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민주당 86세대가 사민주의 재평가해야 할 까닭

[최병천, 겹눈으로 보다] 한국 진보정치 현대화 열쇠 찾기②

  •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입력2023-05-01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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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미연북(抗美聯北) 노선의 등장

    • 유럽을 넘어선 한국 복지 시스템

    • 80년대 청년이 본 뉴턴 과학혁명

    • 진보파가 이해했던 자유주의

    1985년 5월 미국문화원을 점거한 대학생들이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 규명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동아DB]

    1985년 5월 미국문화원을 점거한 대학생들이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 규명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동아DB]

    현재 한국 진보의 주류는 86세대(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출생)다.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노동조합 활동가, 시민단체 활동가 대부분이 그렇다. 이들의 이념적·정서적 원형은 1980년대에 만들어졌다. ‘1980년, 광주’가 가장 중요했다. 전두환이 수천 명의 광주 시민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전두환은 왜 등장했는지, 사회과학적 배후는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몰아낼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1980년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미국이 갖고 있었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미국의 동의 없이 전두환의 광주학살은 가능하지 않다고 봤다. 민주화운동 세력이 1980년대 미국과 대면하게 되고, 미국에 비판적인 생각을 갖게 된 이유다. 미국은 자본주의 중심 국가다.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 다수는 전두환과 미국이 결탁해 있다고 생각했다. 전두환을 몰아내려면 미국과의 대결도 불가피하다고 봤다. 1980년대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미국대사관 점거 시위 등이 발생한 이유였다.

    그 과정에서 학생운동의 일부 세력은 미국과 맞서기 위해 북한과 연계하는 선택을 한다. 항미연북(抗美聯北) 노선의 등장이다. 민주화운동 세력의 한 축으로 주체사상파가 등장한 배경이다. 주체사상파는 한때 학생운동의 다수파였다. 오늘날 한국 진보 세력 중 항미연북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2014년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된 통합진보당 잔류 세력 일부에 국한된 사고방식이다.

    韓 진보 세력의 세 가지 이념

    1980년 광주 이후, 한국 진보 세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념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였다. 여기에는 광주학살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1980년 이전 한국 진보 세력에 가장 강력한 이념은 민족주의였다. 식민지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결국, 1945년 이후 한국 진보 세력의 주된 이념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였다. 혹은 그 결합과 변주였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이 NL(민족해방파) 이론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이 사회민주주의다.

    1980년대는 NL(민족해방파)이 주류 이념이었고, 2000년대 이후는 사회민주주의가 주류 이념이었다. 실천적인 관점에서 사회민주주의 이론은 장점이 분명했다. 스웨덴, 독일, 프랑스, 영국을 비롯한 ‘유럽식 복지국가’ 모델이 매우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추격이 용이했다.



    현재 시점에서, 한국 진보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필요하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사회민주주의 역시 ‘사회주의론’에서 출발했다. 둘째, 2010년 무상급식 논쟁 이후,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 모두 빠른 속도로 복지를 확대했다. 2020~2021년 코로나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국면에서 K-방역의 국제적 경쟁력이 확인됐다. 한국의 복지 시스템은 유럽의 복지 시스템에 비해 뒤지지 않거나 더 우월했다.

    사회민주주의 이념의 본질은 ‘점진적, 민주적 + 사회주의론’이었다. 방향적 좌표는 사회주의였다. 소련식 공산주의와 구분되는 것은, 방법론과 속도였다.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를 달성하는 것이다.

    문제는 21세기 현재에도 사회주의라는 가치가 타당한가라는 근본적 질문이다. 진보 이념의 재구성에서, 그 시야를 더 길게 봐야만 하는 이유다.

    과학주의, ‘근대를 개척한’ 최초의 진보 이론

    세계사의 관점에서 진보주의 이념의 다른 축은 과학주의와 자유주의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가 ‘근대와 함께’ 등장한 이념이라면, 과학주의와 자유주의는 ‘근대를 개척한’ 이념이다. 넓게 보면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역시 과학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탄생한 후배 이념들이다.

    전(前)근대와 구분되는 ‘근대적 세계관’의 탄생은 과학주의와 함께 시작된다. 2000년간 유럽을 지배하던 세계관은 신학적 세계관이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향이 컸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론과 결합한 신학적 세계관이 2000년간 유지된 비결은 무엇일까. 운동론, 물질론, 우주론이 결합했고, 삶에 의미를 부여했으며, 직관적인 상식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천상의 세계는 완전무결한 곳이었다. 지상은 모순과 부조리의 세계였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직관적이고 상식적인 열망에 부합했다.

    신학적 세계관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운동론, 물질론, 우주론이 결합된 설명이 필요했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했다. 코페르니쿠스에서 뉴턴에 이르는 과학혁명에 100여년의 기간이 걸렸던 이유다.

    과학주의는 근대를 개척한 이념이자 ‘근대 최초의 진보 이념’이다. 과학혁명은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주장으로 시작되고, 1596년 케플러의 부등속 타원운동 관측, 1610년 갈릴레오의 달 표면과 목성 주변 위성 관측, 1687년 뉴턴의 ‘프린키피아’ 출간에 의해 완성된다.

    갈릴레오는 네덜란드에서 확보한 4배속 망원경을 개량해 16배속 망원경을 만들어낸다. 1610년에는 달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목성 주변에 3개의 위성이 있음을 밝혀낸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우주론에 의하면, 달을 포함한 천상의 세계는 완전무결해야 했다. 달은 맨들맨들해야 했다. 그런데 관측 결과 달 표면은 울퉁불퉁했다. 달이 울퉁불퉁하다는 것을 관측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에 빠졌던 이유다. 게다가 우주의 중심은 지구여야 했다. 지구가 아닌 목성에도 3개의 위성이 있다는 관측 역시 ‘천동설의 가정’을 무너뜨렸다. 이후 뉴턴은 이원론 자체를 무너뜨린다. 우주에 적용되는 힘과 지상에 작용하는 힘은 그 실체가 같다는 것을 규명한다. 만유인력이다. 오늘날 우리가 중력이라고 알고 있는 내용이다.

    1687년 뉴턴은 만유인력을 수학적으로 정식화한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출간했다. ‘프린키피아’ 출간은 실제로 프랑스의 계몽주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계몽주의를 표현하는 영어 표현은 Enlightenment와 illuminism이 있다. 두 가지 모두 ‘빛을 밝히다’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빛을 밝히다’라는 표현은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상징한다. 과학혁명에서 파생된 개념이다.

    과학혁명은 필연적으로 ‘세계관 혁명’으로 이어졌다. 신학적 세계관에 맞서는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이 확산됐다.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로 유명한 볼테르(1694~1778)가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은 뉴턴이었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은 그만큼 영향력이 강력했다. 1980년대 발행된 운동권 교재들을 보면, ‘과학적’이라는 표현이 유난히 많다. 과학적 사회주의, 과학적 세계관, 과학적 유물론, 과학적 정세분석 등이 그랬다. 광주학살에 분노한 가슴 뜨거웠던 1980년대 한국의 청년들에게도, 300년의 시공간을 넘어 뉴턴의 과학혁명이 전달됐던 것이다.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1751년 ‘백과전서’ 출간을 시작했다. 당시 과학적으로 규명된 새로운 사실들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1752년 프랑스 정부는 ‘백과전서’ 발행을 금지했다. 그 시절은 ‘중세의 황혼’이었다. 당시 통치 이데올로기는 신학적 세계관이었다. 신학적 세계관의 붕괴는 혁명 사상의 유포를 의미했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백과전서’는 1772년에 완간됐다. ‘백과전서’ 출간에는 유럽 최고의 지식인 150여 명이 결합했다. 루소와 볼테르가 대표적이다.

    ‘백과전서’ 출간 운동은 프랑스에서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계몽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혁명이었다. 과학혁명→계몽주의 사상의 탄생→‘백과전서’ 출간 운동→계몽주의 사상의 확산→프랑스 혁명으로 연결됐다. 과학혁명은 세계관 혁명이었고, 실제로 정치혁명으로 이어졌다.

    기본권 보장과 세력 균형을 만들어내다

    과학주의가 근대적 세계관을 태동시켰다면, 자유주의는 근대적 정치체제를 만들어냈다. 유럽 역사에서, 자유주의 이념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두 가지다. 첫째,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신교(개신교)가 등장했다. 유럽은 구교와 신교 사이에 30년 전쟁을 했다. 유럽 거의 모든 세력이 관여했다. 30년 전쟁을 마무리 짓는 협정이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조약의 핵심은 국가를 유럽의 기본질서로 인정하고, 국가의 종교적 선택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베스트팔렌 체제는 이후 유럽에서 ①주권 존중 ②종교 자유 ③국제적 세력균형론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로 중요한 사건은 1688년 영국 명예혁명이다. 명예혁명은 제임스 2세와 의회파의 대립이 발단이었고, 의회파가 승리했다. 의회가 새롭게 추대한 왕은 권리장전을 승인했다.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 금지, 지나친 벌금 및 형벌 금지, 선거와 언론의 자유 등이 규정됐다.

    근대 이후 3대 정치혁명을 꼽는다면 1688년 명예혁명, 1776년 미국 독립혁명,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해당한다. 이들 3대 혁명의 공통점은 자유주의 이념이다. 자유주의 이념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기본권 보장이다. 다른 하나는 세력 균형이다. 1980년대적인 맥락에서 한국 진보파에게 자유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으로 이해됐다. 자유주의 혁명의 주도 계급이 부르주아였던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자유주의 혁명의 산물이 곧 ‘부르주아 지배체제’인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 혁명의 더욱 본질적인 산출물은 기본권 보장과 세력 균형이다.

    정치사 관점에서 볼 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계급과 성격이 달랐다. 자유주의는 왕과 귀족의 타협체제였다. 보통선거권으로 상징되는 민주주의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타협체제였다. 세력 균형을 기반으로 한 타협체제라는 산출물이 중요하다.

    정치학에서 국가론의 대표 이론은 세 가지다. 홉스의 ‘리바이어던’(1651년), 로크의 ‘통치론’(1689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1748년)이다. 세 이론은 모두 베스트팔렌 체제 및 명예혁명과 관련된다.

    ‘리바이어던’(1651년)에 나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1648년에 끝난 ‘30년 전쟁’을 의미한다. 국가 탄생과 주권 확립을 설명한다. ‘통치론’(1689년)은 1688년 명예혁명 다음 연도에 출간됐다. 3권 분립론을 정립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1748년)은 ‘국제적’ 세력균형론을 ‘국내 정치에’ 적용한 경우였다. 3권 분립론은 오늘날 미국식 민주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21세기, 한국에서, 진보 이론의 재구성을 위해서, 우리는 그 시야를 넓혀 ‘근대의 초기’까지 거슬러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사회주의 이전의’ 진보 이념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진보정치 현대화 열쇠 찾기③으로 이어집니다.

    신동아 5월호 표지.

    신동아 5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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