데 그때도 제가 그런 제안을 했어요. 물론 농담이었죠. 그랬더니 아벨란제 회장이 정색을 하고 “그건 FIFA 규정에 어긋난다. 내가 FIFA 회장으로 있는 한 그런 방식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나요.”





―이번 월드컵 기간중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밝혀주십시오.

“북한에 관해서는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요. 언론에 먼저 나버리면 북한쪽에서 싫어하거든요. 일단 아시아축구연맹을 통해 북한축구 관계자들을 초청할 생각입니다. 북한 당국이 허락하면 선수들도 남쪽에 와서 관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월드컵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16강진출, 경제적 성공, 한반도 평화, 코리아 브랜드 상승, 안전한 대회운영 중에서 하나만 고른다면.

“모두가 중요하지만, 굳이 한 가지만 고른다면 안전한 월드컵을 꼽고 싶어요. 다른 분야와 달리 안전은 가장 소중한 인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99%를 달성해도 곤란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100%의 안전을 확보해야 합니다.”

정위원장은 어릴 때부터 유난히 스포츠를 좋아했다. 1976년 전국체전 승마 장애물 비월경기에서 은메달을 땄으며 전국종합스키선수권대회에 출전해 4등을 차지한 적도 있다. 그는 다섯 번이나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정위원장이 다녔던 중앙중학교 축구부는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적도 있는 명문이었는데, 정위원장은 친구들과 응원을 다니면서 축구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비록 정식으로 축구를 배우지는 않았지만, 정위원장의 축구실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새삼 정위원장의 축구철학이 궁금해졌다.

―축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머니 배속에서 태아가 제일 먼저 하는 게 발로 배를 차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축구는 인간의 본능적인 동작이에요. 또 축구를 전쟁 발레 체스가 합쳐진 스포츠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장기처럼 전략을 짜고, 발레처럼 뛰어오르면서 헤딩하고, 전쟁처럼 치열하게 맞붙잖아요. 그리고 축구는 내셔널리즘을 자극하는 스포츠입니다. 유럽에서 축구가 잘 되는 것도 그런 이유죠. 예전에는 전쟁을 벌였는데, 현대사회에서는 그게 곤란하니까 축구로 대신하는 거죠. 전쟁의 긴장과 갈등이 축구로 승화됐다고 볼 수 있어요.”

―슬하에 2남2녀를 두셨는데, 만일 한국 축구선수 가운데 한 사람을 따님에게 소개시켜 준다면 누가 적격입니까.

“우리 아이들은 그냥 축구장 가는 걸 좋아해요. 축구를 좋아하는 건지 축구선수를 좋아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고요. 이동국 이천수 안정환 최용수…, 요즘 선수들은 다들 잘생겼잖아요.”

―국회의원 축구팀에서 주공격수를 맡고 있는데, 축구장에서 가장 호흡이 잘 맞는 정치인은 누구입니까.

“동네축구라 특별히 호흡을 맞추고 할 것도 없어요. 강창희 의원은 육사 다닐 때 선수로 뛰었는데, 김정남 감독이 고려대 다닐 때 맞붙은 적이 있대요. 정균환 의원도 축구를 좋아하고, 장영달 의원도 유연해요. 임종석 의원을 비롯해서 386 국회의원들은 다 잘 뛰어요.”



히딩크 영입은 행운이다

2001년 3월 현재 한국축구의 FIFA 랭킹은 41위. 상식적으로 월드컵 16강은 무리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16강진출의 가능성을 높게 본다. 근거는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한국이 홈에서 월드컵을 치른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히딩크 감독에게 거는 기대다. 히딩크 감독은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를 이끌었고, 세계 최고 명문클럽 레알 마드리드 감독도 지냈다. 한국축구가 위험을 무릅쓰고 히딩크 감독에게 대표팀을 맡긴 것도 그의 탁월한 수읽기와 풍부한 경험을 중시한 탓이다.

―히딩크 감독을 자주 만났을 텐데, 직접 얘기해보면 느낌이 어떻습니까.

“히딩크 감독은 아주 현명한 사람이에요. 5개 국어를 구사하는데 가장 늦게 배운 스페인 말을 지금은 제일 잘한대요. 나하고는 영어로 대화하는데 단어가 아주 정확해요. 감독으로서 경험이 풍부하고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지도자죠. 한국축구가 그런 사람을 모셔온 게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30∼40명에 이르는 대표팀을 2년 동안 이끌고 다니면서 인화를 유지하고 선수단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건 엄청난 능력이에요.”

―한국축구는 그동안 큰 대회에서 성적을 올리지 못하면 감독이 희생되곤 했습니다. 만일 히딩크 감독이 이번 월드컵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둬도, 계속 대표팀 감독을 맡길 생각입니까.

“우선 한국이 부진하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월드컵이 끝난 뒤엔 히딩크 감독의 의사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저는 어떤 식으로든 히딩크 감독과 한국축구의 인연이 계속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최근 일부 언론에 대표팀 선수선발과 관련해 비판적인 의견이 실렸습니다. 축구협회 회장으로서 대표선수의 최우선 선발기준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재능, 성장가능성, 성실성, 전술적 필요성을 중심으로 판단하신다면.

“모두가 중요하고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해요. 원칙적으로 선수선발은 감독의 고유 권한입니다. 우리는 감독을 믿고, 그렇게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지원해야겠죠.”

역대 월드컵에서 주최국이 예선에서 탈락한 일은 한번도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축구팬들의 기대치를 끌어올리는 동시에, 축구인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되고 있다. 특히 월드컵 특수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는 정위원장으로서는 심각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정위원장의 측근들은 “한국의 16강진출 여부와 정위원장의 향후 행보는 무관하다”고 말하지만, 16강진출 여부는 이미 국민적 관심사로 등장했다. 정위원장의 ‘거리두기’ 전략과 무관하게 국민들은 16강진출을 과잉 해석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대표팀의 목표는 1승과 16강진출입니다. 정위원장은 며칠 전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서 강한 자신감을 보였는데, 솔직히 16강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보고 있습니까.

“저는 어느 때보다 희망적이라고 봐요. 히딩크 감독도 얘기했듯이 지금은 16강 가능성이 50%쯤 되니까 날마다 1%씩 올라가면 본선에서는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제가 얼마전 유럽에서 홍명보 선수를 만나서 얘기했어요. 홍명보 선수는 이번에 네 번째 월드컵 출전인데 왠지 좋은 성적이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든대요. 예전에는 월드컵을 앞두고 왠지 막연한 느낌이었는데, 이번엔 다르다는 겁니다.”

―국민적 기대치는 최소한 16강진출인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민들의 기대는 심정적으로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전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죠. 우리는 축구전문가들이 분석하는 것도 감안해야 됩니다. 냉정하게 볼 때 한국은 D조에 속한 어느 팀도 압도하지 못하고 있어요. 다만 그동안 16강진출을 목표로 열심히 준비해왔기 때문에 국민적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한국 축구팬들은 ‘편식증’이 심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2001년 컨페드컵 때도 한국경기 입장권은 일찌감치 동이 났지만, 세계적인 명승부가 펼쳐진 운동장은 텅텅 비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축구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애국심 차원에서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월드컵 축제는 세계 최고의 이벤트이자 문화행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국민들이 평생에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주인으로서 잔치를 즐겼으면 해요.”



“나도 꿈을 갖고 있다”

정위원장은 무소속 국회의원이다. 무소속은 얼마 전까지 여야가 정쟁을 벌이고,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일 상종가를 기록했다. 정위원장의 한표를 잡기 위해 여야의 중진들이 구애작전을 폈고, 아예 영입을 제안한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여야가 본격적인 경선구도로 접어든 지금, 무소속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불과 몇 달 사이 정위원장은 외부요인에 의해 정치적 비중이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이다.

―지난해 12월 후원회에서 ‘나도 큰 꿈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꿈을 꾸고 있는 겁니까.

“참여연대의 공식 슬로건이 ‘여러 사람이 같은 꿈을 꾸면 그 꿈이 실현된다’는 내용이더군요. 우리나라가 앞으로 잘 되려면 문화국가와 지식기반 사회로 나가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탐험심과 모험심의 분위기가 형성돼야죠. 인류사회는 탐험심과 모험심이 사라지면 망하는 겁니다. 그런 게 없으면 꿈을 꾸지도 않을 거고요.”

핵심을 제쳐놓고 멀리 둘러 가는 정위원장 특유의 화법이다. 꿈을 물었더니 탐험심과 모험심으로 받았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그는 이미 신당창당 의사를 수차례 밝혔고, 신당의 이념에 대해서도 내부적 검토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위원장의 꿈은 아마도 그곳에 담겨있을 가능성이 높다.

―2002년 1월 ‘주간동아’ 인터뷰에서 환경신당 창당을 시사했는데, 신당의 테마를 환경으로 잡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월드컵이 끝나면 제가 10년동안 추진해온 사업이 일단 종결되기 때문에 지금보다 시간이 많아질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편안한 상태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좀더 큰 꿈을 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환경을 테마로 하는 신생정당이 만들어지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에도 독일의 녹색당 같은 정당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뭐냐’고 물으면 경제, 남북관계, 지역감정, 부정부패 해소 이런 걸 꼽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이게 다 중요하지만 저는 환경문제가 제일 심각하다고 봐요. 환경은 7천만명이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하는 문제이니까요. 지금부터 환경에 신경쓰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위원장의 정치적 밑그림은 어느 정도 드러났다. 이제 관심은 정위원장이 어떤 정치적 구도를 상정하고 있으며 언제쯤 행보를 본격화할 것이냐다. 정치권에서는 정위원장이 이미 오래 전부터 비밀 대권캠프를 가동하고 있으며, 단독출마를 준비중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하지만 정위원장은 단 한번도 대선출마를 공식적으로 거론한 일이 없다. 한마디로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는 연기만 피우면서 가겠다는 얘기다.

―지금까지 위원장님은 “월드컵을 잘 치르는데 집중하겠다. 월드컵이 끝난 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민심을 살피겠다. 조건이 되면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여기서 출마의 조건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입니까.

“지금으로서는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데만 전념하고자 합니다. 대선출마 여부는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결정할 것입니다. 우선은 여론조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론조사에서 당선가능성이 제일 높다면 결정하기가 쉽겠지만, 가령 여론조사에서 1등을 못했다면 심사숙고해야겠죠.

선거는 결과적으로 한 사람을 뽑는 것이지만, 선거 자체가 하나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제가 7월부터 후보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뛴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과정입니다. 민주주의는 프로세스(process)가 중요하며, 그 프로세스가 대화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이 후보로 거론되는 것과 실제 후보가 돼서 국민들과 대화하는 것은 다른 거죠.

저는 출마여부를 결정하기에 앞서 준법의 문제를 검토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모든 국민들이 지키지 않는 세 가지 법, 즉 교통법, 건축법, 선거법이 있다고 합니다. 교통법은 너무 까다로워서 서울 시내에서 자동차 간의 거리라든지 주정차 금지구역을 정확히 지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거고, 건축법도 역시 까다로운 점이 많다고 합니다. 저는 후보가 되면 선거법을 꼼꼼히 읽어볼 생각입니다. 내가 그 법을 다 지킬 자신이 있으면 나가고, 그렇지 않으면 안 나갈 생각입니다.”

―월드컵이 성공하고 국민들이 높이 평가하면 출마한다는 뜻인가요.

“월드컵의 성공 여부를 출마문제로 연결시키지 말았으면 합니다. 월드컵의 성공은 그 자체로 저의 꿈이고, 대선출마 여부는 그 다음에 생각할 문제죠. 하여튼 종합적으로 고민하겠습니다.”



“보수든 진보든 합칠 수 있다”

‘정치는 생물과 같다’는 말은 최근의 정치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두달 전만 해도 여야 대선주자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민주당 이인제 고문으로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총재의 악재와 민주당 국민경선제의 돌풍은 순식간에 정치구도를 바꿔놓았다. 그 핵심에 ‘노풍’이 있다. 노풍은 여야 구도의 틈새를 노리던 수많은 정치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탈당 카드를 뽑아든 박근혜 의원과 월드컵 이후를 기다려온 정위원장까지도.

―최근 정치권에서는 이른바 ‘노풍’이 강하게 불고 있습니다. 동료 정치인으로서 노풍을 어떻게 보세요.

“바람직한 면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노풍’은 우리 정치의 변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이 많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 예가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 정치는 정당구조나 운영에 있어서 과거 냉전시대의 사고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여야가 정쟁에만 몰두하다 보니 국민들의 불신을 자초한 측면이 있어요. 그 때문에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는 다양한 갈등을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치권이 이를 이용한다는 비난도 듣고 있잖아요.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봐요.

그동안 우리나라 정치는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를 흔히 권위주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그 시대 역시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였습니다. 민주 대 반민주를 집권당 대 비집권당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맞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정치에는 집권당 대 비집권당, 영남 대 호남, PK 대 TK 등 많은 대결구도가 있었는데, 노무현 고문의 인기가 오르면서 진보 대 보수라는 말이 새롭게 생겨났습니다. 노고문의 부상으로 진보 대 보수 구도가 만들어진다면, 저는 그것이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노풍은 시대정서의 반영이고, 보수 대 진보의 구도는 우리 사회가 한번 겪어야 할 상황이라고 보시는 겁니까.

“많은 분들이 보수와 진보의 개념을 쓰고 있는데, 그 의미가 조금씩 다른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는 남북이 분단돼 있으니까 북한에 강경하면 보수고 유화적이면 진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어요.

저는 보수와 진보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라고 봐요. 보수든 진보든 힘을 합칠 수 있다는 거죠. 보수와 진보는 서로 보완하는 관계거든요. 보수가 됐든 진보가 됐든 모두 대한민국이 평화롭게 잘사는 나라는 만들자는 것인데, 다만 방법이 조금씩 다른 거죠. 예를 들어 보수는 역사적인 경험을 중요시하고, 진보는 인간의 이성에 중심을 둔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획일적으로 보수 대 진보의 구도를 짜놓고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주 어리석은 발상이죠.”

정위원장이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노풍’이 정치판을 보수 대 진보로 재편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고, 보수든 진보든 힘을 합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위원장은 보수 대 진보의 판짜기 국면에서, 자신은 양쪽을 모두 아우르는 세력을 꿈꾸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문제는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더라도 이념적 중심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정위원장은 아직까지 자신의 이념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최근 여야는 대통령후보 경선을 진행중입니다. 이 과정에 이념시비가 핵심 주제로 등장했는데, 정치인 정몽준의 이념적 좌표는 무엇입니까.

“‘온고이지신’이라고 할까. 저는 경험이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또 저는 탐험심과 모험심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걸 이성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죠. 미국에 공화당하고 민주당이 있잖아요. 일반적으로 민주당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정당처럼 알려져 있는데, 미국 최대 부호인 케네기 가문과 록 펠러 가문은 모두 민주당이예요. 따라서 민주당에 대한 통념과 현실이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죠.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시저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시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다 로마의 명문귀족 출신입니다. 그런데 집정관 선거에서 민중파하고 원론파로 갈라졌을 때, 시저는 명문귀족 자녀임에도 민중파에 속했어요. 그렇게 보통사람의 인식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저도 최대한 자유롭게 사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결국 보수와 진보를 유연하게 오가면서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위원장이 시저나 록 펠러 등을 언급한 부분은 또 다른 의미에서 눈길을 끈다. 한마디로 자신의 출신에 대해 미리 방어벽을 친 셈이다. 정위원장은 ‘재벌의 아들도 사안에 따라 노동자의 편에 설 수도 있다’는 말을 미국과 로마의 역사를 빌어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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