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특약점만으로는 서전의 품질을 알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특약점으로 선정되지 못한 업소들의 반발도 컸다. 말만 국산 브랜드지, 사실은 소재부터 부품까지 모두 일본산이라는 비난도 쏟아졌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TV 광고였다. 중소기업으로는 파격적인 TV 광고 덕분에 서전안경의 인지도는 눈에 띄게 높아졌다.
서전안경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자 육회장은 공장을 세울 때부터 품었던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 전 공정의 완전 국산화를 통한 자체 제작이었다. 이는 그가 사업경험이 일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전안경을 성공으로 이끈 중요한 요인이 됐다.
“조립만 하면 전공정의 20%, 부품까지 만든다 해도 공정의 50%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전공정 시스템을 갖추려면 공정의 40%를 차지하는 금형, 10%에 해당하는 디자인까지 갖춰야 했기 때문에 쉴새없이 몰아붙였습니다.”
1990년 전공정 시스템을 마련한 육회장은 부품의 국산화에도 박차를 가했다. 합작파트너로부터 계속 소재와 부품을 수입해 안경을 만들면 결국 제조단가를 맞추기가 어려워 훗날 사업성이 떨어질 것으로 판단했다. 그 결과 티타늄 등 특수소재를 제외하고는 모든 부문의 국산화를 이룰 수 있었다.
1995년 합작파트너인 이사야마사가 부도를 냈다. 자기 브랜드를 키우지 않고 주문생산만 하다 시장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하지만 서전은 거의 타격을 받지 않았다. 육회장의 국산화 드라이브가 파국을 막아준 셈이었다.
“품질만 고급스럽게 해서는 소비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래서 애프터서비스 센터를 설치하는 한편 각 특약점에도 애프터서비스를 꼼꼼하게 하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러던 1995년, 공업진흥청의 공산품 품질평가 발표가 있었습니다. 공진청의 조사관들이 안경점에서 무작위로 안경을 수거해 조사한 후 각 항목에 따라 품질평가를 했는데, 서전안경이 ‘올A’를 맞았습니다. 그후 2년마다 발표되는 품질평가에서 서전안경은 한번도 ‘올A’를 놓친 적이 없어요.”
서전의 애프터서비스는 안경업계에서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 무렵만 해도 안경업계는 영세업자의 난립과 무차별적인 할인판매 등으로 유통질서가 엉망이었다. 소비자들에겐 ‘국산 안경은 반 이상 남는 장사’라는 인식이 뿌리박혀 있었고, 품질도 형편없어 불신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애프터서비스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고객이 구입한 안경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면 각 점포가 대충 수리를 해줄 뿐, 생산업체가 책임을 지는 경우는 없었다.
서전은 우선 서울과 부산, 전북 정읍 등 세 곳에 대규모 애프터서비스센터를 만들었다. 안경점에서 수리하기 어려운 경우 이곳에서 수리해 지역점포로 발송하는 전국적인 서비스체제를 구축한 것. 여기에 더해 육회장은 소비자 연구에 착수했다. 소비자를 연령별, 성별, 직업별로 분류한 다음 어떤 디자인과 색을 선호하며 어떤 부분의 고장이 잦은지까지 면밀하게 조사했다. 고장이 자주 나는 부품은 협력업체와 함께 소재와 기초설계부터 다시 연구했다. 디자이너들과도 밤을 새워가며 토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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