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호

[시마당] 회색 벽돌집 위의 붉은 벽돌집

  • 한백양

    입력2025-05-17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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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우리만의 깃발이 있다면

    골목에 잘못 진입한 트럭 안팎의 얼굴들이 우리의 국경이라면 

    반갑습니다, 우리는 같은 말을 쓰는군요, 행군하다가 물 한 모금 빚졌던 스무 살 무렵처럼, 물에 소금을 조금 타준 농부의 거무죽죽한 손 때문에 흙내 가득했던 그날 오후처럼, 내가 우리, 하고 부르면 순식간에 공터가 생기던 마음으로부터 

    서울에 가면 신비로운 비극들이 많겠지, 고향의 방파제 위에서 바라본 상괭이들이 쏟아낸 전망으로부터, 벽돌로 세워진 집, 콘크리트로 빚어진 집, 아무리 두드려도 벽을 포기하지 않는 벽 한복판

    이제야 살 것 같다고



    낙서를 끝낸 소년들은 사라지고, 조금씩 흘러내리는 페인트 때문에 오늘의 날씨는 창문을 닫는 것, 빨랫줄 위에는 속옷도 있고, 내 것이 아닌 속옷도 있고, 펄럭일 때마다 주인집 아저씨는 저녁이 조금 이르게 온 줄 알겠지, 그러나 

    우리의 저녁입니다

    우리는 여기 있고, 우리는 억양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하는 것, 삼 년 만에 월세를 올리면서도 주인집은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 현관 바깥에 말도 없이 토마토 한 바구니 놓여 있는 것, 우리의 깃발이 잘 접힌 채 우산꽂이 속에 놓여 있는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이 지나도 

    후진하던 트럭이 툭, 하고 집을 깨트려도 

    우리, 하면 모두가 돌아보는 곳에서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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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백양
    ‌● 1986년 전남 여수 출생
    ‌● 202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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