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회생(起死回生).
오늘의 한화그룹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확한 말도 없다. 외환위기 직후인 불과 4년 전, 불치의 암(癌) 판정을 받은 것과 다름없었던 한화는 이후 한계사업은 물론, 알짜 계열사까지 서둘러 매각하는 전방위 구조조정으로 최악의 사태를 면했다. 한화는 이미 IMF 관리체제 이전부터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한 두산그룹과 함께 국내외에서 여러 차례 구조조정 모범사례로 평가받았다.
환부를 도려내고 몸집을 줄여 천신만고 끝에 기력을 회복한 한화는 그 여세를 몰아 대한생명 인수에 사활을 걸고 있다. 화학·유화·기계 등 전통적인 ‘굴뚝산업’에 주력해온 한화는 대한생명 인수를 계기로 그룹 주력사업을 금융·유통·레저 등 부가가치가 높은 서비스산업으로 전환할 방침이다. 오는 10월 그룹창업 50주년을 맞는 한화는 이런 청사진을 내걸고 ‘제2의 창업’을 선언할 요량인데, 이것 또한 소비재 중심 산업을 영위하다 구조조정을 마무리한 후 한국중공업을 인수하면서 그룹의 ‘간판’을 바꿔 단 두산을 떠올리게 한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기 직전까지만 해도 한화는 재계 순위 9위의 대재벌이었다. 하지만 외화내빈이었다. 재계 순위를 매기는 기준은 총자산 규모다. 기업의 실속을 보여주는 지표인 매출액이나 당기순익은 고려되지 않는다. 총자산은 자기자본에 부채를 더한 것이므로 장사를 못해도 부채가 많으면 순위는 올라가게 돼 있다.
한화그룹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계열사가 32개나 됐지만 수익을 내는 곳은 서너 개에 불과했다. 한화는 1997년 한 해 동안 3270억원의 적자를 냈으며, 그해 말의 부채는 7조5000억원으로 부채비율이 1200%에 육박했다. 기업을 경영해 돈을 벌기는커녕 부채 이자 갚기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한화는 적자사업을 털어내기로 하고 그해 한화에너지의 윤활유사업부문과 한화종합화학의 조립식 욕실(SBR)사업부문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8월에는 빙그레 유도단을 해체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시중에는 한화그룹의 자금악화설이 확산됐다. 10월부터는 외국계 은행에서 한화에 대한 자금 회수에 착수하면서 자금사정은 더욱 악화됐다.
뒤이어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자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한화도 위기에 처했다. 국내 금융기관들의 신용하락으로 한화의 주력기업 중 하나인 한화에너지는 원유를 도입할 때 필요한 유전스(usance·기한부 수입신용장)를 개설할 수 없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과거에 개설한 유전스의 결제시기가 닥쳐오면서 이중으로 자금압박을 받았다. 한화그룹은 유전스 대불(지급보증 대지급)을 발생시키고 한화에너지의 교통세를 연체하는 등의 방법까지 동원해 근근히 부도를 막았지만, 마침내 한화에너지는 그룹 구조조정 계획의 매각대상에 포함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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