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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한국축구, 그 황홀함과 씁쓸함에 관하여·(상)

6분 만에 해트트릭 차범근의 감동

라디오로 듣던 메르데카컵의 명승부

  • 송기룡 < 대한축구협회 홍보차장 > skr0814@hitel.net

6분 만에 해트트릭 차범근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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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축구협회 송기룡 차장은 한마디로 축구 마니아다. 그가 독문학과에 입학한 배경에는 독일 분데스리가에 대한 열정이 숨어 있다. 그는 비록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일찌감치 접었지만, 늦은 나이에 대한축구협회에 입사해 다른 차원의 축구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이 글은 송차장이 하이텔 축구동호회에 기고했던 글을 다시 편집한 것이다.
”한국 파고듭니다. 박이천 선수 한 사람 제치고 정병탁 선수에게 패스, 정병탁 센터링, 이회택 잡았다. 슈우웃 고올인, 골인됐습니다. 한국 고올인.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한국이 골을 넣었습니다.”

1970년대 초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1∼2학년 무렵이다. 나는 아버지가 재직중인 경북 김천의 고등학교 사택에서 살았다. 그때만 해도 시골 사람들에게 가장 재미있는 오락기구이자 빠른 정보매체는 단연 라디오였다. 텔레비전은 시내에 나가야 어쩌다 몇 집에 있을까 말까할 정도로 귀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가족들은 라디오에서 하는 ‘백만인의 퀴즈’ 같은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밤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신문을 읽으면서, 누나와 형은 공부를 하면서, 그리고 나는 만화책을 보면서 라디오를 들었다.

밤 9시가 되면 누나와 형은 건넌방으로 가서 계속 공부했고,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누워 불을 끄고 라디오를 들었는데, 언젠가 한번은 라디오에서 메르데카컵 축구 결승전을 중계했기 때문에 그냥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중계방송이 있는 날이면 끝까지 다 듣고 잠을 청하셨다. 하지만 나는 중계방송을 제대로 들은 적이 한번도 없다. 언제나 전반전이 끝날쯤 잠들고 마는 것이다.

머리맡에 놓인 일제 내쇼날 대형 라디오에서 아리랑 음악이 흘러나온다. 외국경기를 중계할 때는 꼭 나오는 음악이다. 잠시후 강창선 아나운서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이역만리 말레이시아의 수도 콸라룸푸르입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이미 예고해 드린 바와 같이 잠시후 이곳 콸라룸푸르 국립경기장에서는 제 10회 메르데카컵 축구대회 결승전 우리 한국 대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대 우리 한국의 경기가 벌어지겠습니다.”



아나운서의 멘트는 언제나 똑같았지만 모든 사람들의 흥분을 자아냈다. 말레이시아의 수도 콸라룸푸르와 태국의 수도 방콕은 워낙 자주 나오는 바람에 나도 자연스럽게 외우게 되었는데, 오랫동안 내 귀에는 ‘말레이서도 칼라룸푸’ ‘태국에서도 방콕’이라고 들렸다.

축구는 TV로 봐도 흥분되지만 라디오도 그에 못지않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더 긴장되고, 온갖 상상을 해가며 들을 수 있기에 색다른 맛이 있다. 라디오 중계를 들을 때 주의할 점은 절대로 잡담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내가 어린 마음에 아버지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면, 아버지는 “조용히 해라 임마, 안 들리잖아”라며 꾸중하셨다. 그래서 골 넣고 난 뒤가 아니면,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한국이 결정적인 찬스를 놓치면 항상 혀를 차며 “어휴 짜슥, 그 좋은 찬스에 못 넣어?”라면서 마치 현장에서 경기를 본 사람처럼 말씀하셨다. 그러면 나는 “누구야? 누가 못 넣었어?”라고 묻다가 또 야단을 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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